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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26살, 첫 번째 이직.

함께 일을 하고 싶은 사람 따라.

by Dr Kim

2003년 들어간 공식적인 첫 번째 회사는 처음에 모든 것이 좋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고, 그러면서도 돈을 벌 수 있고, 같이 일하는 선배님들은 다들 자기 분야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계시고, 각자가 자기 실력을 쌓기 위해 노력하시는 모습에서 많이 배울 수 있었다. 그것이 내가 경험한 컨설턴트로써의 선배님들 모습이었다.


컨설턴트라는 직업은 매우 다양하게 나뉜다. 컨설턴트는 "자신의 전문적인 지식" + "풍부한 실전 경험" + "클라이언트(고객)"의 조합이다. 그래서 소위 일반인들이 많이 볼 수 있는 부동산 컨설턴트, 보험 컨설턴트 등도 있지만 이러한 컨설턴트는 개인을 대상으로 전문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기업을 대상으로 전문가 서비스를 제공하는 컨설턴트는 그 기업이 원하는 분야에 따라 컨설턴트의 역할도 구분된다. 나는 처음에 운 좋게 산업요원으로 내가 가진 전문영역을 바탕으로 회사에 들어갔다.


여기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다들 나를 모르시는 분들이지만, 첫 번째 내가 가졌던 직업을 이야기하면 너무 쉽게 나를 특정화 할 수 있어서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글을 쓰다 보니 내 직업을 이야기하지 않고는 전개가 쉽지 않다 보니 이제부터 첫 번째 직업을 소개해야지 이후에 글이 좀 더 잘 쓰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왜 밝히기를 꺼려하는지는 나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그냥 익명으로 쓰는 것이 편해서 그럴지도.


여하튼, 나는 원래 해커로 활동했다. 내가 공부할 당시에는 해커는 인터넷의 자유와 통신상의 인간의 권리를 위해, 시스템에 무한한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이다. 가끔 언론에서 해킹을 나쁜 쪽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우리는 당시 크래커라고 불렀고, 지금은 블랙 햇 해커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하튼 이 분야 공부했던 많은 지인들은 보안 전문회사에서 모의해킹을 하였고 대부분의 보안 전문회사는 해커의 자유로운 스타일을 존중하여 머리에 염색을 하던, 장발을 기르던,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출근하던 대부분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들어간 곳은 보안컨설팅 전문회사였고 회사 주요 임원들은 글로벌 빅 5 컨설팅펌 출신이었다. 지금은 아서앤더슨이 망하고 빅 4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첫 출근부터 정장에 넥타이를 매고 모의해킹을 하고 기업의 주요한 취약점을 해킹 기술로 찾아서 알려주고 그것을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일을 하였다.


그렇게 나는 해커이면서도 컨설턴트로써 첫 직업을 갖게 되었다. 같이 일한 선임자는 한국인 최초로 마이크로소프트 취약점을 발견해 제보해주고 마이크로소프트 공식 홈페이지에서 감사의 글로 그 형의 닉네임이 올라가기도 했다. 정말 멋진 팀원들 덕분에 2년 넘게 재미있게 일했다.


그러다 어느 날 한 번은 죽을뻔한 일이 발생했다. 격주 토요일로 근무하던 날, 마이크로소프트 회사에서 발표한 취약점을 가지고 공격코드인 익스플로잇 코드를 개발한다고 신경을 바짝 썼다. 그 전주에 나는 비중격 만곡증이라는 코안에 연골이 휘어서 학창 시절부터 항상 코가 막힌 채로 휴지를 달고 살았는데, 서울 와서 그것과 관련된 수술을 했었다. 토요일 오전에 일을 마치고 누나 집으로 돌아와서 잠시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었는데 뭔가 침대가 축축했다. 일어나서 보니 피였다. 비염과 비중격 만곡증 수술한 코 안쪽에서 혈관이 터져서 피가 정말 콸콸 흘렀다. 너무 놀래서 화장실에서 휴지로 막아도 되지 않아서 누나한테 연락했는데 연락이 닿지 않아 겨우 119를 불렀다.


얼마나 지났을까. 119가 왔다. 그리고 나를 응급차에 태웠는데 단순 코피인 줄 알고 사이렌도 처음에 켜지 않았다. 그러다 내 상태가 심각한 걸 보고 사이렌 켜고 근처 종합병원에 갔다. 주말 늦은 저녁시간이라 응급실에 레지던트 선생님밖에 없었다. 지혈대를 가지고 지혈을 했는데 그래도 피는 멈추지 않고 계속 흘렀다. 통을 내 자리 밑에 대고 흐르는 피가 통을 채우고 있었다. 레지던트 선생님이 보더니 심각하다고 다른 더 큰 병원에 응급실에 의사 선생님께 연락드릴 테니 가보라고 하셨다. 마침 큰누나와 큰 자형이 와서 나를 부축하고 더 큰 병원에 갔다. 정신이 좀 혼미했는데 새벽에 나오신 의사 선생님은 내 상태를 보더니 긴급하다고 마취 없이 안쪽을 전기로 지져서 출혈을 멈춰야 한다고 하셨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아팠고 심각했다. 다행히 출혈은 멈췄고 수혈을 몇 개 받고 겨우 회복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이 일이 있고 몇 달 지나서 내가 존경하는 팀장님이 회사를 그만두셨다. 창업자가 팀장님을 스카우트했는데 당시 창업자는 개인 사정상 전문경영인에게 회사 운영을 맡겼는데 전문경영인은 이쪽 보안 분야의 특성을 모르고 대기업 스타일로 매우 딱딱하게 회사를 운영하는 것이었다. 팀장님의 퇴사로 우리 팀은 침울해졌다.


한동안 공백 이후에 옆 부서의 부장님이 우리 팀의 팀장을 맡게 되셨다. 그분도 꽤 열정적이었는데, 전 팀장님 스타일이 제갈공명 같은 점잖은 전략가라면, 이번 팀장님은 여포 같은 불도저 스타일이었다. 팀장이 바뀐 이후에 팀원들도 한 명 두 명씩 퇴사했다. 팀장과 팀원 간의 업무 스타일의 궁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느낀 시기였다.


2004년 나의 업무 성과는 꽤 좋았다. 다음 해 연초에 연봉협상을 했다. 전문경영인이신 대표이사는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연봉 인상을 매우 짜게 줬다. 그러면서 내년에는 더 많이 주겠다고 이야기를 하셨다. 나는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 2005년에도 정말 열심히 해서 많은 성과를 내고 다시 연봉협상을 했는데, 회사 실적도 좋고 팀 실적도 좋았음에도 작년과 비슷한 이런저런 핑계를 대시면서 연봉 인상이 기대보다 좋지 않았다. 많은 팀원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대표이사가 우리에게 거짓말을 한다고 다들 생각했다. 대표이사가 회사 직원들의 입장에서 진정성 있게 대하지 않으면 회사 조직원들의 사기는 떨어지고, 대표이사에 대한 신뢰는 깨진다.


팀에서는 25살밖에 되지 않은 나에게 파트장을 맡겼다. 나는 부담되긴 했지만 그래도 맡은 바는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점차 내가 존경하던 멋진 선배님들은 퇴사하시고, 회사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예전 같지 않았다. 물론 그 시기에 새로 온 형이 있었는데 그 형 덕분에 함께 책을 쓰게 되었고 25살에 전문서적을 집필해서 지금도 3판 개정판으로 대학교재로 사용하고 있다. 어째 꺼나 그런 상황에서 한 번은 이쪽 분야 사람들과 저녁 식사를 했는데, 그때 나에 대해 익히 알고 있던 다른 회사 팀장이 나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해왔다. 나도 잘 알고 있던 분이고 함께 일해 보고 싶어서 스카우트에 응했고 당시 가장 큰 불만이었던 회사에 대한 신뢰와 연봉에 대한 불만 두 가지를 모두 이직하면서 해결할 수 있었다. 내가 만일 평판이 좋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의 상황을 이야기하지 않고, 좋은 인연을 만들지 못했다면, 이런 스카우트 제의를 받기 어려웠을 것이다.


마침 산업요원 복무기간도 끝이 났기 때문에 보다 자유롭게 이직을 할 수 있었다. 회사를 옮기고 나니 문제가 하나 생겼다. 당시 전 회사 팀장이 새로 옮긴 회사의 이사와 전무님께 메일을 보낸 것이었다. 고작 2년 경력을 가졌을 뿐인데, 동종업계에서 회사 핵심인력을 데리고 가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공식 항의를 해왔다. 나는 정말 당혹스럽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는데, 다행히 나를 스카우트한 팀장님이 잘 말씀해 주셔서 새로 옮긴 회사 전무님이 공식적으로 대응을 잘해주셔서 무사히 새 둥지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첫 번째 이직 때 고민이 엄청 많았다. 그때 인연이 닿아서 만났던 분이 스카우트 제의를 하지 않았다면 나는 불만을 가진 채로 계속 근무했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어려운 상황이라도 긍정적인 마음가짐과 적극적인 태도로 살아야 지 더 좋은 기회들이 찾아오는 것을 경험했다.


내가 존경하던 이전 회사 팀장님은 약 6개월 정도의 공백을 가진 이후에 외국에 있는 국제금융기구로 이직하셨다. 그걸 보면서 내가 알고 있던 세계가 더 넓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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