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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23살, 인생의 귀인을 만나다

제대로 된 회사 생활 시작

by Dr Kim

4개월간 100만 원도 받지 못한 회사에서 나와서 학교로 복학했다. 복학하면서도 비싼 학비가 부담되었지만 그땐 더 이상 그곳에서 다닐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 학년을 보내던 어느 날 내 인생의 귀인을 만나게 되었다.


내가 활동하고 있는 스터디 그룹에 외부 손님이 놀러 오셨다. 당시에는 닉네임으로 온라인으로 활동하던 시기였는데 그 외부 손님은 알고 나니 고향 선배님이셨다. 어느 날 고향에서 서울로 올라와서 우연히 지하철에 있는 메트로 무료 신문을 집었다. 그런데 거기에 온라인으로 만났던 그분의 닉네임으로 기고한 글이 있는 거였다. 알고 보니 모 회사의 이사로 근무하고 계셨다.


서울생활에 지쳐있었고, 도움을 받을 사람도 없는 상황에서 너무 반가운 나머지 연락을 드렸다. 지금 인천에 있는 한미은행에서 프로젝트를 하고 계시다고 하셨다. 내가 뵐 수 있는지 여쭤봤다. 그러더니 이쪽으로 올 수 있겠냐고 하셔서 약속을 잡고 뵈러 갔다. 당시 경기도에 있는 누나 집에서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지하철 타고 가는 2시간 반 정도의 먼 거리였지만 고향 선배님을 뵙고 삶의 조언이라도 받고 싶어서 달려갔다. 그게 내 인생의 중대한 터닝포인트가 될 줄은 그때는 몰랐다.


커피숍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공부하고 있던 분야에 내가 한동안 푹 빠져 있었기에 어느 정도 실력이 쌓인 상태였다. 그분이 자기네 회사에 내가 공부했던 분야의 인재가 필요하다고 하셨다. 회사는 당시 내가 일하던 분야에서 꽤 알려진 회사였고, 대화를 나눠보니 너무 사람이 좋으셨다. 그렇게 그분께 추천을 받고 여의도에 있는 회사에 면접을 보러 갔다. 당시에 5-60명 정도 되는 회사였는데 뭔가 제대로 된 회사로 보여서 긴장했다. 정장도 입고 가야 하는데 고등학교 이후로 넥타이를 맨 적이 없어서 면접 보러 가는 길에 중간에 같은 스터디 그룹 멤버 분을 만나 말씀도 듣고 넥타이 매주 시는 법도 알려주셨다.


그렇게 기술면접을 봤다. 세 분이 계셨다. 그분도 함께 계셨는데 본인은 추천했기 때문에 의사결정 권한은 없다고 하셨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면접을 끝내고 다시 누나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며칠 뒤 연락을 받았다. 합격했다고. 당시에 사람들 만나는 것에 어려움을 느꼈던 시기였는데 그때 그분을 만나러 멀리까지 가지 않았다면 이런 기회는 얻지 못했을 것이다. 이때까지는 내 인생에서 좋지 않은 사람들만 만나서 사회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는데, 이때 이후로 내 인생에서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다.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멋진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에게 사기 칠 사람인지 자기를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인지를 잘 판단해서 어두운 기운을 가지거나 말이 어둡거나 나를 이용할 만한 사람이라면 가깝게 하지 말고 최대한 멀리 해야 한다.

사람에 대한 중요성을 여러 번의 사기와 피해를 당하고 나서 가슴 깊이 깨달은 경험이 되었고, 이후로도 삶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무수한 사람들 중에서 자연스럽게 정말 친하고 싶은 사람과 피하고 싶은 사람을 알게 되고 그렇게 생활하다 보니 점차 좋은 일들이 많이 생기게 되었다.


이전까지는 내 인생은 암흑기였고, 빛이 보이지 않는 시기였고, 삶에 회환이 가득 찬 시기였다. 어느 날은 커리어에서 지웠던 회사에서 일을 마치고 주말에 누나 집에 돌아오는 길에 2호선 지상으로 올라와 있는 역에 잠시 내렸다. 목적지는 아니었지만 그냥 슬픔이 묻어 나와 더 이상 갈 수가 없었다. 내려서 벤치에 앉아서 왜 이렇게 삶은 고되고 힘든 것일까를 생각했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한 지점은 생각나지 않는다. 어두웠던 마음이, 삶에 염세적이었던 마음에, 다시 서서히 빛이 들어온 시기가. 그때쯤에 내 인생에 변화가 있었던 것은 그때쯤 만난 여자 친구, 지금은 내 인생의 평생 반려자가 된 그녀를 만난 시기와도 일치한다. 그때는 돈이 없어서 마산에서 부산까지 버스를 타고 가면, 지금에야 너무 고맙고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마산으로 돌아가는 차비도 가끔씩 손에 쥐어주고 했던 그녀. 그녀 덕분에 어쩌면 사람에 대한 마음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인생에 대한 많은 좋은 글들을 인터넷으로 찾아보게 되었고, 긍정적인 글귀들을 읽으면서 처음에는 마음이 닫혀 있다 보니 들어오지 않았지만, 어느새 점점 긍정적인 글귀들이 마음에 들어오고 서서히 나를 변화시켜 나갔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 덕분에 먼 거리를 달려서 귀인을 만날 수도 있었고 그 덕분에 감사하게도 지금까지 연을 맺으면서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게 된 것에 많은 감사함을 갖게 되었다.




2003년 8월 18일 무더운 여름날, 나는 기쁜 마음으로 여의도에 있는 회사로 첫 출근을 했다. 여의도라니. 고향 마산에서 가끔씩 TV로만 봤던, 내가 살아온 세계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말로만 듣던 여의도에 내가 오게 되다니. 여의도에 있는 건물에 출근을 하고 오전에 앉아 있으니, 오후에 노트북을 준다. 그리고 여의도 공원을 건너 A 클라이언트 회사로 가라고 했다. 거기에서 누구에게 연락하면 팀원들이 있을 테니 가서 일을 해라고 했다. 이게 말로만 듣던 On-the-Job-Training (OJT)인가. 노트북을 어깨에 메고 무더운 여름날 여의도 공원을 가로질러 A 클라이언트로 갔다. 날은 무더웠지만 마음은 너무 가벼웠다. 거기서 선임을 만나고 현장에서 일을 하면서 나의 첫 회사 생활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복잡한 마음이 든다. 내가 브런치에 글을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직은 익명으로 마음 편하게 쓰고 싶은데. 나를 익명으로 하고 쓰는 게 언제까지 가능할까? 회사를 밝히고 내 일을 밝히는 게 혹여 이 글을 보는 후배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아니면 아닐까? 여러 가지 생각이 들지만.. 일단은 그냥 내가 글을 쓰고 싶어서. 이게 그냥 재미있으니까. 짬을 내서 글을 쓰니까. 그냥 쓰도록 해본다.


첫 달 월급을 받았다. 무려 150만 원 가까이 되었다. 지난 내 커리어에서 지웠던 회사는 4개월간 새벽에 출근하고 밤에 별 보고 퇴근해도, 화장실 청소도, 여사장 집무실 청소하고 혼도 나면서, 고시원에 3개월간 살면서, 100만 원도 받지 못했었는데, 여기서는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면서 월 150만 원이나 받게 되니 너무나도 감사했다. 월급 받은 날 너무 기뻐서 부모님께 전화를 드리고 주말에 내려갔다. 보통 첫 월급 때는 빨간 내복을 사드린다고 했는데, 부모님께 아들이 번 돈을 직접 드리고 싶어서 난생처음으로 부모님께 용돈을 드렸다. 눈물 나게 감사하고 고마웠던 하루였다.




두 번째 프로젝트는 대전에 있는 모 정부기관을 대상으로 일을 했다. 결과가 꽤 잘 나왔고 같이 일을 하는 선임과 프로젝트 결과 설명을 위해 담당자와 미팅을 가졌다. 담당자가 여러 가지 물어봤는데 내가 당시에는 앞서서 많은 부분들을 이야기했다. 그때는 눈치를 채지 못했다. 당연히 내가 한 파트이기 때문에 나 혼자 신나게 기술적으로 설명을 했는데 당시 옆에 계신 선임의 입장을 고려하지 못했던 것이다.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끝나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선임분이 사시는 곳과 누나 집이 가까워서 차로 태워주셨다. 올라오는 길에 나에게 선임이 물으셨다. "OO아, 혹시 OTP라고 들어봤나?" 나는 잘 모른다고 대답했다. OTP는 Occasion, Time, Place의 약자인데, 그 말은 즉 말을 할 때는 OTP를 고려해야 한다고 하셨다. 즉, 오늘 미팅 때는 선임분이 직접 전체적인 진행 상황과 내용을 설명하고, 필요할 때 기술적으로 내가 뒷받침해야 하는 데, 나 혼자 신난 듯이 기술적으로만 설명을 열심히 했다는 것을 OTP라는 말을 해주시면서 설명해주셨다. 만일 그때 선임이 그냥 화를 내거나 나무랐으면 나도 반발심이 생겼을 텐데, 매우 점잖게 그 말씀을 해주시면서 나도 사회생활에서 필요한 대화의 기술을 깨닫게 되었다. 아무리 내가 기술적으로 잘 안다고 해도, 옆에 선임이 계시고, 그리고 그 장소가 선임이 먼저 전체를 설명해야 할 자리라면 내가 나서서 모든 것을 다 말하면 안 되는 것이라고. 그렇게 하나의 사회생활 기술을 익혔다.



다음 프로젝트는 금융사를 대상으로 하는 프로젝트였다. 이번에는 홍대에 있는 우리 팀 전용 사무실에서 일을 했다. 홍대라니, 고등학교 1학년 때 짝꿍이 처음 만났을 때 내가 자기를 삥 뜯었던 양아치인 줄 착각했던 (사실은 내가 아니었지만) 그 친구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미술 선생님께 잘 보여서 3년 동안 선생님이 특별 과외시켜주고 학원도 지원해주었던(나도 1학년 때부터 줄곧 미술 실기 만점을 받았지만, 나보다 창의적으로 그림을 그린) 친구가 다닌 홍대 미대. 친구 따라 몇 번 가보고 정말 젊음의 거리였는데, 거기에 우리 팀 사무실이 있었다. 업무는 저녁에 출근해서 밤 8시부터 새벽 4시까지 일을 하는 것이었다. 외부에서는 나 혼자 일하는 것이었는데 열심히 했다. 그래서 좋은 결과도 얻었는데, 나는 새벽 4시에 끝나면 사무실에서 졸면서 아침 해가 뜨는 것을 바라보면서 첫 버스가 다니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매일 아침에 해가 뜨고 첫 버스가 다니면 버스를 타고 집으로 왔다. 프로젝트가 끝나고 팀장님을 만났다. 팀장님은 나를 추천해주셨던 그분이셨다. 그분이 나보고 왜 택시 타고 가지 않았냐고, 새벽에 일 끝났어도 택시 타고 집에 가고 택시비는 회사에 청구하면 된다고 하셨다. 와,, 택시비를 회사에 청구할 수 있다니. 난 또 놀랐다. 이런 회사가 있다니, 23살 가난했던 대학생이 경험한 회사치곤 너무 좋은 회사였다.


"갑과 을이라는 단어"

그 해 10월 나는 목동에 있는 K* 통신회사에 프로젝트를 나갔다. 당시 클라이언트는 까칠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나는 내가 맡은 파트를 열심히 했다. 클라이언트가 프로젝트가 끝나고 별도로 불러서 갔다. 가서 또 코드를 수정하고 좀 도와드렸다. 그리고 며칠 뒤 또 불렀다. 그래서 갔는데, 조금 과한 요구를 하는 거였다. 그래서 내가 아, 이건 힘들 것 같다고 내가 담당자를 돌아보면서 이야기를 했다. 그랬는데 담당자가 나보고 "을이 이러면 안 되지~"라고 말하는 거였다. 나는 그때 정말 갑/을이라는 걸 몰랐기 때문에 담당자에게 "을이 뭐예요??"라고 반문했다. 그 당시에는 정말 몰라서 물었는데 담당자는 당황하면서 "그.. 그게, 차차 알게 될 거야"라고 하면서 돌아가라고 했다. 나는 사무실에 돌아와서 팀원들에게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니까 다들 빵 터지면서 정말 잘했다고 칭찬해주셨다. 나는 영문을 몰랐다. 그리고 학교로 오기 전까지 컨설턴트 생활 만 14년 동안 한 번도 컨설턴트가 을이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한 적은 없었다. 컨설턴트는 클라이언트에게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더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늘 가슴속에 안고 지냈다.



내가 어려울 때 가난할 때 만난 그녀는 한국을 떠났다. 부모님의 권유로 해외로 공부하러 갔다. 내가 아주 어려웠던 시절에 마음의 힘이 되어주고, 격려가 되어줬던 그녀가 떠났다. 나는 그녀에게 메일 이메일을 보냈지만 회신이 없었다. 마음이 아팠다. 내가 매우 가난한 시절에 부산에 가면 같이 틈새라면에서 식사도 하고, 서면에서 유가네닭갈비에서 밥도 같이 먹고, 차비가 없던 나에게 꼬깃꼬깃 차비를 보태주면서 나를 배웅해주던 그녀가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랬던 만큼 난 회사에서 더욱 미친 듯이 일을 했다. 일도 너무 재미있었고, 함께 하는 팀원들도 너무 좋았으므로, 일을 하면서 아픔을 잊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회사를 다니고 나서 더 이상 부모님께 용돈을 받지 않아도 되었고, 한 달에 3-40만 원씩 부모님께 생활비를 보태드릴 수 있게 되었다. 2003년 연말 통장에 모인 내 돈은 작지만 소중한 162만 원이 통장에 쌓여있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70이 되신 아버지가 조경일로 늘 힘들게 일하셨는데, 병원에서 직장암 3기라는 청천벽락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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