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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20대 초반의 쓰다 쓴 첫 사회생활

세상은 약자를 밟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시기.

by Dr Kim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겨울방학에 고향으로 내려갔다. 고향에서도 비싼 학비에 보탬이라도 되려고 아르바이트를 알아봤지만 방학 때만 잠시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구하기 힘들었다. 연말이 다가왔다. 아버지는 정년퇴직을 하시고 아들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조경일을 시작하셨다. 여름에 무더울 때에도 창원으로 가셔서 공장에 있는 나무 조경을 하셨다. 추울 때도 어김없이 출근하셔서 눈을 맞으시면서 조경일을 하셨다. 그래서 나도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계속 아르바이트를 찾아다녔다. 그러다 연말쯤에 시내 한가운데 있는 호프집에서 알바를 구하는데 일당이 무려 7만 원이 된다는 거였다. 일단 비 정기적으로 일주일에 한두 번씩 일손이 필요할 때 부른다고 했다. 그렇게 며칠을 일했다. 어느 날은 12월 31일 연말이 끝나는 날 연락이 왔다. 일손이 부족하니 와 달라고. 그래서 12월 31일 밤 7시에 도착했다. 가게 안에 있는 번호표 앞에 서 있다가 번호표가 뜨면 그 자리로 가서 필요한 것을 물어보고 가져다주는 거였다. 그리고 손님이 나가면 테이블을 닦는 일이었다. 12월 31일 밤 11시 59분. 모두 다 새해를 맞이한다고 밖에서 축하하고 즐거워하는 시간에 나는 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하는 가게에서 열심히 테이블을 닦고 있었다. 그렇게 한 해가 지나가고 새해를 맞이 했다. 아침 7시까지 알바를 하고 하루 일당을 받고 나와서 배가 고파서 건너편에 있는 편의점에서 라면을 먹었다. 아르바이트비를 받아서 현금은 충분한데, 뭔가 좀 서러웠다. 그래도 돈이 생겼다는 기쁜 마음을 가지고 집에 계시는 부모님을 뵈로 갔다.


21살은 나에게 여로모로 많은 일들이 있었던 해다. 21살에 온라인 특정 분야에 대한 스터디 그룹에 들어갔다. 그리고 미친 듯이 그 분야에 빠져들었다. 누나 집에서 지낼 때였는데 밥 먹는 시간만 제외하고는 계속 그 분야를 공부했다. 누나가 많이 혼을 냈다. 컴퓨터에만 빠져 있지 말고 아르바이트도 하고, 사회생활도 하고, 밖에 나가서 뭐라도 해라고. 나는 내 실력을 쌓아서 내 전문분야로 돈을 벌고 싶다고 했다. 아르바이트가 시간 낭비 같이 느껴졌다. 하지만 돈이 없었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그렇게 하고 싶은 것과, 돈을 벌기 위해 해야 하는 것과, 사회생활이라는 어려움으로 인해 많이 방황했다. 또다시 어두움으로 빠져서 극단적인 생각을 여러 번 했다. 하지만, 고향에 계신 부모님 생각이 나면서 부모님보다 먼저 떠나는 것은 그 보다 더 불효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꾹 참고 견디면서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공부하는 그룹에 계신 분이 내가 병특을 구한다고 하니, 아는 회사가 있다고 소개를 시켜주셨다. 회사는 강남에 있었다. 나는 강남은 학교와 그렇게 멀진 않았지만, 내가 가는 곳이 아닌 것 같았다. 역삼역에 도착해서 알려준 대로 길을 찾아서 회사에 면접을 보러 갔다. 긴장했다. 처음으로 회사라는 곳에서 면접을 받게 되었으니, 면접장소는 회사 사무실 옆에 있는 빈 사무실을 잠시 빌려서 면접을 봤다. 내 전공을 물어보고 몇 가지 물어보더니 다음 주부터 출근하라고 한다. 회사 직원은 총 5-6명 정도 되는 회사였지만 그래도 월급을 받을 수 있고 산업요원 복무를 받을 수도 있는 기대감이 있어서 기분은 좋았다.

다음 주 출근을 했다. 5평 남짓한 작은 공간에 직원 5-6명 정도가 다닥다닥 붙어있고 나는 문 바로 앞자리를 받았다. 열악한 환경이었고 화장실도 우리가 직접 청소해야 했었다. 나와 바로 위 선임은 번갈아 가면서 화장실 청소도 했다. 정말 지금 생각하면 황당한 상황이지만 21살 첫 사회생활을 하는 나로서는 이런 것도 일의 일부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회사가 역삼 쪽에서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 거기는 벤처 지원을 받아서 저번 사무실보다 3-4배는 큰 곳이었다. 사장실도 있었고 회의실도 따로 있었다. 나한테 주어진 업무가 신입 혼자 하기에 너무 벅찬 일이었다. 누나 집에서 출퇴근 하기에 너무 멀어서 회사 옆에 있는 고시원을 알아봤다. 복도 제일 끝에 있는 내 몸이 누우면 위로 손을 다 뻗지도 못하고 옆으로 손을 벌려도 손을 다 뻗지 못하는 아주 작은 공간을 구했다. 그래도 회사와 가까우니까. 열심히 해서 학비도 벌어야 하고, 잘되면 군대 문제도 해결해야 하니. 회사 다닐 때 동안은 새벽같이 일어나서 출근하면 가장 먼저 여사장실에 가서 청소하는 거였다. 책상과 책장을 닦고 밀대로 사무실도 청소했다. 그런데도 매일 여사장은 출근해서 손으로 책상이랑 책장을 스윽하더니 먼지가 조금이라도 나오면 혼내기 일수였다.


나랑 선임만 내가 일하는 분야에서 일하고 다른 직원 A는 장애인인데 디자이너로 다른 일을 했다. 회사에는 여사장 남동생이 실장으로 있었는데 회사 내에서 주얼리 온라인 쇼핑몰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 여자 경리가 있었고, 홈페이지 개발자가 있었다. 좀 이상한 구조였지만 그래도 회사에서 일하고 월급 받는 게 어딘가라는 생각에 새벽에 출근해서 별을 보고 고시원으로 들어오는 생활을 했다. 그리고 드디어 첫 월급을 받았다. 무슨 수습인지 뭔지 해서 현금으로 36만 원 정도 받았다. 다음 달에는 좀 더 많이 나올 것이라고 한다. 한 달 동안 여전히 새벽에 출근해서 청소하고 밤늦게 별을 보고 고시원으로 퇴근하는 일이 이어졌다. 두 번째 달 월급은 60만 원이었다. 왜 이렇게 적냐고 했는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둘러댔다. 그리고 셋째 달, 회사에서 내가 하는 쪽에 매출이 없어서 급여가 없단다. 다음 달에 주겠단다. 고작 21살과 선임 23살 두 명한테 어마한 매출을 만들 제품을 고작 2-3개월 주고 못 만드니 급여가 없다니. 황당했다.


3개월이 지나고 4개월 째는 이제 내가 하는 분야 사업은 접자고 한다. 그러더니 자기 남동생이 하는 쇼핑몰 일을 하라고. 온라인으로 물건 구매가 되면 내가 물건을 포장해서 근처 우체국으로 배송하러 가는 일이었다. 그래도 월급을 준다고 했으니 꾹 참고 일했다. 그런데 네 번째 달도 월급을 안 준다. 그래서 고시원에서 3일 동안 고민했다. 회사에서는 월급은 없지만 산업 요원시켜줄까라면서. 만일 내가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면 나에게는 탈출구가 없었을 것이다. 학비가 비싸서 휴학을 하고 돈을 벌어야 했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고 그래도 대출을 받아서라도 돌아갈 수 있는 학교가 있다고 생각이 들어서 어렵게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급여가 밀린 것도 컸지만, 내 전공과 상관없는 쇼핑몰 배달을 하는 일이나, 당시 격주 토요일 근무였는데 토요일 친한 형 결혼식이 있어서 12시에 퇴근하는 나에게 여자 경리가 야단치면서 못 가게 말려서 결국 결혼식에도 참석 못하고. 여러 가지가 너무 스트레스받아서 결국 그만뒀다. 4개월간 100만 원도 받지 못하고. 오히려 고시원 3개월 비용만 나가고.


억울하고 화나고 분해서 방법을 찾다가 같은 스터디 그룹에서 공부하던 형이 당시 법대 석사하고 있었는데 그 형 통해서 노동부에 신고해서 급여지급명령서를 겨우 받았다. 그런데 그 회사가 오히려 근태 등 다른 핑계로 나를 맞고소하는 것이 아닌가. 정말 더럽고 치사하고 더 이상 저런 부류와 엮이고 싶지 않아서 급여를 받지 않기로 하고 학교로 복학했다. 그리고 이 회사는 앞으로 나의 모든 공식 커리어에서 지우고 언급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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