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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회고. 2000년, 그리고 나의 20살

세상 물정 모르던, 세상의 풍파를 알게 된 20살.

by Dr Kim

1999년 겨울에 수능을 보고 대학을 서울로 진학했다. 그게 나의 첫 서울 방문이었다.

고향에서 부모님의 격려와 걱정스러운 눈빛을 뒤로하고, 마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5시간 정도 지나 서울역에 도착했다. 시골에서 처음 상경한 서울역은 신기했다. 두리번거리다가 서울역 정문으로 나왔다. 내 눈앞에는 난생처음 보는 엄청나게 큰 건물과 그 옆에는 고가 도로가 있었는데, 고가 도로를 본 적이 없던 나는 차가 하늘로 날아가는 것 같아 보였다. 꽤 큰 충격이었다. 그렇게 여차 여차 버스를 타고 경기도에 있는 누나 집에 짐을 풀고 나의 서울 생활은 시작하게 되었다.


대학교에서는 입학생들에게 기숙사를 제공해준다. 나는 고향도 멀고, 입학 성적도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학교에서 기숙사를 배정해준다고 했는데, 나는 기숙사에만 머물면 서울 구경을 못할 것 같아서 거절을 하고 누나 집에서 통학을 했다. 누나 집에서 학교까지는 가는 데만 1시간 반 정도가 걸렸다. 왕복 3시간 조금 넘게 걸렸다. 막힐 때는 2시간도 걸리기도 했다. 기숙사에 가지 않은 것을 조금은 후회했다.


대학교에 입학하니 오리엔테이션이라는 걸 했다. 나는 고향에 내려가야 했기 때문에 입학 오리엔테이션은 참석하지 못했다. 그런데 오리엔테이션 끝나고 뒤풀이를 한단다. 거기에는 어쩔 수 없이 참석해야 했는데, 난생처음으로 뒤풀이에서 엄청나게 술을 많이 마셨다. 소주에, 맥주에, 막걸리에, 그리고 정신을 차리니 다음날 학교 안 어떤 동아리 방에서 정신없이 자고 있는 모습이 아닌가. 시간을 보니 첫 수업에 늦었다. 첫 수업이었는데. 뒤늦게 뒷문을 열고 겨우 자리에 앉았는데, 어지러웠다. 의자와 책상이 붙어있는 구조였는데, 이상하게 바닥이 점점 가까워지더니 그대로 넘어졌다. 부끄러워서 교수님이 부르기도 전에 후다닥 교실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나의 첫 대학 수업이 시작되었다.


어느 날은 조별로 모이란다. 모였더니 조별로 특정 장소에 가라고 한다. 갔더니 어떤 선배 한 명이 단상 위에 앉아있다. 뭔가 했는데 선배가 군기를 잡고, 우리들에게 팔굽펴 펴기, 뜀뛰기, 구르기를 시킨다. 여기가 군대인지 학교인지 구분이 안 갔다. 그렇게 한 코스를 끝나면 또 다른 코스로 가라고 하고, 그곳에 가면 선배가 그 장소에 대해 설명해주면서 또 군기를 잡는다. 그렇게 대학교라는 것에 대해 알게 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꿈이 천문학자나 고고학자, 애니메이터가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인공지능을 공부하고 싶어서 인공지능이 있는 학과로 왔다. 그런데 인공지능은 대학원 때부터 제대로 공부할 수 있었다. 나는 전공이 Computer Science로 왔다. 우리 학교가 이쪽 분야에서는 매우 유명한 학교다 보니, 동기 중 한 명은 자기가 KAIST와 여기 학교 중 고민하다가 우리 학교로 왔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 말이 안 되는 경우였는데, 내가 학교에 입학할 당시만 해도 컴퓨터 쪽은 우리 학교가 최고라는 분위기였다. 1970년에 전자계산 학과가 생기면서 최초의 컴퓨터학과가 생긴 대학이었으니. 그래서 그런지 동기들은 대부분 컴퓨터를 잘 한 친구들이었고, 심지어 올림피아드 입상한 친구들도 꽤 많았다. 지금 와서 찾아보니, 국내뿐 아니라 당시 아시아 최초의 컴퓨터학부를 만든 곳이라고 한다. 대단하긴 하다.


1학년 때 C언어 수업이 있었는데, 모든 교재가 영어였고, 나는 C 언어를 대학 와서 처음 공부했는데 교수님은 진도가 너무 빨랐다. 그리고 수업을 유닉스 실습실에서 했는데 윈도우만 다루던 내가 Unix를 접한 것도 처음이었다. 강의실이 4줄로 길게 늘어섰는데 Unix 시스템만 5-60대는 되어 보였다. Sun OS, Solaris 5.6이었던 걸로 기억난다. 결국 C언어 성적은 C를 받았다. 그리고 내가 그나마 자신 있어하는 수학 수업이었는데, 미적분 수업이었다. 물론 교재는 엄청 두꺼운 영문 책이었고, 진도가 하루에 3-40페이지 이상을 나갔다. 영어도 못하는데 내용은 또 무자게 어렵게 가르쳐주셨다. 결국 백기를 들었다.


서울 생활도 처음인데, 친구도 없고, 수업은 어렵고, 그런데 고향에서는 부모님이 아픈 몸을 이끌고 힘들게 학비 마련하신다고 일하시고 계시고. 힘든 시기였다. 그나마 고등학교 친구 중 한 친구가 바로 옆에 있는 대학교로 진학해서 우리는 자주 만났다. 그리고 만나면 함께 PC방에 가서 밤새 스타크래프트와 포트리스 게임을 하면서 힘겨운 서울 생활을 서로 격려하며 보냈다.


브런치 글을 쓰면서 정말 오랜만에 학부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다. 반가운 교수님들 얼굴이 아직도 보인다. 지금은 과가 두 개로 분리되어서 새로운 과로 친근한 많은 교수님들이 옮기셨고, 전통적인 과는 새로운 뉴 페이스 교수님들이 많이 보이네. 10년 넘게 들어가 보지 않았던 학부 포탈에 들어가서 그때 기억을 희미하게 찾아봤다. 무려 2000년도 첫 학비가 300만 원이 넘는 거액이었다.


대학교 1학년 때 동아리를 가입하라고 학교에서 홍보를 했다. 처음에는 관심 있는 천문학 동아리에 들어갔다. 기대한 이미지는 같이 모여서 천문대에 가서 별도 보고, 별에 대해 공부도 하고 그러는 건지 알았다. 하지만 들어갔더니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라서 금세 나왔다. 그리고 학교 교정을 걷는데 운동장 쪽에서 운동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동기 한 명이 이미 거기서 운동하고 있어서 동기 따라서 무술 동아리에 들어갔다. 1주일에 두 번씩 나름 열심히 나무 검을 휘두르며 운동을 했다. 그 시간만큼은 개운하고 좋았다.




어느 날 학교 교정을 걷고 있는 데 어떤 여성분이 잠시 설문조사를 하자고 나를 부른다. 순진한 나는 설문 조사에 응했다. 3-4 페이지 정도 설문조사였는데 영어와 관련된 설문조사였다. 자연스레 설문조사가 끝나고 나니, 어느덧 내 손에는 007 가방이 들려있었다. 영어 카세트테이프 수십 개와 교재 수십 권이 묶여 있는 책이고, 007 가방만 한 크기의 가격은 무려 80만 원 정도 하는 가격이었다. 당시 부모님이 고향에서 보내주는 한 달 생활비가 지금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20-30만 원 정도였는데, 무려 몇 달치의 생활비에 해당하는 금액을 순진한 꼬임에 넘어가서 덜컥 사놓고 말았다.


여름 방학이 왔다. 나는 고향에 부모님을 뵈러 내려갔다. 반갑게 맞이 해주시는 부모님. 그리고 방학 동안에 뭔가 아르바이트해서 돈을 벌고 싶었다. 동네 길을 가다가 헌책방이 보였다. 신기해서 구경하러 들어가서 책을 보는데 헌책방 주인아저씨가 컴퓨터를 좀 쓸 줄 아냐고 물어보셨다. 전공이 컴퓨터라고 하니, 그럼 여기 있는 책들을 인터넷으로 팔고 싶은데 홈페이지 만들어서 팔 수 있게 도와달라고 했다. 아르바이트 비용을 주겠다고. 그래서 매일 같이 헌책방에 가서 책 사진을 찍었다. 수백 권 넘게 사진을 찍어서 홈페이지를 만들고 사진을 업로드했다. 그리고 가격을 올리고, 거래를 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고 책방 주인에게 아르바이트 비용을 달라고 했더니, 이 핑계 저 핑계를 들어대며 알바 비를 주지 않았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홈페이지를 볼모로 잡고 돈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었다. 참 힘들었다. 결국 돈을 받지 못했다.


순진한 새내기 20살 대학생에게 여러 가지 사기들이 오고 갔다. 정말 서울은 눈 뜨고 코베인다는 말이 새삼 실감 나던 곳이었다. 그렇게 사람에 대해 못 믿기 시작하고, 나는 점점 더 어둠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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