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유년기
지금의 삶에 무한한 감사를 하며.
나의 어릴 때 사진은 거의 없다. 당시에 필름 카메라로 찍은 돌사진과, 아주 어릴 때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 몇 장이 남아있다. 그마저도 해외에는 가져오지 못하다 보니 자연스레 머릿속에 남아있는 기억에 의존해본다. 내가 태어난 1981년 그로부터 10살 때까지 기억을 찬찬이 되돌아본다.
먼저 기억에 떠오르는 것은 그리운 어머니의 향기다. 나는 10살 때까지도 어머니의 품에서 함께 잠을 잤던 걸로 기억한다. 10살 때 집을 다시 뜯어고치기 전까지 우리 집은 부뚜막이 있고, 화장실도 따로 떨어져 있고, 더구나 푸세식 화장실이 있었던 집이었다. 그래서 집에 방이 2개뿐이었고 한 방에서 어머니, 아버지, 막내 누나, 나 이렇게 잠을 자고, 나머지 방에서는 나이 차이가 좀 있었던 큰누나, 작은누나가 잠을 잤었다. 얼마 전 막내 누나가 옛날 집을 그려서 보내줬다.
밤에 혼자 화장실 가기 무서워서 누나나, 어머니가 마루에서 기다려달라고 했던 기억도 난다. 10살 때까지 살았던 정든 집은 너무 오래되어 내가 10살 때 큰누나, 작은누나가 돈을 모아서 부모님을 위해 빨간 벽돌집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어릴 때 나의 또 다른 기억은 모유를 꽤 오랫동안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분유통이 떠오르는 것을 보면 분유도 먹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매일 새벽 4시에는 일어나셔서 가볍게 식사를 하시고 새벽에 어시장으로 출근을 하셨다. 그래서 아침에 눈을 뜨면 아버지는 늘 안 계셨다. 간혹 새벽에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선잠을 깨면 아버지가 식사하시고 출근 준비하는 소리를 들은 기억이 어렴풋이 있다. 그리고 연탄을 사러 아버지와 함께 연탄가게에 가서 연탄을 리어카에 싣고 가져왔었다.
나는 운 좋게 태어날 때 작지만 우리 집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 집을 갖기 전까지 부모님은 많은 서러움을 겪으셔야 했다고 들었다. 원래 아버지의 고향은 북면이셨고, 어머니도 피난 후 북면에서 아버지를 만나서 중매로 결혼을 하셨다. 아버지가 열심히 일하셔서 모으신 돈으로 작은 소 한 마리를 사셨다고 한다. 그리고 휴가 나올 때마다 소가 자라는 것을 보면서, 형수님이 이 소는 아버지 소라고 군 복무 끝나면 주시겠다고 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부산 하야리아 미군 부대에서 근무하셨다고 들었다. 거기서 수세식 화장실을 처음 보셨다고. 그렇게 군 복무를 마치고 고향에 왔더니, 형수가 그동안 이야기한 소는 자기네 것이라고 주지 않았다고 하셨다. 실랑이를 벌였지만, 결국 어릴 때부터 힘들게 일하시면서 모은 돈으로 사신 소를 빼앗기고, 어머니와 함께 마산으로 건너오셨다고. 그렇게 샛방살이를 전전긍긍하시면서 큰누나와 작은누나를 낳으셨다. 어린 두 딸이 있다 보니 주인 집네와 누나들이 다투기라도 하면 매번 고개를 숙이면서 죄송하다고 하시고, 그렇게 셋방살이를 여러 번 하시다가 겨우 25평짜리 집 한 채를 얻게 되셨다.
나는 기억에 없지만,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늘 레퍼토리로 하셨던 말씀이 있다. 집 근처 시장에 어린 나를 유모차를 태우고 나가면, 다들 "손자요?"라고 물어보면 "아들이요!" 하셨다는 말씀을 많이 들었다. 당시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동네에서 형들과 함께 놀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질이 좋지 않은 형들이 많았다. 당시에는 동갑보다 그냥 동네에 어린아이들이 다 모여서 놀았는데, 조금 큰 형들이 나이 작은 아이들을 많이 괴롭혔던 기억이 난다. 동네 뒷산에 아이들과 함께 가서 힘없고 나이 어린아이들에게 원산폭격이라고 하는 걸 시키고. 그래도 놀 사람이 없으니 항상 집 앞에 나가면 늘 만나는 아이들과 어울려 놀았는데, 주로 놀았던 것은 다방구 놀이다. 골목에 있는 전봇대 2개를 진으로 해서 두 팀이 나눠서 상대방 전봇대를 짚으면 점수가 올라가고, 방어하고 술레 하고 그랬던 놀이. 그리고 자주 했던 놀이는 자치기, 구슬치기 놀이를 했던 기억이 난다. 자치기를 한다고 큰아버지가 뒷산에 올라가서 자치기를 만들어주셨던 기억도 난다.
우리 형제 중 내가 유일하게 유치원을 다녔다고 들었다. 병설유치원에 다녔는데 어릴 때부터 습진이 심해서 손을 잡아야 하는데 옆에 있는 여자아이가 손을 잡기 싫다고 해서 어린 나이에 상처를 받았던 기억도 있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유치원 때였는데 선생님께 손바닥을 30여 대 정도 맞았던 기억도 난다. 그리고 국민학교(지금은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어머니가 데리러 오시면 친구들이 "너희 할머니 오신다~"라고 놀려대면, "아니야 우리 엄마야"라고 되받아 치곤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또 하나 기억이 난 건, 어렵게 부모님이 아들을 가지게 되다 보니, 사주를 많이 믿으셨는데, 내가 양어머니가 있어야 한다고 해서 어릴 때 양어머니를 들였고, 동네를 시주하러 다니시는 스님도 우리 집에 와서 나에 대해 어떤 말씀을 해주셨다고 들었는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무슨 내용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릴 때 기억을 회고하다 보니, 간헐적으로 기억이 몇 가지가 난다. 10살, 초등학교 3학년 때, 많은 일들이 있었다. 첫 번째 일은 3학년 수업을 끝나고 6학년 막내 누나 반에 갔는데 어떤 형이 누나를 괴롭히는 것을 보고, 무작정 선배한테 달려들어서 엄청 싸웠다 (주로 얻어맞았지만). 그리고 동네 학교에서도 다른 건 참았어도 뭔가 어머니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참지 못하고 선배들과 많이 싸웠다. 그리고 집 근처 문방구에 있는 오락기 옆에 붙어서 친구들 하는 거 구경했던 기억이 많이 있다. 당시 돈이 없어서 오락은 많이 못하고 늘 옆에 붙어서 구경했었다. 그렇게 눈이 나빠져서 10살 때부터 안경을 쓰기 시작했고, 안경 쓰고 나서부터는 싸움을 많이 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10살 때 누나들이 돈을 보태서 집을 새로 지을 때 동안 몇 달간 가까운 여인숙에 가족들이 다 살았는데, 그때 몇 살 많은 형과 함께 부모님께 혼이 날 만한 짓을 해서 엄청 혼났던 기억들. 공부할 수 있는 내방도, 책상도 없었던 시기라, 안타깝게도 10살 전까진 공부한 기억이 없다. 그냥 동네 아이들과 놀고, 오락실 다녔던 기억들.
그리고 또 부모님 걱정을 많이 끼치게 아팠던 적도 많았다. 주로 코피를 자주 흘러서 어머니가 연뿌리를 자주 주셨다. 그리고 귀가 자주 아파서 방에 있는 요강에다가 따뜻한 물을 붓고 그 위에 수건을 올려놓고 귀를 양쪽 번갈아가면서 데면서 귀 아팠던 것들을 치료했던 것들. 한때는 너무 아파서 부모님이 나를 업고 급하게 병원에 가시는 길인데, 지나가던 어떤 분이 나를 보더니 지금 병원 데리고 가면 아이 죽는다고 다른 방법을 알려주셨던 기억. 참 유년기에는 별나기는 했던 것 같다. 하지만 10살 때부터 10대 중반까지가 부모님의 속을 가장 많이 썩였고, 나도 참 많이 일탈했던 시기였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