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기억들을 더듬어가며.
1981년 8월의 무더운 여름
나는 1981년 어느 무더운 여름날 지금은 없어지고 은행으로 바뀐 경남 병원 2층에서 태어났다. 나를 제외한 누나들은 모두 집에서 낳으셨고 나만 유일하게 병원에서 태어났다. 왜냐하면 당시 어머니가 임신중독으로 위험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나를 낳기 위해 지극정성을 다하셨다. 아버지는 6남매 중 넷째셨는데, 아들이 없던 우리 집은 아버지가 일을 해서 돈을 벌어놓아도 나중에 아들이 두 명인 작은아버지 재산이 될 것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지내셔야 했다. 우리 큰 할아버지도 아들이 없어서 우리 할아버지의 둘째를 양자로 보내셨다. 그 시절에는 부모님, 조상님께 제사를 지내는 것이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아들이 없으면 아들이 여럿 있는 동생에게 아들을 양자로 데리고 오는 경우가 있었다.
아버지는 실제로는 1933년생이시지만, 당시 호적에 늦게 올려서 주민등록으로는 1935년생으로 되어있다. 주변에서는 아버지에게 그렇게 열심히 일을 왜 하냐고, 어차피 OO(동생) 재산 될 건데 하셨다고. 그래도 아버지는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서 일터에 나가셔서 돈을 벌어오셨다. 결혼 후 딸을 2명을 낳고 나서 아들을 낳으려고 노력하시다가 9년 만에 생긴 아이가 또 딸이었다. 그러나 그 후 3년 뒤에 감사하게도 아들을 얻을 수 있었다.
부모님은 아들을 얻기 위해서 용하다는 방법은 다 쓰셨고, 얼음물에 목욕도 하셨다고 들었다. 그렇게 어렵게 생긴 아이는 아버지가 47살이 되셨을 때, 어머니는 38살이 되셨을 때, 음력으로 칠석 바로 전날에 세상에 태어났다. 아들을 낳기 전까지 부모님이 겪으셨던 서러움과 어려움은 상당했다고 들었다.
뒤늦게 늦둥이로 태어난 아들이지만, 이미 임신중독증으로 몸이 상당히 안 좋아지신 어머니는 아들에게 젖을 많이 주려고 밥을 솥째로 드셨다고 한다. 당시 주변에서 젖이 많이 나오려면 많이 먹어야 한다고 해서 무리하게 억지로 밥을 많이 드셨다. 그래서 살도 많이 찌시고 결국 아들 낳고 얼마 안 있어 당뇨병을 진단받으셨다.
따뜻한 남쪽 나라 마산
내가 태어난 곳은 대한민국 남쪽에 있는 당시에는 꽤 잘 나가던 수출 자유지역과 한일합섬이 있던 도시 마산이다. 당시에는 인구 50만 명이 넘는 꽤 큰 도시였지만 수출 자유지역이 쇠하고, 한일합섬이 망하면서 도시가 쇠락했고, 결국 창원시에 합병되어 이제는 창원 마산시 합포구가 되었다.
내가 태어난 집은 뒤쪽에 용마산이라고 하는 자그마한 산이 있다. 두 개의 봉우리가 있는 곳으로 한 봉우리는 나지막하고 다른 한쪽은 약간 가파른 산이다. 주변에 이야기에 따르면 용과 말이 한때 싸웠다가 지쳐 쓰러져서 한쪽은 용이 쓰러진 자리이고 한쪽은 말이 쓰러진 자리라고 어릴 때 들었는데, 현실적으로는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다. 다만, 어릴 때는 왜 용마산이라고 이름을 지었는지 물어보면 어르신들은 그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그리고 우리 집은 골목을 들어와서 또 골목을 들어와서 또 골목을 들어와야 하는, 골목골목 골목길에 있는 집이었다. 아주 좁은 골목은 어른 2명이 지나갈 수도 없을 좁은 길이어서 서로 몸을 비켜야지만 지나갈 정도로 좁은 골목길도 있었다. 우리 집은 산호동인데, 집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오동동이 있다. 오동동에는 짧은 개울이 흐르고 있었고 개울 위로는 상가들이 있었다. 나름 우리 집은 (낮은)배산임수(도랑가) 지역이었던 것이다.
사실 지금은 40여 년이 지났기 때문에 1981년의 기억은 어릴 때 부모님께 들은 이야기가 전부다. 가장 어릴 때 찍은 사진은 흑백의 바래진 돌사진뿐이다. 우리 집은 부모님이 누나 2명이었을 때 6-7번을 이사 다니다가 겨우 25평짜리 기와집을 마련하셨다.
아버지는 9살 때부터 사촌누나 집에서 집안일을 도와가며 사셨고, 7년 동안 그 집에 거주하면서 지내셨다고 한다. 사촌누나 집에서 조카아이를 업어 키우면서 옆에 서당에서 들리는 한자를 어깨너머 공부하셨고, 늘 우리에게 그렇게 배운 한자를 눈 감고 천자문을 달달 외워서 쓸 정도로 똑똑하셨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다 사촌누나가 당시 국민학교(지금은 초등학교)에 갈 수 있게 학비를 도와준다고 말해줬고, 학교에서도 이 정도면 2학년에 올 수 있다고 부모님 도장만 받아 오면 된다고 하셔서, 아버지는 20리 거리를 신나서 뛰어가서 집에 갔는데 당시 할아버지께서 아파서 누워계셨기에, 당시 친할머니께서는 아비가 아픈데 무슨 도장이고, 공부고, 하셔서 도장을 안 주셨다고 하셨다. 집에 갈 때는 신나서 달려갔는데 다시 사촌누나 집으로 올 때는 눈물을 흘리면서 20리를 걸어오셨다고. 그게 평생의 한이 되셨다고 늘 말씀하셨다.
광복과 6.25 전쟁
어머니는 경주 이씨로 당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일본에 계실 때 태어나셨다. 1944년생으로, 태어나시고 일 년이 지났을 무렵 1945년 8월에 광복을 하고 한국으로 넘어오셨다. 어머니가 계셨던 곳은 후쿠오카 쪽이라고 들었다. 어머니도 너무 어릴 때 오셔서 정확한 기억은 없으시다. 하지만 1945년 광복하기 전 어머니가 계셨던 곳 근처 양쪽 도시에 무시무시한 핵폭탄이 떨어졌다. 그때 어머니가 그쪽에 계셨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겠지.
광복 후에 어머니 말씀으로는 친할아버지가 일을 마치고 집에 오자말자 준비도 없이 짐을 바로 싸서 한국으로 오는 배를 탔다고 들었다. 배를 타고 오는 길에 어머니가 열이 너무 오르고 너무 아파서 죽을 뻔하셨다고 했다. 다행히 한국 전라도 쪽에 무사히 도착했는데, 한국 도착하니 가지고 온 일본 돈을 모두 빼앗겼다고 하셨다. 친할아버지는 일본돈을 모두 빼앗기시고 무일푼으로 전라남도 영암에서 터를 틀고 지내시다가 지병으로 얼마 안 되어서 돌아가셨다.
홀로 남은 외할머니는 세 아이를 영암에서 키우는 도중에, 6.25 사변이 터졌다. 어머니는 어릴 때 겨우 풀만 뜯어먹고 지내시다가 6.25가 터지자 전라도 지역이 북한군 수중에 넘어가고, 하루에 한 가족씩 몰살당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새벽에 할머니가 어린 세 자녀를 데리고 야밤에 전라도 영암을 빠져나왔다고 하셨다. 당시 어머니 나이가 고작 예닐곱 살 정도였다고. 그렇게 삼일 밤낮을 기차 타고, 걷고 하셔서 외할머니의 고향인 북면에 도착하셨다.
6.25 전쟁 발발 시 어머니는 7살이었고, 아버지는 16살이었다. 부모님께 듣기로 큰아버지도 전쟁에 나가셨는데, 당시 전쟁 중에 시체 틈에서 죽은 체하다가 겨우 살아서 돌아오셨다고 한다. 6.25 전쟁 후반부에 낙동강 방어선이 마지노선이었는데 어머니께서 피난 오시고 아버지가 계신 북면이 낙동강 바로 아래로, 매일 대포소리 총소리를 들으셨다고 했다. 다행히 전쟁은 끝이 났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북면에서 만나셔서, 어머니 20살, 아버지 29살 때 중매로 결혼하셨고, 결혼 후 18년 만에 막내 늦둥이 아들을 가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