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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회고. 1990-1999. 나의 10대.

일탈과 방황과 세상에 대한 원망이 많았던 시기.

by Dr Kim

나의 10대는 다들 그렇겠지만 평탄하지 않았다.

10살 때 여러 번의 잘못을 저지르며 부모님의 속을 많이 아프게 했다. 그러나 여전히 철이 들지 못했다.


5학년, 12살 때 가장 큰 방황기였다. 학교에서 조금 논다는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30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이 글을 쓰는 순간 그 장면 등이 꽤 기억이 난다. 국민학교 때는 한 반에 5-60명씩 수업을 듣던 때였다. 5학년 2반에 배정받고, 반에서 어떻게 하다가 싸움 좀 한다는 친구를 알게 됐다. 그리고 그 친구와 조금 친하게 되었고, 그 친구의 친구들과도 자연스레 자주 어울려 놀게 되었다. 당연히 국민학교 고학년이 되면 머리가 크고 나쁜 짓들을 하는 시기인데, 어린아이들이 하면 안 되는 것들을 서슴없이 하는 친구들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그것이 그 친구들은 멋이라고 생각했고, 나도 그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며 일탈을 하던 시기였다. 중학생도 아니고 고등학생도 아니고, 초등학교 5학년이었는데.


어머니께서는 편찮으셔서 약을 드시고 계셨고, 아버지는 자주 술에 취해 들어오셨다. 그래서 어머니와 아버지와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했고, 자연스레 나는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점점 일탈을 하고 있었다. 오래된 기억이라 어떻게 일탈에서 벗어났는지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렴풋한 기억에는 편찮으신 어머니를 보면서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고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다행히 6학년 올라가면서 질 나쁜 친구들과 다른 반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어울리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5학년 때 교통사고가 크게 났다. 저녁에 집 근처 고등학교 앞 공터에서 친구들과 잡기 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차와 차 사이를 빠르게 뛰쳐나갔다. 그 순간 뭔가가 내 몸을 강하게 쳤다. 난 순간 하늘을 붕 날랐고, 하늘에서 몇 바퀴를 돈 후 땅에 떨어져서 다시 굴렀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리니 어떤 남자가 나를 앉고 다급하게 뛰고 있었다. 가장 먼저 기억난 것은 안경이었다. 안경이 없었다. 아저씨께 안경 찾으러 가야 한다고 말했다. 사고 난 장소로 갔는데 안경은 부러져있었다. 그래서 안경 맞춰야 한다고 해서 병원 가기 전에 안경점 먼저 가서 안경을 맞추고 병원에 갔다. X-Ray를 찍었는데 다행히 어디 부러진 곳은 없었다. 좀 몸에 기력이 생겨서 걸어보라고 하셨는데 걷기에도 크게 불편함이 없었다. 그래서 봉고차 운전사 아저씨 연락처를 부모님이 받고 그날 집에 왔다. 하지만, 고통은 그다음 날 있었다. 화장실에 앉아있는데 머리가 터질 듯이 아팠다. 그래서 머리를 뒤에 다가 몇 번이고 부딧칠 정도로 머리를 박고, 감싸 앉았다. 그런데 그때도 병원에는 가지 않았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로 진학을 했다. 처음으로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거리에 있는 학교였다. 교복이라는 것을 입고 어색한 모습으로 학교에 등원했다. 학교가 있는 곳이 교육단지라서 2개의 남중, 1개의 여중, 1개의 남고, 1개 초등학교가 모여있는 단지였다. 내가 다닌 학교는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학교에서 버스 내리면 가장 오래 언덕길을 올라가야만 했다.


중학교 입학 숙제가 있었다. A-Z까지 30번 정도 써오는 것이었다. 나는 14살, 중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알파벳을 알게 됐다. 중1 때 영어 선생님도 여자 선생님이었는데 잘 알려주시고 친절해서 나와 또 다른 두 친구는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그런 모습이 귀여웠는지 선생님은 우리 셋을 선생님 집으로 초대도 해주셨다. 그런데 중학교 2학년 때 다른 남자 선생님이 영어 수업을 가르쳐주셨는데 너무 내 스타일이 아니라서 그때부터 영어에 대한 흥미를 잃었었다.


중2 때 방황도 많이 했고 힘든 시기를 보냈지만, 그때 내 인생의 철학을 알게 해 준 선생님을 만났다. 도덕 선생님이었는데 수업 때마다 칠판에 한자를 적어놓고는 수업을 시작하셨다. 그때 선생님이 자신의 스승은 장자라고 하시면서 장자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는데, '무기(無己)'를 이야기해주셨다. 우리 집의 가훈은 가화만사성이었지만, 매일 같이 술에 취해 들어오시는 아버지와 다투시는 어머니, 그리고 학교 생활의 어려움 등으로 힘든 시기를 보냈는데, 내가 있기에 모든 근심 걱정이 있는 것이고, 내가 없다고 생각하면 모든 근심 걱정은 없는 것이라는 말씀이 나한테 너무 와 닿았다. 그래서 그때부터 '무기(無己)'라는 말을 가슴에 새기고 지냈다.


마산은 당시 평준화가 아니라서 연합고사를 보고, 연합고사 성적에 따라 마산에 있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고, 성적이 안되면 인문계를 못 가고 실업계를 가야 하는 시절이었다. 연합고사 시험 100일 전에 친구가 마산 중심가인 창동에 가자고 해서 갔더니, 고등학교 선배들이 시험 잘 보라고 그 친구와 나한테 술을 사줬다. 그때 고등학교 시험을 위해 술을 먹었던 게 내 기억의 첫 번째 술이었던 것 같다. 당시 서울은 200점 만점에 100점이나 110점만 넘어도 인문계 간다고 했는데, 마산, 창원 지역은 200점 만점에 175점이나 180점 정도를 맞아야만 인문계를 갈 수 있었다. 그래서 중학교 3학년 때 야자도 하고 나름 열심히 공부해서 187점 정도 성적을 받아서 다행히 인문계에 갈 수 있었다.



당시 연합고사 만점 받은 학생이 10명 정도가 채 안되었는데 무려 만점 받은 6명 정도가 우리 학교에 배정되었었다. 그래서 뭔가 학교에서 수를 쓴 게 아닌가라는 의심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2학년, 3학년 선배들을 강당에 불러놓고 선생님들이 엄청나게 정신교육을 했다고 들었다. 절대 1학년들 건들지 말라고. 그래서 그런지, 어느 날 급식을 먹으로 식당에 가는데 식판을 들고 가다가 앞에 있던 사람이 멈추길래 부딧쳐서 앞에 있는 사람의 교복이 좀 배렸다. 선배였다. 무서운 눈으로 막 째려보고 때리려고 하다가, 내 교복에 있던 초록색 이름표를 보더니, 옆에 있던 선배가 "야 쟤 1학년이자나. 그냥 놔둬"라고 해서 무사히 넘어갔다. 그렇게 식사를 하고, 식당을 나오는데 바로 옆에서 어떤 선배가 다른 선배 뱜을 있는 힘껏 때리는 걸 봤다. "야 xx야, 선배한테 인사 안 해?"라고 하면서 말이다. 정말 무서운 학교였다. 선배들의 후일담으로 하루는 지역 양아치에게 선배 한 명이 맞았는데, 선배들이 단체로 내려가서 그 지역을 평정했다고 들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면 참 웃긴 문화도 많았다. 학교가 시골에 있다 보니 종점이고, 시내까지 3-40분이 걸리는데,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는 버스를 타면 불문율이 있었다. 버스의 중간 이후로는 1학년은 못 가고, 2학년 3학년만 갈 수 있고, 중간 이후 자리는 3학년만 앉아 갈 수 있었다. 만일 버스 뒤쪽에 1학년이나 2학년이 앉아있으면 바로 손찌검 날아오던 시절이었다. 나는 간간히 겁도 없이 명찰 떼고 자는 척하면서 뒷자리 쪽에 몇 번 앉아있긴 했다. 그때는 왜 그리 겁도 없었는지.




1998년, 18살, 고2. 어두운 시기와 철이 들었던 해.


아버지가 은퇴하셨다. 실제 호적보다 2년 늦게 출생신고가 되어서 또래보다 2년 정도 더 일하셨지만, 30년 넘게 일하시던 직장에서 정년이 다되셔서 은퇴를 하셨다. 이때부터 갑자기 내가 가장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들고, 지금처럼 철없이 지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고2 때부터 나름 열심히 했다고 쓰고 나서 기억이 나는 것은, 고2 때 에반게리온부터 해서 재페니메이션에 엄청 빠져 살았기도 했네. 그때도 죽도록 공부를 하진 않았고, 철이 좀 들어서 열심히 했던 시기였다. 고등학교 때 꿈은 별을 보는 것을 좋아해서 뉴턴 잡지를 매달 사서 봤었고, 그래서 천문학자나, 이집트 피라미드 등 고고학에 관심이 많아서 고고학자가 되고 싶었다. 또는 고1 때부터 줄곧 미술을 만점 받았고, 애니메이션을 좋아해서 애니메이터가 되고 싶기도 했다. 내가 고2 때 큰 자형이 서울로 발령을 받아서 큰누나와 큰자형이 경기도 고양시로 이사를 갔다. 나도 나름 2년 가까이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리고 수능을 봤다.


수능 결과 운좋게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성적이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아버지는 가까운 대학에 가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그래도 성적이 좋은데 서울로 보내는 게 좋지 않겠냐고 말씀해주셨고. 나는 딱히 생각이 크게 없었다. 서울은 내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고, 다른 세상 같아 보였으므로. 마침 큰 누나와 큰 자형이 서울 옆 경기도에 살고 계셨고, 큰 자형이 남자는 서울로 와야 한다고 부모님을 설득시켜주셨다. 다음은 전공이었는데, 내가 가고 싶어 했던 천체물리학을 하는 학교는 많지 않았다. 당시 IT 붐이 있던 시기였는데, 막연히 내가 잠에서 깨면 로봇이 와서 하루 일과를 이야기해주고, 벽에는 투명 디스플레이가 노래를 들려주고 뭐 그런 인공지능을 하고 싶어 졌다. 그래서 인공지능이 있는 과를 찾아서 수시로 넣었다. 당시 수시와 정시에 대한 정확한 개념도 모르고 그냥 넣었는데, 수시가 붙어버렸다. 이후에 정시를 못 넣는다는 것을 알았다. 당시에 좀 더 높은 대학에 지원해볼걸 하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그래도 서울에 있는 학교에 붙은 게 어딘가. 친구들은 논술 공부할 때 나는 열심히 놀았다.


그렇게 1999년 겨울에 난생처음으로 서울로 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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