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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27살. 두 번째 이직. 정상에서 초심으로.

이룰 수 없을만한 원대한 꿈을 꾸다.

by Dr Kim
"한국인으로서 세계를 위해 일하고 싶습니다"


두 번째 회사는 대기업 산하의 계열사로 재무적으로 꽤 안정적이어서 내 나이에 비해 적지 않은 연봉을 받았다. 불과 4년 전만 해도 사회적으로 바닥의 삶을 살고 있었는데, 이런 모습으로 살 수 있을지 당시에는 꿈도 꾸기 어려웠다. 내가 모르는 어떠한 힘이 나를 이끌어 주는 것 같았다.


26살에 두 번째 회사로 이직했을 때 조건 중 한 개가 학부 수업시간에 학교에서 수업 들을 수 있게 배려해 달라는 거였다. 이때부터 석사, 박사학위는 항상 회사와 공부를 병행하게 되었다. 학부 3학년 2학기에 복학을 하고 회사를 다녔다. 낮에는 회사에서 일하고 주로 저녁 수업을 듣거나 또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회사의 배려로 낮에 학교에서 수업을 들었다.


내가 속해 있던 그룹에서 열심히 한 덕분에 회장도 되었고, 내가 속한 분야에서 꽤 이름도 많이 알려졌고 좋은 사람들도 운 좋게 많이 만났다. 어느 날 지인이 나보고 국가정보기관에 특강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2003년 1.25일 전국 인터넷 마비 사건으로 이듬해 국가사이버안전센터가 만들어졌고 그곳에서 강의를 부탁했다. 강의를 잘 마치고 실장님께서 식사를 함께 하자고 하셨다. 무려 20여분 정도가 모이셨고, 가장 먼저 실장님께서 술을 한잔 따라주셨다. 그게 끝인 줄 알았는데 옆에 계신 분도, 그 옆에 계신 분도 계속 술잔을 닦아서 술을 따라 주시는 것이 아닌가. 연거푸 20여 잔을 마셨지만 장소가 장소인 만큼 긴장하고 정신을 바짝 차렸다.

술잔을 다 돌린 이후에 실장님께서 놀라운 말씀을 하셨다.


"김 선생, A회사도 좋은 회사이지만, 국가를 위해 일해주지 않겠나?"

나는 무심결에 "네?! 네!"라고 이야기를 한 거 같다.


어떻게 자리를 끝냈는지도 모르고 어찌어찌 누나 집으로 왔다. 다음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사무관님이라고 하면서 커피숍에서 보자 하셨다. 커피숍에서 서류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고 바로 오퍼가 들어왔다. 나보고 최종 의사결정을 달라고 하셨다. 집으로 가는 길에 그곳에서 일하는 선배님께 전화해서 이런 상황을 말씀드리니 올해 들어오면 대학을 졸업 안 했기 때문에 고졸로 9급이라고, 차라리 내년 대학 마치고 7급 공채로 들어오라고 하셨다. 당시 선배는 7급 특채로 들어갔는데 그 당시만 해도 특채와 공채 간에 차별이 있을 때라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 같다.


대학교 3학년과 4학년 1학기에도 낮에는 회사일을 하고 밤에는 학교 수업을 들었다. 그 와중에 인연이 닿아서 다시 그쪽 기관에서 4개월 정도 간간히 특강을 했고 또다시 4학년 때 연락이 왔다. 그때도 거기에 일하는 형과 상당히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내 인생의 목표와 꿈이 대해 많이 생각했다. 20대 초반에는 내 삶이 바닥이었고 내가 희생해서라도 나를 아는 주변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많았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더 잘되어야지 내 주변 소중한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과적으로 양해를 구하고 가지 않았다. 나는 첫 번째 회사 팀장님이 가신 국제금융기구와 같은 글로벌 무대에서 존경하는 그 형님과 함께 일을 해보고 싶었다. 만일 그 형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내가 알고 있는 세계 안에서 국*원 조직은 최고의 조직이라서 당연히 갔을 것이다. 하지만 더 넓은 세계를 알게 되면서 내 목표와 꿈도 더 넓어졌다.


사람은 몇 가지 머릿속에 각인된 이미지나 글에 영향을 받는다. 그게 좋은 것이든 좋지 않은 것이든.

나에게 각인된 이미지는 어느 날 텔레비전을 보는데 기러기 아빠가 혼자 집에서 외롭게 라면 먹는 그런 모습이 각인되어서, 무슨 일이 있어도 훗날 결혼하고 자녀가 생긴다면, 필요할 때 같이 해외에 나가서 살아야지 절대 혼자 남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국내 공무원으로 산다면 가족과 함께 해외로 원하는 때에 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말씀드렸다.


"국가를 위해서 일을 하는 것도 정말 멋진 일이지만, 저는 한국인으로 세계를 위해 일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양해를 구하고, 가슴속에는 내 삶의 가치관으로써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말을 새기고 살게 되었다.


4학년 1학기까지 회사일과 학교 공부를 병행하다 보니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4학년 2학기 졸업학기가 되자 교수님들께 말씀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졸업학기인데 보통 취업 준비한다고 졸업학기는 교수님들이 배려해주시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세 분 교수님께 찾아가서 지금 일을 하고 있는 중인데 혹시 시험만 보면 안 되겠습니까라는 취지로 이야기를 드렸는데 세 교수님 모두 냉정하게 안된다고 말씀하셨다. 아니, 다들 취업 준비한다고 막 학기에 수업 안 들어오는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이미 취업해서 일 열심히 하고 있는데 왜 안된다고 하는지 당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다들 4학년 2학기에 취업 준비한다고 학교에 잘 오지 않았는데, 나는 반대로 회사를 그만두고 4학년 2학기는 오랜만에 풀타임으로 학교 수업을 들었다. 이후 국내 교수로 일할 때 몇 명 학생이 나와 비슷한 요청을 해 왔을 때 나는 쿨하게 오케이라고 이야기를 해줬다.




4학년 1학기 끝나고 여름방학기간에 회사에서 일을 하는데 전 회사 친한 형한테서 연락이 왔다. 그 형은 이미 전 회사를 퇴사하고 국내 최대 S회계법인에 다니고 있었다. 모 금융권 프로젝트를 하는데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로 연락 온 게 아니라 나를 콕 집어서 프로젝트에 파트너로 일을 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내가 다니고 있던 회사가 대기업 계열이었지만 국내 최대 회계법인과 일을 한 적이 없었기에 이 사실을 이사님과 전무님께 말씀드렸더니 좀 당혹해하셨지만 감사하게도 말리지 않고 잘 수행하고 오라고 하셨다.


내가 투입되었을 때 프로젝트 상황은 썩 좋지 않았다. 당시 크리티컬 한 이슈를 발견하지 못한 상태였는데, 운 좋게 내가 엄청난 이슈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부행장님이 해당 이슈를 들으시고 나보고 시연을 해 달라고 하셨고 감사실장님, 보안팀장님 모인 상태에서 시연을 보여드렸다. 다들 충격을 받으시고 긴급 점검에 들어갔다. 이 일을 계기로 프로젝트 팀은 분위기가 급 반전되었고 성공적으로 프로젝트를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프로젝트 회식 때 감사실장님께서 S회계법인 파트너에게 너무 좋게 나를 추천해주셨다.


"J상무님, 김 선생을 S회계법인에서 데리고 가지 않으면 우리가 데리고 갈 겁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고, 몸 둘 바를 몰라 어쩔 줄 몰랐다.


당시 4학년 졸업반이라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첫 번째 회사 팀장님이 아서앤더슨 출신이라, 그 형님을 본받고 싶었고, 수많은 이유(이건 또 엄청 길어지는 이야기라 언젠가 따로 글을 써봐야겠다)로 인해 글로벌 컨설팅 펌에서 일을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가진 배경으로는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는 높은 산이었다. 그래서 모든 경력을 포기하고 인턴으로라도 들어갈 수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던 곳이었다.


그 이후, 1차로 광화문에 있는 커피숍에서 매니저 선생님과 실무 면접을 보고, 2차로 파트너 면접을 보았다. 그리고 3차로 다른 부서와 시니어 파트너 면접을 보고, 4차로 영어면접을 봤다.


인사팀에서 내 경력 산정을 하는데 내가 산업요원으로 근무했던 기간은 경력의 25프로만 인정해주고, 대기업 계열사에서 일했던 경력은 졸업 전이라 50프로만 인정해줘서 실제 4년 6개월의 경력이 S회계법인에서는 1년 1개월 경력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 경우 현 회사보다 연봉이 더 적게 되기에 파트너께서 잘 말씀해주셔서 만 2년 경력을 인정받고 Senior Associate 1년 차로 오피셜 오퍼를 받았다. 언제부터 입사할 수 있냐고 물어보길래 당시 셋째 누나가 석사 공부하고 있는 멜버른에 가족들이 여행 가기로 해서 다음 해 1월에 출근하기로 말씀드렸다.


내가 S회계법인으로 옮긴다고 했을 때 내가 속한 분야 사람들에게는 꽤 충격이었다. 당시 국내 최고, 최대 언더해커그룹 회장에, 세계해킹대회 한국팀 멤버로 활동하면서 이쪽 분야에서는 최정상에 있었는데, 이쪽 분야의 모든 경력을 버리고, 신입과 같은 마음으로 내부감사컨설팅이라는 분야로 옮기게 되었으니,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예상외라고 매우 놀랐다.

이 시기에 이쪽으로 커리어를 선택한 이유는,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경력보다는 최종 목표와 꿈을 이루기 위한 커리어 디딤돌로써 결정을 한 것이다.


2008년 1월 셋째 누나가 공부하는 멜버른에 큰누나, 작은누나, 그리고 초등학생 조카 4명을 데리고 멜버른에 갔다. 멜버른의 가장 좋은 곳에서 높이 솟아 있는 건물에 내가 입사할 회사 이름이 적혀 있는 걸 보고 너무 감격스러웠다.

"PricewaterhouseCoopers"


당시 S회계법인은 글로벌 Big 4 중 PwC와 파트너십을 맺고 있었다. 그렇게 나의 글로벌 무대로의 진출에 아주 작은 한 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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