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 <변신>을
읽고? 듣고!

문학으로 나아가는 길목

by 내안의 문학

작년 늦은 봄 막 우기가 시작되는 어느 날이었다. 카프카와 그의 책에 대한 소개를 보았다. 맞다. 읽은 것이 아니고 보았다.


냉동칸 안쪽에서 딱딱한 검정 봉지를 꺼냈다. 오래된 건나물... 이것을 이제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갑자기 그렇게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늘 냉동칸을 열면 그 생각을 하곤 했다.


한국에 방문할 때면 시어머님이 무심한 듯 '나물 말린 건데 먹을래?'하고 물어보셨다. 나는 밝은 목소리로 ' 어머님 두고 드시죠 왜요?' 하면서 받아 든다. 그렇게 짐 무게에 별 타격감이 없는 애들이라 늘 챙겨 오지만 이 더위의 말린디의 시간을 지나다 보면 언제 나물을 꺼내 물에 담갔다가 불려서 다시 삶고 꺼내고 볶고 하는가 싶어 사실상 손이 안갔다.


검정 봉지를 풀기엔 너무 꽁꽁 묶여있어서 가위로 끊어 열었다. 문득 내 마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꽁꽁 묶인 차갑게 얼어버린 것이 알지만 모르겠는... 무엇인지 뜯어야만 그 이름이 무엇인지 그제야 제대로 알 수 있는 내 진짜 마음.


1916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요즘 나는 민음사에서 제작한 해외문학편 유튜브를 보곤했다. 덕분에 이름으로만 알고 있던 카프카의 <변신>을 찾아 오디오북으로 읽게 되었다.

이 책을 소개받으면서 강렬하게 문학적 허기를 느끼고 있는 나를 발겼했다.


주인공 그레고리가 어느 날 변했다는 갑충으로 살다 결국은 쓸쓸한 죽음으로 끝나는 이 이야기는 정말 소개처럼 충격적이고 사람을 생산적 가치로만 보는 세태를 어떻게 해석할지에 대해 묻게 했다.

주인공 그레고르는 성실한 가장이었다. 가족을 부양하던 그는 벌레가 되는 순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음에도 더 이상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한다. 말하지 못하고, 일하지 못하고, 생산하지 못하게 되자 그는 점점 방 안으로 밀려난다. 가족의 연민은 불편함으로, 불편함은 부담으로, 결국은 제거해야 할 존재로 바뀐다. 이 과정이 너무도 담담하게 그려지기에 오히려 더 잔인하게 다가온다.




어릴 적 유치원에 가고 싶어 교회를 제 발로 찾아갔다. 정확히는 오빠가 놀아달라는 나의 청을 들어주는 셈 치고 그렇게 유치원 같은 곳이라며 보내주었다. 그렇게 부흥기를 지나 정착된 나의 믿음은 진짜 나를 알아가기에 참 안 되는 게 많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교회 교육안에서 자랐다.


나는 내 신앙과 문학이 양립할 수없다고 생각했다. 문학이란 내 영혼을 앗아가는 도적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처음엔 경계할수록 문학이란게 더 매력이 있어서 설레었었지만 아직 젊은 그때 나는 영성이 깊어질수록 역시 문학은 세상의 것, 썩어질 것, 소망 없는 허무한 것일 뿐이라는 무지의 두려움 속에서 섣부른 결론을 내려버렸었다.

그러한 때를 지나왔다는 사실보다 그러한 시간이 지나치게 길었다는 것이 나를 슬프게 한다.


나이가 들어 오십도 반이 훌쩍 넘은 지금... 나는 이제 그 지적 허영조차도 없는 나를 보면서 내 문학에 대한 동경심이 냉동칸에 처박혀있던 말라비틀어진 건나물 같다고 느꼈다. 시어머니에게서 그것들을 받아 들며 호들갑 섞인 소리로 말하며 가져와서는 여전히 냉동고에 검정뭉치로 땅땅하게 얼어버리고 만 그것.


한강작가의 노벨문학상 소식이 있던 그해였던가... 나의 지적 호기심이 냉동칸에 깡깡 얼려있었지만 아직 상하지 않았더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단숨에 그녀의 책들을 정신없이 읽었다.그간의 허기를 채우기라도 하듯...)


검정 봉지의 나물은 고구마 줄기였다.

여기 아프리카에서 이 우기에 눅눅하고 지친 나는 나물을 볶아 먹겠다는 의지가 갑자기 더욱 강렬해졌다.

그것을 볶아 고추장을 넣고 계란프라이 하나 곁들여 먹으면 나물 비빔밥 흉내를 낼 수 있을 것이다! 물에 불리고 또 불렸다. 레시피에서는 서너 시간이라고 해도 나는 반나절을 불리고 물을 버리고 그것도 성에 안 차서 삶는다. 그제야 먹을 수 있게 조금 보드라워졌다.


잠자기 전에 눈을 감고 읽은(들은) 책 카프카 『변신』을 통해 나의 문학적 딜레마가 균열되기 시작했고 마침내 내 진짜 마음을 열어볼 수 있게 했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벌레가 되어 있는 한 인간의 이야기. 설명도 없고 구원도 없다. 그저 한 사람이 쓸모를 잃어가는 과정을 지켜보게 될 뿐이다. 그러나 이 단순하고 기괴한 설정은 오히려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내 앞에 던져 놓았다.


'인간의 가치는 어디에서 오는가?' 이것은 종교적 물음과도 닿은 주제였다. 내 갈증... 삶으로 살아지지 않는 나의 종교적 가치에 대한 물음이기도 했다.


문학은 인간을 판단하지 않는다. 대신 인간을 가리지 않고 보여준다.
사실 성경도 그렇다.

다만 이해시키게 하기 위해 너무 많은 장치를 두었고 왜곡된 교사들이 지나치게 많았을 뿐이었다.

문학은 답을 주기보다 질문을 남기고, 규범을 말하기보다 현실을 드러낸다.

반면에 종교는 답을 향해 찾아가는 여정이라고 생각한다. 과정을 절대 무시하거나 간과하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문학이라는 과정에 눈을 감고 없다고 우기며 여전히 형체 없는 두려움에 쌓여있었을 뿐이었다.


쓸모를 잃은 존재, 사회적 가치에서 밀려난 존재, 말조차 할 수 없는 존재를 향해 여전히 인간이라 부르는 시선. 문학은 그 시선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의 하나님은 그 시선을 외면하지 말라고 했다.


문학은 인간을 미화하지 않지만, 끝까지 포기하지도 않는다. 가장 연약한 자리까지 내려가 그 자리를 지워버리지 않고 기록한다. 그 기록 앞에 종교가 더욱 정직하게 직면했어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중년이 되어 나는 내가 인간을 너무 쉽게 규정해 왔음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문학을 통해 인간을 배우고, 인간을 통해 다시 신의 세계에 정직하게 닿을 수있음을 알게 되었다. 문학은 답을 주지 않지만, 인간을 사랑하는 과정에 바라보게 만드는 아름다운 도구라고 조용히 이야기해본다.


충분히 보드라워진 마른 나물의 변신은 양념과 함께 잘 볶아져서 마침내 이곳에서 구할 수 있는 식재료들과 어우러져서 제법 비빔밥의 모양새를 갖추었다.

남편에게 엄청난 찬사를 받으며 크게 한입을 퍼서 맛있게 먹으며 이 우기를 지나 곧 다가올 건기를 맞이할 힘을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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