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선과 악, 그 가느다란 선 위에서"

by 글씨가 엉망

우리는 종종 묻는다.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면, 그 악은 우리 바깥, 어디 멀리,

‘악한 자들’ 속에 있는 것일까?

악행이 교묘하게 저질러지는 곳에 오직 악인만 있다면,

우리에게 남은 일은 단순하다. 그들을 솎아내고, 파멸시키면 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만약 선과 악을 가르는 선이 우리 모두의 마음을 가로지르고 있다면?

그렇다면, 그 악인을 제거하는 순간,

우리 자신의 한 조각도 함께 잘라내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우리는 모두 그 아슬아슬한 선 위를 걷고 있는 자들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그 선을 간신히 지키며 걷고 있고,

누군가는 이미 넘어섰지만, 여전히 자신이 선하다고 믿는다.


선이란 완벽한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매 선택마다 고민하고,

책임을 감당하려는 의지의 방향이다.

악이란 본성의 문제가 아니라,

그 책임으로부터 눈을 돌리는 순간의 무책임일 수 있다.


자신의 한 부분, 즉 '악의 가능성'을 기꺼이 제거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순간, 우리는 곧 선의 절대성을 믿기 시작한다.

그러나 한 부분을 제거한다고 해서

남은 부분이 온전한 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늘 그 경계에서 긴장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 긴장 속에서만, 선은 살아 숨 쉰다.


"악이 있기 때문에 선이 있다"는 말은,

선과 악이 대립의 개념임을 전제한다.

하지만 이 논리는 위험하다.

만약 선이 존재하려면 악이 반드시 필요하다면,

악은 선의 존재를 위한 도구가 되어버리고,

결국 악은 정당화될 수 있다.


그렇다면 반대로 생각해보자.

존재 그 자체가 악이라면,

그 존재와 구별되는 ‘비존재’ 또는 ‘선’만이 순수한 것인가?

이 사고는 결국 ‘존재 자체의 죄악성’을 전제로 하며,

역사 속에서 수많은 금욕주의, 자기부정, 심지어 파괴적 도덕주의를 낳았다.


우리는 지금, 선과 악의 명확한 기준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가?

혹은 단지, 시대와 문화가 만들어낸 공동체의 합의된 기준 속에서

그 ‘선’을 기계적으로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공동의 선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악’의 존재를 전제한다.

공동의 기준에서 벗어난 모든 것은

선이 아닌, 잠재적 악이 된다.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선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분명한 것은,

선과 악은 인간의 외부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 둘은 항상 우리 내면을 가르며 흐르고,

우리는 그 선 위에서 끊임없이 균형을 잡으려 애쓰는 존재라는 점이다.

절대선이나 절대악은 없다.

그저 선택과 책임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기꺼이 짊어지려는 의지 속에,

조용하고도 단단한 ‘선’이 깃든다.

keyword
이전 19화인생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