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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엄" 인간으로 살아가는 방식

by 글씨가 엉망

“존엄은 죽음을 준비하는 태도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매 순간의 자기인식이다.”


"존엄과 인간성 그리고 자유가 없는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서 죽음과 삶은 경계가 사라지고,

태어나는 순간 이미 삶은 죽어가는 과정이 된다.

어떠한 논리도 필요하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스스로를 인간답게 인식하고자 하는 의식이다.


오늘날 사회는 "존엄한 죽음"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마지막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려한다. 왜 하필이면 삶의

마지막 순간을 선택하는 것인가?

그러나 정작 우리는 그 보다 앞서 논의되어야 할

"존엄한 삶"의 의미를 잊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존엄은 생명 그 자체의 고귀함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를 인간답게 인식하고자 하는 의식의 결과이다.


결국 존엄은 죽음의 방식이 아니라

삶 전체를 관통하는 인간성의 가치로 이해되어야 한다.




존엄성은 태어남과 동시에 부여된 인간 고유의 가치이며,

삶과 죽음의 경계에 종속되지 않는다.

우리는 살아가는 매 순간 죽어가는 과정 속에 있지만

그 과정이 존엄성을 훼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삶과 죽음의 연속성 속에서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인식하느냐가 존엄의 핵심인 것이다.


인간성은 존엄성이 지켜지는 한 언제나 가치를 가지게 된다.

존엄성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며

그 인간의 순수한 오성의 결과물이 곧 존엄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이 단순한 진리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인간성의 가치는 성과나 지위로 대체되고,

존엄은 더 이상 내면의 의식이 아니라 외형적 성공의 포장지가 되었다.

인간성은 회복을 외쳐대기에는 너무나 왜곡되어 인간성이 뭐였더라...

하는 궁금증조차 생기기 어려운 상황이 된 것 같다.

그 결과 우리는 스스로의 존엄을 타인의 시선 속에서 확인하려 든다.




이러한 가치 전도의 사회에서 '존엄한 죽음'이라는 담론이 등장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일지도 모른다.

인간다운 삶을 실현하기 어려운 사회에서,

사람들은 마지막 순간만이라도 스스로 선택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 선택이 진정한 존엄의 회복인지,

혹은 존엄한 삶을 포기한 사회의 자기위안 인지는 따져 볼 문제다.


'안락사'나 '존엄사'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죽음의 권리는,

자칫 삶의 존엄성을 유지할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는 논리로 변질될 수 있다.

존엄을 죽음의 선택에만 한정한다면,

인간성의 본질은 더이상 삶 속에서 증명할 수 없게 된다.


존엄성이란 자기존재의 엄중한 가치이며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누구의 것으로 바뀌거나 앗아갈 수 없는 가치여야 한다.

존엄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이다.

그것은 사회적 지위나 조건에 따라 변하지 않으며,

삶의 모든 순간에 깃들어 있는 인간성의 근원적 발로인 것이다.


결국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죽음의 방식을 결정할 권리가 아니라,

삶을 존엄하게 만드는 의식이다.

존엄한 죽음은 존엄한 삶의 연장선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삶 자체가 존엄하지 않다면,

죽음의 선택은 결코 존엄할 수 없다.

사회가 이 단순한 진리를 다시 깨닫는 순간,

인간성은 비로소 그 본래의 빛을 되찾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는 마지막 처방이라기 보다는

사회현상의 한 가지로 치부될 수 밖에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무가치한 것은 없다".

"자기의 존엄성과 바꿀 수 있는 대체가치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마치 존재하고 바꿀 수 있는것처럼

인식하고 생각하는 상황이라면 희망적이지 않은 것만은 확실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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