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에 대한 전제는 인간을 분명한 주체로 상정한다.
우리는 소유가 명확해야 하는 사회에 살고 있고,
무엇이 누구의 것인지를 끊임없이 구분한다.
그 속에서 인간은 나와 너, 나의 이익과
너의 이익으로 나뉜 존재가 된다.
이익으로 맺어진 연대는 오래가지만,
의미로 묶인 연대는 쉽게 풀어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철학은 오랫동안 이성을 중심에 두고 사유해 왔다.
생각할 수 있는 능력, 판단할 수 있는 힘,
그리고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
어쩌면 철학은 늘 이성의 편에 서 있었는지도 모른다.
철학에 매력을 느낀 사람들 역시 이성을 신뢰하는 이들이었기에,
어쩌면 그 흐름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을 조금만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이성이 언제나 가장 먼저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실존주의가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고 말하기 전부터,
이성보다 앞서 꿈틀거리는 어떤 힘을
집요하게 바라본 철학자가 있었다.
아르투르 쇼펜하우어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을 새롭게 정의하려 했다.
인간은 이성에 따라 사는 존재가 아니라,
의지에 이끌려 살아가는 존재라고 말이다.
이 생각이 응축된 저작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다.
쇼펜하우어에게 세계는 무엇보다 ‘의지로서의 세계’였다.
인간은 이성적으로 결론을 내린 뒤
삶을 수정하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먼저 욕망하고, 먼저 선택한다.
그리고 나서야 이성이 등장한다.
이미 내려진 선택이 얼마나 합리적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이성은 결정을 내리는 주체라기보다,
결정에 이유를 붙이는 기능에 가깝다.
"의지는 살고자하는 힘이지만 살아갈 이유는 말할 수 없는 힘이었다."
쇼펜하우어에게 이성은 숭고한 능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뇌라는 물질적 조건 안에서 작동하는 기능이며,
신체와 분리될 수 없는 작용이다.
그래서 그는 이성과 신체를 나누어온
기존 철학의 전통을 거부했다.
대신 신체를 사유의 중심으로 끌어들였다.
인간은 충동을 품은 신체로 살아가는 존재다.
이성은 선과 손을 잡을 수도, 악과 결탁할 수도 있는
중립적인 사고 능력일 뿐이다.
인간을 끊임없이 밀어붙이는 힘,
쇼펜하우어는 그것을 ‘의지’라고 불렀다.
의지는 모든 존재를 존재하게 만드는 힘이다.
인간의 본질 역시 이성이 아니라 의지에 있다.
그러나 의지는 인식되지 않는다.
우리는 의지 그 자체를 알지 못한 채,
그것이 드러난 모습만을 인식할 뿐이다.
우리가 보고, 느끼고, 이해한다고 믿는 이 세계는
‘표상으로서의 세계’다.그리고 그 이면에는
‘의지로서의 세계’가 있다.
의지는 표상을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내고,
표상된 세계 역시 의지의 흔적이다.
우리는 결국 의지를 직접 알지 못한 채,
그 그림자 속에서 세계를 살아간다.
쇼펜하우어의 물자체로서의 의지는
어떤 목적을 향한 지향점이 아니라,
세계가 목적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끝내 부인하지 못하게 만드는 형이상학적 장치다.
삶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또한
분명한 목적을 향해 나아가기보다는
의지의 흐름 속에서 흔들린다.
그래서 불행은 언제나 행복보다 또렷하고,
기쁨은 기대를 채우지 못하며,
고통은 늘 예상보다 깊다.
인간은 의지가 만들어낸 욕망에 이끌려
살아가는 존재다.
이전의 철학이 의지를 이성 아래에 두었다면,
쇼펜하우어는 의지를 이성이 결코 닿을 수 없는
자리로 끌어올렸다. 바로 그 지점에서 그의 철학은
지금까지도 불편하고 그래서 여전히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