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에 대하여 02

믿음과 따름 그 차이에 관하여

by 글씨가안엉망

ㅇ개인적 생각임을 미리 밝힙니다


지금의 종교를 유지하기 위한 동력은 무엇인가?

종교가 믿음을 유지하는 수단은 자신의 교리에

저주와 축복, 처벌과 행복, 천국과 지옥, 천사와 악마, 윤회, 극락왕생과 같은 보상의 개념을 결부시키는 일이다.

보상이 없는 믿음은 진리와 깨달음으로 향해야하나

지금의 기복과 소원함에 대한 믿음은 보상이 전제될 수 밖에 없다.


보상의 개념은 존재와 부존재의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다.

믿는가 믿지 않는가의 문제이다.

어차피 보상의 결과는 사후의 세계에 대한 것이거나

자기가 주관적으로 느끼는 결과론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존재와 부존재는 관념적인 문제일 뿐 종교의 입장에서

실존의 문제로는 될 수 없다.

최소한 종교적 입장에서는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의 현실 또한 다르지 않다.

자기에게 가져올 이익의 관점에 얽매여

그 너머의 깨달음과 진리를 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종교안에서의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

이익의 관점에서 종교를 바라본다면 믿음은 중요하지 않다.

보상의 결과는 교리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구원과 행복의 종교적 목적은 최상의 가치를 가진

인간상에 대한 투사의 결과이나,

자신의 믿음의 속성을 알지 못하고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진리에의 접근을 위한 회의와 의심은

교리에 의한 종교적 잘못으로 치부되어지며,

곧 저주와 처벌이라는 종교적 속성이 적용되어

누구도 감히 아니면 굳이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보상이 되었든 처벌이 되었든 어느 하나를 부정하게 되면 결국

무신론의 바다로 빠지게 되므로

그 누구도 신학에 대한 도전을 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이 가지는 종교에 대한 기대는

신의 의지와 은총이 인간과 세계에 직접적인 작용으로 다가오기를 원한다.

그러한 바램과 소원함은 예정적 소멸과 구원설의 근원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신은 결국은 인간이 상상하는

최고의 인간상을 투사한 투사체라고 생각하면

그러한 생각은 결국 예정적 소멸과 구원설 또한

인간의 바램에 불과하다는 이야기와 동일한것으로 봐도 무방 할 것 같다.

최초의 순수한 인간적인 따름에 의한 종교에서

사변적인 종교로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계기는

종교학의 이전에 인간의 이기심과 소원함이 그 기초에 깔려 있다.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의 깨달음도, 십자가 앞에서의 의연했던 모습도

모두가 보상의 종교가 아닌 따름의 종교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진리와 깨달음에 대한 배움과 가르침이 되어야만 따름의 종교라 할 수 있다면

보상이 목적이 되는 종교는 따름의 종교라고 볼 수 없다.

그저 인간의 소망을 투사한 투사체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일 뿐.

같은 맥락으로 교리 또한 인간의 자기규율과

소원함의 구체화로 격하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비트겐슈타인의 이야기 처럼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한계가 세계의 한계이듯이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한계가 교리의 한계라 볼 수 있을 것 같다.

믿음과 따름의 차이는 교리가 그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진리와 깨달음인지

인간상의 투사체인지에 따라 달라지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1. 참고문헌 : 포이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 읽기<양대종, 세창미디어,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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