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팅턴은 틀렸다? 강대국의 룰은 문명을 넘어섰다

냉전논리는 시대를 뛰어 넘는다

by 글씨가안엉망

요즘 뉴스의 국제면을 채우고 있는 내용은 사실 하나다.
세계 최강대국의 움직임 하나하나, 말 한마디가 모두 뉴스가 된다.
중동에서부터 유럽에 이르기까지 전운이 감돌고 있다.

무엇 때문일까.


헌팅턴이 말했던 문명의 충돌 때문일까.

그러나 지금의 갈등을 종교나 문명이라는 축으로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서로 다른 문명 간의 필연적 충돌이라는 설명은
오늘날의 분쟁이 지닌 방향성과 이해관계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어쩌면 헌팅턴의 주장은 이미 과거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혹은 애초에 문명의 충돌이라는 전제 자체가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문명이 아니라 강대국의 룰이다.
그리고 그 룰 속에서 형성된 신냉전체제다.
이 신냉전체제는 과거의 냉전과는 다르다.
이념 대 이념의 대결이 아니라, 미국과 미국의 이익에 반하는

세력 간의 충돌이 중심이 된다.
체제는 명분에 가깝고, 실제로 작동하는 기준은 이익이다.


각 나라마다 국가를 유지하는 법체계가 있듯 국제사회 또한

국제법과 국제관례에 의해 움직이는 듯 보였다.
최소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강대국의 안보와 이익을 위한 선택은 언제나 국제사회의

안전을 위한 ‘새로운 룰’로 포장된다.
그에 대응하는 동맹은 다시 강화되고,
군비 경쟁은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되살아난다.
질서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라는 말과 달리, 그 선택들은

오히려 기존의 질서를 무력화시킨다.


국제질서 재편의 기준은 더 이상 체제도, 안보도 아니다.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것은 자본의 논리다.
이익이 되는가, 손실이 되는가.
그 질문 앞에서 동맹과 적대국의 구분은 의미를 잃는다.
특히 강대국일수록 그 구분은 더욱 무의미해진다.

이 과정에서 냉전은 하나의 실체라기보다 논리가 된다.
실체가 없는 냉전논리는 강대국에게는 유용한 명분이 되고,
약소국에게는 선택지를 제한하는 족쇄가 된다.
그 논리는 ‘세계질서의 재편’이라는 그럴듯한 가면을 쓰고,
각 국가들에게 살아남기 위한 선택을 강요한다.
살아남아야 했고, 그렇게 살아남아진 결과가 지금의 질서다.


그렇게 유지되어 온 냉전논리는
신자유주의라는 변화의 가면을 쓰고 다시 등장한다.
한때 과거의 유물처럼 여겨졌던 신자유주의는
지금 다시 기지개를 켜고 있다.


이번에는 신냉전체제라는 단단한 갑옷을 입은 채로.
이제 그것은 명분이 아니라,
진짜 자본의 논리를 온전히 탑재한 형태로 작동한다.


더 이상 거칠 것이 없다.
과거에는 국제사회의 윤리가
적어도 일정 부분 가이드라인으로 기능했지만,
지금 그 윤리는 오래전에 의미를 잃었다.
윤리는 약소국의 의지가 되고,

강대국의 선택과는 무관한 것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상황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알 필요도 없다.


답습이라는 단어가 있다.
누군가 1등이 되면,
그 뒤를 따르는 자는 1등의 힘을 업고
다시 세계질서의 기준이 된다.

이 반복은 예외가 아니라 구조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는
그 구조가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난 모습일지도 모른다.


실체가 없는 냉전논리는 강대국의 논리가 되어버리고

실체가 없는 냉전논리는 약소국의 족쇄가 되어버리고

실체가 없는 냉전논리는 세계질서의 재편이라는 허울좋은 가면을 쓰고

어떻게든 살아남고 살아남아져야 했다. 세계질서의 재편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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