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복종에 관하여

에리히프롬

by 글씨가안엉망

지금, 세상을 움직이고 진화시키는 것은 복종인가, 아니면 불복종인가.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복종은 미덕으로,

불복종은 악덕으로 간주되었다.
그 복종은 권위에 대한 것이었고,

질서에 대한 것이었으며,

때로는 생존을 위한 선택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은밀하고도 무서운 복종은

외부의 강제가 아닌, 무기력을 내면화한 끝에

스스로 선택한 것처럼 보이는 자발적 복종이다.


순수한 권위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이루어지는 복종은,

어쩌면 복종이라기보다는 순종이나 따름에 가깝다.

그것은 판단 이후의 선택이며, 사유의 결과다.

반면 권력과 돈 앞에서 이루어지는 복종은

자발적인 형식을 띠지만,

실상은 선택의 여지가 제거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비자발적 복종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스스로 결정하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구조 속에서,

이미 결정된 방향으로 움직이는 몸에 가깝다.


이러한 복종의 구조 속에서, 우리는 어느새 사유를 잃어버렸다.
지금은 사유의 실종, 철학의 실종, 실존의 실종의 시대다.


자신의 존재를 깊이 묻기보다는,

본능의 가면을 본질인 양 뒤집어쓴 채

이미지와 자극만이 부유하는 가상의 세계를 떠다닌다.

생각하는 인간이 아니라 반응하는 개체로 존재하는 시대,

질문은 사라지고 즉각적인 판단만이 남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복종은 과연 어떤 가치를 가질 수 있을까.
더 우려스러운 것은 불복종이

단지 저항이나 반발의 또 다른 이름으로 소비되고 있다는 점이다.

불복종은 단순한 반대가 아니다.

그것은 무엇에 복종해야 하는가를 먼저 묻는 행위이며,

그 질문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복종의 대상에 대한

사유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시대는

복종해야 할 가치에 대해 묻는 일조차 사라져버렸다.

판단의 기준이 상실된 곳에서

불복종은 방향을 잃은 분노로 전락하기 쉽다.

그렇기에 불복종이 다시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유의 가치를 되찾아야 한다.

생각하지 않는 불복종은 또 다른 형태의 복종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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