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주의 그리고 인간

by 글씨가안엉망

사회적 인간은 가치관과 규범 없이 살아갈 수 없다.


우리는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바람직한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묻지 않고는 단 하루도 온전히 존재할 수 없다.

가치 판단은 단지 도덕 교과서 속 문장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나침반이다.

문제는 그 나침반이 사라질 때, 혹은 모든 방향이 같을 때 발생한다.


현대 사회에는 지극히 상대주의적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상대주의는 진리와 가치가 보편적 기준을 갖지 않으며,

시대와 문화, 개인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말한다.

겉으로 보기에 이는 관용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태도처럼 보인다.


그러나 극단적인 상대주의는 규범적 판단을 약화시킬 수 있다.

만약 모든 가치가 동등하게 상대적이라면,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더 나은 삶과 더 나쁜 삶을 구분할 수 있을까?

아니면 나은 삶과 나쁜 삶의 구분이 필요가 없어지는 것인가?


규범적 판단이 약해질 때 인간은 자유로워지는 대신 오히려 취약해진다.

명확한 기준이 사라진 자리에는 더 강력하고 단순한 기준이 침투한다.

역사적으로 인류는 이러한 위기를 여러 차례 겪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적 전통, 특히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공적 토론의 장으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극단적 상대주의는 우리를 다시 가치의 공백 상태로 돌아가게 한다.

그 공백은 오래 비어 있지 않는다.

국가의 요구, 초인적 지도자의 카리스마,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기계적 체계,

물질적 성공과 경제적 성과가 새로운 규범으로 자리 잡는다.


무엇이 옳은가 대신 무엇이 강한가,

무엇이 효율적인가,

무엇이 성공적인가가 판단 기준이 된다.


이때 윤리는 효율성에 종속되고, 인간은 수단으로 전락한다.

철학적으로 이는 규범 윤리에서 존재론적·도구적 가치로의

전환이라 할 수 있다.


가치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하지 않고,

“어떻게 더 많이 생산하고 통제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은 스스로 판단하는 주체가 아니라

거대한 체계의 기능적 부품이 되기 쉽다.

상대주의는 겉으로는 해방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비합리적인 가치 체계에 저항할 수 있는

기준을 약화시킨 셈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인간의 존엄, 자유, 책임과 같은 핵심 가치들을

합리적 토론 속에서 끊임없이 성찰하고 갱신하는 태도다.


인간은 가치 없이 살 수 없다.

문제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선택한 가치에 따라 살 것인가,

아니면 무비판적으로 주입된 가치에 이끌려 살 것인가이다.

상대주의의 시대일수록 우리는 더욱 질문해야 한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가? 무엇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는가?

이 질문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다시 힘과 효율,

성공이라는 새로운 우상의 시대 속으로 조용히 후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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