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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와 예술의 만남?
편견 덩어리인 나와의 만남.

때때로 예술보다 중요한 건,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

by 투망고

미디어아트 전시, 편견 덩어리였던 나와의 만남

KakaoTalk_20250523_145151487_02.jpg @뮤지엄헤이


선물로 받지 않았다면, 알지도 못했을 뮤지엄이었다.

첫째 아이와는 어릴 적부터 종종 전시를 함께 다녔다. 조용하고 느린 걸음으로 공간을 감상하며, 한 점의 그림 앞에서 한참이나 서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에너지가 넘치는 둘째 아이는 달랐다. 조용한 미술관 특유의 분위기를 불편해했고, 전시에 가자는 말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그 단호한 거절에 금세 물러서곤 했고, 언제부턴가 둘째와 전시를 함께 본다는 건 나의 ‘포기 목록’에 올라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지인이 초등학교 입학 선물로 준 티켓은 미디어아트 전시였다.

‘정적인 것을 싫어하는 아이에게는 오히려 괜찮겠다’는 또 다른 편견이 작동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둘째에게 전시를 제안했고, 아이는 의외로 따라나섰다.


내가 미디어아트를 꺼리는 이유

사실 나는 미디어아트 전시를 즐겨 추천하지 않는다.
기술 퍼포먼스에 치중된 일회성 체험이 예술의 깊이를 대신한다고 느낀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원화나 오브제를 실제로 가져와 전시하는 일이 가진 물리적, 재정적 리스크를 알기에, 그 대신 ‘작가의 이름을 건 미디어 콘텐츠 전시’가 한동안 유행처럼 이어졌던 흐름도 인식하고 있다. 포토존처럼 구성된 공간, 감각적인 음악, 화려한 그래픽. 언뜻 ‘쉽게 즐길 수 있는 예술’ 같지만, 나는 그 안에서 불편함을 느꼈다. 이 모든 게 예술이라기보다, 체험을 상품화하는 시스템 아닌 시스템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와 함께한 그 순간은 달랐다

뮤지엄 헤이의 전시는 그런 나의 부정적 시선에도 불구하고, 전시의 목적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넓은 공간과 적절한 음향, 시각적 자극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전시였고,

8살 아들은 그 속에서 완전히 몰입했다.
눈을 반짝이며 화면을 따라다니고,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이며 자유롭게 반응했다.

그럼 된 것이 아닐까?

그 아이가 르누아르의 이름을 기억하든 못 하든,
그림을 보며 떠오른 감정을 말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그 순간 그의 눈과 귀가 활짝 열렸다면 그 자체로 충분한 예술 경험이었던 것 아닐까?


편견과의 만남, 그리고 변화의 시작

나는 나도 모르게 스스로에게 ‘이래야 예술이다'라는 틀을 씌우고 있었던 건 아닐까.
편견은 특정 장르나 형식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먼저 내 안에서 만들어진 경계였음을 인정하게 된다.

전시 후, 몇 해 전 보았던 인스파이어 오로라 고래쇼가 떠올랐다.
뮤지엄 헤이에 비해 규모는 작았지만, 대중을 정확히 파악하고
‘대놓고 상업적으로 접근한’ 기획력 덕분에 훨씬 인상 깊었다.
오히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모호하게 감싼 전시보다, 그 전시가 더 정직하게 느껴졌던 것도 사실이다.

뮤지엄 헤이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지만,
기획 의도나 전시 방향성에 대한 설명은 부족했고, 향후 어떤 전시가 이어질지도 알기 어려웠다. 자연과 명화를 테마로 잡았던 전시는 ‘인생의 아름다운 순간’이라는 따뜻한 제목과 달리, 동물 3D 스캔 콘텐츠로 마무리되는 지점에서 의문과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예술보다 중요한 건,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을 소중히 기억할 것이다.
둘째 아들과 함께 전시장을 거닐고,
그의 반응을 지켜보며 ‘예술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질문하게 된 시간.

편견 덩어리였던 나는,

예술과 미디어의 만남이 아닌
‘나와 나의 편견’이 만나는 지점을 마주했다.

그리고 그 순간,
미술은 다시 ‘살아 있는 경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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