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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롤라 Nov 24. 2022

아픔이 열어주는 틈

책장을 넘기다 손을 베었다. 왼손이었으면 좋았을까. 하필 오른손 검지손가락이었다. 야속한 페이지가 손끝에 가까운 첫 번째 마디를 단박에 얇게 저며냈다. 불편한 통증이 올라왔다. 밴드로 감아버렸으면 나았을까. 구급상자를 찾아보니 하필이면 밴드가 똑 떨어졌다. 벌어진 상처가 건드려질 때마다 예민해진다. 열려있는 상처가 욱신거린다. 약국에 가려고 길을 나섰다.

입동이 지난 쌀쌀한 날씨에 옷깃을 여민다. 제대로 물들기도 전에 찬바람에 밀려 떨어진 낙엽들이 바닥에 동그라져 엉망으로 굴러간다. 올해는 햇볕이 모자라 단풍이 곱게 들질 못했다. 폭우에 푹 젖었다가 볕에 바싹 타 버린 색 바랜 낙엽뭉치를 밟았다가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발길을 단속한다. 이맘때면 왜인지 모르게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는 기분이 들곤 하는데 아마도 내가 11월에 태어나서인 듯하다.

10월 말이면 벌써 한 해가 끝이라는 느낌이다. 10월은 나에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않는 무감각한 달이다. 가족이나 친구의 기념일도 없고, 새로운 계획을 세우기에도 연말이라는 느낌에 소극적이 된다. 11월이 다가올수록 설렌다. 첫 주에 생일이 있는 나는 그리운 얼굴들과의 재회를 기대하며 가능한 약속들을 잡기 시작한다. 해마다 11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가 세상의 한 주기로 다가온다. 남들보다 두 달 빠르게 한 해를 돌아본다.

6월 정기검진에서 자궁에 이상 소견이 있다는 통지를 받았다. 빨리 산부인과에 가보라는 전화에 알겠다고 대답을 했지만 병원 찾기를 미뤘다. 외면하면 없던 일이 될 거라 여긴 걸까. 두려움의 민낯을 마주하기엔 용기가 모자랐던 걸까. 시간이 가는 동안 여러 증세가 생겼다. 어지럼증이 심해지고, 일주일이면 넉넉히 마쳐야 할 생리가 열흘이 되더니 다음 달은 이주일로 늘어났다. 요실금까지 생겨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때가 되어서야 병원을 찾았다. 몸이 주는 경고를 무시한 대가를 치렀다.

자궁에 뿌리를 내리고 피를 빨아들이는 혹이 있었다. 이를 근종이라 한다. 근종이 커지면서 혈액이 몰려 생리 양이 많아졌다. 피가 밖으로 나가는 양도 많아지고 기간도 길어지니 몸에 빈혈이 와 어지럼증이 심해졌다. 자궁에 혹이 있어 방광을 누르다보니 요실금까지 간 거였다. 진작 병원에 갔으면 이런 일까지는 겪지 않았으려나. 건강을 잃었을 때야 내가 그동안 탈 없이 지낸 것이 행운이었음을 안다.

입원 수속을 하고 수술을 마쳤다. 회복이 필요해 하룻밤 병원에 묵기로 했다. 다인실에 짐을 풀고 나니 침대를 두른 커튼 너머로 같은 병실의 환자들 소리가 들려왔다. 병상에 가만히 누워있자니 아픔을 참는 신음소리도 들리고, 간병하는 가족들의 목소리도 들렸다. 다정한 목소리로 알뜰하게 식구들을 챙기는 전화 통화 소리에는 덩달아 마음이 따스해지기도 했다.

산부인과 병실이다 보니 분만하러 온 환자들도 있었다. 병실 바로 옆이 신생아실이라 신생아들의 울음소리가 터져나오다 잦아들다 했다. 신생아의 울음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사극에서 중요한 인물이 태어날 때의 울음소리를 떠올려보면 된다. 녹음된 듯 정형화된 소음인데 폐부를 찌르는 애처로운 울음이다. 따듯한 장막에서 갑자기 생경한 찬 공기 앞으로 떨어져 허공에 놓인 당혹스러움, 무언가를 부여잡고 어딘가에 기대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녹아있는 외침이다. ‘살려주세요, 안아주세요, 여기가 어딥니까!’ 살아있다는 고통을 자각하는 순간을 소리로 표현하면 아마 신생아의 울음일거다.

어머니의 진통을 통해 끝없는 고통의 세상으로 태어난 아기의 울부짖음을 들으며,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고통의 관문을 통과해야 함을 깨닫는다. 회복을 기다리는 침상에 누워 타인의 신음을 들으며 나의 아픔도 다독인다. 아기 울음이 잦아들면 잘 먹고 잘 자는 중이겠지 싶다. 나도 잘 먹고 자고나면 회복되어 있으리라 기대한다. 11월에 태어난 아기들과 함께 다시 한 해를 시작했다.

아픔이 만들어주는 시간과 생각의 틈 속에서 올해를 되돌아본다. 매년 그랬던 것처럼 아픔만큼 성장이 다녀갔을 한 해다. 고통 없이는 성장이 없고 아픔은 곧 정체성이다. 울면서 태어나 사람이 되고, 진통을 겪고 어머니가 된다. 나에겐 ‘자궁 점막하 평활근종’이라는 아픔이 다녀갔다. 근종을 제거하고 나면 조금 더 건강해 지겠지. 그동안 나의 성장을 만든 작은 굴욕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모든 것이 다 충분한 상태는 얼마나 심심한가. 아무런 일도 시도할 필요가 없을 거다. 검지손가락의 작은 상처를 그냥 두지 않고 챙기듯 소소한 아픔들을 보듬어가며 한 뼘씩 자라나고 싶다. 살아있는 동안 계속 이렇게 나아가며 자라간다. 더 넓어지고 깊어지며 할 수 있는 한 뻗어나가고 싶다. 11월의 낙엽들도 봄이 되면 새 잎으로 다시 태어나리라. 자연의 순환 속 한 틈 안에 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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