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세 살 어린 여동생이 있다. 동생에 대한 첫 기억은 내 나이 다섯 살 때다. 어머니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삼 남매 사진을 자주 찍으셨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키 작은 장롱을 어머니는 ‘단스’라고 불렀는데, 그 위에 우리 셋을 앉혀놓고 포즈를 잡아주셨다. 평상시 단스 위에는 전화기와 스탠드, 헤드폰 등이 놓여 있었다. 새 옷을 입는 날에는 우리가 소품이었다.
나보다 두 살 어린 남동생은 그때 유행하던 ‘호섭이 머리’였다. 바가지를 엎어놓은 듯 가지런히 둥그렇게 자른 머리 모양에 녹색과 보라색이 교차하는 세로 줄무늬 셔츠를 받쳐 입고 연갈색 코르덴 멜빵바지를 입었다. 나는 잔꽃 모양으로 오려 만든 장식이 드문드문 붙어있는 분홍색 스웨터를 입고 청록색 코르덴바지를 입었다. 긴 머리를 뒤로 모아 ‘포니 테일’처럼 높이 묶은 탓에 나이보다 성숙해 보이지만 장난스럽게 찡그린 얼굴이 영락없는 개구쟁이다.
어머니는 두 남매 사이에 돌도 안 된 막내를 끼워 넣으셨다. 아직 혼자 앉지도 못해 등은 벽에 대고, 양쪽에서 언니와 오빠가 받쳐야 했다. 나란히 앉은 모습이 평면 사진으로 남아 앨범에 담겨 있지만 내 기억은 단면이 아니다.
단스 위에 달랑 올라가 가운데 놓여 있던 아가의 옆모습. 흰 얼굴은 보송보송하고 살굿빛 뺨은 동그랗게 부풀었다. 머리카락은 솜털 같았는데 훈기라도 품고 있는 듯 하늘하늘해서 후광 같은 효과가 났다. 조그맣게 숨 들이마셨다 내쉬는 것도 신기하고 입술을 새초롬하게 내밀 때는 입 모양이 꼭 아가 새 부리처럼 귀여웠다. 동생 바보가 될 내 운명은 그때부터였나보다.
내리사랑이란 말이 있다. 손윗사람이 손아랫사람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흔히 자식에게 주는 부모의 사랑을 이른다. 내가 동생에게 준 사랑은 어머니가 나에게 준 사랑이었을까. 나는 어떤 사랑을 받았길래 동생이 그리 예뻤을까. 기억나는 건 없지만 어머니께 들은 이야기는 있다.
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누워만 있던 때였다. 어머니는 아기의 잠자는 숨결이 너무 고요해 몇 번이나 작은 코 밑에 손가락을 대어 보았다. 신생아의 달랑거리는 목, 가냘픈 목숨이 ‘정말 살아있는 게 맞는가. 어쩜 이리 조용한가.’하고 걱정되어 자꾸만 들여다보았다. 잠든 모습을 보고 있으면 빨려 들어갈 듯 뿌듯했다. 그때만은 꼭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고 했다. 동생을 바라보던 내 마음이 그랬다.
나는 무척 순한 아이였는데, 성질을 부리지도 않고, 떼도 쓰지 않는 편이었다. 한 번은 뜨거운 밥솥 옆에 서 있다가 종아리에 화상을 입었는데, 울지도 소리치지도 않고 얼굴만 빨개져 있더란다. 3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그때 생긴 화상 자국이 남아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울거나 화를 내도 들어줄 사람이 없다고 생각해서 그러지 않았나 싶다.
내가 두 살 반 때 남동생이 태어나고 연년생 여동생이 태어났다. 거실, 주방, 욕실, 마당을 오가며 쉴 새 없이 바쁜 어머니에게 돌쟁이 남동생에 더해 갓난쟁이 막내까지 생겼다. 나는 항상 엄마 치맛단을 붙들고 따라다녔다고는 하지만 곧 알게 되었으리라. 어머니는 더 이상 나까지 돌보실 여유는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막내는 울기도 잘하고 화도 잘 냈다. 어릴 적 사진 앨범을 들춰보면 붉어진 얼굴로 울기 직전인 모습이 많다. 빨간색 롱스타킹을 신고 잔꽃무늬(그렇다 꽃무늬는 어머니의 취향이셨다.)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허리춤에 양 주먹을 댄 채 다리를 벌리고 당당하게 서 있는 사진도 있다. 동생의 정수리 쪽 머리카락이 활활 타오르는 듯 분노를 싣고 하늘로 뻗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도 동생처럼 감정 표현을 많이 하면서 자랐으면 어땠을까. 점잖은 아이로 자란 나는 응석을 부리거나 애교를 피운 경험도 없고 그와 비슷한 기억도 없다. 짜증을 부리거나 화를 내는 편도 아니고 속상한 일이 있을 때는 일기에 썼다. 어른이 되어서는 감정적으로 힘들 때마다 술을 마셨다. 술에 취해 혼자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길에다 점점이 눈물을 뿌리면서 터벅터벅 걸으면 뭔가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임신 동안 1년, 모유 수유 기간 2년. 합하여 3년을 술을 끊었다. 알콜 청정 지대가 된 몸은 알콜 분해 효소가 합성을 멈췄는지, 체력이 약해져서인지 맥주캔 한 잔에도 취기가 올라왔다. 술을 좋아했다기보다는 술자리의 들뜬 분위기를 좋아했음을 알았다.
동네 술친구를 구하려 했지만 유치원생 엄마들은 갓난 동생들이 있는 경우가 많아 불가능했다. 아이 취학 후에는 엄마들이 각자 이미지 관리라도 하는 건지 ‘술이나 먹고 다니는’ 엄마들을 한심하게 보며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직장 다닐 때 회식도 참여하지 않던 분들인가 의아했다. 좀 편한 분위기에서 긴장을 푸는 시간도 ‘엄마들’이 하면 눈총받는 호사가 될 줄이야.
최근 대학 친구와 술을 마셨다. 서울역에서 종각으로 이어지는 술자리였다. 대학 다닐 때는 거의 매일 술을 마셨다. 사회학과라 그랬는지 몰라도 나라 걱정할 게 참 많았다. 그 시절 친구를 만나니 절로 흥이 돋아 마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마음은 늙지 않으니까, 잠시 나이를 잊으면 금방 청년이 된다.
하이볼 네 잔째에 벌써 만취했다. 변변치 않은 체력은 취기를 쉽사리 감당하지 못했다. 오랜만에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부터 좀 위태위태하다는 신호라고 할까. 누르고 있던 뭔가가 탁 터져 올라올 분위기를 안다. ‘아, 나 그랬었지.’ 처음 술을 배울 때 알게 되었다. 속에 묻어 놓았는지도 모른 채 묵직한 슬픔을 담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어디서 생겼는지 도무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만취하면 올라오곤 했다. 살면서 많이 풀어놓은 줄 알았는데 아직도 여기 있었구나. 아니면 그새 더 차곡차곡 설움이라도 쌓아놓았을까. 울먹울먹한 것이 갑자기 튀어나올 텐데, 울음이 터져버리면 앞에 앉은 친구가 얼마나 황당할까. 맥락 없는 타인의 눈물처럼 속수무책인 것은 없다. 왜 우냐고 물으면 대답할 말도 없다. 너무 배불러서 더 못 먹겠다고, 이제 집에 가자고 했다. 오후 다섯 시에 만나 저녁 여덟 시 반에 파했다. 더 이상 태울 불길 없는 시시한 밤을 나선다.
어릴 적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있는 어머니의 품 안에는 항상 막냇동생이 앉아있었다. 동생의 별명은 엄마 껌딱지였다. 나는 동생에게 우스갯소리로 그때 이야기를 하곤 했다. “넌 엄마를 참 좋아했어. 항상 엄마 무릎에 앉아있었잖아.” 늘 맞장구치던 동생이 어느 날엔가 다른 말을 했다. “언니는 모르는구나. 엄마 눈길은 항상 언니를 향해 있었어.”
그랬을까? 나는 몰랐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부러워하며 자랐다. 우리 자리가 바뀌었다면 나도 언니를 부러워했을까? 동생 앞에선 어릴 때처럼 으쓱해지고 싶다. 내가 사랑하는 동생에게 언제나 멋진 사람이고 싶기에 잘 살고 싶다. 나에게도 그런 언니가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실은 너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다. 내 이런 마음은 어머니에게서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