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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롤라 Apr 27. 2023

인간에게 내면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까

우리는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

“저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오랜만에 만난 친한 동생 상아에게서 뜻밖의 말을 들었다. 남편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다는 고백이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아이를 통해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 유치원 친구 어머니, 교육 기관 선생님, 학부모회 구성원, 아이 책방 사장님 등 여러 인연이 만들어진다. 자주 얼굴을 보다 보면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생긴다. 같은 사회 제도 안에서는 육아를 둘러싼 생활 모습도 비슷하게 마련이다. 그런 공감대를 기반으로 시댁, 남편, 아이들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는 것도 친해지는 과정이다. 그런데 상아는 뭔가 달랐다.


“저희 시부모님은 정말 좋은 분들이세요. 결혼할 때부터 전 모시고 살 생각이었어요.”, “제 남편은 정말 가정적이에요. 아이들 목욕시키기는 도맡아 해요, 체력이 필요한 일이잖아요. 설거지도 남편이 전담해요, 저는 요리를 하잖아요. 페어플레이해야죠.”, “저희 애들은 잠투정이 없어요. 좀 너무 일찍 일어나긴 해도, 아홉 시만 되면 꿈나라에 간답니다.” 본인은 가정생활의 난감한 부분은 다 피해 간 행운아라는 듯, 말 사이사이에 자부심이 스며 나오곤 했다.


바른생활의 아이콘 같은 사람이 남편 말고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다. “아무한테도 말 못해서 너무 힘들었어요.” 상아는 손수건을 뭉쳐 눈가를 짚었다가 젖지 않은 쪽을 찾아 코를 풀었다. “언니는 안 놀랐어요? 왜 나를 비난하지 않아요?” 나는 별로 충격받지 않았다. 익숙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다. “놀라긴, 이제야 네가 좀 사람같이 보이는걸. 전에 더 무서웠어, 사람이 너무 완벽해서.”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안나라는 러시아 여자가 있는데, 모두가 칭송하는 현숙한 부인이었거든. 그런데 어느 날 운명을 만난 거지. 잔잔한 피를 끓게 하는 남자를. 사실 그런 건 짧은 생에 드문 축복이잖아. 그런데 신문 기사 헤드라인으로 정리하면 ‘유부녀, 바람 나다’일 거고. 그렇게 단순할 리가 없는데, 복잡한 사정이 있는 거지. 너도 이야기해 봐. 어떻게 된 일인지.”


궁지에 몰린 한 가련한 영혼이, 귀를 기울여주는 사람을 만나 숨통이 트였다. 이게 다 톨스토이옹 덕분이다. “도리를 다 하고 살았는데, 나를 나로 봐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며느리, 아내, 엄마만 있었어요. 그런데 이 사람은 달라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뭘 좋아하는지에 관심 있어요. 다들 나한테 뭘 해달라고 하는데 이 사람은 나한테 자꾸 해 주려고만 해. 내 이름 들어본 지가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불러주니까 내 이름이 평범하게 안 들리고 꼭 진짜 내 이름처럼 들려요.”


속까지 사랑으로 채워져 은은하게 빛나는 얼굴, 윤광 쿠션이 따로 필요 없다. 상앗빛 피부를 지녔다던 안나 카레니나가 겹쳐 보인다. 10년을 만난 사이인데 오늘이 가장 예뻐보였다. 가족을 돌보는 역할을 하던 사람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사랑의 힘. 안나도 이런 힘에 끌렸던 걸까.


“그래서 말인데 언니, 부탁이 있어요. 그 사람이 사준 선물들 가족한테는 언니가 사줬다고 했어요. 미안해요. 그리고 그 사람 만나러 갈 때, 언니 만나러 간다고 했거든요. 남편이 혹시 물어보면 그렇다고 해 줄 수 있어요?” 아뿔싸. 타인의 비밀을 안다는 건 대가가 따른다는 걸 잊을 뻔했다. 그럴 수도 있다고 말했다가 공범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어쩌랴. 이미 선을 긋기엔 늦은 것을. “나, 나만 팔지 말고 골고루 팔아.” 버퍼링 걸린 듯 더듬거리며 소극적으로 내 의사를 밝혔다.


사람은 왜 책을 읽어야 할까. 이런 물음이 내겐 조금 의아하다. 몸의 양식을 매일 먹듯 마음의 양식도 매일 먹어야 하는 게 아닐까. 현대인들이 호소하는 만성적인 공허감은 곧 마음이 비어있음을 말한다. 어떻게 하면 풍요로운 내면을 가질 수 있을까. 책을 읽으면 된다. 독서는 곧 사람을 읽는 일이다. 반복되어 다루어지는 주제에는 인간에 대한 진실이 담겨 있다.


우리는 직함으로 사람을 판단한다. 딱히 편견으로 가득 찬 인간이어서가 아니다. 단순화는 효율적이다. 인간의 뇌는 빠르게 사고하기 위해서 분류하고 상황에 대처한다. 직접 경험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사회 통념 이상의 인식을 갖기 어렵다. 성취로 사람을 분류하는 것도 편리한 기준 중 하나다.


직함이 없는 사람을 통칭하는 단어도 있다. 백수.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수입이 없는 사람을 흔히 백수라 통칭한다. 백수라는 단어 속에 개인의 사정이 삭제된다. 단어가 사람보다 커진다. 백수라는 단어의 납작함 속으로 개인성이 사라지고 상투성만 남는다. 누군가 경제력이 없다고 할 때, 우리는 관념 속 백수 이상으로 상대를 대하지 못한다. 타이틀만 남고 개별성은 사라지는 함정이다.


‘제네시스 푸어’라는 신조어를 들었다. 젊은 나이에 외제 차를 사면 ‘카 푸어’로 오해받을 수 있기에, 내실 있는 부자로 보이려고 요즘 젊은이들은 국산 차 중 가장 고급 차인 제네시스를 무리해서 산다고 한다. 직업, 학벌 등 외적인 성취가 없을 때 제네시스 차주라도 되어 존중받고 싶어하는 젊은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이를 비난할 수 있을 자격이 되는 어른이 있다면 누굴까. 이런 사회를 만든 책임에서 그는 자유로울 수 있을까. 신조어 속에 세태가 보인다. 성취로 평가하는 세상 속을 살면서 인간 대접을 받기 위해, 없으면 있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내세울 게 없는 사람을 무가치하게 보는 사회 속에서는 말이다.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서 ‘사회적 고립을 견디지 못한 불륜녀의 죽음’을 보느냐, ‘관능을 선택한 삶을 살아보려 했던 용기 있는 인간’을 보느냐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다. 세상이 원하는 대로 살 것인가 내가 원하는 길을 따라 모험해 볼 것인가. 육체는 영양으로 채우고 영혼은 무엇으로 채울까. 인간의 영혼을 가득 채우는 것은 그의 인간성이다. 인간이 가진 수많은 가능성에 대한 실험 내용이 책 속에 들어있다.


좀비가 등장하는 영화가 전세계적으로 인기다. 좀비는 무엇을 은유하는 것일까. 살아있어도 산 것이 아닌 생활. 몸은 살아 있지만 정신은 죽어있는 현대인의 초상이다. 좀비 같은 삶에는 자신이 원하는 방식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로 끝없이 눈앞에 닥친 삶만을 남들이 원하는 대로 해치워 나가야 하는 비애가 들어있다.


메타버스도 인기다. 여기 아닌 다른 평행우주에 다른 삶의 조건에서 최선을 다한 또 다른 나의 모습이 있다. 지금의 삶을 차마 긍정할 수 없는 우리는 또 다른 가능성의 세계를 꿈꾼다. 여기 아닌 곳, 다른 선택을 한 나는 지금보다는 행복할지 모른다. 그 희망을 포기할 수 없는 간절함이 느껴진다.


예술은 삶의 혼돈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혼돈을 정돈하는 것이라 했다. 세상 만물은 엔트로피의 법칙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삶은 무질서로 가득 차 있다. 독서는 네겐트로피, 혼돈을 질서로 바꾸는 일이다. 혼란스러운 내면은 예술을 접할 때 진정되고 가라앉는다.


책은 멘토의 역할을 한다. 교주는 해답을 제시하고 무조건 따르라 한다. 멘토는 힌트를 주고 격려한다. 멘토를 만났을 때 창의성이 솟아난다. 우리는 책 속에서 인간의 모순을 발견하고, 역설과 양면성을 깨닫는다. 책 속 인물들의 어두운 면을 보면서 내 안의 그것도 자연스러운 것임을 받아들인다.


내 만족만으로 살 수도 없고, 타인의 인정만으로도 살 수 없다. 주관과 객관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세상이 원하는 삶과 내가 원하는 삶 간에 타협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타인의 시선으로 둘러싸인 삶 속에서 객관은 흘러넘친다. 그에 대응하는 주관성을 기르는 데는 마음의 양식만한 것이 없다. 젊은이들이 제네시스 없이도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자부심으로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게 되려면 내면에 자기만의 풍부한 서사를 갖고 있어야 한다.


‘타인을 외모로 판단하지 마라. 하지만 당신은 외모로 판단 당할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작은 의문이 든다. 이 말을 한 사람은 책을 즐겨 읽는 사람이었을까? 삶이 무너질 때마다 책을 읽으며 힘을 얻은 사람으로서 다른 말을 해 본다. ‘인간에게는 외면으로는 결코 다 알 수 없는 저마다의 내면의 삶이 있다.’ 우리는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 글쓰기가 인간에게 내면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기 때문이다.


글을 읽다보면 인간이 두꺼운 책처럼 많은 페이지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자연히 알게 된다. 그러면 더 이상 외면만으로 상대를 대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은 언제나 외면을 초과하는 복잡한 존재다. 상대를 알기 위해서는 일단 이야기를 들어보는 수밖에 없다. 책을 읽는 마음으로 사람을 대한다면 외모는 책 표지에 불과하다. 물론 표지에는 내용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요소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첫인상에 불과하다. 어떤 책인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책을 펼쳐 들어야 한다. 인간이 다른 한 인간에 다가갈 때도 마땅히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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