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롤라 Jun 07. 2023

아직 도착하지 않은 너에게

어린왕자에게 장미처럼


너를 마지막으로 본 지 몇 년이나 지났을까. 작별 인사처럼 남긴 너의 마지막 문자 메세지는 휴대폰을 몇 번 바꾸는 사이에 사라져버렸어. 그때도 지금도 이해하기 어려운 수수께끼 같은 내용을 다시 확인해 보려 해도 이제는 찾을 수가 없네.


너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소는 버스 정류장 앞 횡단보도야. 연남동과 연희동 사이, 너희 집과 우리 집 사이에 있던 정류장에서 둘이 만나기로 약속했었지. 파란불이 켜졌다 다시 꺼지는 걸 몇 번이나 봤는지 셀 수 없을 만큼 너를 기다렸어. 의자를 조금씩 당기며 밤새도록 일몰을 바라보는 어린왕자처럼. 한 시간이 지나도 넌 나타나지 않았지. 휴대폰이 없던 시절, 약속이 어긋나면 다음번에 만났을 때나 이유를 알 수 있었던 때야. 그 뒤로 얼마나 더 많이 너를 기다려야 할지 그때는 몰랐어.


중학생이 되어 너를 처음 만났어. 너는 옆 반의 체육부장이었지. 첫인상은 짧은 커트 머리에 그을린 얼굴, 주근깨도 잘 어울렸어. 자줏빛 폴로 티셔츠를 입고 항상 체육복 바지 차림이었지. 얼굴이 작은만큼 눈이 더 커 보였어.

체육대회에서 오래달리기 경주를 했는데 너는 1등, 나는 2등이었다. 계단 길 꼭대기에 살고 뒷산을 앞마당처럼 넘어 다니던 나는 지구력에 자신이 있었는데, 너를 제칠 수 없어서 의아했거든. 친해진 다음에 너는 말해주었지, 과수원에 살아서 다리가 튼튼해졌다고, 집까지 가려면 과수원을 가로질러 한참 달려야했다고, 그래서 얼굴이 탔다고 했어.


여자 반은 세 반뿐이었어. 나는 체육 선생님을 짝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교에서 체육에 가장 진심이었다. 체육 시간에 열중했던 나와 체육을 잘했던 너는 금방 친해졌어. 수업 시간에 진지한 사람은 서로 알아보는 법이니까. 2학년이 되어 같은 반이 된 우리는 이번에는 한 팀이 되어 체육대회에 나갔지. 에어로빅 대회에 반대표로 나갔는데 너는 우리 팀에 빨강색 체크무늬 멜빵 치마를 입혔어. 활동하기 편하고 모양도 예쁜 옷을 찾느라 이대 앞을 샅샅이 뒤졌다고 했다. 등수로 1등은 못했지만 ‘듀스’ 음악에 동작을 맞췄던 우리는 화제가 되었나봐. 복도 벽에 붙어있던 우리 팀 단체 사진을 누가 떼어갔길래 다시 붙였는데, 그것마저 떼어갔다고 담당 선생님이 볼멘 소리를 했어.


중학교 때는 서로 친한 무리가 달라서 체육 시간에나 어울렸는데, 고등학교에선 3년 내내 같은 반이었지. 너와 나는 프랑스어반, 다른 친구 두 명은 독일어반. 이렇게 네 명이 제일 친하게 지냈어. 너는 달리기만 잘한 게 아니라 노래도 잘했지. 고등학교 때 성악을 시작하고부터는 머리도 기르고, 교정기를 끼고 다니기 시작했어. 굽실굽실하게 손질한 긴 갈색 머리를 드리우고 파스텔톤 가디건을 입고 청바지를 입은 너는 아름다웠다. 누구에게서나 미인 소리를 듣기 시작했어.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 너를 울게 하는 남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은. 애인이라는 이름으로 너의 곁을 스쳐갔던 사람들 말이야. 애인은 헤어지게 마련이지만 친구는 영원하다고 생각했던 나와는 달랐어. 지금 만나고 있는 남자와 평생을 함께 하기라도 할 것처럼 언제나 우선순위는 애인이었지. 그 사람과 사귀는 것은 너인데 우리들까지, 네가 만나는 남자에 대해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검사를 받고 싶은지 자랑을 하고 싶은지 헷갈렸어. 그와 있었던 일 그가 했던 말까지, 하나도 알고 싶지 않고 부럽지도 않은 것들까지 알려주곤 했지.


너는 어쩌면 도와달라는 말을 하고 있었던 걸까. 행복해 보이기보다는 대체로 절실해 보였던 그때 너의 얼굴이 떠올라. 한참 나이가 든 지금에 와서야, 너는 그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 그래서 가장 친한 친구들의 말을 듣고 싶었던 거라고. 남자와 사귀는 법에 대해 뾰족하게 모르는 건 마찬가지였기에, 전혀 도움이 안 되었을 거야. 이제야 아쉽고 미안한 마음이 들어.


함께 정독도서관에 가기로 했는데, 너는 오지 않았어. 너를 기다렸던 그날은 네가 왜 오지 않았었는지 기억이 안 나. 다만 정독도서관에서 함께 공부했던 다른 날이 떠올라. 그날은 시험 기간이었어. 구름이 가득한데도 맑고 밝기만 한 소풍 가기 참 좋은 날씨였어. 너는 초록과 노랑의 가는 선이 교차하는 체크무늬 셔츠를 입고 김치볶음밥을 싸 왔어.

머리띠가 참 잘 어울렸는데, 머리를 풀면 여신 같은 분위기가 나고 하나로 묶으면 단아한 느낌이 났어. 너를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았어. 아름다운 사람을 보면 원래 그런 거잖아. 감탄보다는 감동에 가까운, 흐뭇하고 나까지 괜히 너그러워지는 마음이 드는 그런 거 있잖아.


생일도 나보다 열 달이 빠르고 요리도 제법 잘해서인지 언니 같은 기분이 들었던 걸까. 너는 항상 나를 귀여워했지만, 잘 웃는 만큼 잘 울던 너를 지켜주고 싶은 기분에 잠기곤 했던 건 도리어 나라는 걸 너는 알고 있을까. 우리는 정독도서관 잔디밭에 앉아서 서로 외운 것을 설명해 주기도 하고, 얼만큼 외웠는지 확인해 보기도 했어. 집중력을 높이는 알렉산드리아 호흡법을 익혀본다고, 도서관 잔디밭에 누워서 마인드맵 책에 나오는 데로 따라 해 보다가 동작이 웃겨서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어. 대학 캠퍼스 잔디밭은 대학 생활의 로망이라던데, 왠지 벌써 대학생이 된 기분이 들기도 했어. 대학생 언니보다 성숙해 보이는 너와 함께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라.


하루 종일 공부를 하고 밤늦게 집으로 갔던 그날, 나는 공부를 많이 했다고 부모님께 칭찬받았는데, 다음날 너는 부은 얼굴로 학교에 왔어. 제사 준비를 해야 하는 주말이었는데 도서관으로 줄행랑을 쳤다며, 할아버지께서 대문 밖으로 너를 쫓아냈다나. 문밖으로 너를 밀치고 가방에서 책을 꺼내어 한 권씩 던졌다며, 책으로 맞았다고 했어. 가방까지 후려치고 철문을 쾅 닫고 들어간 할아버지는 ‘계집애가 무슨 공부냐’고 집에 들어올 생각 말라고 하셨다며 너는 웃었어. 시험 기간에 공부를 했다고 혼이 났다니, 나는 놀랐어. 울면서 말할 이야기를 웃으면서 말하는 너에게도. 문중의 자부심이 가득한 할아버지가 장손인 너의 오빠에게는 후하다는 건 나중에 알게 되었지.


너를 마지막으로 만난 건 네가 평택으로 이사를 왔을 때야. 미국육군사관학교를 나온 교포 2세와 결혼을 한 너는 뉴욕에 살다가 남편을 따라 한국에 몇 년 지내러 왔다고 했어. 내가 사는 수원과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게 되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 너를 울게 하지 않고 소중하게 대하는 사람과 살고 있길 바랐어. 오랜만에 만난 너는 그동안 별로 하지 않던 아버지 이야기를 꺼냈어. 지방에서 사업을 하러 내려가 계시던 아버지가 사실은 딴 살림을 차렸다고, 그 집 자식들과 재산 분쟁을 앞두고 있다고 했어. 실망과 배신감에 몸서리가 쳐진다고, 병석에 누워 계신 아버지를 어떻게 용서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어. 네가 화를 내는 건 낯설었어. 꼭 처음 보는 모습처럼 말이야.


아버지 장례식에서 검정색 계량한복을 입은 너의 모습이 내가 본 마지막 모습이야. 지친 너에게 자세한 사정을 물을 수는 없었지만 너는 조금은 홀가분해 보였어. 그날은 마치 작은 동창회 같았다. 중고등학교와 우리 이십 대는 겹쳐 있었고, 그만큼 함께 아는 사람들이 있었어. 작은 무리가 몇 년간의 근황을 나누었지. 아버지 장례식이기만 했던 게 아닌가 봐. 너는 아마 우리 관계도 같이 장례 치르려 했을지도 몰라. 아니면 한국에서의 모든 생활을. 얼마 후에 너는 그곳에 갔던 사람들에게 단체 문자를 보냈어.


‘우리가 만나서 웃고 떠들고, 맛있는 것을 먹고 헤어지고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하나님과 대화를 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해. 그게 모두를 위한 가장 좋은 길인 것 같아. 기도가 끝나면 연락할게, 나를 걱정하지 말고 잘 지내고 있어 줘.’


네가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당황스러웠어. 사이비 단체라도 들어간 걸까? 걱정이 되어 전화를 했더니 넌 받지 않았어. 우려하는 마음을 담아 문자 메세지로 기도원이라도 들어가는 거냐고 물어보았더니 그런 건 아니라며 불쾌해하는 답장이 왔어. 계속 말을 걸어봤지만 내 메시지는 확인되지 않았고 차단당하면 그렇게 된다는 것을 곧 알게되었어.


너는 사람이 싫어진 걸까, 아니면 한국이 싫어진 걸까. 아니면 그냥 늘 하던 대로 너의 우선순위에 집중하기로 한 걸까. 이번엔 종교가 1순위를 차지한 거라고, 그렇게 이해하면 되는걸까. 네가 사랑한 남자들은 다 너를 울렸는데, 하나님 정도 되면 너를 울리지 않으려나. 사람이 아니라 신 정도 된다면 말이야.


이제 나에게 남은 건 대답을 들을 수 없는 수많은 물음표와 배추흰나비 날개처럼 팔랑거리는 하얀 핀을 머리에 꽂은 너의 핼쑥한 마지막 모습뿐이야. 그때 너는 갓 돌이 지난 아들을 하나 키우고 있었는데 그 뒤로 아들을 하나 더 낳고, 그렇게 바라던 딸도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어. 다복하게 지낸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걱정할만한 생활을 하는 건 아니라고 믿고 싶다.


기도가 끝나면 연락하겠다는 말을 약속으로 받아들여도 될까. 칠 년도 전에 보낸 절교 선언이라기에는 석연치 않은 메시지를 말이야. 약속의 무게가 사람마다 다르게 마련이라는 걸 아는 나이가 되었어. 여전히 나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나름의 이유가 있을 거라 여기는 미련한 사람이야. 아니면 나와의 약속쯤은 지키지 않아도 되는 가벼운 것으로 본다는 걸 받아들이기가 싫은 걸지도 몰라. 그래도 어쩌겠어, 나는 모임의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타입의 사람인 걸.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너를 나는 계속 기다리고 있어.


그거 알아? 약속에 늦는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은 오고 있는 사람의 단점을 떠올리기 시작한대. 실망에는 면역이 잘 생기지 않는 법이라서일까. 내가 이런 편지를 쓰는 이유는 책표지에 덕지덕지 붙은 낡은 스티커 같은 너에 대한 의구심을 털어버리고 싶어서야. 내가 생각해 낸 이유야 헛된 추측일 뿐 너에게는 너만의 이유가 있겠지. 우리 관계를 최근 파일로 업데이트하고 싶어. 단지 생활에 바빠 잠시 잊은 거라도 괜찮아. 너의 말을 듣고 싶어. 이 글을 읽고 너를 엉터리로 그린 몹쓸 글을 썼다고 화내며 연락하면 좋겠어. 네가 보고 싶어 그리운 너를 그려봤어. 지구를 떠난 어린왕자를 기다리는 장미꽃처럼 여기서 피어있을게.

작가의 이전글 펀칭 레이스 원피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