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자녀가 5살 때까지 부모에게 갚을 빚은 다 갚았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자녀들이 태어나서 부모에게 준 기쁨이 크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난 전에 백화점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계단 곁에 세워진 유모차 앞에 젊은 엄마가 앉아서 행복한 미소로 아이를 바라보는 그 광경을 잊지 못하고 있다. 너무나 행복하고, 너무나 사랑스럽게, 너무나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엄마는 아이에게 무언가 소곤소곤 말을 하고 있었다. 아이가 그 말을 알아들으려면 몇 년은 더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진 않을 텐데.
역사적 자료를 보면 어린 영아를 유기하거나 죽이는 문화도 있고, 때로는 자기 부모를 죽이고 왕좌를 차지하는 문학작품들도 있다. 영아유기는 일반적으로 공동체의 생존을 위해서 입을 줄여야만 하는 경우나 생존하기에는 약하게 태어난 아이나 때로는 남존여비의 문화의 영향하에 자행되었던 것들이었다. 뭐 이런 해석들에 문화인류학적이라는 라벨이 붙는다. 오늘날은 새로운 형태의 영아유기가 일어나고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딩크족(Double income No kids)이다. 아예 아이를 낳지 않으니 자궁으로부터 원천적으로 아이에게 태어날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다. 그것도 더블 인컴을 위해서라니… 물론 많은 합리적인 이유와 상황이 있을 터이지만 그렇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자신의 자녀와 갈등이 일어날 일은 없지만, 자기의 미래와의 갈등이 예고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이들이 자라나고 있다. 미운 일곱 살의 위기도 없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12세 전후의 사춘기가 되면 부모와의 갈등이 시작된다. 이제 성인으로 자라기 위해서 기지개를 켜는 과정이다. 자기 생각, 자기 취향, 자기 세계관, 자기만의 색깔을 드러내는 몸짓을 하게 되는데, 부모들이 이것을 못마땅해한다. 특히 우리나라는 이때 대학을 위해서 매진을 해야 하는데, 자기 생각과 자기 주관이라니 아주 위험한 시도로밖에 비치지 않는다. 부모로서는 자식이 몸짓 하나, 생각 한 줌, 옷 하나도 자기의 뜻을 따라주어야 한다. 그래야만이 부모와 자식이 공감하는 미래로 진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에 부모와 자식의 공공연한 계약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계약이 곧 부모 자식간의 평안과 앞으로의 좋은 관계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어려서부터 강요한 가스라이팅으로 이루어진 계약관계를 통해서 목적한 바가 성취되면 자녀는 이미 몸과 마음이 장성한 성인이 되어 더 이상 부모의 틀 안에서 지내기를 원치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자식들의 생각일 뿐, 부모는 여전히 자식들을 품 안에 품고 있다. 취직과 결혼까지 그리고 다시 손자 손녀들의 미래의 안녕을 위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끊임없이 사랑의 끈을 늦추지 않는다. 차라리 가난하거나 무심한 부모라면 자식들에게 한없는 자유를 주기라도 할 텐데. 그러면 반은 성공하고 반은 안 되는 경우라도 나올렀는지 모른다.
미국교포와 대화를 나누던 중에 새로운 생각의 틀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미국은 한국보다 100배나 면적이 크다.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거의 다 대부분 부모의 품을 떠난다고 한다. 문화적인 영향도 있겠지만, 사실은 주(the state)내의 대학을 다니더라도 이 주가 우리나라의 몇 배나 큰 경우가 많고, 살던 주를 벗어나면 아예 다른 나라처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 격리의 감정이 우리나라에서 아들들을 군대에 보내는 것보다 더 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물론 표본은 다양할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에서는 자녀들이 대학을 가게 되면 자식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부모로부터 완전한 독립체가 되는 것이다. 1년에 한 번도 못 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은행에서 돈을 빌려서 등록금을 내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주택임대료 내고, 생활비 벌어서 독립하는 것이다. 거리가 가깝지도 않고, 오고 가는 거리도 만만치 않고, 비용은 또 어떻고… 차 없으면 살 수 없으니 이것도 매월 일정 비용을 갚아 나가야 하는데…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부모에게 손을 빌리지 않는다. 주변이 다 그러니 어쩔 수 없다.
부모들은 자식들을 자기 삶의 연장선상으로 보고 있으며, 또한 자신의 꿈을 이뤄줄 히어로로 보는 경우들이 있는듯하다. 물론 표현은 ‘다 너를 위한 것이다’라고 하지만 사실 이 말은 자식이 부모의 뜻대로 성공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는 말이지 만약에 성공한 부모밑에 성공하지 못한 자식이 있다면 이런 얘기 못할 것이다. 부모가 원하는 수준의 삶을 살지 못하는 자식을 사랑으로 안아주고 자식의 꿈을 응원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어려서부터 부모의 인정과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억눌린 열등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많은 성인아기들이 주변에서 적지는 않다. 반대로 허우대는 멀쩡한데 부모의 우산아래서 누리는 그 많은 혜택들 때문에 자신의 왕권을 부모에게 넘겨주고 사는 성인아이들 역시 주변에 적지는 않다.
성인아이를 길러내는 부모들의 단 한 가지 목적은 자기가 끝까지 왕권을 가지고 말 잘 듣는 백성을 다루듯이 자식을 컨트롤하겠다는 것이다. 좋은 학원을 보내고, 원하는 대학을 보내고, 자식의 결혼상대도 마치 자기가 같이 살 사람을 찾듯이, 집을 해주고, 용돈도 주고, 사업자금도 주고… 가지고 있는 재산을 가지고 끊임없이 자식에게 주면서 끝까지 지배권을 연장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사랑이겠지. 본인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다. 자기의 왕권을 생애동안 누리고, 자식을 통해서 자기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가스라이팅하는 부모들이 언젠가부터는 자식에게 오히려 ‘no’라고 말하지 못하는 관계로 나아가는 경우들이 많아지는 현실이다. 자식들이 이 메커니즘을 이해할 때쯤 되면 지혜로운 기생충으로 충실하게 처신을 하게 되지만, 언젠가 자기도 자기의 왕국을 이루려는 발톱을 속에는 감추고 있다. 그리고 부모가 자기에게 줄 것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에 계약은 드디어 깨지게 되는 것이다.
고등학교 졸업하면 집을 나가든지 아니면 집에 있으려면 관리비나 등록금이나 용돈등은 자기가 알아서 하라는 원칙을 미리 정해놓고 어려서부터 교육을 시켜야 한다. 그런다고 죽지 않는다. 성인아기가 돼서 버리면 진짜 반역이 일어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미 기생충의 습성에 빠져 있기 때문에 갑자기 영양분 공급이 끊어지면 숙주를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인아기가 아니라 성인이 되는 고등학교 졸업 즈음에 자식을 마음에서 내보내야 한다. 아마 우리나라 문화권에서 이러면 미친 부모라는 소리를 들을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적당히 보호는 해주되 간섭은 하지 말고, 세상의 격렬한 파도에 찢겨 돌아온 자식에게 피난처는 제공하되 거주지를 주어서는 안 된다. 월세든, 원룸이든, 공동주택이든 자기들이 알아서 하도록 하면 된다. 죽지는 않는다.
자식이 성인이 되면서 스스로 세상과 맞서도록 하면 훗날 부모와 전우와 같은 동지애가 생길 것이지만, 성인아이로 끝까지 데리고 살면서 이것저것 다 공급해 주면 그 자식과는 왕관을 두고 멱살 잡고 싸우는 원수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하자. 언젠가 내가 타고 가던 택시 기사님 말씀대로 큰 아들 집 해주고, 곧 장가들 둘째 아들을 위해서도 집을 해 주려고 열심히 일한다는 얘기를 듣고 문화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