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풀어쓰기
어렸을 때 따돌림을 당한 후유증일까.
그렇게 형성된 성격에 따른 결과인 걸까.
마음의 상처는 명확한 이유를 찾기 어렵다고 한다.
위로가 되는 말이지만, 원인을 모르면 막연함이 두렵게 느껴진다.
사람들과의 만남을 즐기며,
관계 속 갈등을 중재하고
다수가 만족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게 좋다.
관계를 중시하며 조화로움을 높은 가치로 둔다.
하지만, 때론 공든 탑도 무너지기 마련이다.
때론 공들여 쌓은 관계도 무너지기 마련이다.
고대 로마에서는 소속 집단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은
사형에 가까울 정도로 가장 큰 형벌이었다.
물이나 불 등 다 함께 사용하는 자원으로부터 멀어지면
죽음과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계곡물을 마실 수 있다.
나무의 마찰이나 부싯돌로 불을 피운다.
다만, '소외'라는 관계로부터의 멀어짐은 무엇으로도 대체 불가능하다.
인간관계를 소중하게 여기다,
관계의 노예가 되어버렸다.
마치 값비싼 물건을 애지중지하다, 자신을 챙기지 않는 듯한,
다수의 행복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공산주의적 사랑.
그렇다면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할까.
영원히 누군가를 위해
불필요한 희생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걸까.
절대 그렇지 않다.
하물며, 그렇다 하더라도 그래서는 안된다.
'나'라는 사람이 없다면 집단은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필요가 존재할까.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이들이
모두 나를 외면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오해로써 빚어진 상황이라면
내 잘못이 없다면.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누명을 벗어낼 시간이 주어지겠지.
안 주어진다면
그렇지 못하게 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러한 이성적 생각들은 일단락하고,
앞서 말한 무형의 상처에 집중해 보자.
'관계'라는 단어에 많은 사랑을 둔 내게
그 '관계'가 주는 상처는 무엇보다 크다.
갑론을박 끝에 누구의 잘못도 아닌 상황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 '나'는 상처받고 있다.
흩어질 듯이 몰아치는 바람 속에서
중심을 견고히 잡고 있는 바위일지라도 생채기가 나듯이.
어느새 휴대폰을 바라보는 것도 두렵다.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공포.
관계에 대한 공포심이 점점 커진다.
모르겠다는 말을 최근에는 안다, 혹은 내가 맞다고 생각한다.
통제에 대한 욕구의 반증.
그렇다면 이 욕구에 대해 알아차리고 낮추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건 어떻게 하는 거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꼭 뭔가를 해야 하는 건지?
사실, 모르겠다.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도.
더는 어렸을 때와 같은 불안한 상태가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이제 안정감을 얻을 거라고 생각했다.
튼튼한 돌다리인 줄 알았건만
밑은 텅 빈 연꽃이었다.
결국 또 물에 빠졌다.
그래도 지금껏 지나온 돌다리들이 있으니까.
연꽃뿐이었어도, 그걸 엮어 밧줄로 만들 수 있으니까.
그렇게 다시 하면 될 테니까, 괜찮다.
괜찮다는 말을 습관적으로 뱉는다.
괜찮지도 않으면서.
근원적 마음의 번아웃
일과 공부에만 번아웃이 오는 게 아닌
우울감에 견디다 지치면 마음의 번아웃이 온다.
어제와 오늘의 나는 별다를 바가 없는데
이토록 나 자신이 비루하게 느껴지다니.
마침표를 찍을 즈음에
희망을 찾는다면 좋겠지만,
같은 고통이 반복되면 어떡하지
혼란스럽다.
그 어떤 책과 강연에도 답을 알 수 없다.
지금껏 살아온 과거에도 답을 얻지 못했다.
맞닥뜨려봐야 알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