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박 2일형 답사
1. 검은 황금의 도시, 태백(太白)
『태백』시는 강원도 최남단에 위치해 있으며, 동으로는 강원도 삼척시, 남으로는 경상북도 봉화군, 서로는 강원도 영월군과 정선군과 접해있다. 우리가 태백보다 더 잘 알고 있는 태백산국립공원으로도 유명하다. 또한 우리나라 4대강 중 2개인 한강과 낙동강이 이곳에서 발원하고 있다.
먼저 수도권 거주민의 주요 식수원인 한강의 발원지는 태백시 대덕산에 있는 검룡소로, 총 길이가 514km이다. ‘발원지’란 강의 물줄기가 처음에 생성된 지점을 말한다. 하루 2천 톤의 지하수가 솟아나고 있으며 수온이 사계절 내내 섭씨 9도를 벗어나지 않는다. 즉 한겨울에도 얼어붙지 않고 여름철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 1억 5천만 년 전부터 있었던 태고(太古)의 자연을 그대로 품고 있다.
검룡소에서 솟은 물은 땅속으로 스며들었다가 밖으로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정선의 골지천과 조양강으로 흘러든 뒤, 영월의 동강을 지나고 단양, 충주, 여주를 거쳐 남한강이 된다. 양평 두물머리에 이르면 금강산에서 흘러내려온 북한강과 만나 한강으로 이름이 바뀐다. 검룡소에서 솟아난 물이 한강이 되기까지 무려 514km에 이르는 대장정이다.
낙동강의 발원지는 태백시 황지동에 있는 황지연못인데 태백시 도심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예전에는 마을 전체가 큰 연못이었던 것으로 전해지나 지금의 황지연못은 어느 집 정원의 작은 연못처럼 둘레가 100m 정도 되는 규모이다. 하지만 하루에 샘솟는 물의 양이 무려 5천 톤에 이르니 결코 작은 연못이라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연못의 수온이 연중 섭씨 9~11도를 유지하고 큰 홍수나 가뭄이 닥쳐도 수량이 넘치거나 줄어든 적이 없다. 이 물은 태백시의 구문소를 통과하고 경상도 땅에 이르러 낙동강이 된다. 굽이굽이 1300리 길을 쉬지 않고 흐른다.
황지동은 황지(黃池)라는 연못 때문에 지어진 이름으로, 우리나라 장자못 전설의 원형이 황지못 이야기다. 황지연못을 찾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전설을 들려주는 동상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게 되는데 그 전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 마을에 살던 황 부자가 어느 날 탁발을 하러 온 스님에게 쌀 대신 외양간의 쇠똥을 던졌다. 방아를 찧고 있던 황 부자의 며느리가 이를 보고 쌀 한 바가지를 스님의 바랑에 몰래 넣어주었다. 스님이 그 보답으로 며느리를 재앙에서 구해주고자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말을 전한다. 뇌성벽력이 치는 순간 황 부자의 집터는 땅으로 꺼지고 며느리는 뒤를 돌아보고 만다. 그 순간, 집터는 연못이 변하고 며느리는 돌이 되어버렸다.
전설을 간직한 황지연못은 태백 시민들의 아늑한 휴식처이자 수많은 여행객들을 불러 모으는 태백의 대표 관광지가 되었다.
2. 하얀 도시, 태백
태백의 기후는 한마디로 ‘시원한 여름과 하얀 겨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보통 여름이 7월에 시작되며 겨울이 거의 5개월 정도 지속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평균 기온이 낮은 지역이다. 대략 11월부터 3월까지 5개월 동안은 겨울이라 할 수 있다. 여름 역시 7월과 8월, 2개월 정도로 매우 짧다.
한겨울 최저 기온 자체는 철원이나 춘천, 인제 등에 비해 밀리지만 그래도 사시사철 꾸준히 시원하고 춥다는 점이 다른 강원도 지역과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철원이나 춘천처럼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추위로 유명한 도시도 한여름에는 더위가 기승을 부리지만, 태백은 그렇지 한다. 여름에는 영국과 비슷한 기온을 보인다. 해발 고도가 700m 정도로 상당히 높은 고도에 자리잡고 있어 전국 시 가운데 단연 압도적으로 높은 고도에 위치하여 있다.
심지어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기록적인 온도를 보이면서 폭염이 찾아온 2018년 8월에도 아침 기온 20℃에 낮 최고 기온마저 27℃에 그치는 기온 분포를 보였다. 참고로 바로 옆 동네 영서 지방인 춘천이 40.6℃, 홍천이 41.0℃를 기록했으며 서울까지 39.6℃를 찍었을 정도였지만 태백은 그렇지 않았다.
겨울에는 눈의 도시로 유명하여 태백산 눈축제가 매년 1~2월에 개최된다. 매년 폭설 특보에 빠지지 않고 나올만큼 눈이 기본 20~30cm는 족히 내린다. 그래서 초겨울이 되면 사람들은 알아서 스노우 타이어로 바꾸는 것이 연례 행사일 정도이지만 이곳도 한반도 본토 대부분이 그렇듯 여름에는 비가 오지 않으면 물 부족에 시달리는 지역이다.
3. 태백 8경
각 지역마다 명승지와 그 지역마의 독특한 자연현상 등을 관광지로 개발하여 운여하고 있는데 태백시 역시 태백 8경을 자랑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제1경 天, 태백산 천제단
태백산 꼭대기에 있는 둘레 27m, 폭 8m 높이 3m의 원형제단이다. 녹니편마암의 자연석으로 쌓여져 있는데 위쪽은 원형이고 아래쪽은 사각형이다. 단군조선시대 구을 임금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이 제단은 단기 4324년 (서기1991년)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로 지정 되었으며, 강원도민 체육대회의 성화 채화장소이기도 하다.
제2경 地, 고생대의 보고 『구문소』
낙동강 상류의 황지천의 물이 이 소에 머물렀다가 가는 곳으로 이 소는 석회암이 용해되어 생성된 것으로 높이 20~30m, 넓이 30m로 약 1억 5천만년에서 3억년전 사이에 생성되었다고 한다. 마당소, 자개문, 용소, 삼형제폭포, 여울목, 통소, 닭벼슬바위, 용천등으로 불리는 구문팔경이 있으며, 천연기념물 제417호로 지정된 구문소의 고환경 및 침식지형은 고생대 지질탐방로와 화석수목전시관을 갖추고 있어 자연교육학습장으로 최적지이다 .
제3경 江, 양대 강 발원지와 삼수령
태백시내에서 35번국도를 따라 삼척으로 가다보면 해발 920m의 재를 만나게 되는데 이곳은 한강, 낙동강, 오십천의 분수령이된다. 이곳의 빗방울이 한강을 따라 황해로, 낙동강을 따라 남해로, 오십천을 따라 동해로 흘러가도록하는 분수령이라 하여 삼수령(三水嶺)으로 불리운다 정상에는 조형물과 정자각이 있다. 삼수령을 피재라고도 하는데 삼척 지방 사람들이 황지지역을 "이상향"이라하여 난리를 피해 이곳으로 넘어 왔기에 피해오는 고개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한다.
제4경 風, 매봉산 바람의 언덕
해발 1,330m의 높은 산인 매봉산은, 일명 천의봉으로도 부르는 산으로 남한강과 낙동강의 근원이 되는 산이다. 하늘 봉우리라는 뜻을 가진 산으로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의 분기점을 이루는 산이어서 그 의미가 깊은 산이라 할 수 있다.
제5경 雪, 함백산의 절경
함백산은 정상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에는 주목과 고사목 군락이 있고 시호등 약초가 많다 삼국유사에 보면 함백산을 묘고산이라고 기록하였는데 수미산과 같은 뜻으로 대산이며 신산으로여겨 본적암·심적암·묘적암·은적암 등의 절이 있었다고 한다.
제6경 花, 대덕산, 금대봉의 야생화
태백시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산으로 금대봉에서 북으로 뻗어가는 첫머리에 육산을 이루고 있는 것이 대덕산으로 해발 1,307m이다. 산 정상부근에 나무가 별로 없고 갈대와 같은 풀들로 뒤덮여 천연초지를 이루고 있으며, 산 정상에 고려유신이 세운 사직단이 있었다는 전설이 있다.
제7경 炭, 철암역두선탄장
1935년 일제 강점기 총독부에서 최초로 시작한 남한 최대의 무연탄광인 삼척탄광을 개발하였으며 해방후 국가 경제발전 차원에서 국영기업으로 출발한 대한석탄공사 산하 장성광업소에서 설치하여 현재까지 가동중인 시설이다. 탄광에서 채굴된 원탄을 수요자에게 맞게 선별하고 가공 처리하는 선탄시설로서 60 ~ 70년대 국가 에너지 산업에 중추적인 역할을 해 온 우리나라 근대산업사의 상징적인 중요 시설이다.
제8경 村, 삼수동 산촌마을
우리나라 예언서 『정감록』의 피난지로 알려진 곳으로 한 때는 이북 사람들이 이곳으로 집단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해서 살다가 해방전후 다른 곳으로 떠나 빈터로 남아 있었는데 1988년부터 광동땜 수몰지역인 숙암리, 광동리, 조탄리 사람들 37가구가 집단이주하여 현재의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4. 민족의 영산(靈山), 태백산(太白山)
태백산은 1989년 5월 13일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2016년 우리나라 22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전체면적은 70.052㎢이며 천제단이 있는 영봉(1,560m)을 중심으로 북쪽에 장군봉(1,567m) 동쪽에 문수봉(1,517m), 영봉과 문수봉 사이의 부쇠봉(1,546m) 등으로 이뤄져 있으며, 최고봉은 함백산(1,572m)이다.
태백산은 수천 년간 제천의식을 지내던 천제단과 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 만항재, 장군봉 주변의 주목 군락지, 세계 최남단 열목어 서식지인 백천계곡 등 다양하고 뛰어난 생태경관을 보유하고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의 오악(五岳) 중 북악(北岳)이라 신라 왕실이 제사를 올리는 대상이었다. 통일신라의 오악은 방향으로 보는데, 중앙은 지금의 대구 팔공산인 ‘부악’이고, 동악은 토함산, 서악은 계룡산, 남악은 지리산, 북악은 태백산이다.
태백산은 예로부터 신령한 산으로 여겨져 왔기에 여러 사찰과 토속신앙의 기도처가 있으며, 여기서 만들어진 전설이나 설화가 많이 전해지고 있다.
먼저 고려시대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자장율사에 얽힌 다음과 같은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자장이 태백산 갈반지에서 문수보살을 만나기로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노거사(老居士) 한 사람이 누더기 가사를 입고 칡삼태기에 죽은 개 한 마리를 담아들고 와서는 자장을 보러 왔다고 하였다. 그러자 자장이 그 행색을 보고 미친 사람이라 하여 내쫓으니 노거사가 말하기를, “자장이 해탈의 경지에 든 사람인 줄 알고 찾아왔는데 아직도 그 경지에 들지 못하였구나. 사람을 잘못보고 왔으니 돌아가겠다.” 하고 삼태기를 땅에 내려놓으니 죽은 개가 사자가 되어 이를 타고 빛을 내면서 가버렸다. 자장이 이 말을 듣고 빛을 좇아 남령(南靈)에까지 올라갔으나 끝내 만나지 못하였다고 한다.
태백산은 이름이 있는 산이기에 당대 명사들의 시문이 많으나 오늘 전하고 있는 것은 거의가 한문으로 된 한시가 많고 개화 이후의 국문으로 된 시문은 거의 없다.
『삼척진주지』의 척주부에는 다음과 같이 전하며 태백산이 신라, 고려 때부터 토속신앙의 중심지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何蒼蒼兮太白 堂其上而天王 自羅麗而崇信 儘巫覡之都會 瞻彼東兮大朴 睠其南兮萃覺
“푸르고 푸른데 어찌 태백이라 하였던가. 그 위에 당집을 짓고 천왕이라 이름 하였네. 신라, 고려 때부터 숭상하여 믿었고, 모두 무당과 박수의 도회로세. 저 동쪽을 바라보니 팽나무도 많고, 저 남쪽을 돌아보니 크고 높은 언덕도 많네”
고려 시대의 안축(安軸)은 태백산을 소재로 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直過長空入紫烟 始知登了在高巓 一丸白日低頭上 四面群山落眼前 身逐飛雲疑駕鶴 路懸危磴似梯天 雨餘萬壑奔流漲 愁度縈洄五十川
“길다란 동천을 지나 자연에 들어가니, 비로소 높은 꼭대기에 오른 줄 알았노라. 둥근 해는 머리 위에 낮아진 듯, 사방의 여러 산이 눈앞에 떨어졌네. 몸이 나는 구름을 따르니 학을 탔는가 의심되고, 길은 높은 비탈에 달려 하늘에 오르는 듯하구나. 비온 뒤 일만 골짜기에 물이 넘쳐 흐르는데, 구불구불한 오십천을 건널 일이 근심된다”
또한 조선 시대의 김시습(金時習)은 「망태백산 望太白山」이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태백산을 묘사하였다.
西望遙遙太白山 碧尖高揷聳雲間 人言嶽頂神靈異 辨得乾坤造化關
“멀고 아득한 태백산을 서쪽에서 바라보니, 기암괴석이 구름 사이에 솟아 있네. 사람들은 산마루 신령님의 영험이라 말하는데, 분명코 천지의 조화로세.”
태백산은 육안으로 보았을 때, 금강산이나 설악산처럼 기암괴석으로 되어 있는 경승(景勝)이 없어 시문에 묘사된 모습에서 금강산과 같은 정취는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산이 높고 주위에 높은 봉우리들이 서로 이어져 능선을 이루고 있으므로 신선의 세계와 같은 느낌을 주어 시문에도 신선의 모습과 영스러움이 자주 도입되고 있는데, 이로 인해 태백산이 신라시대 이후로 제사가 올려지는 오래된 신앙처였음을 알 수 잇다.
5. 태백산 단종비각(端宗碑閣)
태백산 정상에서 망경사쪽으로 가다보면, 조선 6대왕 단종의 비각을 볼 수 있다. 안내표지판에 나온 그림에는 백마를 탄 단종과 그 앞에 머루바구니를 들고 있는 추충신(秋忠臣)이 같이 그려져 있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온다.
추충신의 이름은 익한(益漢)으로 한성부윤을 지냈던 사람이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어 외롭게 관풍헌(觀風軒)에 있을 때 산머루를 따다가 진상하고 자주 문안을 드렸다.그날도 예외 없이 산머루를 따 가지고 단종에게 진상하려고 영월부중으로 내려오는 길인데, 연하리(蓮下里) 계사폭포에 이르렀을 때, 곤룡포에 익선관(翼蟬冠)으로 정장을 하고 백마를 타고 유유히 태백산 쪽으로 향하여 가는 단종을 만나게 되었다.
추익한이 단종에게 “대왕마마, 어디로 행차하시나이까?” 하니, “내가 태백산으로 가는 길이오.”라고 말한 뒤 홀연히 단종은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자기 눈을 의심하면서 급히 부중에 들어와 단종의 거소에 가보니 단종은 이미 변을 당한 뒤였다. 추익한은 다시 단종을 만났던 계사동까지 와서 단종을 따라 죽었다. 이후 추익한도 단종과 함께 태백산신령이 되었다.
또한, 신령이 된 충신이 있었는데, 그는 충의공(忠毅公) 엄흥도(嚴興道)이다. 단종이 변사하였을 때 세조가 두려워 누구 하나 돌보지 않자 당시 호장(戶長)이었던 그는 즉시 서강(西江)과 동강이 합류하는 곳으로 달려가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미리 준비한 관에 봉안하여 영월군 서북쪽 동을지산(冬乙旨山)에 암장하고 자취를 감추었다.
흥미로운 점은 태백산 일대의 서낭당 뒤에는 가시가 있는 엄나무가 서낭목으로 서 있는 곳이 많다. 엄충신은 죽어서까지 단종을 보필하기 위하여 그 충절의 넋이 사후에 엄나무가 되어 단종이 계신 서낭당을 지키고 있다고 믿고 있다.
정선군 여량리에도 노산군을 모신 서낭당이 있다. 청령포(淸泠浦)에 유배된 단종이 심심하여 연에 글을 써서 띄웠는데 그것이 바로 여량리에 있는 느티나무에 걸렸다. 연을 내려보니 단종의 친필이 있는지라, 그 걸린 나무를 단종의 신체로 신격화하여 서낭당을 지었다. 그러나 모시고 난 그 뒤부터 여량리 일대에 괴질이 퍼져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러던 중 한 도사가 지나가다가
“이 마을은 저 서낭 때문에 화를 당하는 것이다. 노산군으로 강등시킨 것을 단종으로 모셨기 때문에 그 죄로 괴질이 퍼진 것이니, 도로 노산군지신으로 제사를 지내면 동네가 편안할 것이다.”
라고 충고하여 그 말대로 하니 동네가 무사태평하였다고 한다.
6. 석탄 산업 합리화 정책
태백은 한때 석탄 산업의 메카라 불릴 정도로 번성하였으나 지금은 석탄 산업의 쇠퇴와 함께 도시의 성장도 주춤한 편이다. 검은 황금이라고 불리던 석탄은 자원 빈국인 우리나라에서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되었고, 국민 생활의 기초자원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석탄으로 인해 땔감으로 쓰이던 나무의 소비가 줄어 오늘날 우리의 국토가 푸르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고도성장기의 에너지 정책은 주탄종유(主炭從油)라는 글자로 설명할 수 있었다. 즉 연탄을 비롯한 석탄을 주 에너지원으로 하고 석유를 보조 에너지원으로 하는 정책을 유지해 왔다. 석유는 외국으로부터 비싸게 수입해야 했으나, 석탄은 탄광도 적지 않고 매장량도 자급자족을 할 정도로 많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 당시에는 산림의 황폐화가 심각한 문제였기 때문에 연탄으로 대체하면 나무를 베는 양이 줄어들어 녹화사업에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정부는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맞춰 국민의 에너지인 석탄 채굴을 독려하는 정책을 추진하여 1988년이 되면 1963년의 세 배 가까운 채굴량을 기록하게 되었다. 단순히 채굴만 늘어난 것이 아니라 석탄의 수송에도 신경을 썼는데, 일명 산업선으로 불리는 중앙선, 영동선, 태백선, 문경선, 가은선 등의 신설과 선로 개량, 전철화 등의 개량이 이 시기에 이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권에서는 늘 겨울만 되면 연탄 대란이 나곤 할 정도였으니 정부가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석탄을 채굴하는 광부들은 힘들고 위험한 일을 매일 해야 했으며 탄광촌의 생활 인프라도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광부들의 급여는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북, 고한, 태백 지역에서는 속된 말로 지나가던 개도 만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고 이야기를 할 정도로 해당 지역의 경제도 활성화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부터 국제유가가 안정되고 국내산 무연탄의 가격경쟁력이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더해 국민소득의 증가로 청정연료의 수요가 증가하였으며, 대단지 아파트의 건설이 시작되는 등 사회구조적 변화가 발생하였다. 이에 에너지 정책이 석유와 천연가스를 주된 연료로 사용하는 주유종탄(主油從炭)으로 전환되게 되었다. 석탄에 비해 석유는 취급도 쉽고 열량도 높았으며 환경 오염도 적으며 일산화탄소 중독 위험도 한결 낮았다. 이미 그 전부터 가정에서는 취사용으로 연탄 대신 석유풍로를 더욱 선호하여 연탄은 난방 및 산업용 연료로서 역할이 점차 줄고 있었으며, 실제로 1986년부터 무연탄의 수요가 처음으로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사회구조적 변화의 분위기 속에서 정부는 이른바 석탄 산업 합리화 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비경제적인 탄광을 폐광하고 경제성 있는 탄광을 건전 육성하겠다는 취지에서 1989년 석탄 산업 합리화가 시행되었지만, 대체산업이 준비되지 않은 탄광촌에서는 갑작스런 시행으로 인한 혼란을 겪었다. 1988년 전국 347개에 이르던 광업소가 8년 후인 1996년에는 11개로 급감한다. 탄광 노동자는 68,500명에서 2000년에 들어서는 8,200명으로 급감했다. 이 여파로 우리나라의 대표적 탄광촌인 강원도의 태백, 삼척, 정선, 영월 등은 도시공동체가 붕괴되는 지경에 이른다.
우리나라 최대 석탄 산지인 강원도의 상황을 보면 1989년부터 1996년까지 7년 사이에 171개 탄광 중 97%에 달하는 166개가 폐광된다. 1988년 강원도의 탄광 노동자는 43,831명이었는데, 1996년에는 9,280명으로 급감하게 된다.
석탄 산업의 모델이 되었던 독일·영국·프랑스·일본 등에 비해 우리나라의 석탄 산업 정책은 갑작스럽게 추진되면서 아직 준비되지 않은 탄광촌의 몰락을 가속화시켰다. 석탄 산업 선진국처럼 30∼40년에 걸쳐 시행했다면 합리화의 충격을 줄일 수 있었다는 비판이 나온 것은 그 때문이다.
7. 하늘아래 첫 기차역, 추전역
태백 추전역은 남한 지역에서 가장 높은 역이다. 이 역과 고한역 사이에는 태백선에서 가장 긴 길이 4,505m의 정암터널이 있다. 또한 전국에서 가장 높은 역은 추전역이지만, 가장 높은 구간은 정암터널 내의 한 지점이다. 실제로 지도의 등고선을 참고하면, 정암터널 입구는 추전역보다 약간 더 높은 해발 870m 내외에 위치하고 있다.
태백이 ‘검은 진주의 도시’ 였던 시절, 조금이라도 빨리, 그리고 많은 석탄을 실어 나르기 위해 태백산맥을 관통하는 선로 건설이 필요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역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역’ 추전역이다. 역의 높이는 해발 855m로 웬만한 산들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이다. 이러한 해발고도로 인해 추전역은 한여름에도 난로를 피웠다.
추전(杻田)이란 이름은 옛날부터 싸리밭골로 불렸던 것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추전역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한국에서 제일 높은 역, 해발 855m’라고 적힌 표지석이다.
자동차로 추전역을 오르면 그 높이가 더욱 실감난다. 구불구불 아찔한 경사를 몇 번이나 견뎌야 하늘 아래 첫 기차역에 이를 수 있다. 추전역에서 근무한 역무원들 사이에선 “한여름에도 난로를 피운다”, “한여름에도 선풍기가 필요 없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눈도 가장 많이 내리는 역이어서 역무실 앞마당에 적설량을 재는 나무기둥이 세워져 있다. 그 기둥 끝에 적힌 숫자가 1m인 것만 보아도 추전역의 겨울이 얼마나 혹독할지 짐작할 수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태백선을 오가는 모든 비둘기호는 물론 통일호와 무궁화호도 한두 대씩 추전역에 멈춰 섰다. 그러나 석탄산업이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1995년, 마침내 여객취급이 중지됐다. 화물열차만 오가는 썰렁한 기차역이 다시 활기를 얻게 된 건 눈이 많이 내리는 태백선의 특징을 활용한 환상선 눈꽃열차가 운행되면서부터. 하얀 눈에 파묻힌 기차역이 빚어내는 낭만적인 설경에 인적 드물었던 기차역은 색다른 겨울여행지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8.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은 태조 이성계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이금, 472년 간의 역사를 편찬한 대역사서이다. 이미 1973년 국보 151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대한제국 시기 고종실록과 순종실록도 조선왕조실록의 일부로 편찬되었으나, 이 실록을 편찬할 때는 일제강점기였으므로 전통 방식을 100% 따라서 편찬하지 않았고, 일제가 정략적 의도로 왜곡한 부분이 있어 문화재청에서는 별도로 취급한다. 같은 이유로 세계기록유산 및 국보 지정에서도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빠져 있다.
북한도 적상산 사고본을 보유하고 있는데, 북한에서는 '조선봉건왕조실록', '리조실록' 등으로 칭하고 있다. 북한에 있는 적상산 사고본 조선왕조실록은 대한민국의 영향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국보로 지정되지도 못하였고, 유네스코에도 북한과 공동으로 등재하지 않았으므로 세계기록유산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제외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의 분량을 살펴보면,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 472년간을 기록한 분량이 총 1,893권, 888책이다. 이 내용을 그대로 원고지에 옮겨 적으면 현재 여의도의 63빌딩의 세 배 높이가 되고, 한글로 번역한 실록을 하루 100쪽씩 읽는다면 모두 읽으려면 4년 3개월이 걸리는 양이다.
또한 조선왕조실록 가운데에는 『연산군일기』, 『광해군일기』와 같이 ‘일기’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있지만, 그 성격과 구성은 실록과 같다. 또 대개 한 명의 왕은 1종의 실록을 편찬하지만, 선조, 현종, 경종, 숙종 때에는 역사적 상황에 맞춰 고쳐 편찬하기도 하였는데 이와같은 경우는 원본과 수정본을 나란히 두어 수정 사항을 확인할 수 있게 하였다.
조선 건국 때부터 왕들은 춘추관(春秋館)을 만들고 기록자인 사관(史官)을 두었다. 그리고 사관들은 왕을 따라다니면서 왕과 주변 관료들이 하는 행동을 빠짐없이 적은 기록물 사초(史草)를 작성하였다. 그 외에도 춘추관의 사관들은 3년마다 자신들이 작성한 사초와 각 관청의 기록물을 모아 별도로 시정기(時政記)를 만들어 의정부(議政府)와 사고(史庫)에 보관한다.
사초와 시정기는 모두 비공개 문서였다. 그것은 실록편찬의 공정성을 보장하고, 기록자인 사관을 정치적 탄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었으며, 심지어 왕조차 볼 수 없었다. 따라서 조선 시대 왕 중 자신의 사초를 읽어본 왕은 거의 없다. 연산군이 무오사화(戊午史禍) 때 자신의 사초를 보았다고 알려지긴 했지만, 이것은 연산군 본인의 사초가 아니라 아버지의 사초를, 그마저도 직접이 아니라 문제가 된 부분만 신하가 베껴온 것을 읽었다. 그리고 그것이 최악의 선례가 되어 이후 오히려 더욱 금기시되었다.
태조 이성계가 사관에게 사초를 바치도록 요구한 적이 있었다는 당시 사관이었던 신개(申槪) 등이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
“가만히 삼가 생각하옵건대, 창업(創業)한 군주는 자손들의 모범이온데, 전하께서 이미 이 당시의 역사를 관람하시면 대를 이은 임금이 구실을 삼아 반드시, ‘우리 선고(先考)께서 한 일이며 우리 조고(祖考)께서 한 일이라.’ 하면서, 다시 서로 계술(繼述)하여 습관화되어 떳떳한 일로 삼는다면, 사신(史臣)이 누가 감히 사실대로 기록하는 붓을 잡겠습니까? 사관(史官)이 사실대로 기록하는 필법(筆法)이 없어지므로서 아름다운 일과 나쁜 일을 보여서 권장하고 경계하는 뜻이 어둡게 된다면, 한 시대의 임금과 신하가 무엇을 꺼리고 두려워해서 자기의 몸을 반성하겠습니까?”
태조실록 14권, 태조 7년 6월 12일 병진 1번째 기사
세종 역시 태종실록 편찬이 끝난 뒤 부왕의 실록을 보려고 했다가 신하들의 극심한 반대에 뜻을 접었다.
"이번에 편찬한 실록은 모두 가언(嘉言)과 선정(善政)만이 실려 있어 다시 고칠 것도 없으려니와 하물며 전하께서 이를 고치시는 일이야 있겠습니까. 〈그러하오나〉 전하께서 만일 이를 보신다면 후세의 임금이 반드시 이를 본받아서 고칠 것이며, 사관(史官)도 또한 군왕이 볼 것을 의심하여 그 사실을 반드시 다 기록하지 않을 것이니 어찌 후세에 그 진실함을 전하겠습니까."
세종이 말하기를, “그럴 것이다.”
세종실록 51권, 세종 13년 3월 20일 갑신 2번째기사
왕으로 즉위했던 인물이 사망하면, 현직 왕은 사관 같은 춘추관의 구성원과 정승급 고위 인사를 넣은 임시기구인 실록청(實綠廳)을 설치하고, 위에서 언급한 사초, 시정기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같은 각 관청의 기록들을 모아서 죽은 왕의 실록을 편찬했다. 그러나 태조, 정종처럼 퇴위만 하였을 경우, 해당 인물이 사망하기 전까지는 실록 제작을 시작하지 않는다. 다만 연산군, 광해군 등 폐위되는 경우 폐위된 왕의 사망과는 관계없이 바로 실록 제작을 하였다. 심지어 광해군일기는 광해군이 죽기 전에 완성되었다.
편찬의 과정은 3단계로 나누어지는데,
첫 단계는 실록청을 도청(都廳) 아래에 두고 방(房) 1~3곳으로 나눈다. (세종이나 성종같이 분량이 많은 실록의 경우 방을 6개까지 늘렸다고 한다). 각 방에서 1차 자료에서 중요한 사실을 가려 초초(初草)를 작성하고, 다음으로 방에서 작성한 초초본을 도청에서 편집해 중초(中草)를 작성하고, 마지막으로 실록청의 수장인 총재관과 도청 당상이 재차 수정하고 문장을 통일해 정초(正草)를 작성하면 실록이 완성된다.
이후 완성된 실록은 5개를 복사해서 한양의 춘추관에 1개를 두고 지방에 만들어 둔 사고(史庫)마다 1개씩 보관한다. 그리고 실록청은 마지막 작업으로 초초본과 중초본을 시냇물에 씻어 그 흔적을 없앤다. 이를 세초(洗草)라고 하는데 이 과정을 밟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물자를 아끼기 위해서이다. 당시 종이는 현대의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귀한 물건이었다. 특히 한지는 제작공정이 까다로워서 대량생산이 불가능했고, 고급 용지는 더욱 귀했다. 여기에 두 가지 판본(초초본, 중초본) 외에도 사료 편찬을 위해 왕의 재위기간 동안 사관들이 여러 가지 일을 기록한 원본 사료인 사초에 쓰인 종이까지 합하면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이 정도 양을 한번 쓰고 말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생각하여 정초본이 완성되면 필요성이 줄어든 다른 사료들의 종이를 재활용하기 위해 전부 세초하는 것이다. 한지는 찢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서 물로 잘 씻어 먹물을 빼낸 뒤 다시 잘 말리면 다시 사용할 수 있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사관들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정쟁의 소지를 차단하기 위해서이다. 다듬어서 완성된 형태로 만든 실록과 달리 사초는 그야말로 어떤 상황에 대해 사관의 생각이 여과 없이 기록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사관들이 화를 입거나 정쟁이 불거지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연산군 때 김일손의 사초에서 비롯된 무오사화는 사초의 내용이 공개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무오사화가 벌어지는 과정에서 연산군이 사초를 열람하였고, 이로 인해 많은 신하들을 처벌하였기 때문에 중종 때 대대적으로 세초를 하고, 아예 세초를 의무로 규정하여 이전에 세초하지 않고 남겨뒀던 사초까지 모두 씻어버렸다. 연산군 이후 사초를 보려 한 임금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명색이 '기록물'인데 왕이 실록을 참고조차 하지 않은 건 아니다. 왕이 실록을 직접 읽지는 않되, 조정에서 중요한 판단을 내려야 할 일이 있으면 그 전례를 찾아보기 위해서 왕이 사관에게 지시를 내려 열람하여 기록을 찾도록 했다.
9. 실록의 보관, 수난의 역사
고려왕조실록은 궁궐에 1부, 그리고 해인사에 1부, 총 2부를 만들어서 보관하였는데, 거란의 침입, 홍건적의 난 등에 의해 종종 소실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은 항상 4~5부를 만들어서 이러한 소실에 대비하였다.
『세종실록』부터 실록이 완성되면 복사본의 오·탈자를 막기 위해 활자(活字)로 4부를 인쇄하여 한양의 춘추관에 한 부를 두고, 나머지 3부는 충주·전주·성주에 사고를 설치하여 보관하였다. 실록은 종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습기에 취약할 수 밖에 없는데, 이를 위해 3년에 한 번씩 꺼내 볕에 말리는 '포쇄'라는 작업으로 곰팡이가 슬거나 좀이 먹는 것을 방지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보관 장소였다. 조선 전기 문신인 대사헌 양성지는 보관 장소에 이의를 제기하며 세조 12년(1466)에 상소를 올렸으나 조정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춘추관은 한양에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하삼도(下三道)에 있는 사고는 관청 옆에 붙어 있어 화재의 위험이 있으며 장차 외적이 침입하면 소실될 수도 있으니, 인적이 드문 궁벽한 곳으로 옮겨야 한다. 가령 전주 사고는 지리산으로, 성주 사고는 금오산으로, 충주 사고는 월악산으로 옮겨 그 고장의 절에 보관하고 땅을 지급해서 인근 백성들로 하여금 지키게 해야 한다.”
대사헌 양성지
72년이 지나 중종 33년(1538)에 성주 사고에 화재가 발생해서 태조실록부터 연산군일기까지 모두 전소되자, 나머지 사고에서 인쇄, 필사해서 성주로 보냈는데, 사고의 위치를 바꾸지는 않았다. 그런데 54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전주 사고본을 제외하고 모두 불타버린다. 전주 사고본도 전주의 유생인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이 사재를 털어 사고의 책들을 전부 내장산으로 옮겨놓고, 이듬해 관청에 넘겨줄 때까지 번갈아서 지키며 간신히 지켜냈다.
임진왜란은 사고(史庫)의 입지선정에 대한 시각 자체를 바꾸어 놓은 계기가 되었다. 광해군 때 춘추관과 함께 마니산, 오대산, 태백산, 묘향산에 사고를 마련하고, 전쟁 뒤의 어려운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재출판하여 실록 5부를 갖추었다. 그러나 춘추관 사고본은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모두 불타버렸다. 그리고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되자 묘향산 사고본은 적상산으로, 마니산 사고본은 정족산으로 이전했다.
일제강점기에는 각지의 사고를 철폐하면서 적상산본은 창경원 장서각으로, 정족산본과 태백산본은 총독부로 옮겨졌으며, 경성제국대학이 개교하면서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으로 다시 이관되어 근대적 장서학에 따라 관리를 받았다. 실록을 처음 학술적으로 연구한 곳도 경성제국대학이었다. 그리고 오대산 사고본은 일제가 도쿄제국대학 도서관으로 반출했는데 간토 대지진이 일어나면서 대출본 47권을 제외하고 소실되었다. 정족산본은 경성제국대학에 남아있다가 서울대학교 개교 이후 서울대학교 규장각으로 이관되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에 있던 실록들은 임시수도 부산으로 수송되었는데, 서울대 도서관의 태백산사고본과 정족산사고본 등은 군용 트럭에 실려 부산으로 수송되어 경남대한부인회 창고, 경상남도청 창고 등에 보관되었다. 창경원의 적상산본은 평양으로 옮겨졌다.
현재 정족산 사고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태백산 사고본은 부산 국가기록원에, 일제에 의해 소실되고 남은 오대산 사고본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적상산 사고본 일부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10. 실록의 꼼꼼함, 정확함, 방대함
조선왕조실록은 국가의 정무뿐만 아니라, 국왕과 신하들의 인물 정보, 외교와 군사 관계, 의례의 진행, 천문 관측 자료, 천재지변 기록, 법령과 전례 자료, 호구와 부세, 요역의 통계자료, 지방정보와 민간 동향, 계문, 차자, 상소와 비답 등, 당시 조선 시대의 거의 모든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외교적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 평가받는다. 분류가 역사서고 이름이 조선왕조실록이지만 그 실체는 1400년 이후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데이터 창고라고 할 수 있다. 유네스코에서도 이렇게 꼼꼼하고 정확한 기록을 인정하였으며 이러한 역사서는 세계 어디에도 흔치 않다. 실제 실록에서 아래와 같은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震慶尙道東萊縣三人梁州昌原比屋各一人。
경상도 동래현(東萊縣)에서 세 사람, 양주(梁州)·창원(昌原)·비옥(比屋)에서 각각 한 사람씩 벼락을 맞았다. 태종 9년(1409) 6월 15일 병진 3번째 기사
震平安道三和縣人朴禿同及狗兒
평안도 삼화현(三和縣) 사람 박독동(朴禿同)과 강아지가 벼락을 맞았다.
세종 5년(1423) 7월 21일 기해 2번째 기사
忠淸道懷德縣人物雷震
충청도 회덕현(懷德縣)에서 사람이 벼락을 맞았다.
현종 9년(1668) 6월 28일 을미 2번째 기사
조선왕조실록에는 당시 불길한 징조로 여겼던 일식이나 월식 뿐만 아니라 각종 천체활동에 대한 자료도 방대하게 기록해놓았다. 그중 1604년 요하네스 케플러가 관측하여 '케플러 초신성'이라고도 불리는 SN 1604에 대한 기록도 있다. 케플러는 이 초신성을 거의 1년 가까이 기록을 남겼는데, 당시 실록을 기록하던 사관 역시 이에 못지 않게 7개월 가까이 이를 기록했다. 지구 반대편에서 같은 천체를 보고 각각 남긴 기록이 지금까지 남았다는 점이 굉장히 흥미로운 점이다. 아래 기록은 7개월간 기록된 내용들 중 '일부'이다.
“밤 1경에 객성(客星)이 천강성(天江星) 위에 나타났는데, 미수(尾宿)와는 11도(度)이고 북극성과는 1백 9도의 위치였다. 형체는 세성(歲星)보다 작고 황적색(黃赤色)이었는데, 동요하였다. 3경과 4경에 달무리가 졌다.”
선조 37년(1604) 9월 22일 1번째 기사
“묘시와 진시에 안개 기운이 있었다. 진시에 태백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밤 1경에 객성이 천강성 위에 나타났는데, 형체의 크기는 금성(金星)만하였고 광망이 매우 성하였으며 황적색으로 동요하였다. 위치한 곳의 성수(星宿)의 도수(度數)와 북극성과의 도수는 달과 가까이 있는 데다가 유기(游氣)가 있어 측후할 수 없었다.”
선조 37년(1604) 윤9월 7일 2번째 기사
“1경에서 3경까지 달무리가 졌다. 5경에 객성(客星)이 구름 사이로 조금 보였다.”
선조 38년(1605) 3월 15일 1번째 기사
조선왕조실록을 포함해서 동양의 전근대 서적의 분량을 말할 때 쓰는 '권'과 '책'에서 '권'은 '내용상 구분하여 나눈 단위'이고 '책'은 '물리적으로 종이를 묶은 단위'를 뜻한다. 즉 오늘날 흔히 말하는 '장(챕터, 파트)' 이 당시의 '권'이고, 오늘날의 '권'이 당시의 '책'이다. 예를 들어 태조실록이 15권 3책이라고 하면, 15개 장이 3권 책에 나뉘어 수록되었다는 의미다. 조선왕조실록 중 가장 많은 분량이 기록된 왕은 순서대로 성종(297권), 선조(221권), 광해군(187권), 세종(163권), 영조(127권)이다.
11. 역사서술의 방식
역사 서술의 방식에는 기전체, 편년체, 기사본말체, 강목체 등으로 나누어지는데,
먼저 기전체는 역사적 사실을 서술할 때, 본기(本紀), 세가(世家), 표(表), 지(志), 열전(列傳) 등으로 구성하여 서술하는 역사 서술방식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본기의 ‘기’와 열전의 ‘전’을 따서 기전체라고 하였다.
중국 전한 시절,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에서 시작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조선시대 관찬 역사서인 『고려사(高麗史)』가 이 체제로 편찬되었다. 기전체는 한 왕조의 통치자를 중심으로 하여 여기에 속한 신하들의 전기, 통치제도, 문물, 경제, 자연현상 등을 분류하고 서술하여 왕조 전체를 이해하기 위한 역사서술 방식이므로 중국과 한국의 정사 체제로 자리잡았다.
두 번째, 편년체는 역사기록을 연, 월, 일 순으로 정리하는 편찬체제로 공자(孔子)의 『춘추(春秋)≫에서 비롯되었으며, 이후 사마광(司馬光)이 『자치통감(資治通鑑)≫을 편년체에 의해 서술하면서 크게 발전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동국통감(東國通鑑)』,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일성록(日省錄)』, 『국조보감(國朝寶鑑)』 등이 편년체의 서술방식에 따라 역사를 서술하였다.
셋째, 기사본말체는 동양의 전통적인 역사 서술 체제로, 기전체(紀傳體), 편년체(編年體)와 함께 동양의 3대 역사편찬체제 중 하나다. 기전체는 인물 중심의 서술방법이고, 편년체는 사건 발생시간 중심의 서술방법이며, 기사본말체는 사건경과가 중심이 되는 서술방법이다. 기사가 분산되는 기전체, 편년체와 달리 사건의 발단, 전개, 결말을 한 번에 기술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사건의 명칭이 제목이 되며, 그 사건과 관련된 글을 모두 모아 사건의 발단과 결말을 함께 기술한다. 중국 남송의 원추(袁樞)가 『통감기사본말(鑑紀事本末)』에서 처음으로 기사본말체를 사용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후기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서 기사본말체가 사용되었다.
넷째, 강목체는 큰 글씨로 쓴 줄거리 기사의 강(綱), 보다 작은 글씨로 쓴 구체적 서술의 목(目)으로 기본 틀을 이루는 편년체(編年體) 역사서술의 형식이다. 그 시작은 공자가 쓴 노나라의 역사인 『춘추(春秋)』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고 주희(朱熹)가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자료로 이용하여 『자치통감강목』을 편찬함으로써 강목체의 체계가 정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