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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은 Dec 28. 2022

12. 내포(內浦)문화의 중심, 홍성(洪城)

당일형 답사

해미읍성은 조선 초 축성 이후 약 600여 년간 수 차례의 변형과 보수의 과정을 겪었다.

1. 내포(內浦)문화의 중심, 홍성(洪城)     


 조선후기 실학자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충청도에서는 내포가 가장 좋다.     

 공주에서 서북쪽으로 200여리쯤에 가야산이 있다. 서쪽은 큰 바다이고 북쪽은 경기도 바닷가 고을과 큰 못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으며, 동쪽은 큰 들판이고, 남쪽은 오서산에 가려져 있는데, 가야산에서부터 이어져 온 산줄기이다. 가야산의 앞뒤에 있는 10고을을 내포라 한다."고 언급되어있는데, 이곳은 가야산 앞뒤에 위치한 홍주, 결성, 해미, 서산, 태안, 덕산, 예산, 신창, 면천, 당진이다.     


여기서 내포(內浦)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는, 홍주목(洪州牧, 지금의 홍성군)이 관할하던 충남 서천에서 경기도 평택까지의 20여 고을을 지칭하고 있다. 따라서, 내포지역은 충청도 지역 중에서 서해안을 끼고 있는 대부분의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홍성은 충청남도 내포지방에 있는 군이며, 충청남도청 소재지이다. 특이한 점은 전라남도 무안군과 함께 광역자치단체 청사를 보유한 단 둘 뿐인 군(郡)단위 기초자치단체이다.

     

 홍성의 원래 지명은 홍주(洪州)로, 충청도의 4대 목(충주, 청주, 공주, 홍주) 중 하나로 큰 고을이었다. 1895년 전국이 23부로 개편되었을 때는 홍주부(府)의 부청이 설치되어 충남 서부의 고을들을 관할하는 광역 행정구역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 과정에서 홍주(洪州) 결성(結城)을 합쳐 홍성이라 하였는데, ‘주’ 자가 빠지는 바람에 주급 고을로서 가지고 있던 충남 서부의 중심지 자리를 뺏긴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지역별 홍성군의 발달모습을 살펴보면 북쪽에 위치한 홍북읍에는, 충남도청을 비롯한 내포신도시가 조성되어 새로운 신시가지로 떠오르고 있다. 도시급 생활 인프라를 갖춰나가면서 홍성읍을 추격하고 있다.     

 

 군의 남부에 위치한 광천읍은 홍성군 남부지역과 보령시 북부지역 생활권의 중심핵으로서 독자적인 생활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예로부터 서해 도서 지역의 수산물과 육지의 농산물이 교환되는 두 개의 큰 장(옹암장, 광천장)이 형성되었었고, 충남지역의 오일장을 오가며 장사를 하던 상인들은 주로 광천을 베이스캠프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모두 옛 이야기. 지금은 지역경제 대부분을 몇몇 특산물에 의존하는 실정이고, 많은 기능을 홍성읍에 빼앗기고 쇠퇴했다. 또한 옹암장은 사라졌고 광천장만이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광천토굴새우젓과 광천김은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2. 달을 바라보는 바위, 간월암(看月庵)   

  

 간월암이 간월암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고려말 무학대사가 이곳 암자에서 수행을 하다 바다 위에 둥글게 뜬 달을 보는 순간 홀연히 득도했다고 하여 간월암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간월암(看月庵)의 ‘간(看)’ 자는 ‘바라보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므로 달을 바라보는 바위라는 뜻이다.      


 기록의 전무함에도 불구하고 무학대사의 이 설은 사실에 가까워 보인다. 알다시피 무학대사는 이성계의 조선 개국을 도운 스님이고, 그의 도력으로 한양 천도도 이뤄졌다. 조선 개국 후 무학대사는 개국공신으로서 천수만 일대의 땅을 하사 받았다고 하는데, 그중 간월도와 황도가 있었다. 무학대사는 하사받은 간월도에 무학사라는 이름의 절을 지었다. 그리고 그곳에 자신의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조선이 정도전의 주장대로 유교국가가 되면서 불교를 짓눌러 버렸는데, 그때 실망한 무학대사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절을 떠났다.


3. 만해(卍海) 한용운     


 만해 한용운은 시인이자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879년 8월 29일 충청남도 결성현(지금의 홍성군)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에 당대 기호학파의 거장으로부터 한학을 배웠으며 18세가 되던 1896년 고향을 떠나 여러 사찰을 전전하며 불교 관련 서적을 탐독하였다. 1905년, 영제(永濟) 스님에 의하여 출가하는데 이 때 얻은 법명이 바로 용운(龍雲)이다. 그러니까 용운은 본명이 아니라 법명이다.      


 1910년에 국권이 피탈되자 중국으로 가서 우당 이회영 선생이 운영 하고 있는 신흥무관학교를 방문하여 격려하였다. 그리고 뒤이어 만주와 시베리아 곳곳을 방랑하다가 1913년 귀국해 불교 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후 1912년 양산 통도사에서 팔만대장경을 열람하고, 1914년부산 범어사에서 『불교대전(佛敎大典)』을 간행하였으며, 대승불교의 반야 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 참여를 주장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선언하고 자진 체포되었으며, 3년을 복역한 뒤 출소해 민족 의식 계몽에 대한 준비를 한 후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 문학에 앞장서고, 불교계 항일 단체인 '만당'에 당수로 추대되는 등 각종 민족 운동 및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4. 만해(萬海)의 불교 개혁 정신, 조선불교 유신론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은 한용운이 33세인 1910년에 집필하고 1913년에 간행된 것으로, 그의 불교개혁 정신을 대표하는 저술일 뿐만 아니라 한국 근대불서를 대표하는 기념비적인 저술이다. 총 17개장으로 구성되었는데,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수행 : 불교 수행문제의 해결방안으로 제기한 것은 참선과 염불당의 폐지이다. 올바른 참선의 활성화를 위해 공동으로 선학관을 설립하고 각처 선방 운영의 다각화를 주장했다. 염불당의 폐지는 『유신론』 주장 중에서도 가장 파격적인 것인데, 중생들이 거짓 염불을 멀리하고 참다운 염불을 닦게 하자는 것이지 염불당을 완전히 무조건적으로 없애자는 것은 아니라고 해석된다. 이와 함께 불교 의식(儀式)에 대해서도 많은 다라니(陀羅尼)를 중심으로 한 의식보다는 오히려 간략한 법식(法式)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② 교육 : 승려의 교육문제를 강력히 주장했다. 문명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필히 교육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승려라도 예외일 수 없다. 배움에 있어서는 지혜, 사상의 자유, 진리의 세 요소가 절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 중에서도 당시 승려들은 사상의 자유(비판정신)가 가장 부족하다고 보았다. 승려교육의 급선무를 보통학, 사범학, 외국유학으로 구분하였다.     


③ 포교 : 종교의 세력은 포교로 이루어지고 불교의 가르침도 포교에서 실현된다. 포교인의 자질은 열성과 인내와 자애의 겸비에 있고, 포교 방법은 연설, 신문, 잡지, 역경(譯經), 자선사업 등을 통해 다양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④ 사원의 위치 : 산속의 사원은 사상적인 진보와 모험 및 구세, 경쟁을 자극하지 못해 퇴영적이기 쉽고, 사업적으로는 교육, 포교, 교섭, 체신, 단체, 재정 등에 모두 불리하므로 사원은 도시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⑤ 종단 운영 : 『유신론』에서 종단 운영과 관련된 문제로 거론한 것은 사원의 통할, 승려 단체, 사원의 주지 선거법이다. 사찰들은 지휘와 통할을 통해 운영해야 하는데 구체적으로 혼합통할과 구분통할로 나누었다. 각기 장단점이 있으나 원칙적으로 혼합통할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경험, 인식, 자격자, 공덕심이 없어 실시하기 어려운 점이 있고, 구분통할을 하면 분열의 위험이 있다는 입장으로 이에 대해서는 뚜렷한 방책을 제시하지는 못하였다. 다음으로 한 사원의 흥망성쇠는 주지(住持: 절을 주관하는 승려)에 달려 있는 만큼 능력있고 훌륭한 사람이 주지의 직책을 맡기 위해서는 제도를 개혁하여 선거로 선출하고 월급제를 실시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조선의 승려들은 외형적으로 단결된 것 같으나 정신적인 단결이 없음을 지적했고, 이 중에서 승려들의 방관자적 태도가 가장 문제라는 것이다. 승려들이 단결하여 국리민복(國利民福)을 도모한다면 부처님의 중생제도 정신을 배반치 않을 것이며 지금까지 지은 죄도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을 것이라 주장했다.    

 

⑥ 승려의 인권과 결혼 : 『유신론』에서 승려 인권의 회복 방안으로 제기한 것은 승려 자신의 생산활동 참여로서, 스스로의 생산이 없으면 자신의 생존에 대한 결정권을 남에게 의존하게 된다는 것이다. 불교계가 가진 산림의 조건을 이용하여 조림에 힘쓰고 승려들의 공동생활의 경험을 살려 공동경영 방안을 모색해 보는 것 등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다음으로 승려의 결혼문제는 『유신론』을 대변할 정도로 가장 첨예하고 논란이 심한 문제였다. 한용운은 결혼의 금지는 윤리와 국가, 포교와 풍화(風化: 교육이나 정치의 힘으로 풍습을 잘 교화하는 일)에 모두 해롭기 때문에 승려의 결혼을 금지한 계율은 불교의 목적이 아니라 방편일 뿐이다. 부작용만 많은 결혼금지 문제는 승려 자신의 자유로운 뜻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은 불교 중흥에 대한 그의 이론과 실천을 망라한 최대의 집필이다. 특히 구태의연한 현실 안주의 자세에 대한 통렬한 비판은 현재까지 귀감이 되고 있으며, 가장 탁월한 불교 개혁 방안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5. 만해(萬海)의 작품세계     


 만해가 남긴 작품을 살펴보면 그가 조국과 민족에게 던지고자 했던 메시지를 알아볼 수 있다. 그 중 『님의 침묵』은 불교의 역설적 진리를 바탕으로 님과의 이별에서 오는 슬픔과 절망을 극복하고, 그것을 새로운 만남의 희망으로 전환하고자 하는 시인의 마음이 드러난 시이다.     

   

님의 침묵     


님은 갔습니다.

(여기서 님은 그리움의 대상으로, 연인, 조국, 민족, 부처 등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님이 떠나감에 대한 절망과 충격)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푸른 산빛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단풍나무는 현재의 절망을 뜻하며, 차마 떨치고 간 것은 이별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아갔습니다.

(황금의 꽃처럼 영원한 사랑의 약속도 차디찬 티끌처럼 보잘 것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여기서 님과의 첫 키스는 행복하고 황홀했던 순간을 의미하며, 운명의 지침을 바꾸어 놓았다는 것은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음을 의미한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님의 절대성, 완벽성을 의미하는 역설적 표현)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님과의 이별을 예상 못 한 것은 아니지만 그 슬픔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배기에 들어부었습니다.

(이별의 슬품을 극복하고 새로운 희망으로 전환시켜 새 출발의 힘이 되도록 함.)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만나면 언젠가는 헤어진다는 회자정리(會者定離)와 간 사람은 반드시 돌아온다는 거자필반(去者必返))     

아아, 님은 갔지만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님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을 역설적으로 표현함.)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님을 향한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은, 님의 부재 상황에서도 끊임없음.)     


나룻배와 행인     


만해의 작품 중, 『나룻배와 행인』은 사랑하는 님을 행인에 비유하고, 자기자신을 나룻배에 비유하며 나룻배와 행인의 관계를 통해 인내와 희생, 사랑에 대한 숭고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는 시이다.      


나는 나룻배

(나 자신을 나룻배로 비유함, 나룻배는 임을 기다리며 날마다 외롭게 낡아가고 있다.)     

당신은 행인

(행인은 나의 님)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만약에 님께서 오시지 않는다면 나는 바람과 눈비 같은 고난과 시련이 닥치더라도 밤낮으로 님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초월적 경지에 이르면 나를 멀리하고 떠나가심)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거자필반(去者必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

(어떠한 고난이나 역경이 와도 나는 님을 끝없이 기다리겠다는 의지를 말함)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이별은 미의 창조     


 이 시는 이별의 슬픔에 절망하지 않고 더 나은 만남을 위해 이별의 상황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화자의 태도가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특히, 이별은 임과의 단절이 아닌 미의 창조라고 인식함으로써 만해의 작품 전체를 꿰뚫는 역설(逆說)의 미학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별은 미()의 창조입니다.

(이별은 곧 아름다움, 이별을 통해 슬퍼하거나 아파하지 않고 또 다른 만남을 기약함.)     

이별의 미는 아침의 바탕[] 없는 황금과 밤의 올[] 없는 검은 비단과 죽음 없는 영원의 생명과 시들지 않는 하늘의 푸른 꽃에도 없습니다.

(밝음이 어둠이라는 전제하에서 의미가 있듯이, 긍정적 가치는 부정적 가치의 전제하에서만 그 생명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역설적 표현이 담겨있다.)     

임이여, 이별이 아니면 나는 눈물에서 죽었다가 웃음에서 다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오오, 이별이여.

(이별을 하고 그 뒤에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즉 다시 만났기 때문에 웃음을 지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결국 이별은 다시 만남을 뜻하는 것이고, 만남은 웃음이며 아름다운 것이니, 이별은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것이 된다. 즉 아름다움은 이별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의미이다.)     

()는 이별의 창조입니다.

(아름다움은 이별이 창조하는 것이다.)     


 이 시를 해석하다 보면 만해의 시 전반에 들어있는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계속 언급되고 있는 역설의 미학이다. 이별은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아름다움은 또 이별이 창조한 것이니, 이별이 있어야 만남의 즐거움이 있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시 내용 자체도 어렵고, 해석해도 어렵고, 또 이러한 만해의 생각을 이해하기 더 어렵다.     


 여기에는 아마도 만해가 승려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현실에서의 이별을 통해 부처님을 만나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는 인식이 작용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속세에서의 이별이 진리의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웃음을 지을 수 있게 한다고 한 것이다.     


당신을 보았습니다     


 만해의 시 당신을 보았습니다에서 당신은 나라를 잃고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궁핍한 지경에 처하여 슬픔과 분노를 느낄 때 나에게 와준 당신이고, 또한 조국을 잃은 상황에서 독립 투쟁의 험난한 길을 걸을 것인가? 아니면 차라리 술이나 마시며 자포자기로 살 것인가? 하는 번뇌의 순간에 나에게 와준 당신이다.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당신은 나의 삶의 지표이며, 조국, 연인, 부처를 의미한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의 고통을 견디기 위함.)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가 없습니다.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궁핍했던 생활)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핍박받는 우리 민족의 상황, 주인은 일제를 말하고 거지는 우리 민족을 의미한다.)     

그 말을 듣고 돌아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모욕적이고 비인격적인 핍박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힘)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이 없습니다.

민적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민적 : 주권, 민적 없는자 : 나라 잃은 우리 민족, 장군 : 일제)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일제에 대한 분노가 나라를 지키지 못한 자책으로 변하는 순간 불의에 항거할 수 있는 원동력이 생겼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지내는 연기인 줄을 알았습니다.

(정의라고 믿었던 것들이 권력과 돈에 봉사하는 허망한 것임을 깨달음)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죽음, 역사의 부정, 자포자기와 절망의 순간에서 ‘당신’을 보고 새로운 삶의 의지를 다짐)           

                                                                                                                                 

6. 대한독립군, 백야(白冶) 김좌진     


 백야 김좌진 대한 독립군 총사령관으로써 그 유명한 청산리 대첩의 주역이며 우리에게는 장군의 아들 ‘김두한’의 아버지로도 잘 알려져 있다.      


 김좌진은 충남 홍성 지방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집안은 큰 기와집에 많은 노비를 거느렸고, 한 해 농사만 2천 석을 거두어들일 정도로 큰 부자였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읜 김좌진은 13세의 어린 나이에 가장으로서 집안의 살림을 떠맡아야 했다.     


 김좌진은 어린 시절부터 글공부보다는 활쏘기, 말타기, 병정놀이를 즐겨했으며, 강직하고 무인적인 성격이 강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약한 자를 돕는다는 생각이 항상 자리 잡고 있었다.      

김좌진의 고향 홍성은 홍주의병이 크게 일어난 곳이었는데, 그는 당시 의병장이었던 김복한으로부터 항일 의식을 익혔으며, 계몽지식인 김석범을 통해 신사상을 접하였다. 그리고 김좌진은 15세이던 어느 날, 집안 식구들과 노비들을 모두 불러 모아 큰 잔치를 벌이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오늘부터 우리 집의 노비들은 자유다. 나가서 잘 살도록 하여라.”     


 김좌진은 잔치가 끝나자 집 안에 있는 노비 문서들을 불태우고 노비들에게 땅을 살만한 돈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소작인들에게는 논밭을 무상으로 나누어 주었다. 김좌진은 계몽 지식인 김석한을 통해 신사상을 접하게 되었으며 여러 사람과의 교류를 통해 일찍이 나라 사정에 대해 눈을 뜨고 있었고, 이때부터 김좌진은 나라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백성들을 일깨우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집안의 노비를 해방시킨 뒤, 김좌진은 민족 교육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교육이야말로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 김좌진은 1907년 자신의 고향에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우고 자신의 집을 학교건물로 내놓고 정작 본인은 작은 집으로 이사를 하였다. 김좌진은 근대적이고 체계적인 학교를 세워 변화하는 시대에 알맞은 교육을 하고자 하였고, 학생들에게 민족정신과 애국정신을 심어주고자 하였다.     

 

 김좌진은 서울로 올라와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는 신교육운동의 전개와 계몽운동 단체에 참여해 국권회복에 온 힘을 쏟아 부었다. 또한 청년학우회에 가입하여 한성신보(漢城新報) 신문의 이사를 맡았다. 또한 1909년에는 기호흥학회에 가입하여 교육사업에 활발하게 참여하였다.      


 1910년 국권이 피탈되고 난 후, 애국지사들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계획하였느나,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자금이 필요했고, 김좌진 역시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자금 모집 활동을 펼쳤다. 그러던 1911년 어느 날 김좌진은 중국에서 온 동지를 만났는데,     


“김 동지! 무기 구매 자금으로 10만 원이 필요하오.”     


 10만 원이라면 당시에는 엄청난 액수의 큰돈이었고, 김좌진이 이제까지 전국을 돌아다니며 거두어들인 돈은 3만 원이었다. 김좌진은 자신의 땅도 팔았지만, 그래도 5만 원이 부족했다. 고민 끝에 김좌진은 서울에서 손꼽히는 부자인 김종근을 찾아갔어요. 김좌진은 그에게 현금 5만 원을 부탁했으나 그는 딱 잘라서 거절하였다. 이에 굴하지 않고 김좌진은 거칠게 요구하였으나 그는 고함을 치며 경찰에 신고를 한다. 이 일로 김좌진은 경찰에 체포되어 2년 반 동안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이후 김좌진은 감옥에서 나온 후에도 여전히 격렬하게 항일 운동에 대한 뜻을 굽히지 않았고, 그러던 와중 1918년 그는 일본의 감시를 피해 만주로 향한다. 그리고 그는 만주 지역의 독립 운동가와 함께 민족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한다.      


 1919년 김좌진은 ‘대한정의단’에 합류하여 군사 책임을 맡았고, 대한정의단을 군정부로 확대 개편하고 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군사를 모집하고 훈련하는데 힘을 쏟았으며 국외에서 다량으로 무기를 사들여 와 독립군의 힘을 키웠다. 이후 군정부는 다시 이름을 ‘북로 군정서’로 바뀌었으며, 김좌진은 독립군 부대의 총사령관이 되어 독립군 편성과 훈련에 힘을 쏟았부었다. 또한 군사 학교를 세워 잘 훈련된 독립군 군사들을 길러내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북로 군정서는 1920년 8월 수천 명 규모의 독립군과 다량의 총기류와 탄환 그리고 군자금 등을 갖춘 만주의 최정예 독립군 부대로 성장하였다.     


 일제는 독립군의 세력이 점점 커지자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더구나 지난번 봉오동 전투의 패배로 일본군은 크게 화가 나 있었기에 이번 기회에 대규모 병력을 보내 독립군을 소탕하고자 하였다.     

한편 김좌진의 독립군은 본부를 장백산으로 옮기기 위해 이동하고 있었는데, 1920년 10월 중순 독립군은 중국 지린성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에 이르렀을 때 일본군의 공격 소식이 들리자, 독립군 부대들도 김좌진 장군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장군! 시베리아에 출동했던 일본군 부대가 장고봉을 거쳐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장군! 또 다른 일본군 부대가 함경북도 나남에서 토문강을 건너 북쪽으로 올라오고 있습니다.”

장군! 남만주 철도 일본군 수비대가 송화강을 건너 서쪽으로 진군하고 있습니다.”     


그 무렵 첩보원들에 의해 일본군의 움직임들이 속속들이 우리 독립군 부대에 보고되고 있었는데, 이들은 독립군을 3면으로 공격할 셈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적들에게 우리 독립군의 힘을 보여 줄 때다!”     


 김좌진은 여러 독립군 대장들을 불러 모아 함께 전투 계획을 짜면서, 이곳 청산리 주변은 계곡이 깊어 지형만 잘 이용하면 적은 수의 독립군으로도 대규모 일본군을 무찌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장군! 지금 일본군들이 몰려오고 있다는 첩보입니다.”     


10월 18일, 드디어 일본군이 청산리 골짜기를 향해 쳐들어오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독립군은 청산리 백운평의 울창한 숲 속에 숨어 일본군을 숨죽여 기다리다가 일본군이 나타나면 일제히 공격할 생각이었다.     


이제 일본군이 이곳으로 올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10월 21일 새벽, 수많은 일본군이 길게 늘어서며 골짜기로 들어서고 있었다. 일본군은 독립군이 청산리 골짜기 곳곳에 숨어 있는 줄도 모르고 깊숙이 행군해 왔으며 어느새 청산리 계곡은 일본군으로 까맣게 뒤덮여 갔지요.     


이때 어디선가 권총 소리가 들려 왔다.     


! 땅땅!”     

이범석 장군의 권총 소리였다. 독립군은 이 권총 소리를 신호로 일본군을 향해 집중 사격을 시작했다.     

놈들이 쳐들어왔다! 모두 돌격하라!”     

그러자 사방에 숨어 있던 독립군들이 함성을 지르며 우르르 쏟아져 나왔고 일본군은 우왕좌왕하였어요.     

적을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독립군의 공격은 더욱 거세어져 갔고 청산리 골짜기는 어느새 총소리와 비명으로 뒤섞여 아수라장이 되었으며, 독립군의 기습 공격에 일본군은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싸움에서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일본군과는 달리, 독립군은 사상자가 20여 명에 불과한 큰 승리였다. 첫 전투에서 진 일본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장기전에 돌입하였어요.     


 이에 독립군도 작전을 바꾸게 되었는데, 주력 부대가 그대로 백운평에 있는 것처럼 가장하고 하룻밤에 약 63km를 강행군하였다. 그리고 갑산촌으로 후퇴하여 천수평에 있는 기병 중대를 기습하였는데, 이때 도망자 네 명을 제외한 중대장 이하 전원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또 독립군은 일본군이 어랑촌에 있다는 정보를 얻고 그곳에서 일본군과 맞붙어 이틀 밤낮에 걸친 전투에서 독립군은 수많은 일본군을 사살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처음엔 너무나도 많은 수의 일본군 때문에 밀리는 듯 했으나 다른 독립군 부대들이 합류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김좌진 장군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독립군 부대들은 일본군을 거세게 몰아내기 시작하였다. 청산리에서는 며칠간 총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며 일주일 동안 10여 차례의 전투가 치러졌고 독립군 부대들은 모든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렇게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이 청산리 백운평·천수평·마록구 등의 3차에 걸친 싸움에서 일본군을 크게 물리친 싸움을 ‘청산리 대첩’(1920년)이라고 부른다.     


 청산리 대첩 이후 김좌진은 만주 일대에 흩어져 활동하고 있던 여러 독립군 부대들을 통합하여 나가며 더 크고 강한 독립군 군대를 만들어 한반도로 진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일본과 러시아의 음모에 휘말려 그의 꿈은 그만 깨어지고 말았으나 김좌진은 좌절하지 않고 독립 운동 단체를 조직하여 독립군을 길러내는 데 모든 힘을 쏟았다.     


 암울한 일제 식민 시대에 김좌진의 청산리 대첩은 우리 민족에게 통쾌함과 용기를 주었으며. 자신감과 민족적 자부심을 갖게 해주었다.       

                                                                                                                       

7. 서산(瑞山)의 랜드마크, 해미읍성(海美邑城)     


 ‘해미(海美)’란 지명은, 조선 태종 7년(1407)에 왜구로 인한 피해로 황폐화된 곳이 많아, 정해현(貞海縣)과 여미현(餘美縣) 두 개의 현을 통합하여 한 개의 현을 만들면서 정해현에서 ‘해’자를 따고, 여미현에서 ‘미’자를 따서 해미현(海美縣)이 되었다. 이후 고종 32년(1895)에 해미현에서 해미군(海美郡)으로 개명되었으며, 이후 현대로 들어와서는 1995년 서산시가 도농통합형 시로 승격함에 따라 서산시 해미면으로 편입되었다.      


 해미는 그 호감 가는 이름처럼 바다를 끼고 있는 아름다운 고을이었다. 물론 지금은 모두 농지로 개간되어 바다와 멀어졌지만,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서산 해미읍성에 오르면 멀리 서해가 아름답게 펼쳐 보였다. 해미는 해안을 조망하며 내륙으로 들어가는 관문으로서 적합한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전략적 요충지인 해미면에 소재한 읍성이 바로 해미읍성이다. 고창읍성, 낙안읍성과 함께 현재에도 원형이 잘 남아있는 대표적인 조선시대의 읍성으로 사적 제116호로 지정되어있다.      

 읍성은 도성과 구별된다. 고조선의 도성은 왕검성이나 읍성에 대한 기록은 없다. 고려 시대에는 주요 지방 도시에 읍성이 축조되었고 조선왕조까지 이어졌다. 흙으로 축성된 읍성은 차츰 돌로 고치거나 넓게 다시 축조가 진행됐다.     


 조선 시대의 읍성은 내륙지방에는 비교적 큰 고을에만 있었고, 해안 근처의 고을에는 거의 모두가 있었다. 읍성은 부(府)·목(牧)·군(郡)·현의 행정구역 단위의 등급에 따라 그 크기도 차이가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현 남부지역에 69개소, ≪동국여지승람≫에는 95개소, ≪동국문헌비고≫에는 104개소의 읍성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해안 방비를 위한 여러 가지 정책을 집중적으로 시행하였는데, 태조는 평소 “국가에서 근심하는 바가 왜적보다 심한 것이 없다”고 강조하였다. 이는 고려 말부터 자행된 극심한 왜구의 침입에 대처하였던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서산 해미읍성은 이러한 왜구의 침입에 효율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새로운 거점이다.      


 해미읍성은 조선 태종 17년(1417)부터 세종 3년(1421) 사이에 당시 덕산(德山)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忠淸兵馬都節制使營)을 이 곳에 옮기고자 축성되었으며, 효종 3년(1652)에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이 청주로 옮겨가기 전까지 230여 년간 군사권을 행사하던 곳이다. 당시 이 성 안에 근무 인원은 850여 명이나 되는 대부대였으며, 충청도 병권의 지휘소로서 국방은 물론 내란 방지 등의 임무도 맡고 있었다. 따라서 이 성의 축성으로 왜구의 서해안 침입이 현격하게 줄어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군사 전략적인 면에서 수도 방비의 개념이 부각되면서 병영이 청주로 이동하었고, 읍성에는 해미현(海美縣)의 관아가 옮겨졌다. 서산 해미읍성이라는 명칭도 이때 개명된 것으로, 본래는 해미 내상성(海美內廂城)이었다. 하지만 서산의 해미는 여전히 서해안을 방어하는 군사적 요지였기 때문에 1914년까지 겸영장(兼營將)이 배치되었으며 내포 지방의 군사권을 행사하였다.     


 해미읍성은 조선 초 축성 이후 약 600여 년간 수 차례의 변형과 보수의 과정을 겪었다. 현재 성의 모습은 대체로 헌종 13년(1847) 현감 겸 영장 박민환이 크게 개축한 이후에 완전히 형태를 갖춘 것이다. 성의 둘레에는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탱자나무를 돌려 심어 탱자성이라고도 불렸다.     


 읍성의 면적은 약 6만여 평이며, 둘레는 약 1,800m이다. 해발 130m인 북동쪽의 낮은 구릉에 넓은 평지를 포용하여 축조된 성으로서, 성벽의 아랫부분은 큰 석재를 사용하고 위로 오를수록 크기가 작은 석재를 사용하여 쌓았다. 성벽의 높이는 4.9m로서 안쪽은 흙으로 내탁(內托)되었으며, 성벽 상부 폭은 2.1m 정도이다.  문은 주 출입구이자 남문인 진남문(鎭南門)이 아치 모양의 홍예문(虹霓門)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밖에 동문과 서문이 있으며, 성내에는 동헌(東軒)과 어사(御舍), 교련청(敎鍊廳), 작청(作廳), 사령청(使令廳) 등의 건물이 있다.     


 한편 해미읍성은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사건이 일어났던 지역이기도 한다. 천주교 박해 당시 서산 해미읍성의 서문(西門) 밖 일대는 천주교 신자들에게 가장 두려운 장소였다. 정분문(靜氛門)이라 불렸던 해미읍성) 서문은 순교자들의 생사를 가르는 마지막 관문이었다. 성안의 옥에 수감된 천주교인들 가운데 형이 확정된 사람은 서문 밖으로 끌려 나와 처형되었다. 그러니 서문 밖 일대는 ‘사학죄인(邪學罪人)’들의 공식 처형장인 셈이었다. 매질이나 교수 혹은 참수로 사형이 집행되기도 하였고, 곡식을 타작하듯 메어치는 자리개질로 처형하던 돌다리도 있었다.     


 순교의 피로 얼룩진 서산 해미읍성의 서문 밖 일대는 세대가 지나면서 순교자의 열정을 기념하는 성지로 변화되었다. 1956년 유물 보존을 위해 서산성당으로 옮겨 갔던 해미읍성 형장 길의 자리개돌을 1986년 8월 29일 본래의 위치로 되돌려 놓으면서 ‘해미읍성 서문 밖 순교지’로 기념되기 시작하였다. 현재는 ‘순교 현양비’에 순교 내력이 담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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