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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은 Jan 19. 2023

13. 아라리의 고장, 평창(平昌), 정선(旌善)

당일형 답사

정성을 다해 간절함과 지극함으로 공양하고 있는 월정사 석조보살상의 모습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후회 없이 살라’는 가르침을 오랜 세월 동안 몸소 보여주고 있다.


1. 유유자적, 평창(平昌)     


 『평창』 하면 떠오르는 단어를 생각해보면, 동계올림픽, 스키장, 피겨퀸 김연아, 오대산, 대관령 양떼목장, 봉평 메밀, 평창 한우 등이 떠오르는데 이 단어들 하나하나 살펴보면 어느 것 하나 빠질 것 없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관광지이자 관광자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이면 모른다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로 평창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관광도시이다. 그리고 또 대관령, 용평, 봉평 등의 지역은 굳이 앞에 ‘평창’이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아도 누구나 알고 있는 인지도가 높은 지역이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더 알고 가야 할 중요한 점은, 평창은 국보 5점과 보물 6점을 보유한 문화유산의 보물창고라는 점이다. 강원도 전체 국보 12점 중 5점을 보유하고 있는데, 모두 오대산의 사찰 월정사와 상원사가 보유하고 있다. 그 수 많은 문화유산들이 가지고 있는 역사와 사연은 또 얼마나 흥미롭고 신비로울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평창은 ‘아라리’의 고장으로도 유명하다. 아라리는 예전부터 촌부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우리의 소리인데, 평창 아라리는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일대에서 오래 전부터 마을 사람들이 산나물을 뜯으며 불러온 소리이다. 평창 아라리의 가사는 매우 해학적이며 인생살이 속에 계속되는 희로애락과 생로병사가 잘 묘사되어 있고, 자연현상과 인간의 만사를 접목하는 뜻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 마디마디가 정겹고 친근하다. 사람들은 보통 ‘아라리’ 하면 정선을 제일 먼저 떠오르니 평창 입장에서 보면 여간 서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평창은 또 조선 후기 5대 사고(史庫) 중 하나인, 오대산 사고가 있는 곳이다.     

 

 조선 전기의 사고는 내사고인 춘추관과 외사고인 충주, 전주, 상주에 보관되어 있었다. 이러한 읍치(邑治)에 설치한 사고는 관리가 편리하고, 사고 건물 자체의 보호를 위한 시설 외에는 별도의 시설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인해 전주 사고본을 제외한 모든 사고의 실록이 소실되었는데, 이에 실록을 후대까지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한 방안이 논의되었고, 관리의 불편함이 있더라도 산간 오지 지역에 사고를 설치하여 실록을 보관하게 되었다. 그 장소로는 내사고인 춘추관과, 외사고인 태백산, 묘향산(적상산), 마니산(정족산), 오대산 사고이다. 춘추관의 사고는 조선 인조 때 ‘이괄의 난’을 겪으면서 소실되었고, 현재 태백산 사고는 부산 국가기록원, 묘향산 사고는 김일성 대학, 마니산 사고는 서울대학교 규장각, 오대산 사고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존하고 있다.

      

 평창 월정사 전나무숲길은 부안 내소사 전나무 숲길과 남양주 광릉 수목원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전나무숲길로 꼽히고 있다. 이 전나무 숲길과 월정사에서 상원사로 올라가는 선재길은 휴식과 힐링의 명소 중의 명소라고 할 수 있다.      


 사계절 다른 색깔, 다른 매력으로 우리의 힐링을 책임져 줄 평창으로 유유자적 떠나보는 건 어떨까? 지금이 어느 계절이든 좋다.  


2. 세조와 문수동자 이야기, 상원사(上院寺)     


 상원사는 평창군 오대산에 있는 사찰이다. 신라의 성덕왕이 부처님의 은혜로 왕이 되었다며 그에 대한 보은의 의미로 창건하였고, 문수보살이 36가지의 모습으로 변화해 나타났다고 전해지는 문수보살의 성지다.      


 조계종 제 4교구 월정사의 말사이며, 신라 33대 성덕왕(聖德王) 23년(724)에 건립되었다. 상원사는 비록 작은 절이지만 평창의 국보 5점 중, 3점을 보유하고 있는 보물 중의 보물 사찰이다. 상원사의 국보로는, 신라 성덕왕 때 제작되었으며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동종인 ‘상원사 동종’이 있고, 조선 세조와 관련된 ‘문수동자좌상’이 문수전에 모셔져 있으며, 역시 같은 세조 시기 상원사를 새롭게 단정하면서 지은 글인 ‘상원사 중창권선문’이 있다.     


 세조 재위 시기 국보 2점이 나왔을 만큼 세조와 관련된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으며 현대로 넘어와서 한국전쟁과 관련된 이야기도 간직하고 있다. 1951년 1·4 후퇴 때 연합군 사령부가 월정사와 함께 상원사를 소각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승려들의 저항으로 문만 떼어내서 불태웠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이처럼 한국사의 여러 장면에서 흥미진진한 에피소드로 주목되고 있는 상원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월정사보다 상원사를 먼저 들리는 이유는 월정사를 통과해야 상원사로 올라 갈 수 있으므로 위에서부터 보고 내려오는 동선으로 움직이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종, 상원사 동종     

 상원사 동종은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만들어졌으며, 우리에게 비슷하게 인식되고 있는 성덕대왕신종은 성덕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그 아들인 경덕왕이 만들기 시작하여 그 손자인 혜공왕 때 완성된 종이다. 그래서 상원사 동종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최고(最古)의 종이라고 할 수 있다. 크기는 높이 167cm, 입구 지름은 91cm이다.      


 상원사 동종은 1465년 상원사를 새로 짓는 일과 관련이 있는데, 조선 조정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아 1466년 상원사를 새로 지었지만 종은 끝내 만들지 못하였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종을 수배해 가장 아름답고 소리가 좋은 것을 상원사로 보내도록 하라는 어명이 내려졌다.      

경상도 안동의 역사를 기록한 <영가지(永嘉誌)>에 따르면, 안동의 어느 절에 국내에서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종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이 종은 나중에 안동도호부 남문의 누각으로 옮겨져 시각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안동 남문의 종이 선택되었고 죽령을 넘어 오대산 상원사로 옮겨지게 되었다.

상원사 종을 보면 사방으로 9개씩 모두 36개의 종유가 있는데, 정말로 그 중 하나의 종유가 떨어지고 없는 것을 볼 수 있다. 조선 예종 1년(1469) 이 종을 옮기다가 아마도 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일을 맡은 관리가 상당히 곤란했을텐데, 이때 재치 있는 사람이 다음과 같은 아이디어를 내었다.      


"고개를 넘다가 쉬는데 종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으니 어찌해야 합니까? 그 이유를 알아보니 이 종이 옛 고장 안동을 떠나기 싫어서인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종의 젖꼭지를 하나 떼어 안동으로 보내도록 하면 어떻겠습니까?"      


현대의 시점에서 바라보면 허무맹랑한 이야기이지만, 상원사 동종을 더욱 흥미롭게 볼 수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종의 구조를 미리 알고 종을 보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의 종을 서양의 종과 비교해보면, 우리 종은 전체가 둥글고 아래가 약간 좁아지면서 모여드는 모양인데, 서양의 종은 위가 좁고 아래가 치마처럼 넓게 퍼지는 모양이다. 그리고 우리 종은 푸른 빛을 내는 청동으로 만드는데, 서양의 종은 누런빛을 내는 황동으로 만든다. 우리 종은 낮은음이 많아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데, 서양의 종은 높은음이 많아 확 펼쳐지는 소리를 낸다.    

  

 또한 우리의 종을 주변국인 중국이나 일본과도 비교해보면, 재료나 치는 방법에서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데, 구조면에서 우리나라만의 독자성을 살펴볼 수 있다.      


 우리의 종은 음통이 있고, 당좌라는 종을 때리는 부분이 정해져 있는데 중국종과 일본종에는 없다. 그리고 종의 두께도 우리의 종은 부분마다 달라지면서 곡선을 이루고 있는 반면에 중국과 일본의 종은 종 두께가 똑같아서 전체적인 모양이 직선에 가깝다. 즉 우리의 종을 중국과 일본의 종에 비교해볼 때 음통과 당좌가 있고, 종의 두께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조와 문수동자의 만남, 문수동자 좌상     

 문수보살은 완전한 지혜를 가진 불교의 보살이며 과거 일곱 부처님의 스승이다. 오래전에 이미 깨달음을 얻었지만 대중이 모두 성불을 할 때까지 부처가 되지 않겠다며 부처가 되는 것을 거부했다. 완전한 지혜를 바탕으로 석가모니불의 교화를 돕기 위해 나타난 보살이다. 그래서 보통 대웅전에 가보면 가운데 석가모니불이 있고, 좌우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협시(脇侍)하고 있다. 보현보살이 세상 속에서 실천적 구도자의 모습을 띠고 행동할 때, 문수보살은 사람들의 지혜의 좌표가 되어주고 있다.      

 이러한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을 동자로 표현하여 모시고 있는 곳이 있는데 바로 상원사 문수동자좌상이다. 경건하고 위엄있는 겉모습이지만 동자로 표현해 놓은 만큼 다소 귀여움과 온화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면 왜 문수보살이 여기 이렇게 문수동자로 형상화되어 있는지 세조와 문수동자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마마, 정신 차리십시오."      

잠자리에 든 세조는 악몽을 꾸는지 온몸이 땀에 흥건히 젖은 채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옆에 누웠던 왕비가 잠결에 임금의 신음소리를 듣고 일어나 정신 차릴 것을 권하니 잠에서 깨어난 세조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마, 신열이 있사옵니다. 옥체 미령 하옵신지요?“     

세조는 대답 대신 혼자 입속말을 했다.     

, 업이로구나, 업이야."

"마마, 무슨 일이세요? 혹시 나쁜 꿈이라도 꾸셨는지요."

"중전, 심기가 몹시 불편하구려. 방금 꿈에 현덕왕후(단종의 모친 ·세조의 형수) 혼백이 나타나 내 몸에 침을 뱉지 않겠소."

", 저런‥‥     

꿈 이야기를 하며 다시 잠자리에 들었으나 세조는 잠을 이를 수 가없었다. 어린 조카 단종을 업어주던 모습이며, 생각하기조차 꺼려지는 기억들이 자꾸만 뇌리를 맴돌았다. 이튿날 아침, 이게 웬일인가. 꿈에 현덕왕후가 뱉은 침자리마다 종기가 돋아나고 있다니, 세조는 아연실색했다. 종기는 차츰 온몸으로 퍼지더니 고름이 나는 둥 점점 악화되었다. 명의와 신약이 모두 효험이 없었다. 임금은 중전에게 말했다.     

"백약이 무효이니 내 아무래도 대찰을 찾아 부처님께 기도를 올려야겠소."

"그렇게 하시지요. 문수도량인 오대산 상원사가 기도처로는 적합할 듯 하옵니다."     

왕은 오대산으로 발길을 옮겼다. 월정사에서 참배를 마치고 상원사로 가던 중 장엄한 산세와 밝은 계곡물 등 절경에 취한 세조는 불현듯 산간벽수에 목욕을 하고 싶었다. 자신의 추한 모습을 신하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늘 어의를 풀지 않았던 세조는 그날도 주위를 물린 채 혼자 계곡물에 몸을 담그고 목욕을 즐겼다. 그때였다. 숲속에서 놀고 있는 조그마한 한 동자승이 세조의 눈에 띄었다.     

"이리와서 내 등 좀 밀어주지 않으련?"

동자승이 내려와 등을 다 밀자 임금은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단단히 부탁의 말을 일렀다.     

"그대는 어디 가서든지 임금의 옥체를 씻었다고 말하지 말라."

"왕께서도 어디가서 문수보살을 친견했다고 말하지 마시오."     

이렇게 응수한 동자는 흘연히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왕은 놀라 주위를 살피다 자신의 몸을 보니 몸의 종기가 씻은 듯이 나은 것을 알게 됐다. 왕은 크게 감격했다. 환궁하자마자 화공을 불러 자신이 본 문수동자를 그리게 했다. 기억력을 더듬어 몇 번의 교정을 거친 끝에 실제와 비슷한 동자상이 완성되자 상원사에 봉안토록 했다. 현재 상원사에는 문수동자 그림은 없고, 목각문수동자상이 모셔져 있다.      


 병을 고친 이듬해 봄 세조는 다시 상원사를 찾았다. 상원사에 도착한 왕은 곧바로 법당으로 들어가서 막 예불을 올리려 하는데 어디선가 별안간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세조의 곤룡포 자락을 물고 자꾸 앞으로 못 가게 잡아 당기는 것이 아닌가, 이상한 예감이 든 왕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병사들을 풀어 법당 안팎을 샅샅이 뒤지게 했다. 아니나 다를까. 불상을 모신 탁자 밑에 세 명의 자객이 세조를 시해하려고 시퍼런 칼을 들고 숨어 있었다. 그들을 끌어내 참하는 동안 고양이는 벌써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하마터면 죽을 목숨을 구해준 고양이를 위해 세조는 강릉에서 가장 기름진 논 5백 섬지기를 상원사에 내렸다. 그리고는 매년 고양이를 위해 제사를 지내주도록 명했다. 이때부터 절에는 고양이논, 고양이 밭이라는 뜻의 묘답 또는 묘전이란 명칭이 생겼다. 궁으로 돌아온 세조는 서울 근교의 여러 사찰에 묘전을 설치하여 고양이를 키웠고, 왕명으로 전국에 고양이를 잡아 죽이는 일이 없도록 했다.     


 최근까지도 봉은사 밭을 묘전이라 부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또 지금도 상원사에 가보면 마치 이 전설을 입증하는 듯 문수동자상이 모셔진 문수전 계단 입구에는 돌로 조각한 고양이 석상이 서 있다. 문수전 안에는 왼쪽에는 국보인 문수동자좌상이 모셔져 있고, 오른쪽에는 보물인 문수보살좌상이 모셔져 있다.                                                                                       

문수전 안에는 왼쪽에는 국보인 문수동자좌상이 모셔져 있고, 오른쪽에는 보물인 문수보살좌상이 모셔져 있다.


문수전 안에는 왼쪽에는 국보인 문수동자좌상이 모셔져 있고, 오른쪽에는 보물인 문수보살좌상이 모셔져 있다.


상원사 중창 권선문     

중창권선문은 혜각존자 신미스님이 학열, 학조스님과 함께 상원사를 중수하려 하자, 세조가 이 이야기를 듣고 쌀, 무명, 베 등을 보내면서 그 취지를 함께 적은 글이다.     

 권선문은 두 책으로 되어 있는데, 한 책은 상원사 중창권선문이며, 한 책은 세조가 상원사 중창 취지를 적은 어첩(御牒)이다. 어첩에는 세조와 왕세자가 직접 찍은 도장도 있고, 효령대군을 비롯하여 여러 종실과 신하들의 이름과 수결(手決)이 있다.   

  

 훈민정음 제정 이후 제작된 판각이나 활자본 책자는 많이 접할 수 있지만, 직접 붓으로 쓴 것으로는 이 한글 권선문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조선 초기의 한글 서체를 살피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 왕가에서 직접 사찰에 보낸 귀중한 문서일 뿐 아니라 세조와 신미 등 고승들과의 관계를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이기에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겉표지는 붉은색 바탕에 당초문양이 들어 있는 비단으로 되어 있다. 크기는 세로 45.5센티미터, 가로 29.5센티미터로 접혀 있는데 펼친 총 너비는 810.5평방 센티미터이다.     


 중창권선문에는 신미, 학열, 학조같은 고승들의 친필서명뿐만 아니라 세조와 세자빈, 왕세자의 수결과 도장까지 찍혔으므로, 세조 때 조선 왕실의 불교 문화 포용성에 대해서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또한 한글을 직접 쓴 당대 필사본 중 매우 초장기 문서로 한글 창제 초기의 국문학 연구에도 중요한 사료이다.     

상원사 중창권선문은 월정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다.     


상원사를 지켜낸 한암(漢岩)스님     

 6·25 전쟁이 한창 기승을 부리던 1951년 1월 3일, 오대산의 깊은 산속에 위치한 상원사 법당 입구에서는 76세의 노승과 20대 초반의 국군 중위가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다. 그 싸움은 상원사에 불을 지르려는 국군 장교와 그를 저지하기 위해 생명을 던진 노승간의 결코 물러설 수 없는 한판 대결이었다.      


6·25전쟁으로 인해 전국의 문화재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소실되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북진을 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참전으로 눈물을 머금고 후퇴를 하였다. 마침내 국군은 38선상에서도 중공군의 총공세에 밀려 다시 남쪽으로 후퇴를 하였고, 주민들도 다시 피란을 가야만 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1·4후퇴이다.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당시 한암스님과 국군장교의 대화내용이다.     


이제 불을 지르시오.”     

스님, 이러시면 어떡합니까?”     

나야 죽으면 어차피 다비茶毘에 붙여질 몸이니 내 걱정은 말고 어서 불을 지르시오.”     

스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나오세요!”     

너희들은 군인으로서 상부의 명령에 의해 불을 놓는 것이니 불을 놓으면 되고, 나는 중으로서 부처님 제자로서 마땅히 절을 지켜야 돼. 너희는 상부의 명령을 따르면 되고, 나는 중으로서 부처님 명령을 따라 절을 지키면 되지 않느냐? 본래 중들은 죽으면 당연히 불에 태우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나이도 많고 죽을 날도 멀지 않았으니 잘된 것 아니냐. 그러니 걱정 말고 불을 질러라.”     


상원사 소각 명령을 들은 한암스님은 장교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하고서는 방에 들어가서 가사 장삼을 입고, 법당의 중앙에 가부좌를 하였다. 그리고는 장교에게 이제 되었으니 불을 놓으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노승과 장교는 상원사 소각을 놓고 눈에 핏발이 선 대결을 하였다. 장교의 옆에 있는 사병이 “이제 끄집어낼까요?”라고 말을 하였다. 당시 이 장면을 지켜본 한암스님의 상좌와 보살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면서 장교에게 제발 살려달라고 울면서 부탁하였다. 잠시 후, 무엇인가를 골몰히 생각한 장교는 “이 스님은 보통 스님이 아니다. 도인 스님이 분명해.”라고 말을 하면서 부하 사병들에게 상원사 법당 밖으로 나갈 것을 지시하였다.     


 그리고는 장교는 절을 태웠다는 증명을 하기 위해, 절의 문짝을 태워 연기라도 내야 하겠다는 양해를 노승에게 얻었다. 장교는 부하 사병들에게 상원사의 문짝 수 십여 개를 떼어내서 마당에 놓고 불을 지르도록 하였다. 문짝을 태운 검은 연기는 상원사 하늘로 높이 올라갔다. 그래서 멀리서 보면 상원사에 불이 난 것처럼 보였다. 문짝을 다 태운 장교는 불을 놓았다는 증거로 노승이 옻칠한 깨진 죽비 하나를 가지고 상원사를 내려갔다. 한암스님은 죽음을 무릅쓰고 상원사를 살려낸 것이다.     


 상원사를 수호한 한암스님은 조계종의 종정(宗正)을 네 번이나 역임한 근대 고승, 큰스님이다. 한암스님은 1876년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나, 그의 나이 22세 때인 1897년 금강산 장안사에서 출가하였다. 그는 치열한 수행을 하여 금강산 신계사와 해인사에서 두 차례의 깨달음을 겪었다. 1923년에는 서울의 봉은사 조실(祖室)로 추대되었으나, 일제에 의해 국권을 상실당하고, 불교마저도 친일 불교로 전락되어, 파계승이 들끓는 현실을 비판하면서 “천고에 자취를 감출지언정 춘삼월에 말 잘하는 앵무새는 되지 않겠노라.”는 말을 남기고 오대산 상원사로 들어갔다.           

              

3. 지극함과 간절함의 사찰, 월정사(月精寺)      


 월정사는 오대산의 대표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4교구 본사이다. 신라 선덕여왕 12년(643)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하였다. 자장은 7세기 전반기에 활동한 신라의 승려로, 불교가 신라의 국교로 자리 잡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자장율사는 당나라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親見)하고 부처님의 사리를 받아왔다고 하는데 그 일화는 다음과 같다.     


자장과 문수보살의 만남     


 자장율사는 당나라 유학 시절 오대산 문수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기도를 하는데 당시 중국에 태화지(太和池)라는 연못주위에 문수보살을 조각한 석상(石像)이 있었다. 이 문수보살 앞에서 기도를 하면 모든 소원이 성취된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 문수보살의 성지(聖地)이다. 자장율사도 태화지에 가서 7일 동안 정성껏 기도를 올렸다. 그때 꿈에 낯선 스님이 나타나서 네 구절의 시()를 알려 주었다.     

꿈을 깨고 나니 기억은 또렷하나 모두 산스크리트어로 되어있어 뜻을 풀 수가 없어 답답하였다. 고민을 하고 있던 이튿날 어떤 스님이 자장율사에게 오더니, 스님의 고민을 물었다. 어젯밤 꿈에 어느 스님께서 들려준 그 시의 뜻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자, “한번 외워 보라하였다.

이를 듣고 난 스님이 다음과 같이 풀이해 주었다.     

세상의 모든 이치를 깨달으니, 우리는 본래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

 이와 같이 세상의 진리를 깨달으니, 그것이 곧 부처님의 말씀이어라.“      

이는 석가여래께서 쓰시던 물건과 사리(舍利)이니 스님의 나라로 모시고 가서 잘 보호(保護)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며 석가여래께서 쓰시던 금란가사와 사리(舍利) 다섯 과를 자장율사에게 주면서      

신라는 매우 아름다운 곳이고, 일만 문수보살께서 머무시는 오대산이 있다 하는데 귀국하시거든 그곳에 이 사리를 안치하시오.” 하고는 그 스님은 어디로 가고 없었다.

자장이 부처님의 가사와 사리를 모시기 위해 신라로 돌아오려 하는데 태화지의 용왕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전날 부처님이 쓰시던 가사와 사리를 전하던 스님은 다름 아닌 문수보살이십니다. 스님께서 돌아가시거든 곧 절을 짓고 탑을 세워 잘 봉안토록 하십시오.”하였다.

자장율사는 귀국하여 문수보살에게 받은 부처님 금란가사와 발우와 사리 한 과를 영축산 통도사에 모시고, 설악산 봉정암. 사자산 법흥사. 오대산 상원사, 태백산 정암사에 사리를 나누어 모셨다.      


그 뒤 고려 충렬왕 33년(1307) 화재로 절 전체가 타버린 것을 다시 재건했고, 조선 순조 33년(1833) 또 다 타버린 것을 헌종 10년(1844)에 다시 중건했다.     


 월정사는 6.25 전쟁 당시 우리 손으로 불태운 절이다. 1951년 1.4 후퇴 당시 대한민국 국군이 북한군이 이 절에 머물 것을 우려해 월정사를 불태우고 내려갔던 것이다. 모든 전각과 1948년 선림원지 터에서 발견되어 이곳에서 보관하던 국보 416호였던 신라시대 동종까지도 녹아 없어졌으며, 남은 거라곤 화강암으로 만든 석탑과 전각의 기단, 석조보살좌상 뿐이었다.     


 지금의 건물은 한국전쟁 때 완전히 소실되어 1964년 이후로 새로 중창한 것이다. 월정사의 금당인 적광전(寂光殿)의 원래 이름은 칠불보전(七佛寶殿)이었다. 아마 불상 7좌를 모셔서 '칠불'이라 하였겠지만 화재로 전각이 불타며 다 없어진 탓에 이름을 바꾸었을 것이다. 한국 불교의 전통에서는 '적광전'이라는 이름은 비로자나불을 모신 전각에 붙이지만, 현재의 월정사 적광적에는 석가모니불 한 좌만 안치하였다. 고승으로 이름난 탄허 스님이 석가모니가 비로자나불과 둘이 아니라고 주장하여 '적광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 적광전의 앞에는 한국전쟁을 견디고 남았던 월정사 팔각구층석탑과 석조보살좌상이 마치 한 세트인 양 아름다운 구도를 보여주고 있다.     

 

서두르지 않는 길, 월정사 전나무 숲길     

월정사 일주문부터 금강교까지 약 1km 정도의 거리인데 전나무 숲길로 조성되어 있다. 이 평창 월정사 전나무 숲길은 남양주 광릉수목원 숲길과 부안 내소사 전나무 숲길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전나무 숲길로 지정되어 있다. 월정사 전나무숲에는 재미있는 설화가 전해져 오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고려말 오대산에는 나옹스님이 수도를 하고 있었다. 스님은 매일 월정사로 내려가 부처님 전에 콩비지를 공양하였다. 오대산의 눈은 축 늘어진 소나무 가지마다 수북이 쌓여 소리만 크게 질러도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어느 겨울나, 나옹스님이 비지를 들고 조심스레 눈길을 가고 있었다. 그런데 와락소리가 들리면서 소나무 가지 위에 얹혀있던 눈들이 스님과 스님이 들고 있던 비지를 덮쳐버리고 만 것이다. 순간 스님은 소나무를 크게 꾸짖었다.      

이놈, 소나무야! 너는 부처님의 진신(眞身)이 계신 이 산에 살면서 큰 은혜를 입고 있거늘, 어찌 감히 불전에 올릴 공양물을 버리게 한단 말이냐.”     

때마침 스님의 꾸짖는 소리를 듣게 된 산신령이 결단을 내렸다.      

소나무야, 너는 큰 스님도 몰라보고 부처님께도 죄를 지었으니 이 산에 살 자격이 없다. 멀리 떠나거라. 그리고 이제부터는 전나무 아홉 그루로 하여금 이 산의 주인이 되어 오대산을 번창케 하리라     


산신령의 명령에 따라 소나무들은 오대산에서 쫓겨나고 그때 이후로 전나무들이 주인 노릇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소나무와 전나무를 구분하는 방법은 아주 쉽다. 소나무는 솔잎이 두 가닥이고, 전나무는 잎이 한 가닥이다. 비슷한 수종인 리기다소나무 잎은 세 가닥, 잣나무는 다섯 가닥이다.      


 소나무는 햇볕을 좋아하고 가지가 양지쪽으로 뻗는다. 높은 산 바위틈에서도 뿌리를 박고 사는 이유다. 그러나 전나무는 축축한 음지를 좋아하고 그늘에서 잘 자란다. 또한 추위에도 강하다. 월정사 전나무 숲은 습한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어 전나무가 살기에 안성맞춤이다.    

  

 하루 하루를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잠시 뒤돌아볼 마음의 여유 없이 살고 있다. 야근으로 늦게 퇴근하면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자고 일어나서 다시 일하러 나가는데 바쁘다. 항상 서둘러야 한다. 일도 그렇고, 출퇴근도 그렇고, 가사도, 육아도 모두 서둘러야만 다 할 수 있다.      


휴일이든 휴가든 언제 하루 이 월정사 전나무 숲길에서 서두르지 않고 발걸음 옮길 때마다 콧속으로 느껴지는 청청한 숲의 향을 맡으며 어제의 일상은 잠시 내려두는 건 어떨까?      


나옹선사의 선시(禪詩)처럼 말이다.       


靑山見我 無言以生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蒼空見我 無塵以生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解脫嗔怒 解脫貪慾 성냄도 벗어 놓고 탐욕도 벗어 놓고

如山如水 生涯以去 산 같이 물 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고려의 국보,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은 고려 초기 석탑을 대표하는 다각 다층석탑으로 석탑 앞에는 공양하는 모습의 석조보살좌상이 마주 보며 앉아 있다. 고려 시대가 되면 4각형 평면에서 벗어난 다각형의 다층(多層)석탑이 우리나라 북쪽 지방에서 주로 유행하게 되는데, 이 탑도 그러한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고려 전기 석탑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탑은 8각 모양의 2단 기단(基壇) 위에 9개의 몸돌과 지붕돌로 구성된, 즉 9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뒤, 머리 장식을 얹어 마무리한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에는 안상(眼象)을 새겨 놓았고, 아래·위층 기단 윗부분에는 받침돌을 마련하여 윗돌을 괴어주도록 하였다.     


 탑신부는 일반적인 석탑이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급격히 줄어드는 모습과 달리 2층 탑신부터 거의 같은 높이를 유지하고 있으며, 1층 탑신의 4면에 불상을 모셔두는 감실(龕室)을 마련해 두었다. 지붕돌은 밑면에 계단 모양의 받침을 두지 않고 간략하게 마무리하였고, 가볍게 들려있는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풍경을 달아 놓았다. 지붕돌 위로는 머리 장식이 완벽하게 남아 있는데, 아랫부분은 돌로, 윗부분은 금동으로 만들어서 화려한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당시 고려 불교 문화의 특징인 화려하고 귀족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전체적인 비례와 조각 수법이 우수하여 다각 다층석탑을 대표할 만하다. 또한 청동으로 만들어진 풍경과 금동으로 만들어진 머리 장식을 통해 고려 시대 금속공예의 수법을 살필 수 있어 더욱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지극함, 간절함, 월정사 석조보살좌상     

 월정사는 자장율사에 의해 선덕여왕 12년(643)에 창건되었고, 6·25전쟁 때 전각이 모두 전소되는 아픔를 겪게 된다. 몇 군데 총알 자국이 있지만, 다행히도 월정사 팔각구층석탑과 그 앞에 있는 석조보살좌상만 큰 화를 피했다. ‘월정사 석조보살좌상’은 월정사를 대표하는 불교문화재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만의 독창적인 문화재이다.     


원래는 월정사 팔각구층석탑만 국보 48호였는데, 2017년 보물 139호였던 석보보살좌상이 국보 48-2호로 승격됐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과 월정사 석조보살좌상은 조성 당시의 조형적, 신앙적 의미를 모두 찾을 수 있는 것으로 판단되어 함께 국보로 묶는다”는 게 문화재청에서 밝힌 설명이다. 월정사 석조보살좌상과 팔각구층석탑은 어떤 의미를 담아 함께 조성한 한 세트이다. 보살상을 탑에서 분리하는 것은 그 가치와 의미를 상실한다는 것이다     


 탑 앞의 보살상은 높이 1.8m로 돌로 만들어졌다. 연화대좌 위에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무릎을 꿇고 앉아 무언가를 지극하게 공양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탑을 향해 공양하는 보살상은 고려시대, 특히 강원도 지역에서만 집중적으로 조성되었는데 이는 고려 불교와 이 지역의 특성이 독특하게 결합된 사례이다.     

 보살상의 명칭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탑을 향해 공양하는 모습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공양보살상’이라고 표현하는데 고려시대에는 문수보살로 칭해지기도 했다. 당시 오대산은 대중에게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의 성지로 워낙 유명했기 때문에 당연히 문수보살로 여겼던 것 같다.     


 그런데 이보다 더 유력한 보살상의 명칭이 월정사 관련 기록에 등장한다. 고려 후기 민지(閔漬)가 편찬한 <오대산사적(五臺山事蹟)>의 에는 “탑 앞에 약왕보살(藥王菩薩像)의 석상이 손에 향로를 들고 무릎을 괴고 앉아 있는데, 전해오기를 이 석상은 절 남쪽의 금강연에서 솟아 나왔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의 보살상의 모습과도 일치하는 기록이다. 약왕보살은 전생에 부처님을 찬탄하며 자신의 몸을 태워 공양을 올렸다. 그 불이 1200세까지 꺼지지 않았다고 하니 그 얼마나 지극하고 간절한 공양이었을까?     


 현재 팔각구층석탑 앞에 있는 석조보살좌상은 복제품이고 진품은 월정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박물관으로 들어가면 돔 형식의 커다란 전시관에 석조보살좌상만 특별하게 모신 전시실이 있다. 높은 천정에서부터 내려오는 빛이 석조보살상을 비추도록 구상한 이 공간에서 오랜 세월에 거쳐 완성된 본래의 석조보살좌상을 만나볼 수 있다.


 석조보살상의 가장 눈에 띄는 모습은 머리에 쓰고 있는 기다란 원통형의 보관이다. 통일신라 시대의 보살상에서는 볼 수 없는데 이는 중국 요(遼)나라 보살상의 모습과 흡사하여 중국에서 새로운 문화요소가 들어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얼굴은 길고 뺨은 통통하며 친근하고 복스럽게 보인다.      

 자신의 몸을 바쳐 정성을 다해 지극함과 간절함으로 공양하고 있는 월정사 석조보살상의 모습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후회 없이 살라’는 가르침을 오랜 세월 동안 몸소 보여주고 있다.              


간절함과 지극함으로 공양하고 있는 월정사 석조보살상의 모습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후회 없이 살라’는 가르침을 오랜 세월 동안 몸소 보여주고 있다.

4. 정선 아우라지     


 강원도 정선군의 지명으로 정선군 여량면 여량 5리에 자리 잡고 있으며, 골지천과 송천이 합쳐져서 한강의 본류(조양강)를 이루는 곳이다. '아우라지'는 어우러진다는 뜻으로서, 두 물줄기가 어우러져 한강을 이루는 데에서 이 이름이 유래했다.     


 정선 아우라지는 정선아리랑 애정 편 가사의 주요 무대가 되는 곳이다. 아우라지는 평창 발왕산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송천과 정선 임계와 태백 대덕산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골지천이 합류하여 어우러지다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아우라지로 합류하는 송천을 양수라 하고, 골지천을 음수라고 불렀는데 장마 때 양수가 많으면 대홍수가 나고, 음수가 많으면 장마가 끊긴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이곳은 조선 시대 남한강 물길 따라 서울로 목재를 운반하던 뗏목 터였다. 조선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수할 때 사용된 많은 목재를 떼로 엮어 이곳에서 한양으로 보냈다고 한다. 뗏목 운반을 하는 뗏꾼들은 많은 돈을 벌었는데 여기에서 ‘떼돈 벌었다’는 말이 유래하였다고 한다.     


 많은 돈을 벌기는 하였지만 일이 고되고 생명을 담보로 하는 뗏꾼들의 애환을 담은 아리랑 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아우라지는 뗏목을 타고 떠나는 님과 헤어지는 이별의 장소였고, 강을 사이에 두고 사랑하는 님을 만나지 못하는 애절한 사연을 담은 곳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아우라지에는 얽혀져 있는 이야기가 많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처녀 총각의 안타까움을 노래한 아라리     

 아우라지를 사이에 두고, 유천리와 여량리가 나누어진다. 두 마을을 오고 가려면 다리가 없기에 뱃사공이 배를 건네주어야 다닐 수 있었다. 옛날, 아우라지에 사랑하는 남녀가 살고 있었다. 처녀는 유천리에 살고, 총각은 여량리에 살았다. 이들 처녀와 총각은 유천리에 있는 ‘싸리골’로 동백을 따러 다녔다. 동백을 따러 갔다 온 처녀와 총각은 다음날도 또 만나서 동백을 따러 가기로 하고, 총각은 배를 타고 여량리로 건너갔다. 다음날 아침 총각은 아우라지 나루터로 갔는데, 전날 밤 내린 비 때문에 배를 띄울 수가 없었다. 총각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널 수 없는 마음을 노래로 지어 불렀다고 한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주게 / 싸리골 올동박이 다 떨어진다.     


한편, 강 건너에서 배를 타고 건너올 총각을 기다리던 처녀도 자신의 안타까움을 노래로 불렀다.      


떨어진 동박은 낙엽에나 싸이지 / 사시장철 님 그리워 나는 못 살겠네.          

한양 간 총각을 기다리다 아우라지에서 자결한 처녀     


 1987년 아우라지 언덕에 정선아리랑을 기념하여 ‘아리랑비’와 함께 처녀의 넋을 기리는 ‘처녀상’을 세웠다. 아우라지 부근은 한양으로 떠나던 뗏목이 출발하던 곳이다. 강물이 많은 어느 날, 총각은 뗏목을 타고 한양으로 갔다. 그런데 한양에 도착한 총각은 나무 판 돈을 가지고 정선으로 돌아오지 않고, 한양에서 모두 탕진했다. 그리고 한양 여자를 만나 고향에 두고 온 처녀에 대한 기억은 잊었다. 한편, 처녀는 매일같이 총각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총각이 돌아오지 않자, 그만 아우라지에 투신해 자결하였다고 한다.      


혼례 치른 처녀와 하객들이 목숨을 잃은 아우라지     

 여량면 여량리에서 혼례를 치른 처녀가 강을 건너 시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강을 건너기 위해 혼례에 왔던 하객들과 친척들이 나룻배를 함께 탔다. 그런데 강을 건너던 나룻배가 중심을 잃고 뒤집혀 처녀는 물론 많은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 아우라지에서는 해마다 두세 명씩 물에 빠져 목숨을 잃는 일이 생겼다. 그런데 처녀상을 세운 이후부터는 그런 일이 사라졌다고 한다.     

 

 5. 정선의 맛, 정선 별미 7     


 정선은 높고 깊은 산골이다. 그만큼 척박하고 경작이 어려워 물산이 풍부하진 않지만 나름의 청정 재료로 정선만의 투박하지만 편안하고 담백한 별미를 만들어 우리에게 먹는 즐거움을 주고 있다. 그 맛을 살펴보면,      

 첫째, 담백하고 속 편한 콧등치기 국수이다.

우리나라의 ‘면’ 문화는 지역의 토양과 기후, 사람들의 취향에 따라 다양하게 발달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우리 조상들이 즐겨 먹었던 면은 메밀이었다. 메밀은 춥고 척박한 땅에서도 재배가 가능한데 임진왜란 이후 흉년으로 기근이 들자 나라에서도 메밀 재배를 적극 권장했다고 하니 그야말로 대표적인 구휼작물이었다. 우리가 많이 접하는 메밀면 요리가 바로 막국수인데, 막국수 역시 척박한 강원도 지방에서 즐겨 먹던 메밀국수의 하나이다.     


 정선의 첫 번째 별미인 콧등치기 국수는 주재료가 메밀이다 보니 탄력이 없어 후루룩 먹으면 콧등을 친다고 해서 콧등치기 국수이다. 멸치와 다시마로 우려낸 육수에 멀겋게 된장을 풀어끓인 뜨거운 육수를 부어서 따듯하게 먹거나 오이냉국을 말아 시원하게 먹을 수 있다. 2일, 7일 열리는 정선장에 가서 건강과 웰빙의 맛, 강원도의 맛을 즐겨보는 것은 정선여행의 필수 코스이다.      


 정선의 두 번째 별미는, 올챙이 국수이다. 일명 올챙이 묵이라고도 부르는데, 국수의 재료에서가 아니라 국수의 모양에서 이름이 만들어진 것이다. 올챙이 국수 역시 콧등치기 국수처럼 먹을 것이 부족했던 시절 강원도민의 배를 채워주었던 음식이다. 올챙이 국수가 콧등치기 국수와 다른 것은 재료가 옥수수가루라는 것이다. 깊은 산골인 정선에는 쌀이 귀해 퍽퍽한 감자나 옥수수를 주식으로 먹고, 메밀을 이용하여 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그들에게 척박한 땅에서 먹고 살아야 했던 음식은 ‘맛’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으나, 지금은 외지인들도 웰빙과 문화체험 차원으로 올챙이국수를 많이 찾고 있다. 정선장의 먹을거리 장터에 가면 올챙이 국수를 맛볼 수 있다.   

      

 정선의 세 번째 별미는, 감자옹심이이다. 역시 강원도의 땅과 깊은 관려이 있는데, 흔히 강원도 사람들은 ‘감자바우’라고 부르는데 그만큼 감자요리를 많이 먹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감자요리는 당연히 강원도의 대표 음식이 되었다. 조선후기 실하자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감자는 1824년 무렵 만주의 간도 지방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후 평야가 적고 산이 많아 밭농사가 발달한 강원도에서 쌀을 대신해 먹을거리를 해결해주는 식량자원으로 자리해왔다. 투박함과 편안함을 고스란히 간직한 감자옹심이는 강원도 정선과 영월 등지에서 시작된 요리이며 지금의 도시사람들도 이 지역을 여행하게 되면 필수코스로 찾아서 먹게되는 대표메뉴이다.      


 정선의 네 번째 별미는, 메밀전병이다. 감자와 함께 강원도의 대표적인 구황작물로 사랑받아온 메밀은 옛날부터 강원도 땅에서는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음식 중 하나였기 때문에 강원도에서는 메밀을 곱게 빻은 메밀가루로 국수, 묵, 냉면, 만두, 전병 등을 만들어 먹었다. 특히 고기가 들어간 메밀전병은 메밀 음식중에서도 고급음식에 속했다. 메밀전병의 또 다른 이름은 ‘총떡’인데, 이 역시 모양이 긴 총대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메밀 반죽으로 얇게 전을 부쳐낸 뒤 그 위에, 김치, 당면, 야채, 두부 등을 다져 미리 양념해 둔 소를 올린 후 돌돌 말이 익혀 먹는데 담백하면서도 매콤한 맛이 일품이다. 정선 5일장이 열리는 날이면 시장 곳곳에서 메밀전병을 맛볼 수 있다.        


 정선의 다섯 번째 별미는, 곤드레밥이다. 청정지역 강원의 곤드레는 해발 700m 고지에서만 자생하며 ‘곤드레’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바람결에 흔들리는 모습이 마치 곤드레만드레 취한 사람 같아서이다. 곤드레는 생쌈으로도 먹고, 데쳐서 무쳐먹기도 하고, 튀겨서도 먹는다. 그 중에세도 곤드레 나물을 넣어 밥을 지은 다음 들기름과 함께 양념장에 비며 먹는 곤드레밥이 대표적인 곤드레 요리이다. 옛날에는 보릿고개를 해결하기 위해 곤드레 나물을 많이 넣고 밥을 지어 주린 배를 채웠는데, 오늘날에는 웰빙 별미로 각광받으며 귀한신 몸이 되었다.     


 정선의 여섯 번째 별미는, 황기백숙과 황기족발이다. 황기는 산지의 바위틈에서 자라는데 한방에서는 신체허약, 피로, 식은땀 등에 좋은 약재로 쓰인다. 황기의 주산지인 정선, 평창 지역에서는 대표적인 황기요리인 황기백숙과 황기족발을 맛볼 수 있다. 황기를 비롯해 칡, 오가피, 엄나무, 생강 등 각종 한약재를 넣고 요리한 황기요리들은 특유의 누린내가 나지 않는게 특징이다. 황기와 여러 약재와 토종닭을 푹 고아 만든 황기백숙은 여름철 으뜸으로 치는 보양식이며, 황기족발은 우리가 흔히 보아왔던 족발과는 겉모습에서 확연한 차이가 나는데 이는 족발의 살코기를 찢어서 차리니 마치 닭고기와도 같이 보인다.


 정선의 일곱 번째 별미는, 민물매운탕이다. 정선을 ‘산과 물의 고장’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가리왕산, 함백산, 민둥산 등 1000m를 훌쩍 넘는 산들이 즐비한데다, 아우리자에서 출발해 조양강, 동강으로 이어지는 강줄기가 있기 때문이다. 산이 높으니 논농사보다는 밭에서 감자, 고구마, 메밀등을 키웠으며, 각 종 산나물 역시 풍부했다. 그리고 강줄기가 정선 곳곳을 파고들고 있으니 ‘민물고기’ 역시 넉넉했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정선은 민물고리 요리가 발달되었다.      

 

6. 적멸보궁, 정암사(淨巖寺)     


 정암사는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함백산에 있는 절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 4교구 본사인 월정사의 말사이며, 한반도의 5대 적멸보궁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선덕여왕 5년(636)에 당나라 산시성 운제사에서 21일 동안 치성을 올려 문수보살을 친견하여 석가모니의 신령스런 보물인 진신사리, 가사, 염주 등을 얻어 귀국한 후 전국 각지 5곳에 나누어 모셨는데, 그 중 하나가 정암사이다.      


 사적기(事蹟記)에 의하면, 자장율사는 말년에 강릉 수다사(水多寺)에 머물렀는데, 하루는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문수보살의 메시지를 전하였다.     


 “태백산 갈반지(葛磻地)에서 만나자.”      


자장율사는 태백산으로 들어가 갈반지를 찾다가, 어느 날 큰 구렁이 여럿이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을 보고 화엄경을 외워 구렁이들을 쫓아냈다. 그리고 제자에게 ‘이곳이 갈반지’라 이르고 석남원(石南院)을 지었는데, 이 절이 지금의 정암사이다.     


 또한 정암사에는 자장율사와 문수보살 사이에 있었던 유명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자장이 이곳에서 문수보살이 오기를 기다리던 어느 날, 떨어진 방포(方袍)를 걸친 늙은 거사가 칡 삼태기에 죽은 강아지를 담아 와서 자장을 만나러 왔다고 하였다.     


 이에 시자(侍者)가 스승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을 나무라자 거사는 스승에게 아뢰기만 하라고 말하였다. 시자가 자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으나 미처 깨닫지 못하고 미친 사람으로 생각하여 만나지 않겠다고 하였다.     

 거사는 “아상(我相)을 가진 자가 어찌 나를 알아보겠는가.” 하고 삼태기를 쏟자 죽은 강아지가 사자로 바뀌었으며, 그 사자를 타고 빛을 발하면서 날아가 버렸다.이 말을 들은 자장이 황급히 쫓아가 고개에 올랐으나 벌써 멀리 사라져 도저히 따를 수 없었다.                     


7. 보물에서 국보로, 정선 정암사 수마노탑     


 수마노탑이라는 명칭은 불교에서 금, 은과 함께 7대 보석 중의 하나인 마노(瑪瑙)와 관련이 있으며, 자장율사가 진신사리를 가지고 귀국할 때 서해 용왕이 자장의 도력에 감명받아 마노석을 주었고, 그 돌로 탑을 쌓았다. 물길을 따라 가져왔다 해서 물 ‘水(수)’ 자를 앞에 붙여 ‘수마노탑(水瑪瑙塔)’이라 불렀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수마노탑은 총 길이가 9m에 달하며, 경주 분황사 모전 석탑 등 신라 시대 이래 모전 석탑에서 시작된 조형적인 안정감과 입체감 그리고 균형미를 잘 보여주고 있어 늦어도 고려 시대 이전에 축조된 것을 알 수 있다.     

 1972년 수마노탑 해체 당시에 함께 나온 탑지석(탑의 건립 이유, 수리 기록 등을 적은 돌로 탑 안에 넣어 둠)은 조성역사, 조탑기술 등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했다.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석가탑, 국보 제21호)과 다보탑(국보 제20호)을 포함해 탑의 이름이 지금까지 전하는 희소한 탑이다.    

 

 탑지석을 비롯한 자료에서 수리기록과 연혁을 알 수 있고, 모전석탑으로 조성된 진신사리 봉안탑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다는 점에서 역사적, 예술적, 미술적으로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특히 건축사적 관점에서 수마노탑을 평가해보면, 모전석탑 중 유일하게 완전한 형태의 청동제 상륜부를 갖추고 있다. 탑의 상륜부는 계속된 보수를 통해서 원래의 모습이 유지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나라 불탑 중에서 이렇게 완형을 보이고 있는 청동제 상륜부가 설치되어 있는 예는 극히 드물다.  

    

 또한 수마노탑은 강원지역에 있는 유일한 모전 석탑이며, 대부분의 석탑이 화강암이 주재료인 반면에 수마노탑은 백운암, 석회암을 함께 사용한 희귀한 석탑이다. 더불어 상륜부는 청동과 철제로 만들어져 있어 그야말로 다양한 재료를 사용한 불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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