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일형 답사
경기 동부권 답사, 남양주(南楊州), 양평(陽坪), 여주(驪州)
이번 답사는 경기도 동부권이다. 경기도 동부권이라 함은 서울을 중심으로 동쪽에 위치한 남양주, 가평, 양평, 여주, 이천 등이다. 예로부터 물 좋고 산세 좋은 곳으로 이름나 있으며 조선시대에도 왕릉들이 다수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명당 중의 명당이라고 할 수 있다. 서울권에서 강원도로 답사를 가려면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관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서울권에서 비교적 가깝기 때문에 당일 답사로도 제격인 코스이다.
남양주는 ‘양주의 남쪽’이라는 의미로 1980년 양주와 분리되면서 새로 만들어진 명칭이다. ‘양주’라는 명칭이 처음 나타난 것은 고려시대인 태조 19년(936)으로, “후백제왕 견훤에게 양주를 식읍으로 주었다.”는 『고려사』의 기록이 처음이다. 이후 고려 시대부터는 양주라는 명칭이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남양주 시의 노래, 시가(市歌)가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남양주 시가(市歌) -
천마산 저 소나무 우리들의 표상
개나리 예쁜 꽃잎 우리들의 마음
두터운 믿음으로 하나가 된 시민
기쁨은 나누고 아픔은 감싸며
너와 나의 웅대한 뜻 하나로 모아
아아 위대한 남양주 남양주의 내일을 열자
크낙새 노랫소리 새 아침을 열고
솔내음 향기 짙은 의절의 고장
다산의 숭고한 뜻 오늘에 살려
남한강 북한강이 하나로 가듯이
너와 내가 우리 되고 우리가 주인이 되어
아아 위대한 남양주 남양주의 내일을 열자
2.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시가를 통해 다산(茶山) 정약용이 남양주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산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태어났다. 본가는 압해 정 씨이며 외가는 해남 윤 씨인데, 이 외가가 바로 조선중기 문신이자 시조문학의 최고봉인 고산(孤山) 윤선도의 집안이다. 다산은 어릴 때부터 진주목사를 지낸 아버지 정재원의 공직생활을 보고 자람으로써 노인, 과부, 홀아비, 고아 등 사회적 약자들을 어떻게 여기고 돌보아야 할 것인가를 깨달았을 것이다. 이러한 외가의 학문적 배경과 친가의 실천적 지식이 훗날 다산의 학문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다산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다산(茶山)이라는 호 외에도, 삼미(三眉), 여유당(與猶堂), 사암(俟菴), 자하도인(紫霞道人), 탁옹(籜翁), 태수(苔叟), 문암일인(門巖逸人), 철마산초(鐵馬山樵) 등이 있다.
그중 삼미(三眉)와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어릴 적 천연두에 걸려 얼굴에 종기가 큼직하게 났는데 눈가에 나서 또래들이 마치 눈썹 같다고 그를 삼미, 말 그대로 눈썹이 3개라고 놀리듯이 불렀는데 화내지도 않고 "어 그러냐? 그래"라고 대했다고 한다. 아예 스스로를 삼미(三眉)라고 부르고 삼미집이라고 글을 쓰는 통에 놀리던 아이들이 아무 말도 못 했다고 한다.
또 여유당(與猶堂)과 관련해서 다산은 정조 24년(1800) 모든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지은 여유당기(與猶堂記)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는 나의 약점을 스스로 알고 있다. 용기는 있으나 일을 처리하는 지모(智謀)가 없고 착한 일을 좋아는 하나 선택하여할 줄을 모르고, 정에 끌려서는 의심도 아니하고 두려움도 없이 곧장 행동해 버리기도 한다. 일을 그만두어야 할 것도 참으로 마음에 내키기만 하면 그만 두지를 못하고, 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마음속에 담겨 있어 개운치 않으면 기필코 그만 두지를 못 한다.(중략)
이러했기 때문에 무한히 착한 일만 좋아하다가 남의 욕만 혼자서 실컷 얻어먹게 되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 또한 운명일까. 성격 탓이겠으니 내 감히 또 운명이라고 말하랴.
노자(老子)의 말에 “여(與) 여! 겨울의 냇물을 건너는 듯하고, 유(猶) 여! 사방을 두려워하는 듯하거라”라는 말을 내가 보았다.
안타깝도다. 이 두 마디의 말이 내 성격의 약점을 치유해 줄 치료제가 아니겠는가. 무릇 겨울에 내를 건너는 사람은 차가움이 파고 들어와 뼈를 깎는 듯할 터이니 몹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며, 온 사방이 두려운 사람은 자기를 감시하는 눈길이 몸에 닿을 것이니 참으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다.(중략)
내가 이러한 의미를 해득해 낸 지가 6,7년이나 된다. 당(堂)의 이름으로 하고 싶었지만 이윽고 다시 생각해 보고 그만두어 버렸었다. 초천(苕川)으로 돌아옴에 이르러서 비로소 써가지고 문미(門楣)에 붙여놓고 아울러 그 이름 붙인 이유를 기록해서 아이들에게 보도록 하였다."
다산은 벼슬길에 들어 학문과 문장이 뛰어난 정치가로서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지만 주위의 시기와 질투로 기나기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여유당이라는 어감에서 느껴지는 편안함과 달리 조심스레 세상을 살려고 했던 다산의 뜻이 담긴 호이다.
다산의 성장과정
다산은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공부를 잘했다고 한다. 7세에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니 멀고 가까움이 달라서라네(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라는 시를 지었는데, 부친인 정재원은 수학과 과학에 재능이 있을 것이라고 칭찬하였다. 정약용은 10세에 부친에게서 경서와 역사서를 배우기 시작했다. 15세에 한 살 연상인 풍산 홍 씨와 결혼하여 서울로 올라가 학문에 매진하였다. 부인 홍 씨는 각 도의 국방을 책임지던 병마절도사를 역임한 홍화보의 딸로 당대 명망이 있는 집안의 후손이었다. 서울에서 학문에 열중이던 다산은 이가환(李家煥), 이벽(李蘗), 이승훈(李承薰)등 남인 학자들과 교류하였는데, 이때 이익(李瀷)의 유고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고 실학에 뜻을 두게 되었다. 20세를 전후해 과거공부에 본격적으로 힘을 기울였으며 22세에 과거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이때 정조 대왕을 만나 총애를 받게 된다. 23세 때 고향 마현에서 배를 타고 서울로 가는 도중 두미협을 지나며 이벽이 들려준 서양의 학문과 종교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 28세에 드디어 대과(문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다산은 정조가 인재선발을 위해 세운 규장각에서 교육 및 연구과정을 밟는 초계문신(抄啟文臣)으로 발탁되는 등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재주와 능력을 발휘한다. 특히 배다리 설계에서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았으며 31세 때 정조로부터 수원화성(水原華城) 설계를 명령받는다.
그러나 정조 15년(1795) 4월, 중국 사람이자 한국 최초의 외국인 신부였던 주문모(周文謨)가 조선사람으로 변복을 하고 포교를 위해 들어왔다가 발각된 이후 조선에서의 천주교도 압박은 더욱 거 심해졌다. 이후 정조는 다산을 황해도 곡산부사로 임명하는데, 이는 다산의 천주교 혐의를 씻어주고 반대파의 정치적 공세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함이었다.
곡산 부사로 부임하던 길에 고을 주민들과 함께 관아에 항의하다 도망 다니던 이계심(李啓心)을 만났다. 정약용은 관청의 행정에 항의하는 그의 태도가 오히려 관청이 밝은 행정을 하는 데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권위적 지배를 부정하고 백성의 고통을 해결해 주려는 목민관의 자세를 몸소 실천했던 것이다. 정약용은 곡산부사로 2년 동안 근무하면서 한 고을의 피폐한 민생을 구제하고 누적된 폐단을 바로잡는 행정을 펼 수 있었다. 이때의 경험이 《목민심서》 저술에 영향을 주게 된다.
정조 23년(1799)에 다시 형조참의로 정조의 부름을 받았으나 다산의 재능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세력의 정치적 공격도 고조되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다산은 정조 24년(1800) 봄에 처자식을 거느리고 고향인 마현으로 돌아왔다. 시기와 질시를 받는 상황에서 벼슬을 하지 않고 낙향하면 정적들의 공격도 멈출 것이라 생각했다. 낙향하여 여유당(與猶堂)을 짓고 세상과 거리를 두고자 하였으나, 정적들의 칼날은 피할 수가 없었다. 정조가 갑자기 죽으면서 다산을 보호해 줄 사람이 없어지자 정적들의 공격은 더욱 거세졌다. 순조 1년(1801) 천주교 신앙의 전파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정적들이 일으킨 신유옥사(辛酉獄事) 때 유배를 가게 된다.
강진은 그의 외가가 있는 지역이었고 외가의 장서량이 상당했기에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할 수 있었다. 해남에 있는 '녹우당'이 해남 윤 씨의 종가로 자체적으로 장서를 수집해 '만권당'이라는 장서각을 지어놓았다. 바로 이 집안이 고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의 종가다.
그런데 하필 강진현감이 노론 벽파의 맹장 이안묵이었는데 그는 남인인 정약용을 못마땅히 여겨 유배지에서 정약용을 냉혹하게 대했고 정약용도 이안묵 재임 3년 동안 유배지에서 힘든 생활을 이어갔다.
18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유배되어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연구의 성과가 나타나는 유배 후반기에 탈고된 것이 많다. 1818년 8월에 18년 동안의 귀양살이를 끝내고 고향인 남양주로 돌아왔으며 저술 활동에 힘쓰며 여생을 보내다 1836년 2월 22일 향년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남양주 능내리에 있는 다산 유적지에는, 다산문화관, 다산기념관, 여유당, 다산의 묘(墓), 문도사, 실학박물관 등의 유적이 있으니 여유롭게 관람하며 다산(茶山)의 삶과 철학, 그리고 후대에 전하는 가르침까지 곰곰이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
2. 의병(義兵) 운동 발원지, 지평(砥平)
19세기말, 서양 제국주의 시대를 맞이하여 동아시아 삼국(한, 중, 일)은 문호를 개방하게 된다. 특히 조선은 개화사상과 위정척사 사상 간의 갈등 속에서 임오군란, 갑신정변 같은 역사 속 굵직한 사건들이 일어났으며, 또한 새로운 사회를 꿈꾼 이들이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키고 이들의 요구가 갑오개혁에 반영되기도 한다. 대한제국 수립 이후 국권침탈이 본격화되자 애국 계몽 운동과 의병운동 등 국권 수호 운동이 전국적으로 이어져 나갔다.
1895년 10월 명성황후가 경복궁에서 시해되었다. 같은 해 11월 일본은 조선인에게 단발령을 공포한다. 안 그래도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일본에 대한 반발심이 커져가고 있었는데 단발령을 계기로 양평지역에 있는 화서학파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대규모 의병운동이 일어난다.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이항로는 조선 말기 양평지역에서 대대로 살고 있던 재야의 성리학자로 위정척사론과 의병항쟁의 사상적 기초를 마련하였다. 그는 17세가 되던 1808년 과거시험에 합격했으나 이를 구실로 권력층의 고관 자제와 친교를 종용받자 거부하고 다시는 과거시험을 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관직에도 나가지 않았다. 오직 주자의 학문에만 심취하여 이름 있는 학자들과 학문교류를 하면서 지냈다.
이항로는 주자와 송시열을 숭상하였으며, 호남의 기정진, 영남의 이진상과 함께 조선 말기 주리(主理) 철학의 대가 가운데 하나로 이름을 알렸다. 그는 우주를 하나의 생명력 있는 유기체로 보아 모든 자연은 생성법칙이 있고, 사람의 마음 또한 우주의 법칙인 천리에 따른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주리적인 입장은 조선 말기 서양문화의 유입과 다양한 사상의 출현으로 기존의 가치관이 동요하던 시대적 상황에서 지켜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의 가치 기준을 제시해 주었다. 곧 조선의 유교 문화 전통을 수호·보존하고 위협적인 서양문화를 배척한다는 의식을 확립하였다. 1830년대 후반부터 그를 찾아오는 수많은 유생과 함께 유학의 경전을 강의하는 모임을 지속적으로 실시하여 제자들을 양성하였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김평묵(金平默)·류중교(柳重敎)·류인석(柳麟錫)·최익현(崔益鉉) 등이 있는데 이들이 바로 화서학파이다.
이러한 이항로의 제자들과 문인들로 이루어진 화서학파는 명이 멸망한 다음 조선이 중화 문명의 유일한 계승자라고 자부하는 의식의 기반 위에서 송나라와 원나라, 고려의 역사를 포함한 동아시아의 세계사를 성리학적 세계관에 따라 체계화하려는 시도로 『송원화동합편강목(宋元華東合編綱目)』이라는 역사서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양평은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지는 지리적 여건으로 뱃길과 육로가 만나는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중앙의 소식을 가장 빨리 접할 수 있었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과 이항로라는 대학자의 사상이 양평을 의병 봉기의 출발점으로 만들어 주었으며 이후 전국적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당시 을미의병의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895년 단발령이 내려지자 여주의 곡수(曲水)에 살고 있던 이춘영은 고향인 지평으로 가서 안승우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안승우는 당시 제천에 있었기 때문에 집에 없어 그의 부친인 안종응에게 대책을 물었다. 안종응은 이춘영에게 포군 대장 김백선(金伯善) 이 큰 뜻을 품고 있음을 알리고 그를 찾아가 보도록 하였다. 당시 김백선은 1894년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하여 지방 포수 600여 명을 모아 포군을 조직하였었다. 이춘영은 그날 밤 김백선을 만나 의병을 함께 일으키기로 약속하고 김백선 휘하의 포수들을 의병에 참가하게 하였다. 김백선이 군사를 책임지고 이춘영이 재물을 책임지기로 하고 1895년 11월 26일 안창에서 모이기로 하였다.
한편 안종응은 이춘영이 의병을 일으킨다는 소식을 듣고 제천 장담에 있던 아들 안승우를 불러 의병에 가담토록 하였다. 또한 이춘영은 김백선과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정하고, 장담에 있던 류인석에게 알리자 류인석은 곧 안승우를 지평에 보내어 의병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안승우, 이춘영, 김백선은 1895년 11월 28일 원주 지정면 안창리에서 의병부대를 결성하였다. 또한 이들은 원주에서 의병을 더 모집하여 1,00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원주관아에 들어가자 원주군수 이병화는 충주로 도망갔으며, 충주관찰사는 정부에 원병을 요청했다. 정부는 친위대 1개 중대를 원주로 출병시켰다.
지평 의병의 원주 관아 점령은 전기의병 초기 단계에서 얻은 쾌거로 이후 춘천과 안동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지평의병은 제천과 단양전투를 거친 후 영월로 이동하여 류인석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여 연합의병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충주전투와 제천전투에서 관군 및 일본군과의 치열한 전투 끝에 모두 순국하였다. 특히 제천전투를 살펴보면 관군과 일본군은 제천성을 공략하기 위해 총공세를 펼쳤는데, 안승우는 직접 화약을 넣으며 전투를 독려했다. 그러나 갑자기 비가 내리면서 의병들의 화승총이 물에 젖어 쓸 수 없게 되었다. 이때 안승우는 적의 탄환을 맞고 3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안승우는 죽기 직전 적진을 향해 다음과 같이 외쳤다.
“너희들도 조선 사람의 심장이 있다면 생각해 보라. 개화를 주장한 지 수십 년에 성취한 일이 무엇이냐. 국모를 시해하고, 임금을 머리 깎으며, 5백 년 전래의 종묘사직과 신하 백성들이 모두 이적 금수가 되고, 모든 성인의 제도와 중화의 명맥은 하루아침에 멸망되고 만 것이다. 너희들은 이런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기에 도리어 원수의 앞잡이가 되어서 충의로 국가를 일으키려는 사람들을 죽인단 말이냐. 나는 이제 죽을 곳을 얻었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느냐.”
당시 의병들의 화승총은 유효사거리 및 명중률이 매우 낮았고 항상 불붙은 심지를 이용해야 하므로 비가 오거나 습도가 높은 날에는 사용할 수 없었다. 반면 일제의 38식 보병소총은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최신형 총기였으며 그 성능이 매우 뛰어나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일본군의 주요 화기였으며, 6·25 전쟁 초기까지도 사용된 무기였다. 반동이 적어 다루기 쉬웠으며 총구가 적어 적에게 발각될 위험도 낮았다. 말 그대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으나, 조선의 의병들은 당시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일본을 상대로 목숨을 걸고 결사항전을 벌였고, 그러한 정신은 기나긴 국내외 항일 독립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구한말, 주요 의병투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을미의병(1895년)
1895년 10월의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11월의 단발령 공포에 대한 반발로 양평지역의 화서학파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1895년 말 이춘영이 안종응과 계책을 논의한 뒤 포장군 김백선을 찾아가 거병을 결의하며 원주 안창지역에서 창의(唱義)하였다.
을사의병(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통감정치를 실시하자 이에 항의하여 일어난 의병으로 평민 출신 의병장이 출현하는 등 평민들도 의병단체를 만들어 항일의병 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정미의병(1907년)
일제에 의한 고종의 강제 퇴위로 항일 감정이 극에 달했다. 해산된 군대가 의병에 참여해 의병은 더욱 조직적인 작전 전개가 가능해졌다. 각 지방의 의병장들이 연합하여 13도 창의군을 조직하고 양평을 거점으로 서울 진공 작전의 실행을 준비하였다.
3. 역전의 발판, 지평리 전투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북한군은 38도선 전역을 넘으며 기습적으로 남침을 강행한다. 이로써 민족의 비극인 6·25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에는 유엔군과 중국 인민지원군이 참여한 국제전으로까지 확대되었고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기 전까지 3년 1개월 동안 교전이 일어났으며, 현재까지도 끝나지 않은 전쟁이다.
한편 6·25 전쟁 당시 국군이 전세를 역전한 2대 역전 전투가 있는데, 하나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인천상륙작전’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잘 모르고 있는 바로 여기 ‘지평리 전투’이다.
인천상륙작전은 7만 5천여 명의 유엔군이 9월 15일 인천에 상륙해 수도 서울을 탈환하면서 전쟁의 분위기를 역전하게 된 작전이다. 북한군의 후방으로 기습한 유엔군은 9월 말까지 38도선을 수복했다. 낙동강 일대에 배치되었던 북한군 주력은 퇴로가 차단되면서 붕괴하였으며, 유엔군이 38도선을 넘어 북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중국은 유엔군의 38도선 돌파가 임박한 1950년 10월 8일 항미원조(抗美援朝), 보가위국(保家衛國)이라는 명분으로 전쟁개입을 결정했다. 중국의 참전으로 6‧25 전쟁은 소련을 비롯한 공산국가의 군사지원을 받는 조‧중 연합군 대 유엔군의 전쟁, 즉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의 전쟁으로 바뀌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중국의 인해전술(人海戰術)은 돌파해야 할 핵심지역을 선정하고 집중공격 후 단계별 공격을 감행했다.
① 소수부재로 상대의 화력과 주의력을 유인하고 주력부대는 상대의 허점을 공격하여 포위
② 나팔과 피리, 꽹과리 등으로 공포심을 유발하면서 ‘바닷가에서 파도가 밀려오는 것’과 같은
제파식 공격 반복
③ 탄약이 떨어진 유엔군이 후방으로 철수를 시작하면 후방에 침투해 있던 중국군이 공격하여
섬멸
당시 유엔군은 예상하지 못했던 적군의 공격에 전투대형이 무너지면서 부대들이 연쇄적으로 붕괴되었다. 1950년 12월, 유엔군은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었고, 전쟁지도부는 한반도에서 철수까지 검토하고 있었다. 그때 지상군 총사령관 매튜 리제웨이(Matthew B. Ridgway) 장군은 장병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공격 작전을 계획하면서 베일에 감추어져 있던 중국군의 실체를 파악해 나가게 된다.
그리고 드디어 수세에 몰렸던 유엔군이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는 전환점이 있었는데 바로 ‘지평리 전투’였다. 지평리 전투는 미 2사단 23 연대(프랑스대대 배속)가 1951년 2월 13일부터 16일까지 지평면 일대에서 중구군 3개 사단 규모의 집중공격을 막아낸 전투이다. 중국군 참전 이후 유엔군이 중국군과 싸워 얻은 최조의 전술적, 작전적 승리였다. 이 지평리 전투 이후 유엔군은 패배의식에서 벗어나 과감한 공세로 전환할 수 있었다. 당시 유엔군은 5,600여 명이었고 중국군은 50,000명이었다. 10배 가까운 적을 상대로 승전을 거둔 당시 전투는 유엔군에게 큰 희망과 자신감을 심어준 전투였다.
당시 전투에서 공을 세웠던 미 2사단 23 연대장인 폴 프리먼 대령은 박격포탄 파편으로 다리를 다쳤지만 후송을 거부하고 작전이 성공할 때까지 부대를 지휘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자유를 수호하고 부하를 아껴야 하는 군 지휘관으로써 최고의 명언이다.
“내가 부하를 이끌고 여기에 왔으니 나갈 때도 함께 데리고 나갈 것이다.”
또한 프랑스 대대장인 몽클라르 중령은 1, 2차 세계대전의 영웅으로 중장까지 진급하였으나 참전을 위해 스스로 중령으로 강등하여 6‧25 전쟁에 참전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계급은 중요하지 않다. 곧 태어날 자식에게 유엔군의 일원으로 평화를 위해 참전했다는 긍지를 물려주고 싶다.”
몽클라르 중령은 중국군의 피리와 나팔소리에 병사들이 불안해할까 봐 수동식 사이렌으로 맞불을 놓았다. 수동식 사이렌에서 나는 엄청난 굉음은 중국군이 불어대던 피리, 나팔, 꽹과리 소리를 순식간에 잠재웠으며 예상치 못한 상황에 중국군을 혼란스럽게 했다. 프랑스 대대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빨간 수건을 머리에 매고 돌격해, 중국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며 야간 심리전에 능한 중국군의 전략에 맞섰다.
4. 세계유산, 조선 왕릉(王陵)
조선 왕릉의 종류와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능(陵)은 왕과 왕비, 그리고 훗날 추존된 왕과 왕비, 황제나 황후의 무덤을 말한다. 그리고 원(園)은 왕을 낳은 후궁, 왕세자와 왕세자빈, 왕세손, 황태자와 황태자비의 무덤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묘(墓)는 나머지 왕족들(대군, 군, 공주, 옹주, 후궁)과 폐왕의 무덤(연산군 묘, 광해군 묘)을 말한다.
태조의 능인 건원릉부터 순종황제의 유릉까지 총 27대에 걸친 왕들의 능이 있으며. 추존된 왕릉 5개가 있다.
왕릉의 형식을 살펴보면, 왕과 왕비의 능을 단독으로 조성한 능은 단릉(單陵)은 태조의 건원릉, 단종의 장릉, 중종의 정릉 등 15기의 능이 있다.
쌍릉(雙陵)은 왕과 왕비의 봉분을 하나의 곡장 안에 나란히 조성한 능으로, 우상좌하(右上左下, 오른쪽에 왕, 왼쪽에 왕비)의 원칙에 따라 조성되었으며 대표적으로 명종의 강릉, 영조의 원릉, 철종의 예릉 등 9기가 있다.
왕과 왕비를 하나의 봉분에 합장한 능은 합장릉(合葬陵)이라 하며 대표적으로 세종의 영릉, 인조의 장릉, 정조의 건릉 등 8기의 능이 있다. 영조 이전의 합장릉은 혼유석을 2좌씩 배치하였으나 영조 이후에는 혼유석을 1좌씩 배치하였다.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은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봉분과 상설을 조성한 능으로 최초의 동원이강릉은 세조의 광릉이며, 예종의 창릉, 성종의 선릉 등 7기의 능이 있다.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은 한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위아래로 조성한 능으로, 능혈의 폭이 좁아 왕성한 기가 흐르는 정혈(正穴)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풍수지리적인 이유로 조성하였다. 효종의 영릉과 경종의 의릉 2기가 해당되며, 왕의 능침에만 곡장을 둘렀다.
삼연릉(三連陵)은 한 언덕에 왕과 두 명의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능으로, 헌종의 경릉이 유일하다. 우상좌하(右上左下)의 원칙에 따라 오른쪽(정면에서 볼 때 왼쪽)에 왕을 모시고 첫 번째 왕비(효현성황후)와 두 번째 왕비(효정성황후)를 순서대로 모셨다.
단릉 형식은 태조 건원릉부터 시작하여 조선 중기까지 나타나며 18세기 이후에는 거의 볼 수 없다. 쌍릉 형식은 조선시대 전반적으로 고르게 나타나며, 동원이강릉 형식은 세조 광릉을 시작으로 15세기에만 집중되었을 뿐 이후에는 볼 수 없다. 합장릉의 형식은 18세기 이후에 많이 나타나는데, 이는 능역 조성 시 소요되는 경비와 인력을 절감하기 위해서이다. 그 밖에 풍수적인 입지와 공간적으로 협소하여 동원상하릉의 형식과 삼연릉 형식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조선왕릉의 입지는 풍수사상을 기초로 한다. 왕실과 국가의 번영을 위해 자연지형을 고려하여 터를 선정하는 것이 필수적인 사항이었으며, 기본적으로 지형을 거스르지 않는 원칙을 고수하였기 때문에 크기나 구성에 있어 자연친화적이며, 주변경관과 잘 조화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크게는 도읍지인 한양(현 서울) 주변의 한강을 중심으로 한강 북쪽의 산줄기인 한북정맥과 남쪽의 지형인 한남정맥을 중심으로 정해졌다. 그리고 봉분을 중심으로 한 능침공간은 조선의 풍수사상에서 길지라고 일컫는 사신사(四神砂)가 갖추어진 곳과 잘 부합하게 된다. 이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을 갖춘 곳으로, 주산(主山)을 뒤로하고 그 중허리에 봉분을 이루며 좌우로는 청룡(靑龍, 동)과 백호(白虎, 서)의 산세를 이루고 왕릉 앞쪽으로 물이 흐르며 앞에는 안산(案山)이 위치한 곳이다.
또한 왕릉의 입지선정에는 풍수지리 이외에도 지역적 근접성을 고려하는 것도 중요하였는데, 풍수적으로 명당이면서도 왕궁이 있던 도성(한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곳이 왕릉의 최적지였다. 이와 같이 접근성이 중요한 입지 조건이 되는 것은 후왕들이 자주 선왕의 능을 참배하고자 하는 효심의 실천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선왕릉의 공간은 성격에 따라 진입공간, 제향공간, 능침공간의 세 공간으로 나눌 수 있으며 각 공간은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왕릉은 죽은 자를 위한 제례공간이므로, 동선의 처리에 있어서도 죽은 자와 산 자의 동선을 엄격하게 분리하고 죽은 자의 동선만을 능침영역까지 연결시켜 공간의 상징성을 부여하고 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산 자는 정자각의 정전에서 제례를 모신 뒤 서쪽 계단으로 내려오고 죽은 자는 정자각의 정전을 통과하여 능침공간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협약에 의하면 10가지의 보편적인 가치 기준이 있는데 조선왕릉은 아래의 세 가지 기준을 충족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Criterion (iii) 자연친화적 독특한 장묘 전통
문화적 전통 또는 살아 있거나 소멸된 문명에 관한 독보적이고 특출한 증거가 되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왕조 특유의 세계관, 종교관 및 자연관에 의해 타 유교 문화권 왕릉들과 다른 자연친화적인 독특한 장묘 문화를 보여준다.
Criterion (iv) 인류역사의 중요한 단계를 잘 보여주는 능원조영과 기록문화
인류 역사의 중요한 단계를 보여주는 건조물의 유형, 건축적 또는 기술적 총체 또는 경관의 탁월한 사례이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5백 년 이상 지속하여 만들어진 조선왕릉은 당대의 시대적 사상과 정치사, 예술관이 압축적으로 나타나 있으며 공간구성과 건축물과 석물 등이 가지고 있는 예술적 독창성이 뛰어나다.
Criterion (vi) 조상숭배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는 살아있는 유산
탁월한 보편적 중요성을 보유한 사건 또는 살아 있는 전통, 사상, 신념, 예술적/문화적 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계되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국가 제례가 정기적으로 이어지고 있고, 왕의 신위를 모시고 제례를 지내기 위한 공간인 종묘가 설립되어 조상숭배의 전통이 이어져 오고 있다.
조선왕릉의 공간은 성격에 따라 진입공간, 제향공간, 능침공간의 세 공간으로 나눌 수 있으며 각 공간은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5. 최고의 명당자리, 영릉(英陵)
영릉(英陵)은 조선의 4대 임금인 세종과 소헌왕후를 모신 조선왕릉으로 경기도 여주시 세종대왕면 왕대리에 있다. 조선 임금 중 성군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애민정신, 훈민정음, 과학기술 발달 등의 업적으로 가장 훌륭한 임금 중 한 명으로 기억되고 있는데 왜 이러한 세종의 릉이 여주까지 오게 되었을까?
원래 세종은 아버지 태종의 헌릉 근처에 묻히고 싶어 해서 먼저 세상을 떠난 소헌왕후를 태종의 능역 서쪽에 장사를 지냈고 자신이 승하한 후에도 그곳에 합장하려 하였다. 그런데 당대 풍수가로 이름이 난 최양선이 능의 자리를 보고, “여기는 후손이 끊기고 장남을 잃게 되는 무서운 자리입니다.” 라며 반대를 하였다. 정인지 등의 신하들이 헛소리로 치부하며 “이런 요망한 소리를 하는 자는 처단해야 한다.”라고 했지만 세종은 그냥 기분 좋게 넘어갔다.
그러나 우연의 일치처럼, 최양선이 주장했던 것처럼 세종의 장남 문종은 즉위 2년 만에 승하하였고, 문종의 장남 단종 또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였으며,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와 예종의 장남 인성대군도 요절했다.
이 때문에 예종은 할아버지인 세종의 능을 여주로 이장하였다. 당시 영릉 자리에는 우의정을 지낸 광주 이 씨 이인손(李仁孫)의 무덤이 있었는데, 야사에 따르면 무덤 자리를 양보해 달라는 예종의 청을 받아들인 이인손의 후손들이 묘를 파자 '이 자리에서 연을 높이 날린 다음 줄을 끊어 연이 떨어지는 자리로 이장하라'는 지석이 나왔고, 후손들이 이를 따르자 연이 떨어진 자리도 명당이어서 가문이 계속 번창했다고 한다.
영릉 자리는 당대 풍수가들 사이에도 최고의 명당자리로 여겨지며 평판이 대단했다. 태조의 건원릉, 단종의 장릉과 더불어 3대 명당으로 손꼽히고 있으며, 훗날 이야기로 세종 같은 훌륭한 임금을 이런 최고의 명당에 모셨기 때문에 조선왕조의 수명이 100여 년은 연장되었다는 ‘영릉가백년(英陵加百年)’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또한 영릉은 조선의 역대 왕릉에서 마지막으로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진 능이기도 하다. 조선의 왕릉에서 신도비가 세워진 능은 건원릉(태조), 후릉(정종), 헌릉(태종)과 영릉뿐이고 그 이후의 왕들은 신도비가 없다.
같은 이름으로 영릉(寧陵)은 조선 제17대 효종과 그 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무덤이며, 왕과 왕비를 좌우로 나란히 하지 않고 위아래로 만든 동원상하릉 형식을 취하고 있다. 세종대왕 영릉(英陵)과 효종대왕 영릉(寧陵)은 모두 봉분 앞까지 올라가서 봉분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