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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은 Jul 18. 2023

16. 한국사 씬스틸러, 인천 강화도(江華島)

당일형 답사

 ※ 강화도 하면 한반도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연급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씬스틸러라고 명명함.


1. 한국사 씬스틸러인천 강화도(江華島)    

 

 강화는 현재 인천광역시 소속의 섬이다. 원래는 경기도 소속의 섬이었으나, 1995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인천으로 편입되었다. 강화도 하면 한반도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씬스틸러 역할을 해왔는데, 일단 지리상으로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과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과 가까웠으며, 두 수도의 주요 하천인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과 연결되는 중요한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제37권에 따르면 강화를 ‘혈구군’ 또는 ‘갑비고차’라고 했으며 고구려에 속한 지역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통일신라 경덕왕 때 이름을 바꿔 ‘해구군’으로 개칭하였으며, 고려 태조 때 ‘강화현’으로 개칭되었고, 고려 고종 때(서기 1232) ‘강화군’으로 승격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후, 인근의 교동군을 강화군으로 편입하였고(1914년), 1995년도에 비로소 경기도에서 인천광역시로 통합되었다.     


 강화는 피난의 상징으로도 유명한데, 고려 몽골 침입 당시 당시 집권층인 무신정권이 강화도로 천도하는 일이 있었으며, 1627년 일어난 정묘호란 때 인조가 후금의 군사들을 피해 강화도로 피난을 왔으며, 1636년에 일어난 병자호란 때는 강화도로 피난을 오려다가 실패하고 남한산성으로 피난하게 된다. 이후 ‘강화유수부’로 지정하여 한양 외곽지역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적 요충지가 되었다.      


 강화는 유배지의 상징이기도 하다. 죄인을 살려두기는 위험하지만 죽이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많은 인물들을 유배 보낼 때 강화도로 많이 보냈다. 고려 시대 희종에 이어 조선 시대 연산군, 임해군, 영창대군, 광해군 등이 이곳에 유배되었으며, 철종은 왕위에 오를 때까지 강화도에서 살고 있었다. 광해군은 형인 임해군과 동생인 영창대군을 여기에 유배시켰다가 자신도 인조반정으로 여기에 유배되는 아이러니한 인물이기도 하다.  

    

 강화는 근대 시기에도 서구 열강의 침공과 통상요구의 상징적 장소이다. 병인박해 이후 프랑스가 침공해 와서 벌어진 병인양요가 일어난 곳이었고, 평양에서 일어난 제너럴 셔먼호 사건*으로 인해 미국이 강화도를 침공하는 신미양요도 일어난 곳이다. 또한 일본 해군의 운요호가 조선 해안 탐사를 빙자해 민간인 학살과 약탈, 방화 등의 공격이 일어났던 곳이다.      


 강화는 크고 작은 고인돌이 도처에 널려 있는 인류문명의 중심지이다. 얼마나 많은지 고창군, 화순군의 고인돌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상태이며 한국사 교과서에도 얼굴이 자주 팔리는 큰 고인돌 이외에도, 지나가다가 밭 한가운데나 산길 옆에 고인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놓여 있는 걸 쉽게 볼 수 있다. 그 돌이 고인돌인지 모르고 보면 그냥 굴러다니는 돌덩이로 보일 정도의 위장이 되어 있다. 즉 청동기 시대 지도자의 무덤이라고 알고 있는 고인돌이 그만큼 많다는 것은 그 당시 강화도가 얼마나 흥했던 곳인지 알 수 있다.      


* 제너럴 셔먼호 사건(General Sherman incident)은 미국의 무장상선 '제너럴 셔먼(SS General Sherman)'이 1866년 평안도 용강현 주영포 앞바다에 도착한 뒤 대동강을 거슬러 평안도의 중심지인 평양부까지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며 대포를 쏘고 민간인을 살해하자, 9월 5일 당시 평안 감사 박규수 휘하의 조선군 부대가 배를 급습하여 불태우고 선원들을 살해한 사건이다.


2. 강화도(江華島)의 지리     


  강화도는 (2019년 기준) 대한민국에서 4번째로 면적이 큰 섬이다. 원래 제주도, 거제도, 진도, 남해도에 이어 5번째 섬이었고 면적이 300㎢가 안 되었으나, 장기간 간척 사업을 진행하여 면적이 조금씩 늘어나다가 300㎢를 넘어, 원래 면적 차이가 적던 남해도보다 넓어져서 네 번째 섬이 되었다.     


 강화도는 원래부터 현재와 같은 모양이 아니었고, 수많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다가 고려시대부터 지속적으로 간척이 이루어져 현재와 같은 모양이 된 것이다. 석모도도 원래는 세 개의 섬이었고, 교동도도 두 개의 섬이었으며, 강화도의 경우 수십 개의 섬이었던 데다가 서남부지역은 그냥 갯벌일 뿐이었다. 이걸 매립하고 개간하여 지금의 해안선이 만들어진 것이다. 해안선의 일부는 절벽이고 일부는 평지인 이유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마니산이 있는 화도면도 원래는 강화도 본도와 다른 섬이었지만, 숙종 32년(1706년) 간척 사업으로 본도와 연결되었다. 실제로 마니산 근처엔 경지 정리가 되어 있는 상당히 넓고 평탄한 농지가 있는데, 이 일대가 예전엔 바다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만약 간척이 이루어지기 전의 강화도의 모습을 보고 싶다면 강화도에 있는 산으로 올라가서 산이 있는 부분만 섬이라고 생각하고 보면 대강 예상할 수 있다. 또한 이렇게 생각할 경우, 잦은 외침에도 강화도가 요새 역할을 오랫동안 수행할 수 있었던 이유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일단 해안선이 꼬불꼬불하고, 사방이 갯벌인 데다가 섬의 해안선은 온통 산과 절벽뿐이니 적이 상륙하기 까다로운 지형이다. 이것 때문에 세곡선들이 이 근처를 지나다 수시로 침몰하기도 하였다. 


3. 강화 초지진(草芝鎭)     


 17세기 조선에 설치된 방어진으로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 효종 6년(1655)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초지진은 외부에서 상륙하는 수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해안 진지로 만들어진 돈대(墩臺)이다. 초지진은 1971년 사적 제225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은 고려의 군대인 주진군 개념을 보다 세분화하여 국경 연안에 변진(邊鎭), 내륙 거점에 제진(諸鎭)을 설치했으며, 양란 이후에는 북벌에 대비하여 더 많은 진지를 구축하였다. 초지진은 그에 따라 조선 효종 6년(1655)에 강화유수로 있던 홍중보가 처음으로 축조하였다.      


 초지진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그보다 몇백 년 후인 1866년, 병인양요 때 병인박해에 항의하여 강화도로 들어온 프랑스군과 이에 맞선 관군의 교전 후 초지진이 함락되면서 역사에 이름을 남겼고, 1871년 신미양요 때 미 해병대에 의해 다시 한번 함락당하기도 했다. 1876년에는 일본군이 근대무기를 갖추고 강화도에 포격을 가하고 습격한 끝에 한일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을 맺기도 했다.     


 당시의 초지진은 위의 프랑스, 미국, 일본 군대와의 전투로 인해 소실되어 그 터만 남게 되었고, 지금 교과서 등에 사진으로 자주 등장하는 초지진은 1973년, 지금의 자리에 복원한 것으로 온전한 본래 모습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초지진은 외부에서 상륙하는 수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해안 진지로 만들어진 돈대(墩臺)이다.


4. 조선후기 명장 어재연신미양요(辛未洋擾)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던 시기의 조선 조정은 1866년 2월부터 수개월에 걸쳐 프랑스인 신부와 조선인 천주교 신자들을 대대적으로 색출하여 처형하였다. 그해 6월 하순, 미국 국적의 범선 서프라이즈호가 한약재를 싣고 청국의 산둥반도에 있는 즈푸(芝罘)항을 떠나 류쿠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평안도 철산부 선천포 선암리에 표착하였다. 서프라이즈호 선원들이 조선 측에 구원을 요청하자, 철산 부사 백낙연(白樂淵)은 이들을 북경으로 가도록 조치하였다.  

    

 이어서 8월 6일에는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영국 선적의 배를 타고 충청도 해미현 조금진 일대에 출현하였다. 오페르트 일행은 해미 현감 김응집에게 서신을 보내어 그들이 가지고 온 토산물을 조선 국왕에게 진상할 것을 요구하였고, 아울러 통상을 희망한다는 뜻을 전달하였다. 이를 조선 측에서 거절하자 오페르트는 다음번에는 영국 외의 서구 열강의 선박들을 대거 이끌고 와서 통상을 요구할 것이라고 조선 조정을 위협했다.      

 이처럼 여러 국가로부터 출몰하는 이양선들과의 접촉은 조선의 조정과 재야에 가볍지 않은 위기의식을 심어주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866년(고종 3) 8월 미국의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에 진입하여 평양 군민들과 충돌하는 이른바 제너럴셔먼호 사건(─號事件)이 일어났다. 제너럴셔먼호 측은 자신들이 평양성에 있다는 보물을 찾기 위해 왔음을 밝히고 자신들이 가져온 무기들을 조선인들 앞에서 과시하였다. 또한 이들은 대동강 상류로 진출하여 어두워질 때까지 수심을 측정하는 등 탐사 작업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셔먼호의 토마스 목사는 대동강 북안에 상륙하여 제너럴셔먼호를 구경하러 온 평양 주민들에게 포교활동을 하기도 했다. 조선 측에서는 제너럴셔먼호에 거듭 회선을 요구하였으나 이들은 절대로 돌아갈 수 없음을 고집하였다.  

    

 급기야 27일 제너럴셔먼호는 순영 중군 이현익(李玄翼) 일행을 나포하고 억류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어서 제너럴셔먼호는 이현익 일행에 대한 석방의 조건으로 쌀 1,000석과 금·은·인삼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평양 사람들에게 제너럴셔먼호에 대한 강한 경각심과 적개감을 불러일으켰다. 평양 주민들은 투석전을 전개하면서 제너럴셔먼호에 항의하였고 군민합동의 대규모 무력시위로 전개되었다. 이후 조선 측과 제너럴셔먼호의 교전이 발생하였다. 평양 군민들이 제너럴셔먼호에 접근하여 공격하였으며 제너럴셔먼호 선원들은 강물로 뛰어드는 등 달아나려고 했으나 평양 군민들은 이들을 모조리 살해하였다.     


 이후 고종 8년(1871) 미국은 1866년의 제너럴셔먼 호 사건을 빌미로 조선과의 통상 관계 수립을 목적으로 무력 침략을 단행하는데 이 전쟁이 바로 신미양요이다.     


  미국 공사 로우(Law)가 전권을 위임받고, 조선 원정을 명령받은 아시아 함대 사령관 J. 로저스(J. Rodgers)는 군함 5척, 함재 대포 85문, 해군과 육전 대원 총 1,230명을 이끌고 1871년 5월 16일 일본의 나가사키항을 출발하였다. 19일 남양만(南陽灣)에 도착한 미군은 뱃길을 탐사하면서 북상, 물치도(勿淄島)를 자국 함대의 정박지로 정하였다.      


 미군은 조선에 탐측 승낙을 일방적으로 통고한 뒤, 6월 1일 서울의 관문인 강화도 해협 수로의 측량과 정찰을 목적으로 두 척의 군함을 파견하였다. 이에 흥선 대원군은 미군의 불법 영해 침범을 경고하고 즉시 철수를 요구하였다. 이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광성보(廣城堡)로 접근해 오자 조선군은 경고용 포격을 가하였고 미군은 일단 물러났다.      


 미군은 조선군의 경고용 사격을 빌미로 오히려 조선 정부에 사과와 손해 배상을 요구하였고, 6월 10일 군함 2척을 앞세우고 육상 전투 대원 644명을 강화도 초지진(草芝鎭)에 상륙시켜 무력으로 점령하였다. 이어 덕진진(德津鎭), 광성보(廣城堡)를 차례로 점령하였다. 그리고 6월 11일 어재연이 지키는 광성진 전투에서 미군 역시 피해가 많아 이튿날 물치도로 철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강력한 근대 신식 무기로 무장하고 인디언 전쟁과 남북전쟁 등을 거치며 단련된 미 해군에 병력과 화력 모두 열세였던 조선군은 그야말로 참패했다.     


 미국 역시 목적을 이룬 전쟁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미국은 일본을 강제 개항시킨 흑선 사건을 통해 포함외교(gunship diplomacy)를 한 뒤, 조선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수월하게 개항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순순히 문을 연 일본과는 달리 격렬하게 저항했기 때문에 약탈군을 이끄는 로저스 제독도 당황했다. 미군 전사자는 불과 3명뿐이었지만, 전사자 수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미국의 목표는 최소한의 피해로, 단기간에, 조선을 개항시키려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베이징 주재 미국 공사 로우는 이 같은 목표에 충실하게 움직여, 무력 충돌 전후에 조선과 대화를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결국 군사적인 이득이나 피해와는 상관없이 결과는 조선의 개항 거부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흥선 대원군은 서울의 종로와 전국 각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또한 덤으로 기세를 몰아 서원 철폐도 단행하였다.      


 그러나 당시 동아시아의 큰 흐름이었던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기운은 거스를 수 없었다.      

 불과 2년 뒤, 대원군은 최익현의 탄핵으로 인해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한다. 집권한 고종은 개국, 개화파에 힘을 실어주었다. 신미양요가 일어난 지 불과 4년 뒤, 일본이 미국을 흉내 내어 운요호를 보내자, 신미양요의 피해를 복구하지 못했던 강화도의 수비 병력들은 포함 한 척에 허무하게 무너져버렸고, 결국 조선은 개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운요호는 배수량 249톤밖에 되지 않았고 승조원도 수십 명에 불과한 작은 배였는데도, 이미 이전에 커다란 피해를 당한 조선이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5.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강화 고인돌      


 고인돌은 기원전 2000년~1000년 전인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문화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거석문화의 한 종류이다. 영국의 스톤헨지, 오크니 제도 돌무덤 유적, 그리고 아일랜드의 보인(Boyne) 굴곡부 유적, 서아프리카의 돌무덤처럼 거석을 쓰는 새로운 기술이 돌을 정렬하거나 쌓는 의례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고인돌은 기원전 1000년경 동아시아 선사시대의 주목할 만한 유적으로 티베트, 쓰촨, 간쑤와 같은 중국 서부와 산둥 반도, 일본 규슈 북서 지방과 같은 해안 지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고인돌은 보통 거대한 덮개돌을 지탱하는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가공되지 않은 굄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대개 고인돌은 신석기시대나 청동기시대 중요 인물의 시신 또는 유골 위에 세운 단순한 무덤방으로 알려져 있다. 흙무덤이 고인돌을 덮고 있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풍화작용과 동물들에 의해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고인돌은 보통 높은 지대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는 고인돌을 세운 사람들이 낮은 곳에 있는 정착촌에서 고인돌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동아시아에서는 그 모양에 따라 탁자식(북방식)과 바둑판식(남방식), 두 가지 형태의 고인돌이 알려져 있다. 탁자식은 지상 건축물로 기둥이 되는 네 개의 굄돌을 가장자리에 세우고 거대한 덮개돌을 그 위에 올린다. 바둑판식에서는 석벽 또는 적석벽으로 된 무덤방을 땅 밑에 만들고, 덮개돌은 땅 위에 놓인 돌무지에 의해 지탱된다. 



6. 두 왕의 죽음강화도 살창리(殺昌里)     


 강화읍 관청리에는 살창리(殺昌里) 마을이 있는데 고려궁지 바로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강화도 말로 ‘살채이’라고도 하는데, 이 마을은 고려의 창왕(昌王)과 조선의 영창대군(永昌大君)이 살해된 마을이다. 그들은 죽을 당시 각각 10살과 7살이었지만, 부모 자식 간에도, 형제간에도 나눌 수 없는 권력의 냉혹함 앞에서 무참히 사라져 간 인물들이다.      


 고려 말 우왕이 폐위되고 새로운 왕을 세우게 되었다. 그때 “마땅히 그전 왕의 아들을 왕으로 세워야 합니다.”란 목은 이색의 주장에 따라 전(前) 왕의 아들, 즉 우왕의 아들 창(昌)이 왕으로 등극하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우왕과 창왕이 공민왕의 자손이 아닌 중 신돈의 자손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그 때문에 고려 조정에서는 창왕을 평민으로 강등시켜 강화로 귀양을 보냈다. 그때 창왕의 나이 겨우 10살이었다. 

     

 창왕은 그렇게 귀양을 간 것도 모자라 신하에게 죽임을 당한다. 훗날 사람들은 이곳에서 창왕이 살해당했다고 해서 죽일 살(殺) 자에 창성할 창(昌) 자를 써서 살창리(殺昌里)라 부르게 되었다. 우왕은 신돈의 비첩 반야의 소생이라 하여 죽음에 이르게 된다. 죽음 직전 우왕은 자신이 신돈의 자식이 아니라 왕 씨의 소생임을 밝힌다. 겨드랑이에 난 비늘을 보이면서 “너희들은 보아라. 내가 용의 후손인 왕 씨임을….”이라고 자신을 죽이려는 관리들에게 말을 했다. 그럼에도 결국 우왕은 죽임을 당했다. 그가 용의 아들이라고 했던 것은 고려를 건국한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作帝建)이 용왕의 딸과 결혼하여 왕건의 아버지를 낳았다는 설화에서 비롯한 것이다.      


 한편 조선 광해군에게는 이복동생 영창대군이 있었는데 광해군 재위 때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무고를 받고 강화에 유배되었다가 죽게 된다. 영창대군은 당쟁의 희생양이었던 셈인데, 당시에는 대북파와 소북파의 다툼이 있었다. 영창대군은 당시 7살로,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대북 정권의 명령을 받은 강화부사 정항(鄭沆)은 방에다 영창대군을 가두고 밖에서 문을 잠근 후 온돌방에 불을 계속 지폈다. 영창대군은 뜨겁다고 살려 달라고 어머니를 부르면서 나오려고 했다. 얼마나 애를 쓰고 문을 긁어댔으면 영창대군의 손톱이 다 빠졌다고 한다. 결국 영창대군은 좁은 방에서 쪄 죽고 말았다. 그 후 관가에서는 영창대군이 죽은 사실을 입 밖에 내지 못하게 하였다. 그 당시의 상황이 강화도 민요에도 나오는데 “살채이 묻거들랑 대답을 마오.”라는 구절인데, 영창대군 살해 사건은 아주 큰 정변이었다.     

 

 영창대군을 불에 달구어 죽인 음력 2월 9일을 전후하여 강화도에는 비가 내리는데, 이는 영창대군의 억울한 죽음에 하늘도 울었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이때 오는 비를 강화도에서는 ‘살창우(殺昌雨)’라 한다.               

6. 대몽항쟁의 현장강화도     


 원나라는 1271년부터 1368년까지 97년간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이 지배하고 통치했던 시기이다. 칭기즈칸은 몽골 제국의 초대 칸이며 그는 몽골 초원의 허허벌판 위에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황제국이자 육상 유목 제국을 건국했으며, 13세기의 구대륙을 말 그대로 뒤집어엎어 세계사의 흐름을 크게 바꾼 입지전적 인물로 전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손자인 쿠빌라이 칸이 중국 대륙에서 원나라를 개창한 이후 칭기즈 칸에게 태조라는 묘호를 올렸다.     


 새로운 조직과 질서로 몽골이라는 민족공동체를 창조해 낸 칭기즈칸이 정복한 영역은 동쪽으로는 아시아의 끝인 한반도에서부터 서쪽으로는 유럽의 폴란드, 헝가리까지 아시아와 유럽에 걸친, 면적으로 따지면 777만 km²에 달했다. 이것은 알렉산더와 나폴레옹, 히틀러가 정복한 땅을 모두 합친 것보다 넓다. 당시 칭기즈칸이 이끈 몽골인들은 100만 명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들은 유라시아 대륙 대부분에서 유교와 이슬람, 기독교 등 다양한 문명권에 속하는 인구 2억 명을 지배했다.     


 이러한 몽골 제국이 동쪽 최전선인 한반도, 당시 고려에도 침공을 하는데, 고종 19년(1231)부터 고종 46년(1259)에 이르기까지 무려 9차례나 걸쳐 고려를 침공해 왔다. 거란이나 여진과의 전쟁과는 달리 고려국의 항복으로 끝난 전쟁이며, 이후 전 국토가 잔혹하게 짓밟히게 된다.      


 전쟁의 시작점은 고종 12년(1225)에 있었는데, 몽골 제국의 사신 저고여가 귀국하던 도중 국경에서 자객에게 피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몽골 제국에서는 고려의 소행이라 주장했고, 고려에선 국경을 넘어서 금나라 사람에게 피살된 것이라고 주장하여 양국 간의 관계는 점차 험악해졌고, 결국 국교는 단절되고, 몽골 제국은 고려에 대한 대대적인 침략을 계획하여 9차례에 걸쳐 내려오게 된다.   

   

 그중 2차 침략 시기, 당시 무신정권의 집권자인 최우는 계속된 몽골군의 침략에 대비해 재추회의(宰樞會議)를 열어 강화도로의 천도를 결정한다. 결국 고종 19년(1232)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기고 몽골과의 장기 항전 태세에 돌입하자 이에 분노한 몽골은 살리타이를 다시 내세워 침입했다. 해전에 약한 몽골은 강화도를 넘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요구했으나 고려는 끝내 거절한다. 이에 몽골군은 다시 남하하여 처인부곡(현재 용인시)을 공격했지만 김윤후라는 승려의 활에 사령관 살리타이가 전사하는 바람에 퇴각하게 된다. 그리고 2차 침입 때 많은 문화재가 불타 사라졌으며, 당시 부인사에 소장되어 있었던 《고려대장경》 초조판(初彫板)이 몽골군에 의해 불타 없어지게 되었다.      


 또한 3차 침입 때 대구, 경주 등 현 경상도까지 공격하였는데, 이때 몽골군은 황룡사에 불 질러 전소시키고 황룡사 9층 목탑, 황룡사 대종 등 문화재를 약탈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안겨주었다. 고려 조정은 부처의 힘을 빌려 난국을 타개하고자 1236년 『팔만대장경』의 제조를 시작했다.     


이 해에 몽골의 군사에게 사로잡힌 남자와 여자는 무려 206,800여 명이다. 살육된 사람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다. 몽골군이 지나간 마을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몽골의 병난이 있는 이래 금년처럼 심한 적은 없었다.

                                                                                               

                                                                                                《고려사》 권 24 고종 41년 조     


 1259년 8월, 몽골의 몽케 칸이 죽고, 쿠빌라이와 아리크부카 사이의 왕위 계승 전쟁(툴루이 내전)이 벌어질 시점에서, 당시 전쟁을 끝내기 위해 몽골로 향하던 고려의 태자가 이후 새롭게 칸이 될 쿠빌라이를 만나 강화(講和)를 논의하면서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귀국한 태자는 7월에 승하한 고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원종(元宗)이 되어 개경으로 환도한다.     


 이후 배중손과 김통정 등 일부 무신들이 환도에 극렬하게 반대하며 삼별초의 난을 일으켰으나, 여몽 연합군에 의해 1271년 배중손이 전사하고, 1273년 제주도에서 김통정이 살해된 후, 삼별초가 전멸당하면서 대몽항쟁은 끝이 났다.     


7. 강화 고려궁지(高麗宮址)     


 몽골과의 전면전을 결정한 고려는 강화도 천도를 단행한다. 강화도는 개성에서 멀지 않으면서도 넓은 농토가 있었으며, 세금 운송이 편리했고, 또한 해전에 약한 몽골을 방어하기에 유리한 곳이었다. 당시 무신정권의 실권자였던 최우는 군사들을 동원하여 강화도에 궁을 짓기 시작했는데, 전쟁 중에 천도가 급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궁궐과 관청 등 대부분의 시설은 천도 후 백성들이 힘들게 공사해 완성하게 된다. 이때 옮겨진 도읍터가 고려궁지로 원종 11년(1270) 개성으로 환도할 때까지 39년간 사용되었던 곳이다.     


 고려궁지는 개성의 궁궐과 비슷하게 만들어졌으며, 뒷산 이름도 송악이라 하였다. 1637년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청나라 군에게 함락되는 등 여러 차례 전란을 겪으면서 궁궐과 성은 무너지고 말았다. 그 후 고려 궁터에는 조선시대의 건물인 승평문, 강화유수부 동헌, 이방청, 종각 등이 복원되어 있다. 그래서 ‘고려궁지’를 보러 가도 조선시대 건물만 볼 수 있다.      


 의미 있는 건축물 하나가 시선을 끄는데 바로 조선시대 외규장각이다. 프랑스군이 약탈해 간 의궤가 보관되어 있던 곳이다. 외규장각은 조선 정조 때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한 도서관으로, 왕립 도서관인 규장각(奎章閣)의 부속 역할을 하였다.      


 설치 이후 왕실이나 국가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의궤(儀軌)를 비롯해 왕실 관계 서적을 보관하였으나, 고종 3년(1866)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습격하면서 의궤를 포함한 서적 등을 약탈하고, 나머지는 불태워 없애버렸다. 본래 조선왕실의궤 297권을 포함한 5천여 점의 문서들이 있었는데, 의궤 297권을 제외한 나머지 책들은 전부 불태워졌다.     


 문화재라는 것은 한 나라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세계 모든 인구가 공유하고 향유할 수 있는 인류 공동의 자산이라는 것을 이 두 전쟁을 통해 뼈저리게 알게 된다. 


외규장각은 조선 정조 때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한 도서관으로, 왕립 도서관인 규장각(奎章閣)의 부속 역할을 하였다.


8.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은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있는 성공회 성당으로, 바로 옆에 위치한 천주교 인천교구 강화성당과 구별하기 위해 ‘강화읍 성당’이라고도 한다. 고요한(Charies Jone Corfe) 초대 주교가 1900년에 축성하였으며, 당시 건축 공사는 궁궐 도편수가 주도하였다.    

   

 성당터는 세상을 구원하는 방주의 의미를 담아 배의 형상을 따랐으며 건물은 장방형(넓이 4칸, 길이 10칸)의 중층 구조로 전체적인 건물 양식은 한국 건축의 정통양식을 띠고 있다.   하지만 배치와 내부구조는 서양식 바실리카 건축양식을 응용하여 조화의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고풍스러운 샹들리에와 소박한 도구들이 성당의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건물의 웅장함과 견고함을 고려하여 목재는 백 년 이상 된 백두산 소나무를 직접 신의주에서 구하여 뗏목으로 운반해 왔고, 석재와 기와는 강화도 내에서 구하였다. 도목수는 경복궁 중수에 참여했던 도편수였고, 중국인 석공과 강화 지역의 교우들이 참여하여 1년여 만에 완공되었다.      


 내부 중앙에는 세례를 받을 때 사용되는 돌로 되는 세례대가 있는데, 오른쪽부터 수기(修己), 세심(洗心), 거악(去惡), 작선(作善)이라고 한자로 새겨 교인들의 마음을 다잡게 한다.     


수기(修己) -  몸을 바르게 하고

세심(洗心) - 마음을 깨끗이 하고

거악(去惡) - 악을 제하고

작선(作善) - 선을 행하자



9. 강화도 조약연무당 옛터     


 강화도조약은 1876년 2월 27일 조선과 일본 제국 사이에 체결된 조약으로 정식 명칭은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이다. 한국사 교과서 등에서는 정식 명칭보다는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이라는 통칭이 더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병자년에 체결된 조약이라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이라고도 부른다.     


 1875년 자국 군함을 동원하여 조선의 영해에 불법 침입한 뒤 무력시위를 일으킨 일본은 이를 빌미 삼아 이듬해 강화도 연무당에서 조선 외교 대표와 조약을 체결한다. 이것은 조선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었으나, 당시 흥선대원군 집권기의 쇄국과 척화의 영향으로 국제법(만국공법)에 밝지 못한 데다 군사적 협박까지 받고 있었던 조선은 일본이 깔아 놓은 독소 조항을 걸러내지 못했고, 결국 개항과 동시에 치외법권과 해안 측량권 등을 일방적으로 허용하여 국익 침해의 소지가 있는 불평등 조약이 성사된다.      


 이는 일본이 대륙으로 나아가려는 제국주의 야욕을 드러낸 본격적 사건이기도 하고, 일본은 이 조약을 체결하기 위하여 자신들이 미국에 개항하게 된 페리 제독의 쿠로후네 사건을 연구해 모방했다.     


 1853년의 개항 이후 20년이 지나면서 일본과 조선의 국력의 차이는 상당했다.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에도 각종 변란을 겪으며 나라가 수차례 쑥대밭이 된 반면에, 일본은 오랜 평화 속에서 인구와 생산력을 꾸준히 성장시켰다. 1870년 시점에서 일본의 총인구는 조선의 2배 정도였고, 추정되는 1인당 국민 총생산은 2. 5배가량이었다. 여기에 더해서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이루기 위한 내전 과정에서 서양의 앞선 무기와 함선을 수입하여 군대를 근대화시켰기 때문에, 일본의 국력은 운요호 사건이 일어난 1875년 시점에서도 이미 조선에 비해 압도적 우위에 있었다.     


 1875년 5월 부산에 도착해 무력시위를 벌인 운요호는 조선의 남해안과 서해안을 거쳐 9월에 는 강화도에 도착하였다. 운요호는 강화도와 영종도에서 조선군과 교전을 벌였는데 당시 35명의 조선군이 전사한 반면에 일본군의 피해는 2명에 그쳤을 정도로 양국 군사력 수준 차이가 극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회담에서는 모두 세 번의 회의를 열었는데, 일본의 횡포와 강압적 태도, 그리고 운요호 사건에 대한 억지 등에 조선 측은 이리저리 휘둘렸다. 이때 조선 정부에선 흥선대원군의 통상수교 거부정책을 적극 지지하던 위정척사 세력과 대외 개방을 주장하는 개화파 세력의 대립으로 의견이 제각각이었으나 이유원, 박규수, 오경석 등 개화파의 주장과  청나라 대신 이홍장의 권고로 바뀐 고종은 개국(開國)을 결정하게 됐다.  

   

 하지만 회담 내내 조선이 일방적으로 휘둘리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 측 대표였던 신헌은 이노우에 가오루의 각종 공격에 매우 논리적으로 답변하면서 조금도 꿀리지 않았다. 운요호에 발포한 군인들을 처벌하라는 요구에도 "낯선 배가 쳐들어오는데 변방을 지키는 신하가 제 임무를 한 것에 어떻게 벌을 주느냐?"라고 단호하게 거절했고 나중에는 이노우에 가오루가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배에 있는 우리 군사들이 어떻게 굴지 모른다고 군사적 위협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신헌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이젠 무력으로 위협까지 하는구먼, 이게 이웃나라 사이의 예의냐?"라고 대답하여 뻘쭘해진 이노우에가 "내가 잘 타일러 놨으니 군사들이 가만있을 것이다."라고 물러서기도 했다. 

    

이렇듯 강압과 협박 속에 체결된 강화도조약 중, 불평등한 요소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제1관. 조선국은 자주 국가로서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 이후 양국은 화친의 실상을 표시하려면 모름지기 서로 동등한 예의로 대해야 하고, 조금이라도 상대방의 권리를 침범하거나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우선 종전의 교제의 정을 막을 우려가 있는 여러 가지 규례들을 일체 혁파하여 없애고 너그럽고 융통성 있는 법을 열고 넓히는 데 힘써 영구히 서로 편안하기를 기약한다.     


일본은 제1관을 통해 조선이 청으로부터 독립된 자주국임을 선언하게 하여 청으로부터의 간섭을 배제하고자 하였다.     


제4관. 조선국 부산(釜山) 초량항(草梁項)에는 오래전에 일본 공관(公館)이 세워져 있어 두 나라 백성의 통상 지구가 되었다. 지금은 종전의 관례와 세견선(歲遣船) 등의 일은 혁파하여 없애고 새로 세운 조관에 준하여 무역 사무를 처리한다. 또 조선국 정부는 제5관에 실린 두 곳의 항구를 별도로 개항하여 일본국 인민이 오가면서 통상하도록 허가하며, 해당 지역에서 임차한 터에 가옥을 짓거나 혹은 임시로 거주하는 사람들의 집은 각각 그 편의에 따르게 한다.     


제5관. 경기(京畿), 충청(忠淸), 전라(全羅), 경상(慶尙), 함경(咸鏡) 5도(道) 가운데 연해의 통상하기 편리한 항구 두 곳을 골라 지명을 지정한다. 개항 시기는 일본력(日本曆) 명치(明治) 9년 2월, 조선력 병자년(1876년) 2월부터 계산하여 모두 20개월로 한다.     


 제4관과 제5관을 통해 부산 이외의 2개의 항구를 더 개항하도록 하였는데, 개항지는 인천(1883년)과 원산(1880년)으로 결정되었다. 인천은 정치적인 목적으로 수도인 한양과 가까운 지역이었고, 원산은 군사적인 목적으로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결정되었다.     


제7관. 조선국 연해의 도서(島嶼)와 암초는 종전에 자세히 조사한 것이 없어 극히 위험하므로 일본국 항해자들이 수시로 해안을 측량하여 위치와 깊이를 재고 도지(圖志)를 제작하여 양국의 배와 사람들이 위험한 곳을 피하고 안전한 데로 다닐 수 있도록 한다.     


제10관. 일본국 인민이 조선국이 지정한 각 항구에서 죄를 범하였을 경우 조선국에 교섭하여 인민은 모두 일본국에 돌려보내 심리하여 판결하고, 조선국 인민이 죄를 범하였을 경우 일본국에 교섭하여 인민은 모두 조선 관청에 넘겨 조사 판결하되 각각 그 나라의 법률에 근거하여 심문하고 판결하며, 조금이라도 엄호하거나 비호함이 없이 공평하고 정당하게 처리한다.     


 제7관은 대표적인 불평등 조약 조항으로 일본인들이 마음대로 조선의 해안을 측량하도록 허락한 내용이고, 제10관은 불평등 조약의 백미인 치외법권 조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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