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시는 원주시, 춘천시와 함께 강원도 3대 도시로 꼽히며, 동해안에 접해있는 영동지방 최대의 거점 도시이다.
고구려 미천왕 14년(313)에 고구려 세력에 합쳐지면서 ‘하슬라’라고 불렀으며, 신라 선덕여왕 8년(639) 소경(小京)으로 삼아 북빈경(北濱京)이라 하여 사신(仕臣)을 두었다. 태종 무열왕 5년(658) 무열왕이 "이곳은 말갈과 인접해 있다"는 이유로 소경을 폐지하고 아슬라주를 만들어 도독을 파견하였으며 경덕왕 16년(757) 명주(溟州)로 개칭하였다가 혜공왕 12년(776)에 복구하였다.
이후 고려로 넘어와서는 충렬왕 34년(1308)에 강릉부(江陵府)로 개칭되었으며, 공양왕 때에는 강릉 대도호부가 있어서 북쪽의 원산에서부터 남쪽의 울진까지 이르는 동해안 일대를 관할하는 고을이었다.
조선 태조 4년(1395)에는 강원도로 개칭하였으며, 고종 33년(1896)에 강릉군으로 개편되어 21개 면을 관할하였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에 강릉면에서 강릉읍으로 승격되었으며,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인 1955년에는 강릉읍, 성덕면, 경포면을 합하여 강릉시로 승격과 동시에 강릉군을 명주 군으로 개칭하여 분리하였다가, 1995년 1월 1일 강릉시, 명주 군을 통합하여 통합 강릉시로 개칭,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강릉은 온난 습윤의 해안지방과 냉대 습윤의 산지지방이 혼재하고 있기 때문에 특이한 기후로도 유명하다. 이런 이유로 근대부터 기상 관측이 시작된 곳의 하나이며, 지금도 대한민국 기상청에서 매우 중요시하는 도시로 지방기상청 중 하나인 강원지방기상청이 있는 도시이다. 그래서 강릉은 기상 행정에서만큼은 서울특별시 다음으로 부산광역시, 인천광역시, 대구광역시, 대전광역시, 광주광역시 등의 대도시와 동급의 도시로 취급되고 있다.
이처럼 특이한 기후를 가지고 있는 강릉인데, 그중에서도 특히 눈이 많은 도시로 유명하다. 보통 강릉 토박이들은 눈이 무릎 높이까지는 와야 ‘눈 좀 오는구나’ 할 정도로 웬만한 적설량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렇다 보니 폭설 대비를 정말 철저히 해 놓고 있는데, 아무리 눈이 많이 온 날이라도 아침에 나가보면 웬만큼 큰 도로는 이미 다 뚫려있다. 그래서 강릉에서는 첫눈 오는 날이 자동차 스노체인을 착용하는 날이라고 한다.
강릉의 산업구조를 보면 알다시피 관광업이 주를 이룬다.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유명 관광지인 대관령, 경포대, 오죽헌, 선교장, 정동진 등과 함께 최근 2018 평창 동계올림픽, KTX 강릉역 등의 개발 호재에 따라 송정, 안목, 주문진 해변 등이 주목을 받으며 사시사철 국민 관광지로 사랑받고 있다. 또한 관동팔경 중 하나인 경포대를 비롯하여 율곡 선생과 신사임당이 거처하였던 오죽헌과 국보인 객사문 등의 많은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
2. 강릉 음식 문화의 랜드마크, 초당순두부
강릉을 대표하는 초당순두부는 조선시대에 처음 만들어졌다. 삼척 부사를 역임한 허엽 선생이 깨끗한 바닷물로 간을 맞추어 두부를 만들어 먹기 시작했고, ‘초당(草堂)’이라는 허엽의 호를 붙여 ‘초당두부’라는 이름이 탄생했다.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으면서 초당 마을의 남자들은 줄어들고 여인들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비용이 적게 드는 두부를 만들어 팔게 되었다. 그 시절 두부는 그런 그들에게 있어 그저 단순한 음식이 아닌 가족을 부양할 고마운 ‘생계 수단’이었다. 이런 한 맺힌 역사 속에서 초당두부의 맛과 전통은 단단해져 갔고, 오늘날의 초당두부가 있을 수 있었다.
초당순두부가 유명세를 얻은 것은 중국과 일본에까지 유명세를 날린 여류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과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許筠)이 허엽의 자녀이며, 강릉은 그들이 태어난 고향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허난설헌은 허엽이 삼척부사에서 파직되던 해에 태어났고, 허균도 1569년(선조 2) 강릉 외갓집의 애일당(愛日堂)에서 태어났다. 허균은 그가 지은 ‘도문대작(屠門大嚼)’의 첫머리에 “나의 외가는 강릉이다.(余外家江陵)”라고 술회하고 있다.
허균은 음식에 관하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미식가이자 풍부한 지식의 소유자이기도 하였다. 허균의 음식에 관한 관심은 그의 시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 수록된 ‘도문대작(屠門大嚼)’에서 드러난다. 도문대작을 우리말로 의역하면 “푸줏간 문 앞에서 크게 입맛을 다신다.”로 풀이된다. 이 책은 당시 전국 팔도의 산해진미와 고기, 과일, 생선, 채소 등 지역의 특산물을 소개하면서 품평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허균을 일컬어 “조선시대의 맛칼럼리스트”라는 별칭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 허균의 집안이 음식에 관심이 높았던 집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3. 조선의 천재 학자, 이이(李珥)
흔히 조선을 대표하는 두 학자로 퇴계와 율곡을 꼽는데, 그중 율곡은 특히 이론적 탐구에 몰두하지 않고, 현실 개혁에도 적극적으로 노력을 기했던 학자이자 정치가이다.
조선의 대표적인 천재 학자 중 한 명으로, 이이는 책을 읽을 때 무려 10줄을 1번에 읽는 능력자였다. 이 시절에는 대부분이 한자로 된 책이기 때문에 아무리 책을 많이 읽는 조선 선비라도 1번에 1줄 읽는 것도 어려워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이이가 조선의 대표적인 천재로 인정받는 이유에는 이러한 빼어난 학습 능력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겨우 23세에 정립해 일관되게 유지했던 이기일원론으로 조선 유학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놨던 뛰어난 사상적 업적 때문이다.
1536년 강원도 강릉 오죽헌에서 부친 이원수 공과 모친 신사임당 사이에서 태어났다. 1980년 발행된 『한국구비문학대계 2-1(강원도 강릉․명주 편)』에는 율곡 선생의 출생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사임당 신 씨는 강릉 오죽헌 언니네 집에 머물고 있었다. 하루는 사임당 신 씨가 언니와 한방에서 잠을 자는데, 하늘에서 청룡과 황룡이 내려와서 방안을 삥 돌다가 언니의 치마에 싸이는 꿈을 꾸었다. 사임당은 언니에게 급히 집에 돌아가야 한다며 언니가 입고 있던 치마를 빌려달라고 한다. 언니는 자기가 입고 있던 치마를 사임당에게 벗어준다. 사임당은 언니가 준 치마를 입고 집으로 돌아온다.
율곡 선생의 아버지도 서울에서 똑같은 꿈을 꾸었다. 집으로 내려오는 길에 조그만 주막에 들렀는데, 주모가 술과 주식을 대접하면서 하룻밤 같이 잘 것을 요구한다. 율곡 아버지는 이를 거절하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와서 열흘을 묵다가 서울로 돌아간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예전의 주막에 들러 주모에게 당신의 청을 들어주겠다고 한다. 그러자 주모는 당신이 내려올 때는 얼굴에 양기가 가득하여 대인을 낳을 상이 었는데, 지금은 아니라고 하면서 거절한다.
사임당이 율곡을 낳게 되었을 때의 일이다. 형부가 집에 무지개와 오색구름이 둘러싸는 꿈을 꾼다. 형부는 처제가 자기 집에서 아이를 낳으면 기운을 모두 빼앗아 갈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다른 곳으로 가서 아이를 낳으라고 한다. 그런데 사임당이 일어나서 대문을 나서는 순간에 율곡이 태어났다고 한다.
어린 시절에는 외가인 강릉에서 강을 둘러싼 산천을 보며 학문을 연마하고, 심신을 수양하였으며, 6살 때 외가인 강릉을 떠나 친가인 파주 율곡리로 이사하였다. 이이의 호인 '율곡'도 파주 '율곡리'에서 본 딴 것이다.
요즘에는 보통 고향(故鄕)이라고 하면,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곳을 이야기하는데, 가문이 중요시되던 전근대 사회에서의 고향은 '나'가 아니라 '우리 가문'이 연원을 두고 있는 곳을 의미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율곡의 고향은 탄생지인 강릉이 아니라 친가가 위치한 파주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이이는 본가가 아닌 외가에서 태어나고 자랐을까? 그것은 바로 조선 전기의 일반적인 결혼풍습이었던 데릴사위제도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이의 부친 이원수 공이 신사임당의 집안에 데릴사위로 들어갔기 때문에 이이는 강릉에서 태어나고 자라게 된 것이다.
율곡의 어릴 때 이름, 즉 아명(兒名)은 현룡이었다. 율곡의 태몽이 용꿈이었기에 사임당은 율곡의 아명을 ‘현룡’으로 지었다. ‘이현룡’이 ‘이이’로 바뀐 것은 율곡의 나이 11살 때이다. 그 무렵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는 중병에 걸려 목숨이 촌각을 다투고 있었다. 율곡은 조상을 모신 사당에 들어가 아버지 대신 자신이 죽도록 해달라고 비는 한편 자신의 팔뚝을 찔러 거기서 나오는 피를 신음하는 아버지 입 속에 흘려 넣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간신히 기운을 차린 이원수는 낮잠을 자다 꿈속에서 백발노인을 만나게 되는데, 그 노인은 이원수에게
“당신의 아이는 분명 나라의 큰 유학자가 될 것이요. 그러니 이름을 이(珥)로 바꾸시오”라고 말하자 이원수가,
“내 아들은 용을 보고 낳은 아이입니다. 그래서 현룡이라 했는데 이름을 바꾸라니요”라고 묻자 백발노인은 이렇게 답했다.
”이(珥)란 귀걸이를 뜻하는데 매우 귀한 것을 말한다오. 그러므로 꼭 바꿔야 하오.” 이로 인해 율곡의 이름은 이현룡에서 이이로 바뀌게 됐다.
어릴 적부터 총명했던 율곡은 외부 교육기관에서 공부하기보다는 주로 사임당에게서 사서(四書)를 비롯한 여러 경전을 배우며 가정교육, 지금으로 치면 홈스쿨링을 받았다.
파주 임진강가 언덕에는 파주를 대표하는 화석정(花石亭)이라는 정자가 자리 잡고 있는데 임진강이라는 뛰어난 경관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화석정을 노래한 시가 굉장히 많이 전해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율곡이 8살이 되던 해에 지었다는 시가 있는데 일명 ‘팔세부시(八世賦試)’이다.
林亭秋已晩 / 騷客意無窮
숲에는 가을이 저물어 가매 / 시인의 시정은 그지없어라.
遠水連天碧 / 霜楓向日紅
물빛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 / 단풍은 햇빛 따라 불타올라라.
山吐孤輪月 / 江含萬里風
산에는 둥근달이 솟아오르고 / 강에는 끝없는 바람 어려라.
塞鴻何處去 / 聲斷暮雲中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 저무는 구름 새로 소리 끊겨라.
열 살 때는 강릉 경포대를 들러 장문의 ‘경포대부(鏡浦臺賦)’를 지었는데 여기서는 노장사상에 대한 그의 폭넓은 이해를 엿볼 수 있다. 다음 내용은 경포대부의 일부인데 10살 어린아이가 쓴 문장이라고는 믿기가 쉽지는 않다.
안목은 천하에 높고 정신은 우주에 노닐어, 번뇌스런 마음은 물 난간에 고요해지고, 세상의 정은 바람 탑에 흩어지네. 금계(천상의 닭)가 울어 새벽을 알리면 부상(扶桑) 만경의 붉은 물결을 잡을 듯하고, 옥토(달의 별칭)가 어둠 속에 솟아오르면 용궁(龍宮) 천 층의 흰 탑을 엿보기도. 상쾌하게 사방을 두루 바라보니, 황홀하게도 신선이 된 것 같구나. 뿌연 모래를 밟으며 산보하기도 하고, 백조를 벗 삼아 졸기도 하네.
1548년 13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해 조광조의 문인인 백인걸 문하에서 공부하게 되었으나, 16세가 되던 해에 어머니 신사임당이 사망하였고, 20세가 되었을 때 성주 목사(牧使)의 딸인 곡산 노 씨와 혼인했다. 20살에 혼인하는 것은 당대로서는 만혼이었는데, 한창 결혼해야 할 나이에 어머니 신사임당의 삼년상을 치른 데다 삼년상 이후 불도를 익힌다고 출가를 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불교에 심취하여 금강산에서 불법(佛法)을 공부했다고 한다. 그때도 두문불출하며 온갖 불경들을 읽어내어 주변 스님들이 생불이 나타났다며 감탄했다고 전해지는데 머리가 좋은 건 유학에서만 작용한 게 아니라 불도에서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우연히 유교 서적을 다시 읽은 율곡은 곧 하산을 하게 된다.
4. 조선의 과거제도, 이이(李珥)
역사상 우리나라의 과거제도는 고려 광종 때 처음으로 시행되었다. 당시 고려 초기의 호족들은 그 출신성분에 따라 직위를 세습받아왔던 터라 과거제 시행에 많은 반발이 있었다. 그러나 광종은 반대세력을 숙청해 나가면 기어이 과거제도를 정착시킨다.
광종이 과거제도를 도입한 영향으로 고려사(高麗史)에서 받는 평가는 아래와 같다.
광종(光宗) 이후로는 문교(文敎)를 더욱 정비하여 안으로는 국학(國學)을 숭상하고 지방에는 향교(鄕校)를 설치하여 동리마다 학교에서 글 읽는 소리가 들리니 이른바 문물이 중화와 같다는 것이 지나친 말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정착된 과거제도는 조선으로도 이어져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될 때까지 총 418번의 문과 시험이 실시되었고, 총 15,151명의 과거 합격자를 배출하였다. 조선왕조가 500년간 유지될 수 있었던 원동력에는, 나라를 팔아먹는 반역죄를 지었거나 천민 출신이 아닌 이상 누구든 실력을 바탕으로 관료가 되어 지배계층으로 편입할 수 있는 과거제도가 사회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과거시험이라 하면 보통 문과 시험을 말하는데, 소과(小科)와 대과(大科)로 나누어졌으며, 양인이면 누구나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다.
소과(小科)는 진사시(유교 경전 암기)와 생원시(논술 시험)로 구분되었고, 합격하게 되면 각각 진사와 생원의 칭호를 받았다. 진사시와 생원시 각각 초시와 복시로 구분되어 있는데, 1차 시험인 초시는 한양에서 200명, 지방에서 500명을 뽑았다. 그러면 생원시와 진사시 모두 합쳐 초시 합격자는 1,400명이 되는 것이다. 이 중에서 2차 시험인 복시에서 생원과 진사 각각 100명을 뽑게 되니, 소과의 최종 합격자는 총 200명이 되는 것이다. 전국에서 200명을 뽑는 것이니 우리가 보통 문학작품에서 보게 되는 최진사, 허생원 등은 전국시험에서 200등 안에 든 우수한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소과에 합격하게 되면, 성균관에 입학하거나 대과(大科)에 응시할 수 있다. 성균관에 입학하는 것은 대과를 보기 위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대과는 식년시(式年試)라고 해서 3년에 한 번 치르는 정기시험이 있었고, 그 외에도 비정기적인 별시(別試), 증광시(增廣試), 외방별시(外方別試) 등이 있었다.
대과 역시 1차 시험인 초시(初試)에서 240명을 뽑고, 2차 시험인 복시(覆試)에서 33명을 선발한다. 그리고 최종 33명이 임금이 시험문제를 내고 임금 앞에서 시험을 보는 전시(殿試)를 보게 되는데 이 시험은 합격과 불합격이 아닌 순위 결정전이다. 여기서 1등인 ‘장원’은 종 6품, 2등인 ‘방안’과 3등인 ‘탐화’는 정 7품의 관직을 받았다. 4등부터 10등까지는 정 8품, 11등에서 33등까지는 정 9품의 품계를 받았다.
5. 조선의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 이이(李珥)
이러한 조선의 과거시험에서 율곡은 장원만 9번을 해서 당시에는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고 불렀다. 지금으로 치자면 사시, 외시, 행시 등 고등 고시의 1차, 2차, 3차 시험을 모두 수석으로 합격한 것이다. 이 부분은 당시 정적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이미 합격해서 안 봐도 되는 시험을 보는 행동이 장원이라는 타이틀에 지나칠 정도로 집착해 다른 사람의 기회를 빼앗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율곡이 장원을 한 시험과 나이는 다음과 같다.
생원과 초시 : 29세
생원과 복시 : 29세
진사과 초시 : 13세, 29세
진사과 복시 : 21세
대과 초시 : 29세
대과 복시 : 29세
대과 전시 : 29세
별시 초시 : 23세
23세에 본 별시 초시에서 율곡은 다음과 같은 천도책(天道策)으로 장원 급제를 하였다.
“그런데 사람은 천지의 마음이니, 사람의 마음이 바르면 천지의 마음도 바르고 사람의 기가 순(順)하면 천지의 기도 순하다. 그렇다면 이의 상(常)과 이의 변(變)을 어찌 한결같이 천도에 맡길 수 있겠는가? …… 성왕(成王)이 한번 잘못 생각하매 대풍(大風)이 벼를 쓰러뜨렸고, 주공(周公)이 수년을 교화하매 바다에 파도가 일지 않았으니, 그 기가 그렇도록 시킨 것도 또한 사람의 일(人事)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 아아, 일기(一氣)의 운행 변화가 흩어져 만수(萬殊)가 되나, 나누어서 이를 말하면 천지만상이 각각 일기(一氣)이지만, 합하여 이를 말하면 천지만상이 같은 일기(一氣)이다. …… 이로써 본다면 천지가 제자리에 위치하고 만물이 육성되는 것이 어찌 임금 한 사람의 수덕(修德)에 달린 것이 아니겠는가? ……”
율곡 이이의 과거시험 답안지 천도책(天道策)의 마지막 부분
6. 조선의 붕당(朋黨) 정치,이이(李珥)
붕당이란, 조선 중기 학문적 계통과 정치적 입장에 따라 형성된 집단을 말한다. 이들은 대립하면서도 서로 공존하며 정치를 이끌어 나갔다. 지방에서 학문적 기반을 바탕으로 성장한 사림파(士林派)는 15세기말 이후 중앙에 진출하기 시작하여 16세기 중엽 선조가 즉위하자 중앙 정계를 장악하나, 얼마 지나지 않아 동인과 서인으로 대립하고 분리되었다. 대립의 근본적 원인은 당시 완전히 청산되지 않은 훈구(勳舊) 세력을 어떤 속도와 방법으로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후배 세대와 선배 세대의 입장 차이에 있었다.
이러한 대립 속에서 율곡은 중립의 위치를 지켰다. 초년의 이이는 붕당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는데 붕당의 문제를 인정하여 분열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훈구에게 반격할 빌미를 주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붕당의 문제점과 정치적 대립은 점점 더 심각해졌는데, 이 현실을 자각하게 된 이이도 자신의 판단이 실수였다는 것을 인정하고 양파의 화합을 위해 움직인다. 이때 이이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사건이 바로 선조 8년(1575)에 있었던 을해당론(乙亥黨論)이다.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지며 붕당이 점점 과열되는 양상을 보이자 김효원과 심의겸을 모두 지방관으로 좌천시켜 버린 것이다. 이때 당대 집권층인 동인의 맹렬한 비난을 받는다. 그리고 이러한 양상은 훗날 이이의 제자들이 정치적으로 성장하여 서인의 주된 세력을 형성하면서 이이를 자신들의 종주(宗主)로 세우는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이황, 조식 등 높은 학문적 성과를 이룬 거물급 유학자들의 제자였던 신진 사림 동인에게, 독학으로 학문적 일가를 이룬 이이는 배척의 대상이었다. 반면 서인 입장에서는 기존의 권세가들에게 맞설만한 자신들만의 거물급 지도자가 없었기에 이이의 학문과 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천재는 시기와 질투를 많이 받는다고, 이이 역시 당시 조정의 비난 대상이었다. 젊은 나이에 이미 과거에 합격했는데도 계속해서 과거의 장원 자리를 차지한 것도 그렇고, 당시 유학자들에게 불교는 증오하다시피 배척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신사임당 사후 불교에 귀의했던 전적도 정적들의 주된 비난 대상이었다.
특히 위에서 서술된 허균과 허난설헌의 아버지, ‘허엽’과도 향약의 시행 여부를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는데 그 일화는 다음과 같다.
허엽이 선조에게 향약(鄕約)의 시행을 권하였으나, 이이 등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당시 허엽은 향약 시행을 강력히 주장했으나, 이이는 그보다는 민생 안정이 우선이라며 허엽의 주장을 반대했다. 그래서 허엽이 이이를 찾아가 영문을 물으며 따지자, 이이가 허엽에게 "선생 집안은 향약으로 집안을 다스리십니까?"라고 묻자, 허엽이 "나라의 명이 없어서 안 하고 있소"라고 대답했다.
이에 이이는 "선생은 집안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도 일일이 나라의 명을 기다리신단 말입니까? 부자지간에도 매일 매를 때리면서 글을 배우라고 권하면 반드시 서로 등을 지는 결과가 벌어질 것인데, 더구나 백성이겠습니까"라고 반박했다.
그러자 허엽은 "선한 사람이 많으니 시행할 수 있다"라고 하였고, 이이는 다시 "당신의 마음은 선하기 때문에 사람이 선한 것만 보셨습니다마는, 나는 선하지 않은 사람을 본 것이 더 많으니 필시 내 마음이 선하지 않아서 그런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몸으로 가르치면 따르고 말로써 가르치면 말썽이 생기는 법인데, 지금 향약의 경우 어찌 말썽이 없겠습니까"라고 반박했다.
7. 천재의 독서 습관, 이이(李珥)
천재 학자인 만큼 이이는 독서에 대한 남다른 생각을 가지고 또한 그것을 저서에도 서술해 놓았다. 이이의 저서인 자경문(自警文)에는 독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놓았다.
새벽에 일어나면 아침나절 할 일을 생각하고, 아침밥을 먹고 나면 낮 동안 할 일을 생각하고, 잠자리에 들 때면 내일 할 일을 생각한다. 아무 일이 없으면 마음을 내려놓고 일이 있으면 반드시 생각을 하여 일 처리에 마땅한 방도를 얻어야 할 것이다. 그런 뒤에 독서를 한다. 독서란 옳고 그름을 분변(分辨)하여 일을 행하는 데 실천하는 것이다. 만약 일을 살피지 않고 오뚝 앉아 독서만 한다면, 무용한 학문이 된다.
또한 격몽요결(擊蒙要訣) 4장에는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배우는 사람은 늘 이 마음을 보존하여 사물의 유혹에 져서는 안 된다. 반드시 이치를 따져보고(窮理), 선(善)을 밝힌 뒤에야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가 눈앞에 드러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道)로 드러내는 데는 이치를 따지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이치를 따지는 데는 독서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성현(聖賢)들이 마음을 쓴 자취와 본받거나 경계해야 할 선과 악이 모두 책에 있기 때문이다.
이이는 독서를 세상과 사물의 이치와 진리를 깨우치는 가장 기본적인 단계로 해석하였다.
8. 강릉의 국보, 임영관(臨瀛館) 삼문(三門)
강릉 임영관 삼문은 고려 말에 지어진 객사(客舍)의 정문으로, 강원도에 있는 건축물 중에서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객사(客舍)란 고려와 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두었던 관청건물의 하나로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절을 하였으며, 왕이 파견한 중앙관리가 오면 여기서 묵게 하였다.
‘강릉 객사문’으로 오랫동안 불리다가 2014년 ‘강릉 임영관 삼문’으로 개칭된 이 건축물은 드물게 남아있는 고려말 건축물의 하나이며, 강원도 내 목조 건축물 중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임영관 삼문은 강릉부 객사의 대문으로, 고려 태조 19년(936)에 창건되었으나 현재의 삼문은 고려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문에 걸려있던 제액(題額) 글씨 '임영관'(臨瀛館)은 공민왕 5년(1366)에 공민왕이 낙산사로 행차하는 도중에 쓴 친필(親筆)로 전해지고 있다.
건축물의 형식은 간결하고 소박한 주심포(柱心包) 양식으로 지어졌고, 정면 3칸에 측면 2칸, 맞배지붕을 얹혔다. 기둥은 가운데 부분이 볼록한 배흘림 형태이며, 기둥과 지붕이 만나는 곳을 세련되게 조각한 솜씨는 고려 시대 건축 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예산 수덕사 대웅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안동 봉정사 대웅전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의 백미(白眉)로 꼽히고 있다.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고려의 목조 건축물 다음과 같으며 모두 국보(國寶)로 지정되어 있다.
안동 봉정사 극락전
예산 수덕사 대웅전
영천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영주 부석사 조사당
강릉 임영관 삼문
강릉 임영관 삼문은 고려 말에 지어진 객사(客舍)의 정문으로, 강원도에 있는 건축물 중에서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9. 신사임당과 율곡의 공간, 오죽헌(烏竹軒)
오죽헌(烏竹軒)은 보물 제16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정식 명칭은 '강릉 오죽헌(江陵烏竹軒)'이다. 정면 3칸에 측면 2칸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을 얹었으며, 건축의 양식이 주심포에서 익공(翼工)으로 변해가는 건축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어 건축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주택이다.
특히 신사임당이 율곡 이이를 낳은 집으로 유명하며, 건물을 바라볼 때, 왼쪽 2칸은 대청, 오른쪽 1칸에 온돌방을 두었는데, 이 온돌방이 신사임당이 이이를 낳은 몽룡실夢龍室이다.
오죽헌은 조선 전기 세종대의 문신(文臣)이었던 강릉 최 씨 최치운의 둘째 아들인 최응현이 처음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사위인 용인 이 씨 이사온에게 상속되었고, 그다음으로는 평산 신 씨 신명화에게 상속되었다. 신명화가 바로 신사임당의 부친이자, 이이의 외조부이다. 신명화는 다시 사위이자 이이의 이종사촌인 안동권 씨 권처균에게 상속하였고, 그 이후 1970년대까지는 안동권 씨 문중에서 관리하였다. 오죽헌이라는 택호(宅號)가 생긴 것도 권처균이 현 오죽헌 집에 살면서 집 주변에 검은 대나무가 많아 자신의 호를 오죽헌이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매표소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율곡 이이의 동상을 만날 수 있다. 조선의 대학자답게 정자관(程子冠)을 단정히 쓰고 서책을 들고 있다. 이어서 걸어 들어가다 오른쪽으로 돌아보면 오죽헌 안팎을 가르는 문이 서 있는데, 이 문의 이름은 바로 자경문(自警門)이다. 율곡의 저서인 자경문(自警文)에서 따왔는데 자경문은 율곡이 어머니를 여읜 채 상심하여 19세에 불교를 연구해 보려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다가 20세가 되던 해에 강릉의 외조모가 계신 곳으로 돌아 나와 자기 수양의 기준을 삼고자 지은 글이다.
그 수양의 기준은 다음과 같이 11가지로 요약된다.
1.입지(立志) - 큰 뜻을 세우고 성인을 본보기로 삼아야 하되 털끝만큼이라도 성인에 미치지 못한다면 나의 일은 끝나지 않는다.
2. 과언(寡言) - 마음이 안정된 자는 말이 적다. 마음을 안정시키는 일은 말을 줄이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3.정심(定心) - 마음이란 살아있는 사물과 같다. 잡념과 헛된 망상을 없애기 전에는 마음의 동요를 안정시키기 어렵다.
4. 근독(謹獨) - 항상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혼자 있을 때는 삼가는 마음을 가슴에 담으며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5. 독서(讀書) - 새벽에 일어나서는 아침에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밥 먹은 뒤에는 낮에 할 일을 생각하고, 잠자리에 들어서는 내일 해야 할 일을 생각할지니, 만일 일이 없으면 그만두려니와 일이 있으면 반드시 적절하게 처리할 방법을 생각해 낸 다음에 글을 읽을지니라. 글을 읽는다는 것은 옳고 그름을 분간해서 실천에 옮기려 하는 것이니 만일 사물을 살피지 않고 똑바로 앉아 글만 읽는다면 쓸데없는 학문이 되느니라.
6. 소제욕심(掃除慾心) - 재물을 이롭게 여기는 마음과 영화로움을 이롭게 여기는 마음을 비록 쓸어 낼 수 없다고 하더라도, 만일 일을 처리할 때 조금이라도 편리하게 처리하려 한다면 이 또한 이로움을 탐하는 마음이 된다.
7. 진성(盡誠) - 해야 할 일이라면 정성을 다하여 해야 하고, 해서 안 될 일이라면 일체 끊어 버려서 가슴속에서 옳으니 그르니 다투게 해서는 안된다.
8. 정의지심(正義之心) - 한 가지의 불의를 행하고 무고한 사람을 죽여서 천하를 얻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일을 해서는 안된다.
9. 감화(感化) - 어떤 사람이 나에게 이치에 어긋나는 악행을 저지른다면 나는 스스로 돌아서서 반성을 하면서 그를 감화시켜야 한다.
10. 수면(睡眠) - 밤에 잘 때나 아픈 때가 아니면 눕지 않아야 하고 비스듬히 기대지도 말 것이며 또 밤중일지라도 졸리는 생각이 없으면 눕지 말되, 다만 억지로 할 것은 아니니라. 그리고 낮에 졸음이 오면 마땅히 정신을 차려 바짝 깨우칠 것이요, 그래도 눈까풀이 무겁거든 일어나서 두루 거닐어 깨도록 할지니라.
11. 용공지효(用功之效) - 공부는 서둘러도 안되고 늦어도 안된다. 공부는 죽은 뒤에야 끝나기 때문이다.
자경문을 통과하면 오죽헌과 문성사를 접하게 된다.
문성사는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 때 율곡 선생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문성(文成)』 은 1624년 인조가 율곡 선생에게 내린 시호(諡號)로 '도덕과 사물을 널리 들어 통했고 백성의 안위를 살펴 정사의 근본을 세웠다(道德博聞 安民立政)'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원래 이 자리에는 율곡 선생이 쓴 『격몽요결』과 벼루를 보관하기 위해 건축된 어제각이 있었으나 사랑채 북쪽으로 자리를 옮기고, 문성사를 건립하여 율곡 선생의 영정을 모셨다. 선생의 영정은 선비들의 평상복인 심의(深衣)를 입고 검은색 복건(服巾)을 쓰고 있다.
선생의 영정은 선비들의 평상복인 심의(深衣)를 입고 검은색 복건(服巾)을 쓰고 있다.
10. 관동팔경(關東八景)의 고장, 강릉(江陵)
강릉, 양양, 고성 일대를 답사하다 보면 계속해서 동해(東海)의 아름다운 풍광을 즐길 수 있다. 도로를 달리다가도 잊힐 만하면 다시 나오고, 또다시 잊힐만하면 다시 나와서 답사객의 눈과 귀를 정화시켜 준다.
동해의 대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은 인간은 도저히 만들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이러한 동해의 아름다움을 조선시대에도 느끼고 기록한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송강(松江) 정철(鄭澈)이다.
우리는 보통 송강을 가사문학(歌辭文學) 대가로만 알고 있는데, 그는 정치인이었다. 그것도 붕당정치가 활발하게 전개되던 선조 시대의 정치인이었다.
송강은 어린 시절 담양에서 살며 임억령(林億齡)에게 시를 배웠고, 당대의 이름난 학자와 관료인 양응정, 김인후, 송순, 기대승에게 학문을 배웠다. 또, 이이, 성혼, 송익필 같은 큰 선비들과도 교류하였다. 이이, 성혼, 기대승 등의 기라성 같은 대학자들과 한 시대를 같이 살았던 것이다.
송강은 선조 8년(1575) 시묘살이를 끝내고 벼슬길에 나갔으나 이 무렵 본격화된 동서분당에 따른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벼슬을 버리고 담양 창평으로 돌아갔다. 창평에 있을 때 선조로부터 몇 차례 벼슬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선조 11년(1578) 43세가 되던 해, 송강은 다시 조정에 나아갔다. 그해 11월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되나 진도군수 이수(李銖)의 뇌물사건으로 반대파인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선조 13년(1580) 45세가 되던 해에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때 「관동별곡」과 「훈민가(訓民歌)」 16수를 지어 시조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의 자질을 발휘했다.
그 뒤 전라도 관찰사, 도승지, 예조참판, 함경도 관찰사 등을 지냈으며, 48세가 되던 해 예조판서로 승진하고 이듬해 대사헌이 되었으나 반대파인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음 해(1585) 사직, 고향인 창평으로 돌아가 4년간 은거하며 지냈다. 이때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등의 가사와 시조, 한시 등 많은 작품을 지었다.
관동별곡을 통한 송강의 이동 경로를 보면 서울(한양)을 출발하여, 여주, 원주, 춘천, 철원, 금강산, 고성, 양양, 강릉, 삼척, 울진으로 이어진다. 그중 관동팔경은 현재 분단으로 인해 6경만 볼 수 있다. 청간정(고성), 경포대(강릉), 낙산사(양양), 죽서루(삼척), 망양정(울진), 월송정(울진)은 남한에 있지만, 총석정과 삼일포는 북한에 있기 때문이다.
그중 강릉지역을 서술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송강은 경포대와 강릉지역의 풍속을 이야기하고 있다.
斜샤陽양 峴현山산의 躑텩躅튝을 므니바ᆞ갈와
羽우蓋개芝지輪륜이 鏡경浦포로 나ᆞ려가니,
十십里리 氷빙紈환을 다리고 고텨 다려,
長댱松숑 울흔 소개 슬카ᆞ장 펴뎌시니,
믈결도 자도 잘샤 모래라ᆞ갈 혜리로다.
저녁놀 비껴드는 현산의 철쭉꽃을 이어 밟아
신선이 타는 수레를 타고 경포로 내려가니,
10리의 흰 비단을 다리고 다시 다려,
큰 소나무 숲 속에 실컷 펼쳐졌으니,
물결이 잔잔하여 모래알까지도 헤아리로다.
孤고舟쥬 解하ᆡ纜람하ᆞ야 亭뎡子자ᆞ 우하ᆡ 올나가니,
江강門문橋교 너믄 겨타ᆡ 大대洋양이 거긔로다.
從둉容용하ᆞ간댜 이 氣긔像샹, 闊활遠원하ᆞ간댜 뎌 境경界계,
이도곤 가ᆞ자ᆞ간 다ᆡ ᄯ고 어듸 잇단 말고.
紅홍粧장 古고事사ᆞ라ᆞ갈 헌사ᆞ타 하ᆞ리로다.
한 척의 배를 띄워 정자 위에 올라가니,
강문교 넘은 곁에 대양이 거기로다.
조용하구나, 이 기상. 광활하구나, 저 경계.
이 경치 갖춘 데가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박신과 홍장의 사랑이 야단스럽다 하리로다.
江강陵능 大대都도護호 風풍俗쇽이 됴흘시고,
節졀孝효旌졍門문이 골골이 버러시니,
比비屋옥可가封봉이 이제도 잇다 하ᆞ갈다.
강릉 대도호부의 풍속이 좋구나.
절효정문이 고을마다 널렸으니,
집집마다 벼슬 받을 만한 일이 이제도 있다 하리라.
정철 『관동별곡(關東別曲)』 중
11. 국보(國寶) 진전사지 삼층석탑, 보물(寶物) 진전사지 도의선사탑
진전사(陳田寺)는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후반에 도의선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터 주변에서 ‘진전(陳田)’이라 새겨진 기와 조각이 발견되어 절의 이름이 밝혀졌다. 도의는 선덕왕 5년(784)에 당에서 선종(개인 수양을 중시하는 불교 종파)을 이어받고 821년에 귀국하여 설법을 시작하였으나, 당시는 교종(교리를 중시하는 불교 종파)만을 중요시하던 때라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이 절로 들어와 40년 동안 수도하다가 입적하였다. 또한 진전사는 고려시대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저술한 일연스님이 출가한 절로도 알려져 있다.
창건된 이후 오랜 세월 절이 계속 유지되어 오다가 조선시대에 결국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상으로는 세조 때까지는 절이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중종 때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진전사가 언급이 되지 않기에 그 사이 시기(약 16세기경)에 폐사되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폐사의 이유로는 근처에 창궐하던 도적떼의 습격으로 되었다는 설과 조선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인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탑은 통일신라 석탑의 일반적인 모습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려놓았다. 아래층 기단에는 날아갈 듯한 옷을 입은 천인상(天人像)이 있으며, 위층 기단에는 구름 위에 앉아 무기를 들고 있는 웅건한 모습의 8부 신중(八部神衆)이 있다.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는데, 1층 몸돌에는 각기 다양한 모습의 불상 조각들이 있다.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가 살짝 치켜올려져 있어 경쾌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며, 밑면에는 5단씩의 겹받침을 두었다.
3층 지붕돌 꼭대기에는 받침돌만 남아있을 뿐 머리장식은 모두 없어졌다.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혀 있으면서 지붕돌 네 귀퉁이의 추켜올림이 경쾌한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석탑 가운데 하나이다. 기단에 새겨진 아름다운 조각과 1층 몸돌의 세련된 불상 조각은 진전사의 화려했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도의선사탑은 일반적인 다른 부도(浮圖)와는 달리 8 각형의 탑신(塔身)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 아랫부분이 석탑에서와 같은 2단의 4각 기단(基壇)을 하고 있어 보는 이의 호기심을 자아낸다. 2단으로 이루어진 기단은 각 면마다 모서리와 중앙에 기둥 모양을 새기고, 그 위로 탑신을 괴기 위한 8각의 돌을 두었는데, 옆면에는 연꽃을 조각하여 둘렀다. 8각의 기와집 모양을 하고 있는 탑신은 몸돌의 한쪽 면에만 문짝 모양의 조각을 하였을 뿐 다른 장식은 하지 않았다. 지붕돌은 밑면이 거의 수평을 이루고 있으며, 낙수면은 서서히 내려오다 끝에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위로 살짝 들려 있다. 석탑의 기단과 비슷한 기단의 모습은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단단하고 단정함이 느껴지며, 장식을 자제하면서 간결하게 새긴 조각들은 소박하다. 도의선사탑은 우리나라 석조부도의 첫 출발점이 되는 중요한 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양양 진전사지 삼층석탑과 도의선사탑
12. 의상, 원효, 추사, 조신 등장, 양양 낙산사(洛山寺)
낙산사(洛山寺)는 신라 문무왕 11년(671) 의상대사가 창건하였으며,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 신흥사의 말사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에서는 낙산사 창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의상이 관세음보살을 만나고자 낙산사 동쪽 벼랑에서 27일 동안 기도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여 바다에 투신하려 하였다. 이때 바닷가 굴 속에서 희미하게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여의주와 수정염주(水晶念珠)를 건네주며 "내 전신(前身)은 볼 수 없으나 산 위로 수백 걸음 올라가면 대나무 2그루가 있을 터이니 그곳으로 가보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는데 그곳이 바로 현재의 원통보전(圓通寶殿) 터라고 한다.
이를 계기로 오봉산을 관세음보살이 있는 낙산(보타락가산)이라 여겨 '낙산사'라고 이름 지었다. 이외에 부속건물로 의상대(義湘臺), 홍련암(紅蓮庵) 등이 있으며 낙산사 일대가 사적 제495호로 지정되었다. 우리나라 3대 관음 기도 도량으로 손꼽히며, 송강의 관동팔경 중 하나인 의상대가 있는 절경으로도 유명하다. 경내에는 조선 세조 때 다시 세운 7층 석탑을 비롯하여 원통보전과 그것을 에워싸고 있는 담장 및 홍예문 등이 있다.
한편, 같은 시대를 살았던 원효도 관음보살이 동해의 한 동굴에 머물러 있다는 말을 듣고 낙산사를 향했다. 원효가 낙산사 남쪽 부근에 도착하였을 때, 논에서 흰옷을 입은 한 여인이 벼를 베고 있었다. 원효는 여인에게 “그 벼를 제게 주시오.”라며 장난을 쳤다. 여인도 장난 삼아 “벼가 잘 익지 않아 줄 수가 없소이다.”라고 하였다. 다시 길을 가다가 이번에는 다리 아래에서 월경개짐을 빨고 있는 여인을 만났다. 원효가 그녀에게 “물을 좀 주시오.”라고 하자, 그 여인은 월경개짐을 빨던 물을 떠서 원효에게 주었다. 원효는 그 물을 쏟아 버리고 다시 물을 떠서 마셨다. 그때 들 가운데 있는 소나무 위의 파랑새 한 마리가 “원효 스님은 그만두시게.”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갑자기 사라져 보이지 않고, 소나무 아래에는 신발 한 짝만 남아 있었다. 원효가 낙산사에 도착해서 관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찾아갔다. 그때 관음보살이 있던 자리에 관음보살은 없고, 자신이 소나무 아래에서 보았던 신발과 똑같이 생긴 신발 한 짝이 떨어져 있었다. 그제야 원효는 낙산사로 오는 중간에 만난 여인이 관음보살의 진신임을 깨달았다. 또한 원효가 동굴로 들어가 관음보살 진신을 만나려고 하였으나, 거친 풍랑이 일어 동굴로 들어가는 것을 막아 결국 관음보살의 진신을 만나지 못하였다.
매표소를 지나면 홍예문(虹霓門)을 만날 수 있는데 조선 세조 13년(1467)에 왕이 친히 낙산사에 행차하여 세운 무지개 형태의 석문이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근처 강에서 나온 돌을 사용해 쌓았는데, 홍예를 조성하는 석재가 26개인데 이는 당시 강원도의 고을 수를 표시한 것이다. 홍예 위에는 1962년에 세운 문루가 있었다. 2005년 화재 때 문루가 불타 홍예만 남았으며, 문루를 복원할 때 이번에는 산에서 가져온 돌을 사용하여 홍예를 보수했다.
홍예문을 지나 걸어 올라가다 보면 사천왕문을 볼 수 있는데 2005년 화재 피해를 입지 않은 건물이다. 사천왕문 왼편으로는 범종루가 있는데 이는 보물 제479호 낙산사 동종이 걸려 있던 누각이다. 2005년 화재 때 불타면서 안에 있던 동종까지 모조리 녹아버렸다. 현재는 동종을 예전 형태대로 복원해서 걸어 놓았고 다 타버린 동종은 의상기념관에서 전시 중이다.
이어지는 동선으로 빈일루, 응향각을 지나면 원통보전과 7층 석탑을 볼 수 있다. 원통보전은 보통 절들의 대웅전 위치에 있는 건물로 석가모니불 대신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있다. 2005년 화재로 모조리 불탔지만 안에 있던 관음불상은 미리 옮겨놨기에 다행히도 화를 면했다. 삼국유사 탑상 편에 기록된 『조신의 꿈』 이야기가 낙산사 원통보전에서 기도하다 일어난 일이다.
『조신의 꿈』은 삼국유사 제3권 탑상(塔像) 편에 실린 대표적인 꿈 이야기로, 조신몽(調信夢), 조신지몽(調信之夢), 조신설화(調信說話)라고도 한다. 우리 고전문학 중 일장춘몽(一場春夢) 속의 허무한 인생을 그린 원조 격 작품이다.
주인공은 신라의 승려 조신(調信). 조신은 본디 세달사(世達寺)에 있었는데, 절의 장원(莊園)이 명주(溟洲 현 강릉)에 있었으므로 파견되어 장원을 관리하였다. 조신은 명주 태수 김흔(金昕, 803-849)의 딸을 보고 한눈에 반하여 낙산사 관세음보살상 앞에서 그 여인과 맺어지게 해 주십사 하고 남몰래 기도하였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도록 연분이 맺어지기는커녕 다른 남자와 혼사가 정해졌다는 소문이 들릴 뿐이었다. 조신은 밤중에 불당에서 관세음보살을 원망하며 눈물을 흘리다가 그 자리에서 잠이 들었다. 그런데 웬일인가, 사모하던 낭자가 제 발로 절에 나타나 불당 문을 열고 조신을 찾아오지 않는가.
김 씨 낭자 또한 부모가 정한 혼처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우연히 만난 조신에게 연정을 품고 과감히 집을 나온 것. 그리하여 두 사람은 그대로 도피하여 부부의 연을 맺고 가정을 일구었다. 두 남녀는 40년간 같이 살면서 자식들 5명을 낳았으나 집은 서발 장대 거칠 것이 없는 판이었다. 나중에는 그 보잘것없는 누옥도 잃고 온 가족이 함께 떠돌아다니며 구걸로 먹고 살기를 10년간 했다. 어느 날 해현령(蟹峴嶺) 고갯길을 넘어가는데 15살 된 큰아이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죽자, 부부는 대성통곡을 하며 시신을 길 옆에 묻었다. 그 뒤 남은 가족들이 우곡현(羽曲縣)에서 풀을 엮어 집으로 삼아 구걸로 먹고살았다. 부부는 늙어서 움직이기도 힘든데, 어느 날 10살 된 딸이 마을에서 구걸을 하다가 개에게 발목을 물려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부부가 이 꼴을 보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눈물을 흘리는데 아내가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는 아름답고 젊었으며 의복도 깨끗했습니다. 콩 한쪽이라도 나누어 먹으며 함께 살아온 세월이 벌써 50년이니 참으로 깊은 인연입니다. 그러나 병은 깊어가는데 굶주리며 추위에 떨기를 피할 수 없으니, 이제는 보잘것없는 음식이라도 제대로 빌어먹지도 못하여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아이들이 이런 꼴을 당해도 돌보지도 못하는데 언제 부부의 즐거움을 즐길 수 있을까요? 아름다운 얼굴이며 밝은 웃음도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사라지고, 난초처럼 향기로운 언약도 바람에 흩날리는 버드가지처럼 지나갔습니다. 이제 생각해 보니, 예전의 기쁨이 바로 근심의 뿌리였습니다. 다 함께 굶어 죽기보다는 서로 헤어져 상대방을 그리워함만 못할 것입니다. 좋다고 취하고 나쁘다고 버림은 사람 마음에 차마 할 짓이 못 되지만, 인연은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헤어지고 만남에도 명이 따르는 것이지요. 바라건대 이제 헤어집시다."
조신은 아내의 말을 듣고 기뻐하며 각자 아이들을 둘씩 데리고 헤어지기로 하였다. 떠나기 전에 아내가 말하였다.
"저는 고향으로 갈 테니 당신은 남쪽으로 가십시오."
두 사람이 마지막 인사를 하고 헤어지려는데 조신이 꿈에서 깨어났다. 새벽빛이 희뿌옇게 밝아오는데 머리카락과 수염이 새하얗게 세어버렸다. 마치 한평생의 희로애락을 모두 겪은 듯 세상사에 뜻이 사라지고 재물에도 관심이 없어졌다. 또한 자기 앞에 있는 관세음보살상을 바라보기가 부끄러웠다.
조신이 돌아가는 길에 꿈속에서 큰아이를 묻은 곳에 들러 땅을 파보았더니 돌미륵이 나왔다. 조신은 미륵상을 물에 씻어 가까운 절에 봉안하고 세달사로 돌아와 소임을 내려놓은 뒤, 정토사(淨土寺)를 세우고 부지런히 선행을 하며 살았다. 이후 조신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원통보전 앞의 7층 석탑은 보물 제499호로 석탑의 재질은 화강석이며 청동제 상륜을 달았다. 원래는 3층이었지만 조선 세조 13년(1467)에 탑을 중수하면서 7층으로 층수를 늘렸다. 6.25 전쟁 전까지는 멀쩡했으나 전쟁을 겪으면서 한쪽 귀퉁이가 뭉텅 잘려 나가는 손상을 입었다. 다른 석탑들에 비해 독특한 양식으로 만들어졌다.
원통보전에서 해수관음상으로 가는 길에서 아래쪽을 보면 보타전 있는데 이 건물은 낙산사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관음성지임을 상징하는 건물로, 건물 안에는 관음상 1,500좌를 봉안하고 있다. 천수 천안 관음상을 비롯하여 얼굴과 팔이 여럿인 불상이 다수 있어서 이국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으며 보타전 앞쪽에는 낙산사 7층 석탑을 본떠 새로 지은 탑과 보타락이라는 이름의 2층 누각, 연꽃이 가득 있는 연못이 있다.
절의 끝자락에는 해수관음상이 있는데 홍련암, 의상대와 더불어 낙산사의 랜드마크라고 불린다. 해수관음상의 아래쪽으로 약간 내려가면 관음전이 있는데 관음전 내부에는 불상이 따로 없고, 대신 불상 자리에 통창이 나 있다. 통창으로 외부의 해수관음상이 정면으로 보이는 구조로 외부의 해수관음을 향해 실내에서 기도를 할 수 있는 건물이다.
바닷가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의상대가 있는데 말 그대로 의상이 좌선수행을 했던 곳이라 전해지는 곳이다. 원래는 암자가 있었다고 하나 폐허로 변해버렸고 이후 1925년에 그 자리에 정자를 세우고 의상대라 이름 붙였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일출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며 송강의 관동별곡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낙산사는 『관동십경』에 옛 모습이 잘 남아있고, 『삼국유사』, 『동문선』, 『동문여지승람』 등의 고문헌에 많은 시인과 명사들이 낙산사 창건 및 중수 기록과 유람기, 경관을 노래한 시문이등을 다수 전하는 등 역사적 가치가 큰 명승지이다.
梨니花화나ᆞ간 바ᆞ갈셔 디고 졉동새 슬피 울 제,
洛낙山산 東동畔반으로 義의相샹臺다ᆡ예 올라 안자,
日일出출을 보리라 밤듕만 니러하ᆞ니,
祥샹雲운이 집픠나ᆞ간 동, 六뉵龍뇽이 바퇴나ᆞ간 동,
바다하ᆡ ᄯ거날 제나ᆞ간 萬만國국이 일위더니,
天텬中듕의 티ᄯ그니 毫호髮발을 혜리로다.
아마도 녈구름 근쳐의 머믈셰라.
배꽃은 벌써 지고 소쩍새가 슬피 울 때,
낙산사 동쪽 길 따라 의상대에 올라 앉아,
일출을 보려고 한밤중쯤 일어나니,
상서로운 구름이 지피는 듯, 여섯 용이 떠받치는 듯,
(해가) 바다를 떠날 때에는 온 세상이 일 듯하더니,
하늘에 치솟아 뜨니 터럭도 셀 수 있도다.
행여나 지나가는 구름 근처에 머물까 두렵도다.
정철 『관동별곡(關東別曲)』 중
12. 명태의 고장, 강원도 고성
강원도 고성군 거진항은 국내산 명태의 본고장이다. 전국 명태 어획량의 70%가 고성군 어장에서 잡힌다. 명태는 명천군에 살던 태 씨 성을 가진 어부가 처음으로 잡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명태와 관련된 일화는 조선 인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함경도 관찰사가 명천군(明川郡)을 초도순시(初度巡視)할 때의 일이다. 반찬으로 내놓은 생선이 담백하고 맛이 좋아 무슨 생선이냐고 물었다. 주민들은 명천에 사는 태(太)씨 성을 가진 어부가 처음으로 잡아 온 고기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관찰사는 명천의 ‘명’ 자와 태 씨의 ‘태’ 자를 따서 명태(明太)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함경북도 명천(明川)에 사는 어부 중에 태 씨(太氏) 성을 가진 자가 있었다. 어느 날 낚시로 물고기 한 마리를 낚아서 고을 관청의 주방 일을 보는 아전으로 하여금 도백(道伯)에게 드리게 하였는데, 도백이 이를 매우 맛있게 여겨 물고기의 이름을 물었으나 아무도 알지 못하고 단지 “태 어부가 잡은 것이다.”라고만 대답하였다. 이에 도백이 말하기를, “명천의 태 씨가 잡았으니, 명태라고 이름을 붙이면 좋겠다.”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이 물고기가 해마다 수천 석씩 잡혀 팔도에 두루 퍼지게 되었는데, 북어(北魚)라고 불렀다.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이 말하기를, “300년 뒤에는 이 고기가 지금보다 귀해질 것이다.”하였는데, 이제 그 말이 들어맞은 셈이다. 내가 원산(元山)을 지나다가 이 물고기가 쌓여 있는 것을 보았는데, 마치 오강(五江)[2]에 쌓인 땔나무처럼 많아서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었다.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임하필기(林下筆記, 1871) 中
우리에게 먹을거리로 친숙한 물고기로, 지역이나 조리 방식에 따라 호칭이 다양하다. 이름은 하나인데 별명은 50개가 넘는다고 한다. 한국의 물고기 가운데 가장 호칭이 많은 물고기라 할 수 있다.
생태 : 어떤 가공과정도 거치지 않은 갓 잡은 명태
북어 : 그냥 건조한 명태
코다리 : 반쯤 말린 명태
동태 : 겨울에 잡아서 얼린 명태
황태 : 얼렸다 녹였다를 반복해서 말린 명태
낙태 : 덕장에서 건조할 때 땅에 떨어져 상품 가치가 낮은 황태
먹태 : 황태를 만들다가 날씨가 풀려 버려 잘못된 상태의 명태
노가리 : 명태 어린 개체를 말린 것. 이야기를 잘하거나 거짓말을 자주 쓰는 사람더러 "노가리 깐다"라고 표현하는 동남 방언이 있는데, 이는 명태가 낳는 알의 개수가 어마어마하한 데서 기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