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박 2일형 답사
1. 최고(最古)의 고장, 청주(淸州)
청주는 충청북도 중서부에 위치하였으며, 도청 소재지이자 충북 최대의 도시이며, 충청북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이다. 충청도의 ‘청’이 바로 청주에서 유래되었으며, 충청권 전체로 봤을 때 제2의 도시이며, 교육의 도시를 표방하고 있다.
청주의 경제 규모는 이미 광역시급 대도시가 되었다. 2018년 기준 청주시의 지역 내 총 생산(GRDP)은 34조를 돌파하여 약 37조인 광주광역시와 비슷한 규모이고, 약 39조인 대전광역시에 버금가는 수준이다. 또한 교통의 중심지인데, 경부고속도로와 중부고속도로, 전국 유일의 KTX 경부, 호남선의 분기역인 오송역과 충청권 유일의 국제공항인 청주국제공항 등이 위치하고 있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땅이었고 백제 시대에는 상당현이라 칭하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자 지리적 중요성으로 인해 5 소경 중의 하나인 서원경으로 승격, 지방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고려 태조 23년(940년)에 청주로 지명을 개칭하였으며, 고려 우왕 3년(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본인 직지(直指)를 간행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청주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본래 백제의 상당현(上黨縣)인데, 신라가 차지하여 신문왕(神文王) 5년에 처음으로 서원소경(西原小京)을 두었다가, 경덕왕(景德王) 때에 서원경(西原京)으로 고쳤으며, 고려 태조 23년 경자에 청주로 고치었다.
세종실록 149권, 지리지 충청도 청주목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수운(水運)이 발달한 충주(忠州)가 교통의 요지로 부상함에 따라 청주는 상대적으로 발전이 정체되었으나, 1905년 경부선 철도 개통과 함께 급속하게 발전하었으며, 1908년에는 도 관찰사가 충주에서 청주로 이전되었다. 1920년 충북선 개통은 지역발전을 획기적으로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으며, 1946년에 청주부와 청원군이 분리되었고 1949년에 청주시로 승격되었다.
교육도시의 명성에 맞게 대학교의 수도 비슷한 규모의 도시들보다 많다. 청주 내 국립대는 충북대학교, 청주교육대학교,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한국교원대학교, 공군사관학교 등이 소재하고 있으며, 사립대는 청주대학교, 서원대학교(구 청주사범대학교)와 가톨릭꽃동네대학교가 위치하고 있다. 한편, 지역의 거점국립대학교인 충북대학교의 약칭은 충대(忠大)인데, 대전에서는 주로 충남대학교를 칭할 때 쓰인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이 청주 흥덕사에서 발행되어 청주는 직지의 고장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직지심체요절은 2001년 9월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되었지만 현재는 파리의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1887년 프랑스의 한 외교관이 한국에서 수집한 이 책을 파리의 골동품 수집가에게 넘겼는데, 수집가가 죽고 그의 가족이 프랑스 국립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이러한 직지의 고장이기 때문에 본 청주, 보은편의 제목을 ‘최고(最古)의 고장’으로 명명하였다.
2. 초정리행궁
조선의 궁궐은 그 용도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1. 법궁(法宮)은 공식궁궐들 가운데 으뜸이 되는 궁궐로 정궁이라고도 하며 경복궁이나 창덕궁이 이에 해당된다.
2. 아궁(衙宮)은 보조궁궐로 법궁의 화재나 변고가 생겼을 때 사용하는 궁궐로 법궁이 아궁이 되기도 하며 또한 아궁이 법궁이 되기도 한다.
3. 별궁(別宮)은 왕이 되기 전 살던 사저로 잠저(潛邸)라고도 한다.
4. 행궁(行宮)은 왕이 본궁 밖으로 나아가 머무는 임시장소로서의 궁궐을 말하며, 이궁(離宮) 또는 행재소(行在所), 행궐(行闕)이라고도 했다. 행궁에는 세조가 다니던 온양행궁, 임진왜란 때 선조가 피난했던 의주행궁, 인조 때 건립한 광주행궁(남한산성 행궁), 강화행궁, 부안행궁, 숙종 때 북한산성에 건립한 양주행궁, 정조 대 건립한 화성행궁과 전주행궁 등이 있다.
5. 궁방(宮房)은 왕의 아버지 정도의 격을 가진 사람의 집도 궁이라 하며(흥선대원군의 운현궁), 왕자. 공주 등 왕족의 집은 방이라 한다.
6. 칠궁(七宮)은 왕비가 아닌 왕의 생모를 모신 사당으로 육상궁(숙종의 후궁이며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 씨), 저경궁(선조의 후궁 인빈 김 씨), 대빈궁(경종의 생모이자 숙종의 후궁인 희빈 장 씨), 선희궁(사도세자의 생모이자 영조의 후궁인 영빈 이 씨), 경우궁(순조의 생모이자 정조의 후궁인 수빈 박 씨), 덕안궁(영친왕의 생모이자 고종의 후궁인 순헌황귀비) 등이 있다.
이 중 세종이 말년에 눈병 치료를 위해 짓고 머물렀던 곳이 바로 초정행궁이다. 이곳에는 탄산수인 초정약수가 나오는데 세종은 이곳에서 목욕, 질병 치료, 휴양 등을 하며 한글창제를 마무리하였다고 한다.
“초수(椒水)는 고을 동쪽 39리에 있는데 그 맛이 호초 같으면서도 차고, 그 물에 목욕을 하면 병이 낫는다. 세종과 세조가 일찍이 이곳에 행차한 일이 있다.”
『동국여지승람』
‘후추처럼 톡 쏘는 물이 나오는 우물’이라는 뜻의 초정약수는 땅 속 깊은 곳의 화강암층에서 솟아나는 탄산수로 각종 미네랄이 풍부하여 세계광천학회에서는 독일의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 미국의 샤스터(Shasta), 조선의 초정약수를 세계 3대 광천수로 꼽을 뿐만 아니라, 미국식품의약국(FDA)의 검사에서도 고혈압, 위장병, 당뇨병, 안질, 피부병 등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인정하기도 했다.
세종의 초정리 행차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세종대왕이 한글 창제에 한창 몰두할 때였다. 밤낮없이 집중해서인지 특히 눈이 피로하기 시작하더니 벌겋게 부어오르고 시야가 흐려지는 일이 잦았다. 그 무렵 세종대왕은 “청주의 초수가 눈병에 효험이 있다고 합니다.”라는 보고를 들었다. 초정 약수가 효험이 있음을 확인한 세종대왕은 바로 청주에 행궁을 짓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 사이 한글 창제에 대한 이야기가 조정에 퍼지면서 관리들의 반대 상소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세종대왕은 뜻을 굽히지 않고 반대 상소를 올린 자들을 감옥에 가두고는, 소란스러운 조정을 떠나 초정으로 향했다. 초정 행궁에 도착한 세종대왕은 편안한 마음으로 치료를 시작하였다. 초정 약수가 담긴 대접을 살펴보니 물의 알갱이가 방울방울 맺혔다 사라졌다 하는 것이었다. 곧 마셔보니 “따끔따끔 톡 쏘는 것이 정말 새로운 맛이로구나!”라며 신기해하였다.
그다음으로는 초정 약수가 담긴 대야에 눈을 담갔다. 먹어보았을 때처럼 눈이 따끔따끔하였지만 몇 차례 반복하자 점차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또 초수가 가득 담긴 탕에 들어가자 온몸을 톡 쏘는 느낌을 받았다. 탕에 들어가서도 눈 주위를 문지르며 눈병을 치료하였다. 몇 날 며칠을 이런 식으로 반복하자 세종대왕은 “눈이 한결 편안해졌구나. 이제 좀 집중해서 일을 볼 수 있겠구나.”라며 흐뭇해하였다. 행궁에서 생활하던 세종대왕은 마을의 백성들의 삶을 직접 살펴보게 되었다. 가뜩이나 왕의 행차로 더 힘들지 않을까 가엽게 여기면서, 백성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고 특히 노인들이 있는 집에는 곡식을 더 많이 하사하였다. 이렇듯 세종대왕은 백성들을 세심하게 살피면서도, 초정에 올 때에 같이 왔던 집현전의 젊은 학자들인 신숙주, 성삼문, 정인지 등과 한글을 보완하는 작업에 집중하였다. 그 후 한양으로 돌아갔다. 얼마 뒤 다시 초정으로 와서 종전과 비슷한 생활을 하다 궁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3. 최고(最古)의 기록, 직지(直指)
직지(直指)는 고려시대 청주목(淸州牧)에 있었던 사찰인 흥덕사(興德寺)에서 만들어진 인쇄물로, 정확한 이름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다.
책 제목을 쉽게 풀이해 보면,
백운(白雲)이라는 승려(和尙)가 부처님(佛)과 스님들(祖)이 마음의 본모습을(心體) 바로 가리켜 보인(直指) 가르침 중에서 중요한 부분(要節)을 뽑아 기록하여(抄錄) 펴냈다는 뜻이다.
이름이 길기 때문에 우리가 부르기로는 '직지' 또는 '직지심체요절'로 축약해서 부르는 경우가 많다. 일부에서는 '직지심경'이라 부르기도 하나, 직지는 불경이 아닌 요절(요약본)이므로 엄밀히 직지심경은 잘못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직지는 1377년 고려 청주 흥덕사에서 당시 고승이었던 백운화상이 쓴 책을 금속활자로 본뜬 것이다. 독일의 금속활자본인 「구텐베르크 42행 성서」보다 무려 78년이나 앞서 간행되었다. 직지는 각 상권, 하권의 2권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현재 프랑스에 있는 원본은 하권에 해당하며, 상권은 한때 현상금까지 내걸고 찾으려 노력하였지만 아직까지도 발견되지 않았다.
직지는 공식적으로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으로 알려져 있는데, 현재 남아있는 본은 1372년 제작이 시작되어 1377년에 간행되었다. 이는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간행한 금속활자본 성경보다 78년 더 앞선 기록이다. 기록에 의하면 직지 이전에도 1234년 인종 시기의 '고금상정예문(古今詳定禮文)', 1239년 고종 시기의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 같은 금속활자 인쇄물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나, 안타깝게도 소실되어 현대까지 전해지지 않기에 인류에게 남아있는 것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 직지이다. 이는 당시 고려의 우수한 인쇄문화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산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 우수한 문화재인 『직지심체요절』은 현재 우리나라가 아닌 프랑스 파리 국립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 이유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1886년 조선은 프랑스와 통상 조약을 맺는다. 이후 1887년 꼴랭 드 쁠랑시(Collin de Plancy, 1853∼1922)가 프랑스 외교관으로 우리나라에 근무하게 되었는데 그는 우리나라에 있으면서 다양한 종류의 고서와 각종 문화재를 수집하였다. 『직지심체요절』의 수집 경로는 정확하게 아직 밝혀진 바 없지만, 1901년 모리스 꾸랑(Maurice Courant, 1865∼1935)이 저술한 「조선 서지」에 『직지심체요절』이 게재된 것으로 보아 분명한 것은 1900년경에 이미 꼴랭 드 쁠랑시가 프랑스로 가져간 수집품들 속에는 『직지심체요절』이 있었다는 것이다.
1911년 『직지심체요절』은 앙리 베베르(Henri Vever, 1854∼1943)라는 사람이 경매를 통해서 구입하여 소장하다가 1950년 경 앙리 베베르의 유언에 따라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기증이 된다.
그럼 프랑스에 있던 『직지심체요절』은 어떻게 발견되었을까? 『직지심체요절』은 프랑스 유학생 박병선 박사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1972년 프랑스 파리 국립 도서관 사서로 일하고 있었던 박병선 박사는 유네스코가 후원하는 국제 도서 전시회에 전시할 책을 고르고 있다가 우연히 서고 한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보관되고 있던 『직지심체요절』을 발견한다. 그리고 오랜 연구를 거듭한 끝에 이 책이 구텐베르크의 금속 활자보다 앞선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로 인쇄된 책이라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4.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세계기록유산이란, 유네스코가 고문서 등 전 세계의 귀중한 기록물을 보존하고 활용하기 위하여 1997년부터 2년마다 세계적 가치가 있는 기록유산을 선정하는 사업으로 유산의 종류로는 서적(책)이나 문서, 편지 등 여러 종류의 동산 유산이 포함된다.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등재기준이 필요하다.
가. 진정성(authenticity)
- 유산의 본질 및 기원을 증명할 수 있는 정품이며, 그 실체와 근원지가 정확한 기록자료
나. 완전성(integrity)
- 기록유산이 온전하고 완전하게 포함되었는지 여부
다. 세계적 중요성(world significance) * 아래의 세 가지 중 최소 하나 이상 충족해야 함
1) 역사적 중요성(Historical significance) : 세계사적 중요성을 지니고 관련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는 경우
• 정치적 또는 경제적 발전, 사회적 또는 정신적 운동/세계 역사상 저명한 인물/세계 변화에 중대한 사건/시대, 사건 또는 사람과 관련된 특정 장소/독특한 현상/주목할 만한 전통 관습/다른 국가나 공동체 간의 관계 발전/삶과 문화 패턴의 변화/역사의 전환점 또는 중대한 혁신/예술, 문화, 과학, 기술, 스포츠 또는 삶과 문화에서 우수성을 보여주는 사례
2) 형태와 양식(Form and style) : 뛰어난 미적, 형식적, 언어적 가치를 가지거나 형태 및 스타일에서 중요한 표본이 된 경우
3) 사회적, 공동체적 또는 정신적 중요성(Social, community or spiritual significance) : 특정 공동체가 해당 기록유산에 갖는 정서적 애착이나 현재 시점에서 공동체의 정체성과 사회적 응집에 기여하는 경우
라. 법률기준
1) 소유권 : 신청한 등재 목록에 대한 소유자(관리자)의 동의 필요
2) 접근성 및 저작권 : 해당 유산과 관련 소유자(관리자)의 접근 및 저작권 사용승인 필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대우를 받게 된다.
가. 보존관리에 대한 유네스코의 보조금 및 기술적 지원
나. 홍보와 인식 제고를 위한 세계기록유산 로고 사용 및 유네스코를 통한 지속적 홍보 가능
다. CD-ROM, 디지털 테이프와 오디오 CD 같은 디지털기술을 활용하여 세계기록유산을 가능한 많은 대중에게 제공할 수 있음
그리고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은 다음과 같다. (등재 연도 순)
훈민정음(1997년)
조선왕조실록(1997년)
직지심체요절(2001년)
승정원일기(2001년)
조선왕조의궤(2007년)
해인사 대장경판 및 제경판(2007년)
동의보감(2009년)
일성록(2011년)
5‧18 민주화운동 기록물(2011년)
난중일기(2013년)
새마을운동기록물(2013년)
한국의 유교책판(2015년)
KBS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기록물(2015년)
조선왕실 어보와 어책(2015년)
국채보상운동기록물(2017년)
조선통신사기록물(2017년)
5. 용두사지 철당간
청주의 국보이며,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이라는 명칭으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으며,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 ‘안심사 영산회 괘불탱’과 함께 청주시의 국보이다.
지름 46~39cm, 높이 65cm가량의 철통 20개를 쌓아 13.1m의 높이를 이루고 있다. 원래는 비어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콘크리트를 채워 보수하였다. 본래 철통은 30개였으나 10개가 소실되어 현재에는 20개이다. 일설에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때 10개를 가지고 갔다고 하나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충남 공주에 있는 갑사 철당간(보물, 1963년 지정), 경기도 안성에 있는 칠장사 당간(경기도유형문화재, 1973년 지정)과 함께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대표적인 철당간이다.
용두사지 철당간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이를 『용두사 철당기』라고 한다. 이 당간의 건립연대와 내력을 밝혀주는 명문은 아래에서 세 번째 철통 둘레에 393자가량의 해서로 양각되어 있다. 내용은 청주의 호족인 김예종이라는 사람이 유행병에 걸리자 철당을 바쳐 절을 장엄할 것을 맹세하고 사촌형인 희일 등과 함께 철통 30단을 주조하여 높이 60척의 철당을 세우게 했다는 것이다.
“근래에 당대등(堂大等 : 고려 향리 중의 최고위 직함. 983년에 戶長으로 바뀜) 김예종(金芮宗)이라는 이가 있으니 고을의 큰 가문이요 지방의 손꼽히는 집안이다. 우연히 병에 걸려 문득 부처와 하늘에 약속하기를, 우러러 철당간을 삼가 만들기를 빌고, 엎드려 훌륭한 사찰을 장엄할 것을 맹서하였다. 그러나 세월은 멈추기 어렵고 죽음에 빠지기는 쉬워 그 사이에 몇 년이 늦어지고 때는 쉽게 멀어졌다. 이때에 종형인 당대등 김희일(金希一) 등이 저쪽에서 돌이킨 서원이 되게 하고 이쪽에서 끊어진 인연을 이어 마침내 30단의 철통을 주조하게 하고 이어 60척의 당주(幢柱)를 세웠다.”
철당기 맨 끝에 준풍(峻豊) 3년 2월 29일에 건립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고려 광종 13년(962)에 건립했음을 알 수 있으며, 다른 당간들과는 다르게 그 기록이 남아있어 당시 사상과 문화, 건축, 미술 등을 유추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6. 속리산(俗離山) 세조길
1450년경 조선의 7대 왕이었던 세조가 직접 속리산을 왕래하던 길이다. 2016년 9월에 처음 개통하여 그 해에만 70만 명 이상이 탐방하여 가장 성공적인 명소 사업으로 꼽히고 있다.
道不遠人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았건만
人遠道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
山非離俗
산은 속세를 떠나지 않았건만
俗離山
속세가 산을 떠난 것이다
이 시는 신라 헌강왕 때 속리산 묘덕암을 찾은 고운 최치원의 글이다. 고운이 읊은 그대로 속리산은 그 옛날 열 두 구비 말티고개를 넘어야만 닿을 수 있는 첩첩산중이었다. 이름 또한 속세를 떠난다는 뜻이니, 속리산 깊은 곳에 발을 들여놓으면 시의 울림이 더욱 절실하게 와닿는다.
충북 보은군과 괴산군, 경북 상주시의 경계에 있는 속리산은 최고봉인 천왕봉을 중심으로 비로봉, 길상봉, 문수봉 등 9개의 봉우리가 있다 하여 ‘구봉산’(九峰山)으로도 불린다. ‘고려사지리지’나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신라 때에는 ‘속리악’(俗離岳)이라고 일컫고, 중사(中祀)가 행해졌다”라고 기록돼 있다.
예로부터 속세와 단절이 가능한 명산으로 꼽혀온 속리산은 천왕봉 코스보다는 천년고찰 법주사 쪽에서 올라가는 문장대 코스가 가장 인기 있는 등산로다. 문장대는 본래는 구름 속에 잠긴다고 운장대 (雲藏臺)였으나 세조가 이곳에서 시를 읊었다 하여 문장대(文藏臺)로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속리산에는 문장대뿐만 아니라 법주사로 행차할 때 가마가 걸려 움직이지 못하자 가지를 들어 올렸다는 정이품송(천연기념물 제103호), 목욕하며 피부병을 고쳤다는 목욕소(沐浴沼), 바위 밑에 앉아 생각에 잠겼던 눈썹바위, 속리산의 배꼽에 해당하는 복천암까지 조선의 7대 임금인 세조의 흔적이 녹아 있다.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즉위한 세조는 내내 죄책감에 시달렸고 만년에는 부스럼(종기)으로 고생했다. 지난해 9월 개통한 세조길은 세조가 요양 차 스승인 신미대사가 머물던 복천암으로 순행 왔던 길로, 천년고찰 법주사에서 세심정 간 2.4㎞ 구간이다. 여기에 나란히 이어지는 ‘오리숲’을 더하면 운치 있는 숲길이 십 리를 훌쩍 넘는다. 속리산 관광단지에서부터 법주사 입구까지 걸쳐 있는 오리숲은 그 거리가 대략 2㎞(5리)라 붙은 이름으로, 법주사를 찾는 사람들이 걸었던 길이다.
7. 부처님의 법(法)이 머무는(住) 절(寺) , 법주사(法住寺)
세조에게 예를 표한 정이품(正二品) 소나무를 지나, 부처님보다 먼저 사찰을 찾는 사람들을 품어주는 숲길을 지나면 법주사를 만나볼 수 있다.
법주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이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지정한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중 하나인 한국불교의 자랑이다.
신라 진흥왕 14년(553년)에 당나라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의신대사가 창건한 절인데, 인도에 유학을 다녀온 의신대사가 553년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을 흰 노새에 싣고서 절을 지을 만한 터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어느 날 노새가 지금의 법주사 터에 이르러서는 조금도 움직일 생각을 않고 울기만 해댔다. 의신은 바로 이 자리가 절터임을 직감하고서 여기에 법주사를 지었다.
고려시대에는 뛰어난 고승대덕들이 차례로 법주사에 머물며 수 차례에 걸쳐 중창이 이루어졌다. 문종의 다섯째 아들인 도생승통은 법주사의 주지를 지냈으며, 원종 때 미수대사는 왕명으로 각종 경전 92권을 집필하기도 하였다. 공민왕 12년(1363)에는 공민왕이 직접 법주사에 와서 양산 통도사에 모셔진 부처님의 사리 1과를 법주사에 봉안하도록 하였다. 이때 사리를 모셨던 사리탑이 아직도 법주사 능인전 뒤쪽에 남아있다. 고려 숙종이 그 아우 의천을 위하여 연회를 베풀었을 때 모인 승려가 3만 명이나 되었다고 하니 법주사의 위상과 그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조선 고종 9년(1872년)에는 경복궁 재건에 사용할 당백전을 주조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사찰 내의 커다란 미륵장륙상과 철당간이 수거되기도 했다. 현재는 오랜 노력 끝에 대형 금동미륵불상이 자리 잡게 되었으며, 철당간 역시 복구를 해 놓았다.
법주사 팔상전(八相殿)
법주사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문화재가 바로 1962년에 국보로 지정된 팔상전(八相殿)이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5층의 목탑으로 지금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탔으나, 인조 2년(1624)에 승려 벽암이 주도하여 다시 지었다. '팔상전'이라는 이름 때문에 8층 목탑으로 착각하기 쉬우나 실제로는 5층 목탑이다. 벽면에 석가모니 부처의 일생에서 중요한 8가지를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있어서 '팔상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탑의 구조를 살펴보면,
1층과 2층은 앞·옆면 5칸, 3층과 4층은 앞·옆면 3칸, 5층은 앞·옆면 2칸씩으로 되어 있고, 4면에는 돌계단이 있는데 낮은 기단 위에 서 있어 크기에 비해 안정감을 준다. 지붕은 꼭대기 꼭짓점을 중심으로 4개의 지붕면을 가진 사모지붕으로 만들었으며, 지붕 위쪽으로 탑 형식의 머리장식이 달려 있다.
목탑의 전성기였던 삼국과 고려시대 이후의 목탑이라 그런지 전형적인 고대식 목탑과는 달리 외형이나 구조가 상당히 특이한 편이다. 거대한 중심 기둥인 심주를 중심으로 한 연속구조인데, 내부는 통층이므로 사람이 걸어 올라갈 수는 없고, 높이는 22.7m, 평면은 5칸으로 정방형이다.
건물의 양식 구조가 층에 따라 약간 다른데, 1층부터 4층까지는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공포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고, 5층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설치한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은 사리를 모시고 있는 공간과 불상, 팔상도를 모시고 있는 공간, 그리고 예배를 위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팔상도(八相圖)
팔상도란, 석가모니불의 일대기를 압축 묘사한 불화로써 사찰의 팔상전(八相殿, 捌相殿)이나 영산전(靈山殿)에 많이 봉안된다. 화폭마다 제목을 적어 넣어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한 것이 팔정도의 특징인데, 8개 화폭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내용 이해를 돕기 위해 양산 통도사 영산전 팔상전(보물)을 함께 제시하였다.
1. 부처가 도솔천에서 내려오는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
도솔래의상에서는 네 장면이 묘사된다. 탱화의 왼쪽에는 마야궁에서 마야 부인이 의자에 앉아 흰 코끼리를 탄 호명보살이 내려오는 꿈을 꾸는 장면이 묘사된다. 바로 그 위에 입태전(入胎殿)이 있어서 입태되는 장면이 묘사되고, 그 위에는 소구담이 도적으로 몰리어 죽는 장면이 묘사된다. 오른쪽에는 정반왕궁(淨飯王宮)이 있고 여기에는 왕과 왕비가 꿈꾼 내용을 바라문에게 물어보는 장면이 묘사된다.
2. 룸비니 동산에 내려와서 탄생하는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비람강생상에서는 여섯 장면이 묘사된다. 첫째 마야 부인이 궁전을 떠나서 친정으로 가던 도중 룸비니 동산에서 무우수(無憂樹) 나뭇가지를 잡고 서서 오른쪽 겨드랑이로 아기를 낳는 장면, 둘째 태어난 아기가 한쪽 손은 하늘을, 한쪽 손은 땅을 가리키면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외치는 장면, 셋째 제천(諸天)이 기뻐하면서 갖가지 보물을 공양하는 장면, 넷째 용왕(龍王)이 탄생불을 씻겨 주는 장면, 다섯째 왕궁으로 돌아오는 장면, 여섯째 아지타선인의 예언 장면으로 묘사된다.
3. 사문에 나가 세상을 관찰하는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사문유관상에서는 네 장면이 묘사된다. 태자가 동문으로 나가 노인의 늙은 모습을 보고 명상하는 장면, 남문으로 나가 병자를 보고 노고(老苦)를 느끼는 장면, 서문으로 나가 장례 행렬을 보고 죽음의 무상을 절감하는 모습, 북문으로 나가 수행하는 사문(沙門)의 모습을 보고 출가를 결심하는 장면이다.
4. 성을 넘어가서 출가하는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유성출가상에서는 보통 세 장면이 묘사된다. 첫째 태자궁에서 시녀들이 취하여 잠자고 있는 모습, 둘째 태자가 말을 타고 성문을 뛰어넘는 모습, 셋째 마부 찬다카가 돌아와서 왕비와 태자비에게 태자의 옷을 바치면서 태자가 떠났음을 보고하자 왕비와 태자비가 태자의 소재를 묻는 장면 등이다.
5. 설산에서 수도하는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설산수도상에서는 보통 여섯 장면이 묘사된다. 첫째 태자가 삭발하고 사문의 옷으로 갈아입는 장면, 둘째 찬다카가 돌아가는 장면, 셋째 정반왕이 교진여 등을 보내어 태자에게 왕궁으로 돌아갈 것을 설득하는 장면, 넷째 환궁을 거절하자 양식을 실어 보내는 장면, 다섯째 목녀(牧女)가 우유를 석가에게 바치는 장면, 여섯째 모든 스승을 찾는 모습 등이다.
6. 보리수 아래에서 마귀의 항복을 받는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수하항마상에서는 네 장면이 묘사된다. 첫째 마왕 파순이 마녀로 하여금 유혹하게 하는 장면, 둘째 마왕의 무리가 코끼리를 타고 위협하는 장면, 셋째 마왕이 80억의 무리를 모아 부처님을 몰아내려고 하는 장면, 넷째 마왕의 항복을 받아 성도 하는 장면이다.
7.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포교하는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
녹야전법상에는 네 장면이 묘사된다. 대개 상단과 하단으로 구분되는 경우가 많다. 상단에는 석가삼존불이 설법하는 모습이다. 하단에는 교진여 등의 다섯 비구에게 최초로 설법하는 모습, 기원정사(祇園精舍)를 건립하는 장면, 흙장난을 하던 아이들이 흙을 쌀로 생각하고 부처님께 보시하자 탑으로 바뀌는 장면 등이다.
8.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는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
쌍림열반상은 보통 세 장면으로 묘사된다. 첫째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하는 모습, 둘째 금관에 입관된 부처님이 가섭의 문안을 받고 두 발을 관 밖으로 내보이는 모습, 셋째 다비하여 사리가 나오자 8대 왕이 차지하기 위하여 다투는 장면과 바라문이 이를 중재하는 모습 등이다.
법주사 쌍사자 석등
법주사 쌍사자 석등은 8세기경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는 석등이다. 법주사의 대웅전과 팔상전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데, 석등의 보존을 위해 보호각을 지어놓았으며, 석등의 높이는 3.3m에 달하며 전체적으로 보존상태는 아주 좋다.
석등이란 돌로 만든 등기(燈器)를 말하는데, 불교에서 등기는 예불을 올리는 의식에서 기본적인 도구일 뿐 아니라 사찰에서 행하는 모든 행사에서 매우 중요시하는 도구 중 하나이다.
석등의 구조적 형태를 분석하면 일반적으로 상대석, 중대석, 하대석으로 구분된다.
상대석은 석등의 머리 부분을 일컫는데, 지붕 역할을 하는 부분인 옥개석과 불을 피우는 창이 뚫린 화사석(火舍石)으로 구성된다. 그 단면은 대체로 팔각형을 이룬다.
중대석은 간주석이라고도 부르며 석등의 기둥을 이루는 부분을 지칭한다. 기둥의 위로 연꽃잎 무늬를 새긴 연화석을 둔다.
하대석은 지면과 맞닿아 바닥에서 석등을 받치는 부분을 일컫는데, 탑의 형식으로 비유하자면 기단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하대석은 지대석 부분과 이 위에 올리는 하대석으로 구분가능한데, 지대석 위에 올라가는 하대석은 2단으로 하부하대석과 상부하대석으로 나뉜다.
지대석(地臺石)은 말 그대로 땅과 닿는 받침돌이며, 지대석 위에 올라가는 하대석 중 상부하대석에는 중대석을 꽂는 구멍을 파놓고 구멍 둘레에 연꽃무늬를 새겨놓는다. 지대석은 주로 네모나고, 상부하대석과 하부하대석의 단면은 대체로 둥근 원형이거나 팔각형을 이룬다.
법주사 쌍사자 석등도 여느 석등들과 마찬가지로 상대석과 하대석은 팔각형의 구조를 보인다. 하지만 중대석에서 큰 파격을 보여준다. 이 석등은 사자 암수 한 쌍을 조각하여 기둥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다른 석등들과 구분되는 특징을 보인다. 사자 두 마리가 가슴을 맞대고 앞발을 위로 치켜세우고 상대석을 떠받치는 형태로 서 있어서, 측면에서 보면 안정적인 X자형 자세를 이룬다. 사자 두 마리의 조형미도 뛰어난데, 상체는 우람하고 다리는 곧게 뻗어 있어서 힘차고 유연한 느낌을 주면서도 머리의 풍성한 갈기, 엉덩이에 붙어 있는 꼬리 등도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데다가 사자 한 놈은 무거운 상대석을 떠받치느라 힘이 드는 듯 입을 벌리고 있고 다른 한 놈은 근엄하게 입을 앙다물고 있는 표정까지 묘사해 놓아 해학미까지도 느껴진다.
여기에 다른 동물도 아니고 굳이 사자를 만들어 놓은 것은, 불교에서 사자는 불법을 수호하는 존재인데 부처의 진리를 상징하는 석등을 사자가 높이 치켜들어 올림으로써, 사자에게 수호받는 불교의 법이 사방으로 널리 퍼져나간다는 의미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쌍사자가 기둥 역할을 하는 석등은 법주사의 것이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보이는데, 매우 기발하고 상징적인 조형이라 후대에도 여기서 영향을 받고 모방하여 만들어진 쌍사자 석등들이 몇 기가 더 존재한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법주사 쌍사자 석등은 균형미가 가장 뛰어나고 섬세한 조각 솜씨가 가장 우수하다고 평가받는다.
이처럼 쌍사자 석등이 지닌 조형사적 의미로는, 다른 나라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 유일무이한 한반도만의 독창적인 양식이라는 점이 있다. 단순한 원기둥 혹은 팔각기둥의 형태를 탈피하여 사자가 불 피우는 부분을 떠받드는 형상은 조형적으로도 대단히 효과적일 뿐 아니라 이에 담긴 의미까지도 효과적으로 나타내는 방식으로서, 신라인들이 창안해 낸 우리만의 고유한 조형물이라고 할 수 있다.
법주사 쌍사자 석등은 현존하는 쌍사자 석등 중에서 가장 완벽한 형태이자 이후에 만들어진 쌍사자 석등들에 큰 영향을 준 선구적 작품이라는 점과 당대 고도로 발달한 석조공예술을 보여줄 뿐 아니라 통일신라를 대표할 만한 석조예술품 중 하나라는 점 등의 가치를 인정받아 일찍이 1962년 12월 20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법주사 쌍사자 석등도 여느 석등들과 마찬가지로 상대석과 하대석은 팔각형의 구조를 보인다. 하지만 중대석에서 큰 파격을 보여준다.
법주사 석련지 (法住寺 石蓮池)
법주사 천왕문을 들어서면 동쪽에 위치한 돌로 만든 작은 연못으로, 연꽃을 띄워 두었다고 한다. 불교에서의 연꽃은 극락세계를 뜻하여 사찰 곳곳에서 이를 본뜬 여러 형상들을 만날 수 있다.
기단부는 팔각형의 돌로 이루어져 있고, 가운데 잘록한 부분은 구름모양의 돌이 올라가 있으며, 그 위에 커다란 석련지가 그릇 모양으로 만들어져 올려져 있다. 조성 시기는 신라 33대 성덕왕 19년(720년)이며, 용화보전 정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깨진 부분이 있으며, 쇠를 이용해 깨진 부분을 연결해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법주사 석련지는 720년에 세워진 통일신라시대의 석련지로, 보존 상태가 매우 좋고 세부 조각 수법이 우수하며 조형미도 뛰어나다. 한국 석련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으며, 통일신라시대 융성했던 석조공예술을 보여주는 대표 유물이라 할 수 있다. 이에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 국보로 지정되었다.
법주사 석련지는 720년에 세워진 통일신라시대의 석련지로, 보존 상태가 매우 좋고 세부 조각 수법이 우수하며 조형미도 뛰어나다. 한국 석련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으며, 통일신라시대 융성했던 석조공예술을 보여주는 대표 유물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