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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은 Oct 04. 2023

19.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王陵) -동구릉 편-

당일형 답사


1. 신들의 정원조선왕릉(王陵)     


 왕릉(王陵)이란, 왕과 그 정실 배우자가 죽으면 묻히는 무덤을 말하며 일반적으로 능(陵)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즉 왕을 낳은 후궁이나 왕족, 그리고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무덤은 원(園)이라고 한다. 그 외 나머지 왕족들이나 폐위된 왕의 무덤은 묘(墓)로 분류한다.     


 가정 먼저 선사시대의 왕릉은 당연 고인돌이다. 역사상 청동기시대부터 계급이 생겨났으므로 부족장이나 군장이 그 집단의 왕이나 다름없었다. 고인돌의 크기가 클수록 그 주인의 권위와 업적을 나름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고인돌을 만드는 과정에서 엄청난 노동력과 재정이 소모되었으므로, 차츰 철기 시대에 들어서면서 고인돌은 거의 없어지고 토광묘나 옹관묘 같은 비교적 쉬운 묘장으로 바뀌게 되었다.  

    

 다만 왕의 무덤은 일반인과는 당연히 달라야 했기 때문에 크기를 크게 하거나, 매장 시 부장품(副葬品)들을 같이 묻어 만들었다. 하지만 왕의 무덤이라는 표시가 나기 때문에 도굴이 될 수밖에 없었고, 3세기 이전의 왕릉 중에서 온전한 것은 거의 없다. 도굴당하지 않고 그대로인 왕릉도 있겠지만 발견이 되지 않았거나 방어 장치가 너무 강해 접근할 수 없는 경우다.     


왕릉, 신들의 정원으로 떠나보자. 


2. 고구려의 왕릉     

 고구려 왕릉은 고구려의 수도였던 졸본성, 국내성, 평양 각지에 소재하는 왕릉으로 현재까지 무덤의 주인이 밝혀진 왕릉은 없고 추정만 하고 있을 뿐이다.      


 고구려 초기는 실물 자료로 삼을 만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전해 내려오는 기록을 통해서 추측해 볼 수 있다.      


三年 秋九月 王如卒本 祀始祖廟 冬十月 王至自卒本

3년(서기 167) 가을 9월, 임금이 졸본으로 가서 시조묘(始祖廟)에 제사 지냈다.

겨울 10월, 임금이 졸본에서 돌아왔다     

                                                      삼국사기 제16권 고구려본기 제4 신대왕조     

國壤降於予曰 昨見于氏歸于山上 不勝憤恚 遂與之戰 退而思之 顔厚不忍見國人 爾告於朝 遮我以物

국양왕이 나에게 내려와서 "어제 우 씨가 산상왕에게 가는 것을 보고는, 분함을 참을 수 없어서 마침내 우 씨와 싸웠다. 내가 돌아와서 생각해 보니 낯이 아무리 두껍다 해도 차마 나라 사람들을 볼 수 없도다. 네가 조정에 알려 나의 무덤을 물건으로 가리게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삼국사기 제17권 고구려본기 제5 동천왕 8년조          


3. 백제의 왕릉     

 백제 수도였던 한성(서울), 웅진(공주), 사비(부여) 각지에 소재하는 백제의 왕릉은, 고구려와 신라의 무덤 형식이 비교적 일정한 것에 비해 도읍을 두 번 옮긴 영향으로 무려 여섯 종류나 발견되었다.     


 한성 시대에는 돌무지무덤(積石塚), 돌방무덤(石室墓), 움무덤(土壙墓)이 조성되었고, 웅진 시대에는 돌방무덤에 흙무덤과 벽돌무덤(塼築墳)이 등장하였으며, 사비 시대에 가서는 돌방흙무덤으로 변화하였다.     

 현재까지 왕릉의 주인이 확실하게 밝혀진 건 공주 무령왕릉이 유일하다. 쌍릉은 백제 무왕의 무덤일 것으로 거의 확실시되고 있지만, 도굴이 심해 왕릉의 주인을 입증할 만한 유물이 부족하고, 무령왕릉처럼 묘지석이 나온 것이 아닌지라 100% 확증을 못 하는 상황이다.    

 

 한성백제의 무덤들은 대부분 1970년대 들어와 잠실지구 종합개발로 택지가 정비되면서 많은 고분이 사라졌다. 이에 고분에 대한 보존·복원 운동이 일어났고, 1985년 석촌동 고분군의 일부 고분만이 살아남아 고분 공원으로 남아있다. 고분 공원에 복원되어 있는 고분은 총 6기로 그중 가장 큰 3호 적석총은 밑변 50m, 높이 4.5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로 4세기 백제 최고의 전성기를 이끈 근초고왕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웅진백제 시기에는 중국 양나라의 영향을 받아 벽돌무덤이 만들어졌는데 이것은 한성 시기에도 없었고, 사비 시기에도 보이지 않는 무덤 양식이다. 이 양식을 백제가 수용한 까닭은 웅진 천도 이후 추락한 백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무덤 주인이 밝혀진 무령왕릉이 있다.     


 백제 성왕이 대외교류를 활발히 할 수 있는 사비로 수도를 옮긴 후 벽돌무덤은 사라졌고 돌방무덤만 남았다. 대표하는 것으로 능산리 고분군이 있는데,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능산리 1호분에는 사신도가 그려져 있다. 바닥은 전돌을 구워 깔았으며, 위에 판석을 올리고 천장에 연꽃과 구름을 그렸다. 일단 무왕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비시기 왕들은 여기에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무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쌍릉이 이 시기에 조성되었는데 다만 사비성이 위치했던 부여 지역이 아닌 익산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4. 신라의 왕릉     

  신라는 삼국시대 최후의 승자인 덕분에 다른 고대 국가의 왕릉들에 비해 잘 보존되어 있다.  후대 왕조인 고려왕릉보다도 보존 상태가 양호한데, 이것은 고려왕릉이 신라왕릉의 돌무지나 조선왕릉의 석회 같은 도굴 방지 대책이 없어서 도굴되기 쉬웠고, 개성이 경주에 비해 수많은 전란을 겪은 탓인지 유실된 왕릉도 많은 상태다.      


대부분의 신라왕릉들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경주역사유적지구에 포함되어 있고, 명확하게 무덤 주인이 밝혀진 건 총 8기로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선덕여왕릉, 무열왕릉, 문무왕릉, 성덕왕릉, 원성왕릉, 헌덕왕릉, 흥덕왕릉까지 해서 7기와, 경주 밖(경기 연천)의 경순왕릉까지 총 8기다. 이처럼 확실히 밝혀진 곳만 8곳이고, 누구의 능묘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규모나 위치를 봤을 때 왕릉급인 능묘는 수십 곳이 더 있다.     


 신라의 왕릉들은 마지막 왕인 경순왕릉(경기 연천)을 제외하면 모두 신라의 수도 경주시 범위 안에 있다. 왕릉 자리를 정하는 기준은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서 알기는 어렵지만 고려나 조선이 도성 주변 일정 범위 안으로 제한한 것처럼 어떤 규정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규정은 고려 조정에서도 경순왕을 경주로 못 가게 하는 명분이 되기도 한다.      


 신라의 왕릉은 초기 국가 시대의 고인돌 → 초기의 돌널무덤 → 마립간 시대의 돌무지덧널무덤 → 후기(통일신라)의 굴식 돌방무덤으로 변한다. 특히 경주에 남아있는 무덤 중 가장 크고 많은 돌무지덧널무덤은 고구려, 백제에 비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있다.      


 그러한 이유로는 신라의 무덤은 고구려, 백제와는 달리 입구를 따로 만들지 않았고, 그 내부구조가 견고하여 도굴이 어려운 특징이 있다. 또한 삼국통일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에 수백 년 더 오래 관리되고 지속되었으며, 후대 고려 시대에도 경주 김 씨는 고려의 문벌귀족으로 남아 그나마 고려 왕조의 핍박을 덜 받았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원래 신라 왕릉은 초기에는 흙 봉분 외에는 따로 시설을 설치하지 않았지만, 무열왕릉부터 비석을 세우고 봉토 밑에 자연석으로 호석을 설치하였고, 신문왕릉부터는 문인상, 무인상, 십이지신상 등 수호석으로 주변을 장식했다. 원성왕릉과 흥덕왕릉을 보면 이후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지는 능묘 제도가 거의 완성된다.  

   

5. 고려의 왕릉     

 삼국의 여러 나라가 그렇듯이 고려의 왕릉 역시 수도였던 개성 근처에 모여있으며, 잠시 강화도로 도읍을 이전했던 대몽항쟁 시기와 공양왕의 경우만 특이한 경우로 다른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왕릉의 양식은 기본적으로 통일신라 시기 정립한 양식을 기본으로 한다. 봉분 주변을 둘러싼 난간석, 12 지신을 봉분 아래에 부조한 병풍석, 무덤 주변의 석물 배치는 원성왕릉 같은 신라 후기 양식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신라왕릉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고분 벽화 같은 고구려 양식 영향으로 추정되는 요소가 일부 포함되었는데 이는 고려가 신라와 고구려의 문화를 모두 이어받으려고 했던 국가라는 점을 말해준다.    

 

 고려 34명의 왕 중에 9기의 위치는 아직까지 알려져 있지 않다.


6. 조선 왕릉     

 조선 왕릉이란, 조선(1392~1897)과 대한제국(1897~1910)의 역대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가 묻힌 능(陵)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총 42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태조의 추존 4대 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그 왕비들의 능까지 포함하면 총 50기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론 42기의 능만을 조선왕릉으로 취급하고 있다.


 조선왕릉은 2009년 제33차 세계유산위원회를 통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는데, 현재 북한에 위치하고 있는 제릉과 후릉을 제외한 40기 만이 등재되었다. 그리고 폐위되어 임금의 능이 아닌 왕자의 묘가 된 연산군묘와 광해군묘 역시 제외되었다.     


 조선왕릉의 경우, 다른 왕조의 능과는 달리 아직까지 무덤 내부에 대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진 적이 없다. 이는 왕릉 제례를 맡은 전주 이 씨 종약원에서 발굴에 동의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건전한 학술 연구라고 해도 무덤을 완전히 파헤쳐야 하니 예법상 매우 꺼릴 수밖에 없다.          


 따지고 보면 조선왕릉 이외에도 천마총과 황남대총 같은 삼국시대 왕릉급 고분들을 발굴했던 것도 예전 일제강점기 시대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지, 현재 발굴은 경주 김 씨 등 문중의 반대가 강해 어렵다. 이 때문에 조선왕릉의 내부구조는 조선왕조실록 등 왕릉 축조에 대한 기록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 왕릉의 기본적인 조성 규정을 담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포함해 국장 과정과 택지 정보 및 능침 조영 등의 자료를 담은 『국장도감의궤(國葬都監儀軌)』와 『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 등 관련 자료들이 풍부하게 남아있는 편이라서, 굳이 발굴하지 않아도 내부를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조선왕릉은 조선 시대 당시에도 조정이 엄격히 관리하였거니와, 일제강점기 기간 및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당연히 중요하게 다뤄서 관리하였다.      


 또한 시신을 안치한 석실에 석회를 두껍게 바른 회곽묘라서 포클레인 같은 중장비나 폭약 없이 소수 인력이 도굴이 불가능한 데다, 검약(儉約)을 강조한 유교 윤리에 따라 온갖 진귀한 부장품을 가져다 묻은 이전 왕조와는 다르다.       


 왕릉 주변이 훼손되었을지언정 왕릉 자체는 보존되었다. 구한말 오페르트 도굴사건이 벌어졌으나 석회벽에 막혔고, 2007년 서오릉 순창원도 당시 자행됐던 도굴 시도 역시 두터운 석회벽에 막혀 미수에 그쳤다.      

 조선의 왕릉들은 주변의 지명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신덕왕후 강 씨의 정릉(성북구 정릉동), 문정왕후 윤 씨의 태릉(태릉 선수촌), 세조의 광릉(광릉 수목원) 등이 그러하고, 그 외에도 조선왕릉에서 역명을 따온 철도역인 선릉역, 선정릉역, 태릉입구역, 정릉역, 온릉역, 사릉역, 세종대왕릉역 등이나 태종의 능침 앞을 지나는 도로인 헌릉로 및 선정릉 앞을 지나가는 도로인 선릉로와 정릉 앞을 지나가는 정릉로, 용인서울고속도로의 헌릉 IC 등의 지명이 그 예이다.   

   

 조선왕릉은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수도인 한양 인근인 경기도에 주로 밀집해 있는데 이는 조선의 국법인 경국대전에서 '왕릉은 도성에서 10리(약 4km) 이상, 100리(40km) 이하의 구역에 만들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도성 내, 즉 옛 한양 시가지 내에 있는 조선왕릉도 없다. 조선 초기 신덕왕후 강 씨의 능인 정릉이 태조의 명에 따라 도성 내에 있었으나, 이후 태종 때 현 위치로 이장했다.     


 한편 이러한 규정에 어긋나는 예외적인 부분도 있는데 다음과 같다.     


1. 동북면 (지금의 함경도)에 있는 태조의 조상들을 추존한 왕릉(목조~환조) 8기.  

   

2. 개성에 있는 태조의 첫 번째 부인이자 추존된 한 씨(신의왕후)의 제릉, 같은 개성에 있는 조선의 2대 

임금인 정종(조선)과 정안왕후의 후릉.     


3. 귀양지에서 죽은 뒤 이후 추숭하면서 무덤을 그대로 격상한 단종의 장릉.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4. 원래 장지에 문제가 생겨서 불가피하게 이장해야 했던 영녕릉(세종, 효종). 세종의 왕릉은 본래 부왕인 태종의 왕릉인 헌릉 인근에 있었다. 그런데 이미 세종 재위 기간에 최양선이라는 풍수가가 '이곳은 후손이 끊어지고 장남을 잃는 무서운 자리입니다'라고 살벌한 주장을 했다. 이 예언이 맞았는지 계유정난 등 왕실에 피바람이 불면서 터가 불길하다는 인식이 박혔다. 이 때문에 예종 때 현 위치로 이장했다. 효종의 무덤은 본래 동구릉 구역에 있었으나 자꾸 석물이 파손되는 사고가 일어나자 현종 때 현재의 위치로 이장했다.     


5. 국왕 본인의 특별한 지침을 따른 정조의 융건릉.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무덤을 양주 배봉산(현대의 동대문구)에서 경기도 화성으로 이장하고 이후 정조 본인의 유언대로 아버지의 무덤 근처에 왕릉을 만들었다.


7. 조선 왕릉의 형식     

 조선왕릉은 기본적으로 유교 예법에 근거하여 공간이 구성되어 있으면서도 봉분의 조성 형태에 따라 형태적 차별을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형식은 크게 단릉, 쌍릉, 합장릉, 동원이강릉, 동원상하릉, 삼연릉의 여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단릉 형식은 태조(건원릉)부터 시작하여 조선 중기까지 나타나며 18세기 이후에는 거의 볼 수 없다. 쌍릉 형식은 조선시대 전반적으로 고르게 나타나며, 동원이강릉 형식은 세조(광릉)를 시작으로 15세기에만 집중되었을 뿐 이후에는 볼 수 없다.   

  

 합장릉의 형식은 18세기 이후에 많이 나타나는데, 이는 능역 조성 시 소요되는 경비와 인력을 절감하기 위해서이다. 그 밖에 풍수적인 입지와 공간적으로 협소하여 동원상하릉의 형식과 삼연릉 형식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단릉(單陵)

단릉은 왕과 왕비의 봉분을 단독으로 조성한 능이다. 대표적으로 태조 건원릉, 단종 장릉, 중종 정릉 등 15기의 능이 있다.     


쌍릉(雙陵)

쌍릉은 왕과 왕비의 봉분을 하나의 곡장 안에 나란히 조성한 능으로, 우상좌하(右上左下, 오른쪽에 왕, 왼쪽에 왕비)의 원칙에 따라 조성하였다. 대표적으로 명종 강릉, 영조 원릉, 철종 예릉 등 9기의 능이 있다.    

 

합장릉(合葬陵)

합장릉은 왕과 왕비를 하나의 봉분에 합장한 능이다. 영조 이전의 합장릉은 혼유석을 2좌씩 배치하였으나 영조 이후에는 혼유석을 1좌씩 배치하였다. 대표적으로 세종 영릉, 인조 장릉, 정조 건릉 등 8기의 능이 있다. 특이하게 순종황제 유릉은 황제와 황후 두 분을 하나의 봉분에 합장한 동봉삼실(同封三室) 합장릉이다.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동원이강릉은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봉분과 상설을 조성한 능이다. 최초의 동원이강릉은 세조 광릉이며, 예종 창릉, 성종 선릉 등 7기의 능이 있다. 특이하게 선조 목릉은 세 개의 서로 다른 언덕(선조, 의인왕후, 인목왕후)에 별도의 봉분을 조성하였고, 숙종 명릉은 쌍릉(숙종과 인현왕후)과 단릉(인원왕후)의 형태로 서로 다른 언덕에 봉분을 조성하였다.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

동원상하릉은 한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위아래로 조성한 능으로, 능혈의 폭이 좁아 왕성한 기가 흐르는 정혈(正穴)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풍수지리적인 이유로 조성하였다. 효종 영릉과 경종 의릉 2기가 해당되며, 왕의 능침에만 곡장을 둘렀다.     


삼연릉(三連陵)

삼연릉은 한 언덕에 왕과 두 명의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능으로, 헌종 경릉이 유일하다. 우상좌하(右上左下)의 원칙에 따라 오른쪽(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에 왕을 모시고 첫 번째 왕비(효현성황후)와 두 번째 왕비(효정성황후)를 순서대로 모셨다.



8. 조선왕의 건강     

 519년의 긴 세월을 이어온 조선과 대한제국에는 모두 27명의 왕과 황제가 존재하였다. 왕들은 장엄한 궁궐에서 화려한 의복을 입고, 조선의 내로라하는 명의들이 궁궐에서 늘 왕의 건강을 살폈다. 그러나 왕들은 호화로운 환경에서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그다지 건강하지 못하였다. 조선 왕들의 평균 수명은 44세로 주로 눈병, 종기, 중풍 등의 병을 겪다가 세상을 떠났다.     


 일단 왕위에 오르면 그 뒤로는 정신없이 바쁜 왕의 일과가 시작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처리해야 할 업무가 산처럼 쌓여 있기 때문에 왕이 집무하는 일들을 만 가지 일이라는 뜻의 “만기(萬機)”라고 하였다. 왕은 주로 앉아서 신료들을 만나고 공문서를 읽었으며, 이동할 때는 가마를 이용하였다. 격구나 활쏘기 등의 간단한 활동을 제외하고는 운동할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혈액 순환이 원활히 되기가 어려웠고, 당뇨와 고혈압에 쉽게 걸렸다. 눈병이나 종기가 나면 쉽게 낫지 않았으며, 이는 결국 왕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원인이 되었다. 실제로 세종과 숙종이 당뇨병으로, 태조, 정종, 태종이 중풍으로 인한 뇌출혈로, 문종, 성종, 효종, 정조, 순조가 종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가 하면 질병과는 상관없이 정치적 희생양으로 유명을 달리한 왕도 있다. 6대 임금 단종은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영월로 유배당했다.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어 감옥이나 다름없는 영월의 청령포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결국 17세의 어린 나이에 사약을 받고 승하하였다. 단종과는 다른 경우이나 연산군과 광해군도 반정에 의해 폐위되고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9. 조선왕의 장례 절차     

 왕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가 있겠지만 왕릉 이야기이니만큼 이 장에서는 왕의 건강과 죽음과 관련된 일련의 절차나 에피소드를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보통 사극이나 영화에서 보면 왕이 승하하면 내시 중 한 명이 지붕에 올라가 무언가를 외치는 장면을 보았을 것이다. 이때 내시는 평상시 왕이 입던 옷을 입고 올라가 북쪽을 향해 선다. 그리고 왼손으로는 옷의 깃을, 오른손으로는 옷의 허리를 잡고 “상위 복(上位復)” 하고 세 번을 외친다.      


 여기서 “상위 복”의 뜻은 “임금의 혼이여, 돌아오소서”이다. 즉 왕의 혼이 자신의 체취가 벤 옷을 보고 다시 돌아오라는 의미이다. 이렇게 왕의 혼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기간은 5일이었고, 이 기간 동안은 왕이 아직 살아있는 것으로 간주하여 세자가 다음 왕으로 즉위하지도 않았다. 5일이 지나도 왕이 되살아나지 않으면 입관을 하고 세자의 즉위식이 치러졌다.      


왕비가 죽었을 때에도 같았는데, 이때는 “중궁 복(中宮復)”이라고 외쳤다.      

  왕이 승하하게 되면 임시 관청인 국장도감(國葬都監), 빈전도감(殯殿都監), 산릉도감(山陵都監)이 설치되었다. 이 중 국장도감은 장례를 주관했고, 빈전도감은 빈전의 설치와 운영을, 산릉도감은 왕릉의 조성을 담당했다.     

 특히 빈전의 설치는 우리 고대사에서도 확인이 되는데, 바로 백제 무령왕릉이다. 빈전에 안치된 왕의 시신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얼음이 필요했는데, 이를 저장했던 시설이 바로 석빙고다. 지금도 서울의 지명 가운데 동빙고동(東氷庫洞), 서빙고동(西氷庫洞) 등이 있어 석빙고와 관련 있는 지명임을 알 수 있다. 빈전의 설치 기간은 약 5개월로 이후 왕의 시신을 재궁(梓宮)에 모셔 대여(大轝)에 실은 뒤 장지(葬地)로 이동했다.      

 장지에 도착한 뒤 재궁을 묻고, 뽕나무로 왕의 혼백을 담은 신주(位牌)를 썼다. 이 신주를 종묘에 부묘하기 전까지 혼전(魂殿)에 봉안했다. 이후 3년이 지나면 종묘에 모시는데 이를 부묘(祔廟)라고 한다.      


10. 조선왕릉의 공간 구성     

조선왕릉은 진입 공간, 제향 공간, 능침공간의 세 공간으로 나눌 수 있으며 각 공간은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왕릉은 죽은 자를 위한 제례의 공간이므로, 동선 처리에 있어서도 이에 상응하는 원칙을 적용하고 있다.      


 죽은 자와 산 자의 동선을 엄격하게 분리하고 죽은 자의 동선만을 능침영역까지 연결시켜 공간의 상징성을 부여하고 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지는 향로·어로에는 산 자와 죽은 자의 동선은 공존하되 구별되어 있다. 즉, 산 자는 정자각의 정전에서 제례를 모신 뒤 서쪽 계단으로 내려오고 죽은 자는 정자각의 정전을 통과하여 능침공간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답사자의 시각에서 왕릉 입구에서부터의 건물 및 구조물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진입 공간은 왕릉의 시작 공간으로, 관리자(참봉)가 머물면서 왕릉을 관리하고 제향을 준비하는 재실(齋室)에서부터 시작한다. 능역으로 들어가기 전 홍살문 앞에는 금천교(禁川橋)라는 다리가 있는데 왕과 왕비의 혼령이 머무는 신성한 영역임을 상징한다.     


재실(齋室) : 왕릉 관리자가 상주하며 제례에 필요한 제수를 준비하는 곳.     

금천교(禁川橋) : 능역과 속세를 구분하는 돌다리    

      

 두 번째, 제향 공간은 산 자(왕)와 죽은 자(능에 계신 왕이나 왕비)의 만남의 공간으로, 이곳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은 정자각(丁字閣)이다. 제향 공간은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홍살문[紅箭門]부터 시작된다. 홍살문 옆에는 돌을 깔아 놓은 배위(拜位)가 있는데 참배하러 온 왕을 위한 자리이다. 홍살문 앞부터 정자각까지 이어주는 향로(香路)와 어로(御路)는 박석을 깔아 만든 돌길인데, 홍살문 기준으로 왼쪽의 약간 높은 길은 향과 축문을 들고 가는 길이라 하여 향로라 하고, 오른쪽의 낮은 길은 왕이 사용하는 길이라 하여 어로라 한다. 일부 왕릉에서는 향·어로 양 옆으로 제관이 걷는 길인 변로(邊路)를 깔아 놓기도 하였다. 향·어로 중간 부근 양옆으로는 왕릉 관리자가 임시로 머무는 수복방(守僕房)과 제향에 필요한 음식을 간단히 데우는 수라간(水刺間)이 있다. 정자각에서 제례를 지낸 후 축문은 예감(瘞坎)에서 태우는데, 정자각 뒤 서쪽에 위치해 있다. 조선 전기에는 소전대(燒錢臺)가 그 기능을 하였으나 후에 예감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정자각 뒤 동북쪽에는 장방형의 산신석(山神石)이 있는데, 산을 주관하는 산신에게 예를 올리는 자리이다.     


홍살문(紅箭門) : 궁(宮), 관아(官衙), 능(陵), 묘(廟) 등의 입구에 세우는 붉은 문으로 귀신을 쫓고, 나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는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의미이다.      

배위(拜位) : 홍살문 오른편에는 현재 왕이 도착해 선왕에게 절을 할 수 있는 자리이다.      

향어로(香御路) : 홍살문에서 정자각을 잇는 길로, 신이 가는 길인 향로와 왕이 가는 길인 어로가 있다.     

수라간(水刺間) : 제례에 필요한 음식을 준비하는 건물로 정자각을 정면으로 바라볼 때 왼편에 있다.      

수복방(守僕房) : 왕릉 관리자가 머무는 건물로 정자각을 정면으로 바라볼 때 오른편에 있다.      

정자각(丁字閣) :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건물로, 지붕이 정(丁) 자와 같아 정자각이라고 부른다.     

비각(碑閣) : 왕의 행적을 적은 신도비나 표석을 보호하는 건물     

예감(瘞坎) : 제례 때 사용한 축문을 태우는 곳으로 봉분을 정면으로 바라볼 때 왼편에 있다.      

산신석(山神石) : 왕릉이 있는 산의 신령에게 제사 지내는 곳으로 봉분을 정면으로 바라볼 때 오른편에 있다.      

 마지막, 능침공간은 봉분이 있는 왕릉의 핵심 공간으로 왕이나 왕비가 잠들어 계신 공간이다. 능침공간 주변에는 소나무가 둘러싸여 있으며, 능침의 봉분은 원형의 형태로 태조의 건원릉을 제외한 모든 능에는 잔디가 덮여있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의하면 ‘봉분의 직경은 약 18m, 높이는 약 4m’로 조성하게 되어 있으나 후대로 갈수록 줄어드는 경향을 보여 평균 직경 약 11m를 이루고 있다.      


석마(石馬) : 문석인과 무석인의 뒤나 옆에 배치하는 말 모양의 석물     

무석인(武石人) : 왕을 호위하는 무인을 상징하는 석물

문석인(文石人) : 왕을 보좌하는 문인을 상징하는 석물     

장명등(長命燈) : 어두운 사후세계를 밝힌다는 의미를 지닌 석등     

혼유석(魂遊石) : 왕과 왕비의 혼이 노니는 곳     

망주석(望柱石) : 봉분의 좌우에 세우는 돌기둥     

석호(石虎)와 석양(石羊) : 왕릉을 수호하는 호랑이와 양 모양의 석물로 네 마리씩 교대로 밖을 향하여 배치되어 있다.      

난간석(欄干石) : 봉분을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 돌     

병풍석(屛風石) : 봉분을 보호하기 위해 봉분의 아랫부분에 둘러놓은 돌     

봉분(封墳) : 왕릉의 주인이 잠들어 있는 곳     

곡장(曲墻) : 봉분의 동, 서, 북쪽에 둘러놓은 담장          


11. 조선왕릉 알아보기 동구릉』 경기도 구리     

 동구릉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조선시대 왕릉군(群)으로, 서울 기준 동쪽에 있는 9개의 능(陵)이라 하여 훗날 동구릉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본래 조선시대에는 무덤 한 개가 늘어날 때마다 이름이 바뀌며 동오릉(東五陵), 동칠릉(東七陵)으로 불리다가 효명세자가 안치된 이후로 더 이상 이곳에 새로 생기는 능이 없는 채로 조선왕조가 문을 닫으면서 동구릉으로 이름이 굳었다.     


 조선왕조의 창업 군주인 태조 이성계의 능인 건원릉(健元陵)부터 시작하여, 제5대 왕 문종과 그의 비 현덕왕후의 능인 현릉(顯陵), 제14대 왕 선조와 그의 정비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가 함께 묻힌 목릉(穆陵), 제16대 왕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능인 휘릉(徽陵), 제18대 왕 현종과 그의 비 명성왕후의 능인 숭릉(崇陵), 제20대 왕 경종의 정비였던 단의왕후의 능인 혜릉(惠陵)이 들어설 때까지 이곳은 동오릉(東五陵)으로 불렸다. 이미 여섯 개의 능이 들어섰는데도 동오릉이라 한 것은 짝수를 쓰지 않는 관례 때문이었다.      


 이후 제21대 왕 영조와 그의 계비 정순왕후 김 씨의 능인 원릉(元陵)이 들어서면서 동칠릉(東七陵)이 되었고, 제23대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문조익황제로 추존)와 그의 비 신정왕후의 능인 수릉(綏陵), 제24대 헌종과 그의 정비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의 능인 경릉(景陵)이 들어서면서 지금의 동구릉(東九陵)이 되었다. 총 9개의 능, 15개의 봉분이 구릉산 동쪽 기슭에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관람 동선에 따라 왕릉을 답사하려 하는데, 태조의 능은 예외로 가장 먼저 이야기하기로 하자.       


 동구릉의 터는 태조가 죽은 뒤 태종의 명을 받아 한양 가까운 곳에 길지를 물색하던 검교참찬의정부사(檢校參贊議政府事) 김인귀(金仁貴)가 추천해 하륜(河崙)이 나가보고 능지로 택정 했다고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고, 태조가 생전에 무학대사에게 부탁해 자신과 후손이 함께 묻힐 적당한 택지를 정해두었다고도 전해진다.     

 한양으로 천도해 온 태조는 생전에, 고려의 왕릉들이 대개 개성의 산악지대 여러 곳에 흩어져 있어 왕릉의 참배도 불편하거니와 왕릉 수호에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에 태조는 자신과 후손들의 묘지를 한양 가까운 곳에 정하고자 고심했는데, 어느 날 망우리 고개에 올라 동구릉을 바라보니 왕릉의 군락지로 더없는 길지라고 보고 점찍게 된다. 이로써 이성계는 죽어서도 오백 년 왕조의 후손들을 줄줄이 거느리게 되었고, 묘지에 대한 근심을 잊게 된 곳이라 하여 망우리(忘憂里)란 명칭이 생겨났다는 설이 있다. 태종 때 건원릉을 둘러본 명나라 사신들은 산세의 뛰어남에 “어찌 이런 하늘이 만든 땅덩이(天作地區)가 있단 말인가. 이는 필시 인간이 만든 산(造山) 임에 분명하다”라고 감탄했다.            


12. 조선 창업 군주 태조의 능건원릉(健元陵)     

 건원릉(健元陵)은 조선의 제1대 왕인 태조의 능이다. 조선 3대 왕 태종 8년인 1408년 9월 9일에 조성되었고,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유해를 안장한 조선왕조 최초의 왕릉이며 이후 전개되는 조선왕릉 제도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적인 형태는 고려 공민왕의 능인 현릉과 유사하나, 고려시대에는 잘 사용하지 않았던 곡장(曲墻)이 봉분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봉분은 화강암을 사용한 병풍석이 감싸고 있고, 병풍석 위에는 12 지신이 새겨져 있다.      


 봉분 밖으로는 12칸의 난간석이 둘러져 있으며, 난간석 밖으로는 석호(石虎)와 석양(石羊)이 교대로 2쌍씩 배치되어 있다. 봉분의 앞쪽에는 혼유석(魂遊石)이 있고 그 밑에는 북 모양의 고석(鼓石) 5개가 있다. 봉분이 위치한 단에서 한단 내려오면 석마(石馬)를 동반한 문인석 1쌍이 있고, 한 단 더 내려오면 석마를 동반한 무인석 1쌍이 있다.     


 능 아래에는 정자각(보물), 비각, 수복방, 수라간, 홍살문, 판위 등이 배치되어 있고, 비각 안에는 태조가 세상을 떠나고 태종대에 세운 신도비(보물)와 대한제국 선포 후 태조고황제로 추존된 능표석이 세워져 있다.     

 태조의 정자각이 보물로 지정된 데에는 조선을 건국한 군주의 능이라는 상징성과 조선시대 정자각의 모범이 되기 때문이다.      


 건원릉 비각 안에는 태조의 업적과 치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석이 있다. 태종 9년(1409) 4월에 건원릉을 조성하면서 태조 이성계의 조선 개국 과정과 생애, 업적 등을 새겨 신도비를 세웠다. 비문은 조선의 개국공신이기도 한 권근(權近)이 지었다. 건원릉 신도비는 왕릉에는 신도비를 세우지 않는 관례를 깨고 처음으로 세워진 것이다. 신도비 제도는 5세기 초 진송(晉宋) 때 비롯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사대부의 신도비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왕릉에 세워진 신도비는 그 수가 많지 않다.      


왕릉 신도비는 태조 건원릉, 태조의 원비인 신의왕후 한 씨의 제릉, 태종과 원경왕후 민 씨의 헌릉, 세종 영릉 네 곳에만 세워졌다. 이 중에서도 건원릉 신도비는 잘 보존되어 전해졌기 때문에 역사, 문화, 예술사에서 귀중한 연구 자료이며, 조선 초기 왕릉 제도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중요한 문화재이다.       

 태조의 건원릉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봉분을 조성한 뒤 잔디를 심지 않고 억새를 심었다는 점이다. 그에 대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태조의 고향은 함경남도 영흥이다. 태조는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한양에서 생활하면서도 태어나서 자란 고향 영흥을 항상 그리워했다. 또한 자신이 죽어서는 “영흥에 묻히고 싶다.”라는 말을 주위 사람들에게 하였다. 태조가 승하한 뒤에 함경남도 영흥에다 왕릉을 쓸 수 없기에 봉분을 덮을 잔디(억새)만이라도 영흥 것을 가져다가 입히기로 하였다. 그리고 잔디 대신에 억새를 봉분에 입힌 것은 태조의 유언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함경남도 영흥은 서울에서 천 리가 넘는 먼 곳이기에 억새를 죽이지 않고 가져오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심 끝에 한 신하가 묘안을 생각해 냈다. 그 방법은 영흥에서 서울까지 사람들이 쭉 늘어서서 억새 떼를 하나하나 받아넘기게 해서 운반하는 것이었다. 결국, 이와 같은 방법을 사용해서 함경남도 영흥에서 구리시에 소재한 건원릉까지 무사히 가져왔다고 한다.    

  

 함경남도 영흥에서 억새를 가지고 와 건원릉 봉분을 조성하였지만, 건원릉을 관리하면서 억새가 군데군데 말라죽기도 하였다. 한양의 억새를 대신 심기도 하였는데, 그럴 때마다 억새가 자라지 않고 계속해서 말라죽었다고 한다. 한편, 임진왜란 때 왜적들이 건원릉에 불을 질렀는데 신기하게도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건원릉에 붙은 불을 꺼버렸다. 왜적들은 불이 꺼지자 계속해서 불을 놓았지만, 그럴 때마다 불이 꺼졌다. 이에 겁이 난 왜적들이 불을 지르다가 도망가 버리고, 그 이후에는 건원릉에 접근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건원릉 앞에 서 있는 비석들이 밤에는 장군으로 변해 왜적을 물리치기도 했는데, 그때 건원릉의 억새들이 군사들로 변해서 왜적을 물리치는 데 함께 참여했다고 한다.     


 건원릉의 억새는 예전부터 한식날 단 한 차례만 예초(刈草)를 하였다고 하며 그 전통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2010년부터 매년 절향(節享, 계절에 따른 제사)인 봄 제사로 ‘청완(靑薍, 억새) 예초의(刈草儀)’를 거행하고 있다. 

태조의 정자각이 보물로 지정된 데에는 조선을 건국한 군주의 능이라는 상징성과 조선시대 정자각의 모범이 되기 때문이다.


13. 추존된 문조(효명세자)와 신정황후의 능수릉(綏陵)  

 추존 황제 문조(효명세자)는 순조와 순원왕후 김 씨의 아들로 순조 9년 (1809)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태어났다. 순조 12년 (1812)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순조 27년(1827)에 부왕을 대신하여 대리 청정을 시작하였다.      


 당시 안동 김 씨의 세도정치가 극에 달한 시기였으나 왕세자는 대리청정을 통해 강인한 군주의 모습을 보였다. 특정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그동안 소외되어 있던 인재들을 고루 등용하였으며, 백성을 위하는 선정을 펼쳤다.      


 효명세자는 20살도 안 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단호한 일처리로 당시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았다.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맡기 전 아버지 순조 통치 시기는 순조가 잦은 병환으로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기 때문에 기강이 상당히 해이해져 있었다. 실제로 이 시기 실록을 보면 파직, 탄핵, 유배, 국문, 해임 등의 처벌과 관직 제수 및 시상 등 상벌과 관련된 기사가 쏟아진다. 관리들을 감시하고 부정부패를 감독해야 할 왕이 정무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기 때문에 조정 내부의 여러 부분이 고여서 썩어있었던 것이었다.      


 효명세자는 "어느 수령이 백성들을 괴롭혔다."는 소리가 들리자 엄한 벌을 내리며 철저히 단속하기도 하였고 심지어 정승도 직급을 막론하고 직접 단속하여 단순한 권한대행을 넘어서 인사권 문제도 다루는 등 실질적인 군주의 역할을 도맡아 진행했는데 이때 기용된 인물 중 대표적 인물이 바로 실학자 박지원의 손자이자 개화파의 시조로 불리는 박규수다.     


 효명세자는 박규수와 교류하며 견문을 넓히고, 타문화 수용에 긍정적인 자세를 보였다. 예악의 진흥을 위해 궁중 연회에 쓰이던 춤과 노래인 정재(呈才)를 발전시켜 손수 악장, 치사, 전문 등을 직접 지었으며 춘앵전을 편곡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효명세자를 직접 발레 공연까지도 나섰던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견주어 '조선의 태양왕(太陽王)'으로 부르기도 한다. 검무(劒武)에 쓰이는 칼날과 손잡이가 따로 노는 독특한 구조의 칼을 도입한 사람도 바로 효명세자이다. 이처럼 아버지 순조와 아들 효명세자의 관계는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눌 수 없다"는 격언을 비웃기라도 하듯 대리청정 시기에도 전혀 잡음이 나오지 않았으며, 부자간의 돈독한 관계 덕분에 조정에도 모처럼 활력이 찾아오는 듯했다. 그러나 잘될 것만 같았던 효명세자의 대리청정은 얼마 가지 않아 너무나도 허망하게 끝나버리고 만다.    

  

 효명세자는 순조 30년(1830)에 창덕궁 희정당에서 2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강력한 정통성과 성군의 자질을 일찌감치 보여 뭇사람들의 기대를 받았으나 요절해 버린 비운의 왕세자이다. 순조는 뜻을 이어 사업을 이루었다는 의미의 ‘효(孝)’와 사방에 빛을 비춘다는 ‘명(明)’을 시호로 내린다.   

   

효명세자의 묘는 순조 20년(1830)에 경종의 의릉(懿陵) 왼편에 연경묘(延慶墓)라는 이름으로 묘를 조성하였다. 세자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라 능이 아니라 묘로 조성된 것이다. 


 그리고 1834년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익종(翼宗)으로 추존하고 능의 이름을 수릉(綏陵)이라 하다. 헌종 12년(1846)에 풍수상 불길하다 하여 양주 용마봉(현 광진구 용마산)으로 옮겼다가 철종 6년(1855)에 다시 현재의 동구릉으로 옮기게 되었다. 대한제국 선포 후 광무 3년(1899)에 고종의 직계 5대 조상 추존으로 문조익황제로 추존되었고, 고종 27년(1890)에 신정익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수릉에 합장으로 능을 조성하다.     

 신정익황후 조 씨는 본관이 풍양으로 순조 8년(1808)에 태어났고, 순조 19년(1819년)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으며, 1827년에 아들 헌종을 낳았다. 효부라는 칭찬을 듣던 왕세자빈은 불행히도 1830년에 남편 효명세자를 잃었다. 이후 1834년 아들 헌종이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으며 철종 8년(1857)에 순조의 왕비 순원숙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대왕대비가 되었다. 1863년에 철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종친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고종)을 양자로 입적시켜 왕위에 올렸으며,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수렴청정을 실시하여 흥선대원군과 함께 정국을 주도했다. 수렴청정 기간에 흥선대원군과 함께 경복궁 중건과 서원 철폐 등의 개혁을 실시하였고, 국가가 여러 재난에 시달리자 눈물을 흘리며 죽지 않은 것을 한탄했다고 한다.      


 그 후 고종 3년(1866)에 수렴청정을 거두고 왕실 최고의 어른으로 살다가 고종 27년(1890)에 경복궁 흥복전에서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대한제국 선포 후 광무 3년(1899)에 고종의 직계 5대 조상으로 추존되어 신정익황후로 추존되었다.     


 문조(효명세자)가 일찍 승하함으로 인해 왕비로서의 영화도 누려보지 못하고, 안동 김 씨의 세도에 눌려 지내던 신정익황후는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흥선대원군과 함께 손잡고 고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후 왕실 최고 어른으로서의 권력을 거머쥐었다. 꽃문양 담으로 유명한 경복궁의 자경전은 흥선대원군이 신정익황후를 위해 1867년 경복궁 중건 당시 지은 건물이다.     


 또한 현재 부산 동아대학교 박물관에는 신정익황후의 40세 생신을 축하하는 잔치 모습을 그린 8폭 병풍이 소장되어 있다. 당시 도화서의 최고 화원들이 그린 작품으로 추정된다. 헌종 13(1847) 정월 초하루 창덕궁 인정전 앞뜰에서 거행된 잔치에는 400여 명이 참석했는데, 관직에 따라 서로 다른 관복을 입은 문무백관과 행사에 참여하는 인물 그리고 창검을 들고 도열해 있는 군관들의 모습을 섬세하게 사실적으로 표현해 당시 궁중 의식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수릉은 추존 문조익황제와 신정익황후 조 씨의 능이다. 수릉은 한 봉분 안에 왕과 왕비를 같이 모신 합장릉(合葬陵)의 형식이다. 보통의 합장릉은 혼유석을 각각 2좌씩 놓았으나 조선 후기부터 조성된 합장릉은 혼유석을 1좌로 줄여서 조성하였다. 문석인 또한 복두관복 대신 금관조복으로 조각하였다.   

   

 일반적으로 왕릉은 정자각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에는 왕을 오른쪽에는 왕후를 모시는데, 수릉은 반대로 왼쪽에 왕후를 오른쪽에 왕을 모시고 있다. 이는 세상을 떠났을 때 신분의 차이(왕세자와 대왕대비) 때문에 그렇게 조성된 것이다.      


 능침 아래에 있는 비각에는 총 2개의 표석이 있는데, 1 비는 익종대왕과 신정왕후의 표석이고, 2 비는 문조익황제와 신정익황후의 표석이다. 다른 능과 달리 정자각에서 비각까지 잔디가 아니라 돌길로 조성되어 있다.      

 효명세자가 좀 더 오래 살아서 왕위를 이었다면 정조에 이은 조선 문예부흥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또한 헌종과 철종에 이르기까지의 극심한 세도정치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역사에서 ‘만약에’라는 가정은 금기이기에 더 이상 언급은 하지 않기로 하자.      

수릉은 추존 문조익황제와 신정익황후 조 씨의 능이다. 수릉은 한 봉분 안에 왕과 왕비를 같이 모신 합장릉(合葬陵)의 형식이다.

14. 문종과 현덕왕후의 능현릉(顯陵)     

 조선의 5대 국왕인 문종은 조선 최초의 적장자 출신 국왕으로, 세종과 소헌왕후 심 씨 사이의 8남 2녀 중 둘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나, 1421년에 세자로 책봉된 뒤 세종 말년에 부왕을 대신하여 왕세자 신분을 로 대리청정을 하다가 세종이 사망한 뒤 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소헌왕후와 세종의 3년 상을 연달아 치르면서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어 2년 2개월 만에 어린 아들 단종을 남겨두고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재위 기간이 2년 2개월 정도로 매우 짧았기 때문에 탈상(脫喪)도 못 하고 붕어(崩御)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세종 말기 1442년부터 7년 8개월 동안은 문종의 대리청정 기간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통치 기간은 9년 10개월 정도라고 볼 수 있다.      


 성인이 되어서는 아버지 세종을 직접 도우며 실무를 도왔다. 이때부터 이미 유교적 지식뿐만 아니라 역산과 천문에 능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대표적으로 세종 시기 과학 분야 업적 중 하나인 측우기가 다름 아니라 세자 시절 문종이 세종의 명을 받아 설계한 작품이다.     


  그러나 세종의 건강이 빠르게 악화되자, 세종 24년인 1442년부터 세자로서 약 7년 8개월 동안 대리청정을 하며 정무의 대부분을 직접 처리했다. 때문에 세종 치세 말기는 사실상 문종의 치세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전자에 내가 세자(문종)에게 선위(禪位)하고 한가롭게 있으면서 병을 수양(修養)하고자 하였더니, 경들이 울면서 청하기를 마지 아니하기로 억지로 그대로 따랐으나, 되풀이해 생각하니, 번쇄(煩碎)한 여러 일을 일체 친히 처결하면 반드시 다른 병이 날 것이니, 내가 심히 염려한다. 이제 군국(軍國)의 중한 일 외의 일체 서무(庶務)를 세자로 대신 다스리게 하고자 한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27년(1445) 5월 1일 기사.   

  

 문종은 일생동안 부인복이 지독히 없었다. 세종 9년(1427) 상호군 김오문(金五文)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들였는데 이 세자빈 김 씨가 궁중에 들어온 이후 문종의 총애를 얻기 위하여 온갖 미신적인 술법을 쓰고, 세자의 사랑을 받기 위해 방중술(房中術)까지 배웠던 정황이 드러났다. 이에 아버지 세종은 김 씨가 세자빈으로 적당치 못하다고 생각하여 궁에서 내쫓기로 하였고 이리하여 문종의 첫 결혼생활은 채 2년을 채우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다.     


 그 이후 종부소윤 봉여(奉礪)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하였는데, 세자빈 봉 씨의 행적은 앞서 김 씨보다 한술 더 뜨는 것이었다. 봉 씨는 당시 후궁이었던 권 씨가 임신을 하자 이에 대해 분개하는 한편, 문종의 총애를 얻기 위하여 궁인들을 사주하기도 하였다. 시도 때도 없이 음주를 하는가 하면 음식을 몰래 숨겨두고 먹는 식탐을 부리기도 했다. 또 궁궐 내에서 소쌍(召雙)이란 궁인을 사랑하여 동성애를 행한 정적도 드러났다. 이러한 행실에 대해 중궁이었던 소헌왕후 등이 몇 차례 타이르기도 하였으나 결국 행실을 고치지 못하였고, 아버지 세종은 고심 끝에 봉 씨 역시 폐출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세 번째 부인은 본래 후궁으로 있었다가 봉 씨의 퇴출 이후 세자빈이 된 훗날의 현덕왕후(顯德王后) 권 씨였다. 권 씨는 권전(權專)의 딸이었는데, 세종 13년(1431) 동궁의 후궁으로 입궁하였다. 그러다가 봉 씨가 폐출된 이후 세종 18년(1436) 세자빈으로 임명된다. 그런데 권 씨 역시 세자빈이 된 지 5년 만에 아이를 낳다가 사망하였는데, 그 아이가 훗날 왕위에 오르는 단종이었다. <세종실록>에는 “왕세자빈 권 씨가 졸(卒)하였다. 빈은 덕이 있어 동정(動靜)과 위의(威儀)에 모두 예법이 있으므로, 양궁(兩宮·세종과 문종)의 총애가 두터웠다. 병이 위독하게 되매, 왕(세종)이 친히 가서 문병하기를 잠시동안 두세 번에 이르렀더니, 죽게 되매 양궁이 매우 슬퍼하여 수라를 폐하였고, 궁중에서 모시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울지 않는 이 없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권 씨는 세조가 왕위에 오른 이후 단종의 생모라 하여 직위를 빼앗겼는데, 16세기 사림이 조정에 진출하면서 이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어져 결국 명예를 회복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바로 16세기 정치사의 중요 문제였던 ‘소릉(昭陵) 복위문제’이다.      


 아들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에 대해 현덕왕후의 사후 보복이 이어졌다는 기록도 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어느 날 밤에 세조가 꿈을 꾸었는데 현덕왕후가 매우 분노하여 ‘네가 죄 없는 내 자식을 죽였으니, 나도 네 자식을 죽이겠다. 너는 알아두어라’고 했다. 세조가 놀라 일어나니 갑자기 동궁(세조의 장자, 의경세자)이 죽었다는 기별이 들려왔다. 그 때문에 소릉(현덕왕후 무덤)을 파헤치는 변고가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현덕왕후는 단종의 생모라는 이유로 파헤쳐져 시흥 앞바다에 버려졌다. 현덕왕후가 복위되어 다시 문종 곁으로 돌아온 것은 56년 후, 문종은 어떠한 말로 위로와 미안함 마음을 전했을까? 이처럼 왕실에서 태어났지만 세상 모든 우여곡절과 아픔을 겪은 문종과 현덕왕후의 능인 현릉에서 그들의 넋을 위로해 보는 건 어떨까?


15. 선조와 의인왕후인목왕후의 능목릉(穆陵)     

 선조는 중종의 아들인 덕흥대원군과 하동 부대부인 정 씨의 셋째 아들로 명종 7년(1552)에 현재의 사직동 일대 사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행동이 바르고 용모가 빼어나 순회세자(명종의 아들)를 잃고 후사가 없었던 명종의 총애를 받았다. 처음에 하성군에 봉해졌다가, 명종 22년(1567)에 명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인순왕후의 명으로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후 인순왕후의 수렴청정을 8개월 동안 받았다.      

 명종은 아들 순회세자를 잃고 자식 잃은 슬픔을 달래려고 여러 왕손들을 궁궐에 자주 불러, 그들의 성장을 지켜보곤 했다. 그중에서도 선조(당시 하성군)를 유난히 아껴 그를 따로 불러 학문을 시험해보기도 하고, 한윤명, 정지연 등을 따로 뽑아 그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하루는 명종이 익선관을 벗어 여러 왕손들에게 주며 써보라고 하였다. “너희들의 머리가 큰가 작은 가를 알려고 한다.” 명종은 이렇게 말하며 여러 왕손들에게 익선관을 써보게 하였다. 다른 왕손들은 돌아가면서 익선관을 써보았지만, 제일 나이가 어린 선조는 머리를 숙여 사양하였다 “이것을 어찌 보통 사람이 쓸 수 있겠습니까?” 선조는 이렇게 말한 뒤 두 손으로 관을 받들어 어전에 도로 가져다 놓았다. 이를 본 명종은 매우 기특하게 여기며, 그에게 왕위를 전해줄 뜻을 정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선조는 즉위 초에 매일 경연에 나가 토론하고, 밤늦도록 독서에 열중하였다. 훈구세력의 힘을 억제하고 이황, 이이 등의 인재를 등용하여 선정에 힘썼다. 『유선록』, 『근사록』, 『심경』, 『소학』, 『삼강행실』등을 편찬케 하여 유학을 장려하는 한편,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조광조 등을 신원하고, 그들에게 화를 입힌 훈구세력의 관직을 추탈(追奪)하여 민심을 수습했다.     

 

 그러나 명종 말년부터 일어난 붕당정치의 시작으로 정여립의 모반사건과 세자책봉 문제로 옥사가 일어났으며, 국력이 쇠약해져 국방 대책을 세우지 못하던 중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이어서 정유재란까지 두 차례에 걸친 7년 전쟁을 치르며 전 국토는 황폐화되었다. 선조는 전후 복구작업에 힘을 기울였으나 거듭된 흉년과 정치의 불안정으로 인해 큰 성과를 이루지 못하였고 그 후 선조 41년(1608)에 경운궁 석어당에서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선조는 조선의 첫 번째 방계(傍系) 임금으로 적통에게서 낳은 대군 출신이 아니다. 반정으로 즉위한 세조, 중종 역시 '대군'들이었다. 참고로 조선 왕조에서 적장자 출신 왕은 7명뿐이고 그중 연산군, 현종, 숙종을 제외하면 재위 기간이 모두 10년 미만이다. 다만 선조는 서자는 아니고 엄연히 덕흥군의 적자이며, 본인이 아예 서자인 임금은 영조가 처음이다.    

  

또한 선조는 조선 역대 임금 중 경복궁에서 즉위한 마지막 임금이다. 재위 기간 중 발발한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타 사라졌기 때문이다. 경복궁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 270년간 방치되었다가, 고종 때 섭정을 하고 있었던 흥선대원군이 반대와 원성에도 불구하고 복원했다. 고종의 아들인 순종은 역시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덕수궁)에서 즉위했다.     


 선조시기의 치세를 선조의 능인 목릉을 따서 목릉성세(穆陵盛世)라고 일컫기도 하는데 이 말은 한문학의 융성을 뜻하는 말이다. 선조 시기에는 사림파가 대대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이황, 이이, 조식, 류성룡, 이항복, 이덕형, 정철, 성혼, 기대승 등 이름 하나하나만 들어도 위인전의 주인공 격인 대학자들이 함께 살았던 시대이고, 임진왜란 당시에는 우리 역사 최고의 영웅인 이순신 장군도 같은 시대를 살았다.      


의인왕후 박 씨

 선조의 첫 번째 왕비 의인왕후 박 씨는 선조 2년(1569)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성품이 온화하였으며 침착하고 자애로운 면모를 지녔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어 후궁의 자식들을 자기 자식처럼 보살폈다. 특히 공빈 김 씨의 소생인 광해군을 남달리 총애하여 친아들처럼 대해주었고, 훗날 왕세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후원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광해군과 함께 피난길에 오르기도 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종결된 후 선조 33년에(1600) 경운궁에서 46세로 세상을 떠났다. 의인왕후의 국장은 임진왜란 이후에 치른 첫 번째 국장이었다. 원래 왕과 왕비의 능으로 결정된 자리에 일반묘지나 민가가 있으면 강제로 옮겨야 했다.      

 하지만 당시는 전쟁 이후의 수습 상황 단계였기 때문에 묘를 옮기거나 철거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이런 여러 가지의 이유로 의인왕후의 능 자리는 5개월 동안 정하지 못하였다가 겨우 포천 신평에 장지를 정하고 공사를 하였다. 하지만 지세가 불길하다는 여론이 일어나면서 공사를 중단하고, 건원릉 동쪽으로 장지를 다시 정하였다. 세상을 떠난 지 7개월이 지난 선조 33년(1600) 음력 12월 22일에 장사하면서 겨우 국장을 종료하였다.     


 선조 때 유학자들의 글에는 “전국 방방곡곡에 왕비의 원찰이 아닌 곳이 없다.”는 통탄의 목소리가 종종 등장하는데, 이는 의인왕후가 전국 각지에 이름난 기도처마다 자신의 원찰을 설치하고, 아이를 낳기를 발원했기 때문이었다. 왕후는 전국의 명산대찰에 원찰을 설치하고 부처님께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건봉사, 법주사 등 여러 사지(寺誌)에는 의인왕후가 보시한 기록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만큼 자식을 절실하게 바랬던 이유로 불교에 의지하여 평생 불경과 염주를 가까이하고 살았으며 궁중의 여인들은 그녀를 ‘살아있는 관세음보살’이라 불렀다.   

   

  의인왕후는 어린 나이에 어미(공빈 김 씨)를 잃은 임해군과 광해군을 친자식처럼 돌보았다. 선조실록에는 “의인왕후가 후궁들의 자식을 지나치게 예뻐하여 선조가 장난 삼아 질책하면 아이들은 왕후에게로 도망가 숨곤 했는데, 이때마다 왕후는 곧 치마폭을 당겨 그들을 가려주곤 했다.”는 일화가 등장한다. 이를 통해 의인왕후가 자신의 배로 나은 자식은 아니었을지언정 선조의 모든 자식들을 어머니의 마음으로 사랑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인목왕후 김 씨     

선조의 두 번째 왕비 인목왕후 김 씨는 현재의 아현동 일대 사저에서 태어났다. 선조 33년(1600)에 선조의 첫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2년 뒤인 선조 35년(1602)에 선조의 두 번째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1606년에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을 낳았다. 당시 소북 정권의 유영경(柳永慶)은 적통론에 입각하여 적자인 영창대군을 왕위에 추대하려 하였으나, 선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소북정권이 물러나고 대북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광해군 즉위 후 왕대비가 되었으나, 광해군 5년(1613)에 계축옥사로 친정아버지와 영창대군이 연루되어 처형당하는 일을 겪었다. 광해군일기에는 인목왕후의 죄악이 열거되어 있는데 의인왕후의 유릉(裕陵)을 저주한 죄, 영창대군으로 하여금 역모를 꾀한 죄 등의 대목이 나와 있다.      

 결국 광해군 10년(1618)에 대비의 호칭을 삭탈하고 서궁이라 칭하여 경운궁에 유폐되었고 그 이후 1623년에 서인 세력이 광해군을 폐위하고 선조의 손자 능양군을 옹립한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다시 대왕대비의 지위에 올랐다.      


 인목왕후는 그 후 인조의 왕통을 승인한 왕실의 장(長)의 위치에 처하면서 국정에 관심을 표하여 한글로 하교를 내리기도 하였다. 금강산 유점사에 친필로 쓴 『보문경(普門經)』의 일부가 전하고, 인목왕후 필적첩이 남아 있다. 인조 10년(1632)에 인경궁 흠명전에서 48세로 세상을 떠났다. 

    

  목릉은 조선 14대 선조와 첫 번째 왕비 의인왕후 박 씨와 두 번째 왕비 인목왕후 김 씨의 능이고, 같은 능역 안에 각각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이 선조, 가운데 언덕이 의인왕후, 오른쪽 언덕이 인목왕후의 능이다. 

    

 원래는 의인왕후가 죽으면서 조성된 유릉(裕陵)이 있었고, 선조는 현재의 동구릉 헌종의 경릉 자리에 있었는데 이후 1630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기면서 동원이강릉이 되었고 목릉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632년 한참 어린 나이로 궐에 들어와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인목왕후가 자리 잡으며 현재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세 개의 능침을 가진 왕릉이 되었다.   

   

 선조의 능은 기본적인 왕릉의 형식에 맞게 조성되어 병풍석과 난간석, 혼유석, 망주석, 석양 및 석호가 배치되어 있다. 의인왕후의 능과 인목왕후의 능은 병풍석만 생략했을 뿐 형식은 선조의 능과 같다. 특히 의인왕후 능침의 망주석과 장명등에 새겨진 꽃무늬는 처음 선보인 양식으로 이후 조선 왕릉 조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정자각은 원래 의인왕후의 능 앞에 있었다.       


 현재 목릉의 정자각은 선조의 능을 향하여 있으면서 신로는 세 능으로 모두 뻗어 있다. 대부분의 조선왕릉의 신로는 일직선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선조의 신로는 굉장히 길고 굽어 있는데 이 길에 서면 파란만장한 삶과 후대의 냉혹한 평가를 받아야 했던 살았던 선조의 운명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목릉의 정자각은 조선왕릉 정자각 중 유일하게 다포식 공포로 지어진 건물로 보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목릉의 석물들은 조선 왕릉 중 최악의 졸작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이는 목릉이 조성된 인조 때 병자호란으로 경제가 피폐해진 데다가 우수한 석공들을 구할 수 없어서 이렇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다른 왕릉들과 비교해 보면 목릉의 석물들은 크기만 컸지 다른 능들의 석물보다 균형이나 조형미 같은 게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목릉의 석물에서는 총탄 자국도 볼 수 있는데 이는 한국전쟁 때의 흔적이라고 한다. 선조는 살아서도 전란을 겪었는데 죽어서도 끝내 전란에서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대부분의 조선왕릉의 신로는 일직선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선조의 신로는 굉장히 길고 굽어 있다. 


16. 인조의 두 번째 왕비 장렬왕후의 능휘릉(徽陵)     

  인조의 두 번째 왕비 장렬왕후 조 씨는 현재의 충남 천안 관아에서 태어났다. 1635년에 인조의 첫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인조 16년(1638)에 인조의 두 번째 왕비로 책봉되었다. 1649년에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즉위하자 자의 왕대비가 되었으며, 효종, 현종, 숙종 대에까지 살다가 숙종 14년(1688)에 창경궁 내반원에서 65세로 세상을 떠났다.     


 어린 나이에 인조의 두 번째 왕비로 간택된 장렬왕후는 인조가 세상을 떠난 후 자의대비라는 호칭으로 효종, 현종, 숙종 대에까지 왕실 최고의 어른으로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예송논쟁의 대상이 되어 서인과 남인의 붕당 싸움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성리학에 근거한 상례에 따르면 장자(맏아들)의 상에는 부모가 3년 동안 상복을 입고, 차자 이하의 상에는 1년 동안 상복을 입도록 되어 있다.      


 효종 10년(1659)에 효종이 세상을 떠나자,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얼마 동안 입어야 할 것인가를 두고 서인과 남인이 대립하게 된다. 이 사건을 제1차 예송논쟁(기해예송)이라고 하는데, 이때 서인은 효종이 인조의 둘째 아들이기 때문에 1년을 주장하였고, 남인은 효종이 인조의 장자는 아니지만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장자의 대우로 3년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대립한 것이다. 이 논쟁은 결국 장자와 차자의 구별 없이 1년을 입게 한 경국대전의 규정에 따르는 것으로 결말지어졌고, 이로 인해 기년복을 주장했던 서인이 승리하여 정권을 잡게 되었다.      


 그 후 15년 뒤인 현종 15년(1674)에 효종의 왕비 인선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이 논쟁이 다시 불거졌다. 이를 제2차 예송논쟁(갑인예송)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서인은 인선왕후가 인조의 둘째 며느리이기 때문에 9개월을 주장했고, 남인은 왕비이기 때문에 첫째 며느리의 대우로 하여 1년을 주장하였다. 이때 현종은 남인의 주장을 채택하여 서인 정권을 몰락시키고 남인 정권이 세력을 잡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휘릉은 단릉 형식으로 봉분에는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난간석에는 십이지를 새겨 방위를 표시하였다. 능침 주변의 석양과 석호는 아담한 크기에 다리가 짧아 배가 바닥에 거의 닿을 정도이다. 능침 아래에는 정자각, 비각, 홍살문 등이 배치되었다. 휘릉의 정자각에는 다른 왕릉의 정자각과는 달리 정전의 양옆에 익랑을 추가하여 웅장함을 더하였다.

휘릉의 정자각에는 다른 왕릉의 정자각과는 달리 정전의 양옆에 익랑을 추가하여 웅장함을 더하였다.


17. 영조와 두 번째 왕비 정순왕후의 능원릉(元陵)     

 영조는 숙종과 숙빈 최 씨의 아들로 숙종 20년(1694)에 창덕궁 보경당에서 태어났다. 숙종 25년에(1699) 연잉군에 봉해졌고, 경종이 즉위한 후에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당시 왕세제 책봉을 주장하는 노론과 시기상조론을 들어 반대한 소론 간의 정쟁이 극심했으며, 영조 자신도 이 소용돌이에 휘말려 경종을 시해하려는 시도에 가담했다는 모함을 받기도 하였다. 이런 치열한 경쟁과 우여곡절 끝에 1724년에 경종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영조는 붕당의 대립을 완화하고 해소하는 것을 왕정의 큰 과제로 삼았다. 그리하여 즉위와 동시에 왕권을 강화하고, 균형 있는 인재 등용을 통하여 탕평세력을 구축하였다. 영조는 탕평 정치로 조정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는 여러 가지 폐단을 고치는 개혁 조치를 단행하였는데 특히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되어온 군역을 감소한 균역법을 시행하고, 노비 신공을 혁파하는 등 획기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또한 청계천 건설과 여러 사치풍조를 금지하고 법제도를 개편하여, 『속오례의』, 『국조상례보편』 등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붕당정치의 폐단으로 즉위 초에 경종 독살설에 휘말려 옥사가 일어났고, 영조 38년(1762년)에는 세자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경계심으로 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어 죽이는 참사를 빚기도 하는 등, 붕당정치의 혼란을 완전히 잠재우지는 못하였다.      


 조선 역대 임금 중 재위 기간이 가장 긴 53년의 기간을 재위한 영조는 1776년에 경희궁 집경당에서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영조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일화가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하루는 영조가 미복 차림으로 궁을 나와 산책하던 중에 시골의 나무꾼이 향나무를 팔고 있는 것을 보았다. 영조가 향나무를 어디서 캐온 것이냐고 물으니, 무지한 나무꾼은 제 앞의 임금을 몰라보고, 나라님의 모후를 모신 소령릉이 있는 고령 양주산에서 캐온 나무라고 설명해 주었다. 나무꾼은 능과 원을 구별하지 못하여 능이라고 부른 것이지만, 오랜 세월 어머니의 묘를 능으로 꾸며드리고 싶었던 영조는 나무꾼의 ‘소령릉’ 소리에 감격하였다. 그리하여 나무꾼이 팔던 향나무를 비싼 값에 쳐주고, 그를 소령원 참봉에 제수하였다고 한다.     

 

 영조는 조정에서는 강하고 결단력 있는 군주였으나, 내면에는 정통성에 대한 콤플렉스와 어머니에 대한 안타까움, 정쟁에 휘말려 아들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사연 등 큰 아픔을 평생 삭이고 살아야 했다.      


 영조의 두 번째 왕비 정순왕후 김 씨는 영조 21년(1745)에 여주 사저에서 태어났다. 1757년 영조의 첫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2년 뒤에 영조 35년(1759)에 15세의 나이로 영조의 두 번째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런데 15세의 어린 나이에 왕비가 된 정순왕후의 대담하고 당찬 성격을 나타내는 일화는 왕비 간택 때에서부터 전해진다. 간택 시 영조가 왕비 후보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다른 사람들은 산이 깊다, 물이 깊다고 대답했지만, 정순왕후는 인심이 가장 깊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고개가 무엇이냐는 물음에는 보릿고개라는 인상적인 답을 하였다고 전한다.   

   

 왕비로 간택된 후에는 상궁이 옷의 치수를 재기 위하여 잠시 돌아서 달라고 하자 단호한 어조로 “네가 돌아서면 되지 않느냐.”라고 추상같이 꾸짖었다고 한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왕비의 체통을 지킬 줄 아는 당찬 여인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영조가 세상을 떠나고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대비가 되었으며, 1800년에 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11세의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의 자격으로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때 스스로를 여주(女主)라 칭하고 실질적인 국왕의 권위를 갖고 모든 권한을 행사하였다. 과감하게 국정을 주도하여 조정의 주요 신하들로부터 개인별 충성 서약을 받았으며, 정조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사도세자에게 동정적이었던 시파 인물들의 힘을 약화시켰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천주교 탄압을 일으켜 정약용 등의 남인들을 축출하고, 국왕 친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을 혁파하는 등 정조가 수립한 정치 질서를 부정하였다. 1804년에 수렴청정을 거두었으며, 순조 5년(1805)에 창덕궁 경복전에서 61세로 세상을 떠났다.     


 조선의 27명의 왕 중, 가장 장수했던 영조는 일찌감치 홍릉에 잠들어있는 원비 정성왕후 옆에 묻어줄 것을 당부하였다. 하지만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섭섭함이었을까? 정조는 그 뜻을 외면하고 할아버지를 이곳 동구릉 경내에 모신다. 영조의 곁을 지키는 이는 14살 어린 나이에 왕비가 되었던 계비 정순왕후이다. 

     

 원릉은 조선 21대 영조와 두 번째 왕비 정순왕후 김 씨의 능이다. 쌍릉의 형태이며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서쪽)이 영조, 오른쪽(동쪽)이 정순왕후의 능이다. 능침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왕과 왕비의 능 앞에 각각 혼유석 1좌씩 배치되었다. 망주석 기단부에 조각된 꽃무늬가 세련되고 화려하며 오른쪽 망주석에 새겨진 세호는 위를 향하고 있고, 왼쪽 망주석에 새겨진 세호는 아래로 내려가는 모양을 하고 있다.      


 장명등은 사각옥개형의 장명등으로 화사석(火舍石)과 옥개석 부분을 제외하고 상, 중, 하대석 부분은 꽃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영조의 원릉을 시작으로 중계와 하계 사이의 단을 없애고 문석인과 무석인을 한 단에 같이 배치하였다.

영조의 원릉을 시작으로 중계와 하계 사이의 단을 없애고 문석인과 무석인을 한 단에 같이 배치하였다.


18. 헌종과 효현왕후효정왕후의 능경릉(景陵)     

  헌종은 추존 문조와 신정익황후 조 씨의 아들로 순조 27년(1827)에 창경궁 경춘전에서 태어났다. 순조 30년(1830)에 왕세손으로 책봉되고, 1834년에 순조가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다. 8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으므로 할머니인 순원왕후 김 씨가 수렴청정을 실시하였다.     

 

  헌종 재위기는 안동 김 씨와 풍양 조 씨의 세도정치가 서로 대립하여 두 차례의 역모 사건이 일어났으며, 삼정(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으로 백성들이 큰 부담을 안고 살아가던 시기였다.    

  

 또한 천주교 탄압(기해박해)으로 인해 외국 군함이 처음으로 조선 근해에 나타나 민심이 흉흉했다. 친정 후에는 『동문휘고』, 『열성지장』, 『동국사략』, 『삼조보감』등을 완성하였으며, 각 도에 제언(堤堰)을 수축하게 하는 등의 치적을 쌓았다.

      

 그 후 헌종 15년(1849)에 창덕궁 중희당에서 23세로 세상을 떠났다. 융희 2년(1908)에 헌종성황제로 추존되었다.     


 헌종 3년(1837)에 효현왕후를 왕비로 맞이하였으나, 6년 뒤에 소생 없이 세상을 떠났다. 그 후 두 번째 왕비를 맞아들이기 위하여 스스로 간택에 참여하였는데, 이는 왕이 간택에 직접 참여한 유일한 예였다. 헌종은 김 씨 여인을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간택의 최종 결정권은 왕실의 어른인 대왕대비에게 있었고, 김 씨 여인이 아닌 홍재룡의 딸 효정왕후가 최종 간택되어 왕비로 책봉되었다.      


 이에 헌종은 3년을 고심한 끝에 왕비가 후사를 생산할 가능성이 없다는 핑계로 대왕대비의 허락을 받아 간택에서 낙선한 김 씨를 후궁으로 간택하였다. 경빈 김 씨를 위하여 헌종 13년(1847)에 창덕궁 서쪽에 별궁인 낙선재를 지어주기까지 하였다. 예술을 사랑한 헌종은 경빈 김 씨와 함께 이 별궁에서 고금 명가의 유필을 벗 삼아 지내기를 좋아하였다. 낙선재에 여러 차례 불려 들어갔던 조선 후기 서화가 허유(許維)의 기록에는 낙선재는 헌종이 평상시 거처하는 곳이며,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쓰인 현판이 가득하다는 등의 묘사가 잘 드러나 있다.     


효현왕후 김 씨     

 헌종의 첫 번째 왕비 효현왕후 김 씨는 안동김 씨 김조근과 한성부부인 이 씨의 딸로 순조 28년(1828)에 현재의 서울 안국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헌종 3년(1837)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헌종 사이에 후사를 낳지 못하였다. 헌종 9년(18463)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16세로 세상을 떠났다. 융희 2년(1908)에 효현성황후로 추존되었다.     


효정왕후 홍 씨     

 헌종의 두 번째 왕비 효정왕후 홍 씨는 순조 31년(1831)에 현재의 전북 익산 관사에서 태어났다.      

 1843년에 헌종의 첫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1년 뒤 헌종의 두 번째 왕비로 책봉되었다. 헌종이 세상을 떠나고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명헌대비가 되고, 철종 10년(1859)에 왕대비가 되었다. 이후 왕실의 어른으로 지내다가 광무 1년(1897)에 대한제국이 선포되면서 최초의 태후가 되었다. 헌종 사이에 소생을 낳지 못하였으며, 광무 7년(19040) 경운궁 수인당에서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융희 2년(1908)에 효정성황후로 추존되었다.     


 경릉은 조선 24대 헌종과 첫 번째 왕비 효현왕후 김 씨와 두 번째 왕비 효정왕후 홍 씨의 능이다. 경릉은 세 개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삼연릉(三連陵)의 형태로 조선의 왕릉 중 유일하다. 


 정자각 앞쪽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헌종, 가운데가 효현왕후, 오른쪽이 효정왕후의 능이다. 세 봉분은 모두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을 둘렀으며, 난간석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각 봉분 앞에는 혼유석을 따로 설치하였다.     

 능침 아래에는 정자각, 비각, 홍살문, 판위 등이 배치되었으며, 비각에는 한 개의 표석이 있다. 표석은 대한제국 선포 후 황제 추존으로 바꾼 표석으로, 전면에는 ‘대한 헌종성황제 경릉 효현성황후 부좌 효정성황후 부좌’라고 쓰여있다.      

 처음 경릉 자리는 선조의 목릉(穆陵)이 있던 자리였는데, 인조 8년(1630)에 목릉에 물길이 있고 풍수상 불길하다는 상소로 목릉 천장을 확정하고 구릉을 파고 열어 보니 물기가 없어 목릉은 그 자리 그대로 있게 되었다.      

 이후 헌종의 첫 번째 왕비 효현왕후 김 씨가 헌종 9년(1843)에 세상을 떠나, 현재의 자리에 처음 능을 조성하였다. 6년 뒤인 1849년에 헌종이 세상을 떠나자, 13곳의 택지를 간심한 끝에 ‘십전대길지(十全大吉地)’의 명당이라고 주장한 효현왕후의 경릉 오른쪽에 능을 조성하였다.      

 대한제국 선포 후 광무 8년(1904)에 헌종의 두 번째 왕비 효정왕후 홍 씨가 세상을 떠나 현재의 자리에 능을 조성하였다.     


19.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능혜릉(惠陵)     

 경종의 첫 번째 왕비 단의왕후 심 씨는 숙종 12년(1686)에 현재의 서울 회현동에서 태어났다. 단의왕후가 5살이던 어느 여름날, 아버지 심호가 술에 취해 낮잠을 자면서 딸에게 부채를 들고 파리를 쫓게 한 적이 있었는데, 그녀는 저녁때가 되도록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켰다. 그래서 심호는 그 딸을 매우 기특하게 여기고 사랑하여 항상 주변 사람들에게 이를 칭찬하였다고 한다. 또한 그녀는 간소한 것을 좋아하여 남이 좋은 옷을 입더라도 부러워하지 않았으며, 좋은 것이 생겨도 반드시 여러 동생들에게 모두 나누어주는 등 물건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고 한다.     


  숙종 22년(1696)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는데, 실록에는 하루 종일 단정하게 앉아서 잠시라도 함부로 기대거나 나태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시녀들이 궁궐 구경하기를 청해도 따르지 않고 『소학(小學)』을 읽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타고난 의젓함과 총명함으로 궁궐의 어른들과 병약한 세자를 섬기는 데 손색이 없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왕비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숙종 44년(1718)에 창덕궁 장춘헌에서 33세로 세상을 떠났다. 경종과의 사이에는 소생이 없으며, 1720년에 경종이 즉위하자 단의왕후로 추존되었다.     


 혜릉은 조선 20대 경종의 첫 번째 왕비 단의왕후 심 씨의 능이다. 단의왕후는 처음 왕세자빈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 이전의 순회세자의 묘인 『순창원』과 소현세자의 묘인 『소경원』의 예를 참조하여 묘를 조성하였다. 이후 경종이 왕위에 오른 후 단의왕후로 추존하고 능의 이름을 혜릉이라 하였고, 경종 2년(1722)에 능의 형식에 맞게 무석인, 난간석, 망주석 등 석물을 추가로 제작하였다.      


 능침의 석물은 명릉(明陵) 이후의 양식을 그대로 따라 작게 조각하였고, 장명등은 현재 망실되어 터만 남아 있다. 혜릉의 정자각은 광복 후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1995년에 새로 복원하였다. 

혜릉의 정자각은 광복 후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1995년에 새로 복원하였다.


20. 현종과 명성왕후의 능숭릉(崇陵)     

 현종은 효종과 인선왕후 장 씨의 아들로 인조 19년(1641)에 청나라 심양 관사에서 태어난 조선 역대 임금 중에 유일하게 외국에서 태어난 왕이다. 아버지 효종(당시 봉림대군)이 병자호란 이후 인질로 끌려갔기 때문이다.       


 인조 23년(1645) 인조의 세자인 소현세자가 급서(急逝)하고 아버지 봉림대군이 왕세자로 책봉되는 동시에 원손이 되었고, 인조 26년(1648)에 왕세손이 되었다.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세자가 된 후 1659년에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동안 함경도의 산악지대를 개척하고,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된 아버지 효종의 북벌 정책을 중단시켰으며, 호남 지방에 대동법을 시행하였다. 동철로 된 활자 10만 자를 주조시켰으며, 천문 관측과 역법 연구를 위하여 혼천의를 다시 제작하게 하는 등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현종 재위기는 두 차례의 예송논쟁으로 붕당 간의 싸움이 치열하기도 하였다.      


 현종 15년(1647)에 창덕궁 재려에서 34세로 세상을 떠났다. 현종은 어려서부터 효심이 지극하고 사려가 깊었다. 청나라 심양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나이에 부모보다 먼저 본국으로 먼저 돌아왔는데,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볼 때마다 하루빨리 아버지인 효종이 돌아오기를 기도하였다.      


새로 맛있는 음식을 대할 때는 효종이 있는 곳에서 생산되지 않는 것이면 바로 아버지께 보내게 하고 나서야 맛을 볼 정도로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컸다고 한다. 어린 현종이 어진 인정을 베푸는 대상은 부모뿐만이 아니었다. 한 번은 그의 할아버지인 인조가 방물(方物)을 받다가 표범 가죽의 품질이 나빠서 되돌려 보내려고 하였다. 이때 현종의 나이 7세였는데 곁에 있다가 말하기를, “표범 한 마리를 잡으려면 아마도 사람이 많이 다칠 듯합니다.” 하니, 인조가 그 뜻을 가상히 여겨 돌려보내지 말라고 명하였다.      


 하루는 궁중에서 나오다가 추위에 얼고 굶주린 궐문 밖 군졸을 보고는, 탄식하며 옷과 식량을 제대할 때까지 제공해 주라고 명령하고서야 자리를 떴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어린 현종의 이러한 효성과 자애로움은 할아버지인 인조에게 큰 신임을 안겨주었다.     


 명성왕후 김 씨는 현재의 서울 종로 관철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효종 2년(1651)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현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현종 사이에 1남(숙종) 3녀(명선공주, 명혜공주, 명안공주)를 낳았다. 명성왕후는 지능이 뛰어나고 성격이 과격했다고 전해진다. 그 때문에 궁중의 일을 다스림에 있어서 거친 처사가 많았고 공공연히 조정의 정무에까지 간여하며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 후 숙종 9년(1683)에 창덕궁 저승전에서 42세로 세상을 떠났다.     


 숭릉은 조선 18대 현종과 명성왕후 김 씨의 능이다. 숭릉은 하나의 곡장 안에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쌍릉(雙陵) 형식이다. 봉분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고 난간석으로 두 봉분을 연결하였으며 능침 앞에는 혼유석이 각각 1좌씩 놓여 있다.     


 그 밖의 석양, 석호, 망주석, 문무석인, 석마 등은 일반적인 조선왕릉의 형태로 배치되었다. 숭릉의 석물은 효종의 구 영릉(寧陵)의 석물을 다시 사용한 것으로, 영릉(寧陵)이 여주로 천장(遷葬)될 때 석물을 묻었다가 다시 꺼내 사용하였다.    

 

 망주석에는 꽃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위쪽에는 ‘세호(細虎)’라고 불리는 작은 동물 조각이 뚜렷하게 조각되어 있다. 숭릉의 정자각은 조선왕릉 40기 중 유일하게 남은 팔작지붕 정자각이며, 보물로 지정되었다.

숭릉의 정자각은 조선왕릉 40기 중 유일하게 남은 팔작지붕 정자각이며, 보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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