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일형 답사
1.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王陵)
왕릉(王陵)이란, 왕과 그 정실 배우자가 죽으면 묻히는 무덤을 말하며 일반적으로 능(陵)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즉 왕을 낳은 후궁이나 왕족, 그리고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무덤은 원(園)이라고 한다. 그 외 나머지 왕족들이나 폐위된 왕의 무덤은 묘(墓)로 분류한다.
가정 먼저 선사시대의 왕릉은 당연 고인돌이다. 역사상 청동기시대부터 계급이 생겨났으므로 부족장이나 군장이 그 집단의 왕이나 다름없었다. 고인돌의 크기가 클수록 그 주인의 권위와 업적을 나름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고인돌을 만드는 과정에서 엄청난 노동력과 재정이 소모되었으므로, 차츰 철기 시대에 들어서면서 고인돌은 거의 없어지고 토광묘나 옹관묘 같은 비교적 쉬운 묘장으로 바뀌게 되었다.
다만 왕의 무덤은 일반인과는 당연히 달라야 했기 때문에 크기를 크게 하거나, 매장 시 부장품(副葬品)들을 같이 묻어 만들었다. 하지만 왕의 무덤이라는 표시가 나기 때문에 도굴이 될 수밖에 없었고, 3세기 이전의 왕릉 중에서 온전한 것은 거의 없다. 도굴당하지 않고 그대로인 왕릉도 있겠지만 발견이 되지 않았거나 방어 장치가 너무 강해 접근할 수 없는 경우다.
왕릉, 신들의 정원으로 떠나보자.
2. 조선 왕릉
조선 왕릉이란, 조선(1392~1897)과 대한제국(1897~1910)의 역대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가 묻힌 능(陵)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총 42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태조의 추존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그 왕비들의 능까지 포함하면 총 50기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론 42기의 능만을 조선왕릉으로 취급하고 있다.
조선왕릉은 2009년 제33차 세계유산위원회를 통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는데, 현재 북한에 위치하고 있는 제릉과 후릉을 제외한 40기 만이 등재되었다. 그리고 폐위되어 임금의 능이 아닌 왕자의 묘가 된 연산군묘와 광해군묘 역시 제외되었다.
조선왕릉의 경우, 다른 왕조의 능과는 달리 아직까지 무덤 내부에 대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진 적이 없다. 이는 왕릉 제례를 맡은 전주 이 씨 종약원에서 발굴에 동의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건전한 학술 연구라고 해도 무덤을 완전히 파헤쳐야 하니 예법상 매우 꺼릴 수밖에 없다.
따지고 보면 조선왕릉 이외에도 천마총과 황남대총 같은 삼국시대 왕릉급 고분들을 발굴했던 것도 예전 일제강점기 시대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지, 현재 발굴은 경주 김 씨 등 문중의 반대가 강해 어렵다. 이 때문에 조선왕릉의 내부구조는 조선왕조실록 등 왕릉 축조에 대한 기록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 왕릉의 기본적인 조성 규정을 담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포함해 국장 과정과 택지 정보 및 능침 조영 등의 자료를 담은 『국장도감의궤(國葬都監儀軌)』와 『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 등 관련 자료들이 풍부하게 남아있는 편이라서, 굳이 발굴하지 않아도 내부를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조선왕릉은 조선 시대 당시에도 조정이 엄격히 관리하였거니와, 일제강점기 기간 및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당연히 중요하게 다뤄서 관리하였다.
또한 시신을 안치한 석실에 석회를 두껍게 바른 회곽묘라서 포클레인 같은 중장비나 폭약 없이 소수 인력이 도굴이 불가능한 데다, 검약(儉約)을 강조한 유교 윤리에 따라 온갖 진귀한 부장품을 가져다 묻은 이전 왕조와는 다르다.
왕릉 주변이 훼손되었을지언정 왕릉 자체는 보존되었다. 구한말 오페르트 도굴사건이 벌어졌으나 석회벽에 막혔고, 2007년 서오릉 순창원도 당시 자행됐던 도굴 시도 역시 두터운 석회벽에 막혀 미수에 그쳤다.
조선의 왕릉들은 주변의 지명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신덕왕후 강 씨의 정릉(성북구 정릉동), 문정왕후 윤 씨의 태릉(태릉 선수촌), 세조의 광릉(광릉 수목원) 등이 그러하고, 그 외에도 조선왕릉에서 역명을 따온 철도역인 선릉역, 선정릉역, 태릉입구역, 정릉역, 온릉역, 사릉역, 세종대왕릉역 등이나 태종의 능침 앞을 지나는 도로인 헌릉로 및 선정릉 앞을 지나가는 도로인 선릉로와 정릉 앞을 지나가는 정릉로, 용인서울고속도로의 헌릉 IC 등의 지명이 그 예이다.
조선왕릉은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수도인 한양 인근인 경기도에 주로 밀집해 있는데 이는 조선의 국법인 경국대전에서 '왕릉은 도성에서 10리(약 4km) 이상, 100리(40km) 이하의 구역에 만들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도성 내, 즉 옛 한양 시가지 내에 있는 조선왕릉도 없다. 조선 초기 신덕왕후 강 씨의 능인 정릉이 태조의 명에 따라 도성 내에 있었으나, 이후 태종 때 현 위치로 이장했다.
한편 이러한 규정에 어긋나는 예외적인 부분도 있는데 다음과 같다.
1. 동북면 (지금의 함경도)에 있는 태조의 조상들을 추존한 왕릉(목조~환조) 8기.
2. 개성에 있는 태조의 첫 번째 부인이자 추존된 한 씨(신의왕후)의 제릉, 같은 개성에 있는 조선의 2대
임금인 정종(조선)과 정안왕후의 후릉.
3. 귀양지에서 죽은 뒤 이후 추숭하면서 무덤을 그대로 격상한 단종의 장릉.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4. 원래 장지에 문제가 생겨서 불가피하게 이장해야 했던 영녕릉(세종, 효종). 세종의 왕릉은 본래 부왕인 태종의 왕릉인 헌릉 인근에 있었다. 그런데 이미 세종 재위 기간에 최양선이라는 풍수가가 '이곳은 후손이 끊어지고 장남을 잃는 무서운 자리입니다'라고 살벌한 주장을 했다. 이 예언이 맞았는지 계유정난 등 왕실에 피바람이 불면서 터가 불길하다는 인식이 박혔다. 이 때문에 예종 때 현 위치로 이장했다. 효종의 무덤은 본래 동구릉 구역에 있었으나 자꾸 석물이 파손되는 사고가 일어나자 현종 때 현재의 위치로 이장했다.
5. 국왕 본인의 특별한 지침을 따른 정조의 융건릉.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무덤을 양주 배봉산(현대의 동대문구)에서 경기도 화성으로 이장하고 이후 정조 본인의 유언대로 아버지의 무덤 근처에 왕릉을 만들었다.
3. 조선 왕릉의 형식
조선왕릉은 기본적으로 유교 예법에 근거하여 공간이 구성되어 있으면서도 봉분의 조성 형태에 따라 형태적 차별을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형식은 크게 단릉, 쌍릉, 합장릉, 동원이강릉, 동원상하릉, 삼연릉의 여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단릉 형식은 태조(건원릉)부터 시작하여 조선 중기까지 나타나며 18세기 이후에는 거의 볼 수 없다. 쌍릉 형식은 조선시대 전반적으로 고르게 나타나며, 동원이강릉 형식은 세조(광릉)를 시작으로 15세기에만 집중되었을 뿐 이후에는 볼 수 없다.
합장릉의 형식은 18세기 이후에 많이 나타나는데, 이는 능역 조성 시 소요되는 경비와 인력을 절감하기 위해서이다. 그 밖에 풍수적인 입지와 공간적으로 협소하여 동원상하릉의 형식과 삼연릉 형식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단릉(單陵)
단릉은 왕과 왕비의 봉분을 단독으로 조성한 능이다. 대표적으로 태조 건원릉, 단종 장릉, 중종 정릉 등 15기의 능이 있다.
쌍릉(雙陵)
쌍릉은 왕과 왕비의 봉분을 하나의 곡장 안에 나란히 조성한 능으로, 우상좌하(右上左下, 오른쪽에 왕, 왼쪽에 왕비)의 원칙에 따라 조성하였다. 대표적으로 명종 강릉, 영조 원릉, 철종 예릉 등 9기의 능이 있다.
합장릉(合葬陵)
합장릉은 왕과 왕비를 하나의 봉분에 합장한 능이다. 영조 이전의 합장릉은 혼유석을 2좌씩 배치하였으나 영조 이후에는 혼유석을 1좌씩 배치하였다. 대표적으로 세종 영릉, 인조 장릉, 정조 건릉 등 8기의 능이 있다. 특이하게 순종황제 유릉은 황제와 황후 두 분을 하나의 봉분에 합장한 동봉삼실(同封三室) 합장릉이다.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동원이강릉은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봉분과 상설을 조성한 능이다. 최초의 동원이강릉은 세조 광릉이며, 예종 창릉, 성종 선릉 등 7기의 능이 있다. 특이하게 선조 목릉은 세 개의 서로 다른 언덕(선조, 의인왕후, 인목왕후)에 별도의 봉분을 조성하였고, 숙종 명릉은 쌍릉(숙종과 인현왕후)과 단릉(인원왕후)의 형태로 서로 다른 언덕에 봉분을 조성하였다.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
동원상하릉은 한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위아래로 조성한 능으로, 능혈의 폭이 좁아 왕성한 기가 흐르는 정혈(正穴)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풍수지리적인 이유로 조성하였다. 효종 영릉과 경종 의릉 2기가 해당되며, 왕의 능침에만 곡장을 둘렀다.
삼연릉(三連陵)
삼연릉은 한 언덕에 왕과 두 명의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능으로, 헌종 경릉이 유일하다. 우상좌하(右上左下)의 원칙에 따라 오른쪽(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에 왕을 모시고 첫 번째 왕비(효현성황후)와 두 번째 왕비(효정성황후)를 순서대로 모셨다.
4. 조선왕의 건강
519년의 긴 세월을 이어온 조선과 대한제국에는 모두 27명의 왕과 황제가 존재하였다. 왕들은 장엄한 궁궐에서 화려한 의복을 입고, 조선의 내로라하는 명의들이 궁궐에서 늘 왕의 건강을 살폈다. 그러나 왕들은 호화로운 환경에서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그다지 건강하지 못하였다. 조선 왕들의 평균 수명은 44세로 주로 눈병, 종기, 중풍 등의 병을 겪다가 세상을 떠났다.
일단 왕위에 오르면 그 뒤로는 정신없이 바쁜 왕의 일과가 시작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처리해야 할 업무가 산처럼 쌓여 있기 때문에 왕이 집무하는 일들을 만 가지 일이라는 뜻의 “만기(萬機)”라고 하였다. 왕은 주로 앉아서 신료들을 만나고 공문서를 읽었으며, 이동할 때는 가마를 이용하였다. 격구나 활쏘기 등의 간단한 활동을 제외하고는 운동할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혈액 순환이 원활히 되기가 어려웠고, 당뇨와 고혈압에 쉽게 걸렸다. 눈병이나 종기가 나면 쉽게 낫지 않았으며, 이는 결국 왕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원인이 되었다. 실제로 세종과 숙종이 당뇨병으로, 태조, 정종, 태종이 중풍으로 인한 뇌출혈로, 문종, 성종, 효종, 정조, 순조가 종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가 하면 질병과는 상관없이 정치적 희생양으로 유명을 달리한 왕도 있다. 6대 임금 단종은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영월로 유배당했다.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어 감옥이나 다름없는 영월의 청령포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결국 17세의 어린 나이에 사약을 받고 승하하였다. 단종과는 다른 경우이나 연산군과 광해군도 반정에 의해 폐위되고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9. 조선왕의 장례 절차
왕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가 있겠지만 왕릉 이야기이니만큼 이 장에서는 왕의 건강과 죽음과 관련된 일련의 절차나 에피소드를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보통 사극이나 영화에서 보면 왕이 승하하면 내시 중 한 명이 지붕에 올라가 무언가를 외치는 장면을 보았을 것이다. 이때 내시는 평상시 왕이 입던 옷을 입고 올라가 북쪽을 향해 선다. 그리고 왼손으로는 옷의 깃을, 오른손으로는 옷의 허리를 잡고 “상위 복(上位復)” 하고 세 번을 외친다.
여기서 “상위 복”의 뜻은 “임금의 혼이여, 돌아오소서”이다. 즉 왕의 혼이 자신의 체취가 벤 옷을 보고 다시 돌아오라는 의미이다. 이렇게 왕의 혼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기간은 5일이었고, 이 기간 동안은 왕이 아직 살아있는 것으로 간주하여 세자가 다음 왕으로 즉위하지도 않았다. 5일이 지나도 왕이 되살아나지 않으면 입관을 하고 세자의 즉위식이 치러졌다. 왕비가 죽었을 때에도 같았는데, 이때는 “중궁 복(中宮復)”이라고 외쳤다.
왕이 승하하게 되면 임시 관청인 국장도감(國葬都監), 빈전도감(殯殿都監), 산릉도감(山陵都監)이 설치되었다. 이 중 국장도감은 장례를 주관했고, 빈전도감은 빈전의 설치와 운영을, 산릉도감은 왕릉의 조성을 담당했다.
특히 빈전의 설치는 우리 고대사에서도 확인이 되는데, 바로 백제 무령왕릉이다. 빈전에 안치된 왕의 시신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얼음이 필요했는데, 이를 저장했던 시설이 바로 석빙고다. 지금도 서울의 지명 가운데 동빙고동(東氷庫洞), 서빙고동(西氷庫洞) 등이 있어 석빙고와 관련 있는 지명임을 알 수 있다. 빈전의 설치 기간은 약 5개월로 이후 왕의 시신을 재궁(梓宮)에 모셔 대여(大轝)에 실은 뒤 장지(葬地)로 이동했다.
장지에 도착한 뒤 재궁을 묻고, 뽕나무로 왕의 혼백을 담은 신주(位牌)를 썼다. 이 신주를 종묘에 부묘하기 전까지 혼전(魂殿)에 봉안했다. 이후 3년이 지나면 종묘에 모시는데 이를 부묘(祔廟)라고 한다.
5. 조선왕릉의 공간 구성
조선왕릉은 진입 공간, 제향 공간, 능침공간의 세 공간으로 나눌 수 있으며 각 공간은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왕릉은 죽은 자를 위한 제례의 공간이므로, 동선 처리에 있어서도 이에 상응하는 원칙을 적용하고 있다.
죽은 자와 산 자의 동선을 엄격하게 분리하고 죽은 자의 동선만을 능침영역까지 연결시켜 공간의 상징성을 부여하고 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지는 향로·어로에는 산 자와 죽은 자의 동선은 공존하되 구별되어 있다. 즉, 산 자는 정자각의 정전에서 제례를 모신 뒤 서쪽 계단으로 내려오고 죽은 자는 정자각의 정전을 통과하여 능침공간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답사자의 시각에서 왕릉 입구에서부터의 건물 및 구조물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진입 공간은 왕릉의 시작 공간으로, 관리자(참봉)가 머물면서 왕릉을 관리하고 제향을 준비하는 재실(齋室)에서부터 시작한다. 능역으로 들어가기 전 홍살문 앞에는 금천교(禁川橋)라는 다리가 있는데 왕과 왕비의 혼령이 머무는 신성한 영역임을 상징한다.
재실(齋室) : 왕릉 관리자가 상주하며 제례에 필요한 제수를 준비하는 곳.
금천교(禁川橋) : 능역과 속세를 구분하는 돌다리
두 번째, 제향 공간은 산 자(왕)와 죽은 자(능에 계신 왕이나 왕비)의 만남의 공간으로, 이곳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은 정자각(丁字閣)이다. 제향 공간은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홍살문[紅箭門]부터 시작된다. 홍살문 옆에는 돌을 깔아 놓은 배위(拜位)가 있는데 참배하러 온 왕을 위한 자리이다. 홍살문 앞부터 정자각까지 이어주는 향로(香路)와 어로(御路)는 박석을 깔아 만든 돌길인데, 홍살문 기준으로 왼쪽의 약간 높은 길은 향과 축문을 들고 가는 길이라 하여 향로라 하고, 오른쪽의 낮은 길은 왕이 사용하는 길이라 하여 어로라 한다. 일부 왕릉에서는 향·어로 양 옆으로 제관이 걷는 길인 변로(邊路)를 깔아 놓기도 하였다. 향·어로 중간 부근 양옆으로는 왕릉 관리자가 임시로 머무는 수복방(守僕房)과 제향에 필요한 음식을 간단히 데우는 수라간(水刺間)이 있다. 정자각에서 제례를 지낸 후 축문은 예감(瘞坎)에서 태우는데, 정자각 뒤 서쪽에 위치해 있다. 조선 전기에는 소전대(燒錢臺)가 그 기능을 하였으나 후에 예감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정자각 뒤 동북쪽에는 장방형의 산신석(山神石)이 있는데, 산을 주관하는 산신에게 예를 올리는 자리이다.
홍살문(紅箭門) : 궁(宮), 관아(官衙), 능(陵), 묘(廟) 등의 입구에 세우는 붉은 문으로 귀신을 쫓고, 나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는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의미이다.
배위(拜位) : 홍살문 오른편에는 현재 왕이 도착해 선왕에게 절을 할 수 있는 자리이다.
향어로(香御路) : 홍살문에서 정자각을 잇는 길로, 신이 가는 길인 향로와 왕이 가는 길인 어로가 있다.
수라간(水刺間) : 제례에 필요한 음식을 준비하는 건물로 정자각을 정면으로 바라볼 때 왼편에 있다.
수복방(守僕房) : 왕릉 관리자가 머무는 건물로 정자각을 정면으로 바라볼 때 오른편에 있다.
정자각(丁字閣) :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건물로, 지붕이 정(丁) 자와 같아 정자각이라고 부른다.
비각(碑閣) : 왕의 행적을 적은 신도비나 표석을 보호하는 건물
예감(瘞坎) : 제례 때 사용한 축문을 태우는 곳으로 봉분을 정면으로 바라볼 때 왼편에 있다.
산신석(山神石) : 왕릉이 있는 산의 신령에게 제사 지내는 곳으로 봉분을 정면으로 바라볼 때 오른편에 있다.
마지막, 능침공간은 봉분이 있는 왕릉의 핵심 공간으로 왕이나 왕비가 잠들어 계신 공간이다. 능침공간 주변에는 소나무가 둘러싸여 있으며, 능침의 봉분은 원형의 형태로 태조의 건원릉을 제외한 모든 능에는 잔디가 덮여있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의하면 ‘봉분의 직경은 약 18m, 높이는 약 4m’로 조성하게 되어 있으나 후대로 갈수록 줄어드는 경향을 보여 평균 직경 약 11m를 이루고 있다.
석마(石馬) : 문석인과 무석인의 뒤나 옆에 배치하는 말 모양의 석물
무석인(武石人) : 왕을 호위하는 무인을 상징하는 석물
문석인(文石人) : 왕을 보좌하는 문인을 상징하는 석물
장명등(長命燈) : 어두운 사후세계를 밝힌다는 의미를 지닌 석등
혼유석(魂遊石) : 왕과 왕비의 혼이 노니는 곳
망주석(望柱石) : 봉분의 좌우에 세우는 돌기둥
석호(石虎)와 석양(石羊) : 왕릉을 수호하는 호랑이와 양 모양의 석물로 네 마리씩 교대로 밖을 향하여 배치되어 있다.
난간석(欄干石) : 봉분을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 돌
병풍석(屛風石) : 봉분을 보호하기 위해 봉분의 아랫부분에 둘러놓은 돌
봉분(封墳) : 왕릉의 주인이 잠들어 있는 곳
곡장(曲墻) : 봉분의 동, 서, 북쪽에 둘러놓은 담장
6. 조선왕릉 알아보기 『서오릉(西五陵)』 - 경기도 고양
서오릉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에 있는 조선 왕실의 왕릉군으로, 서쪽에 있는 5개의 능(陵)이라는 뜻이다. 사적 제198호 “고양 서오릉”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다른 조선왕릉들과 함께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서오릉에는 조선 7대 임금인 세조의 세자이자 9대 임금 성종의 아버지인 추존왕 덕종(의경세자)과 세자빈 소혜왕후 한 씨(인수대비)가 안장되어 있는 경릉(敬陵)부터 시작하여, 제8대 임금인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한 씨의 능인 창릉(昌陵), 제19대 임금인 숙종과 그 계비인 인현왕후 민 씨, 인원왕후 김 씨가 안장되어 있는 명릉(明陵), 숙종의 첫 왕비인 인경왕후 김 씨가 안장된 익릉(翼陵), 그리고 제21대 임금인 영조의 정비인 정순왕후 서 씨가 안장된 홍릉(弘陵)까지 다섯 개의 능이 자리 잡고 있다.
왕이나 왕비의 무덤은 왕릉으로 조성되지만, 왕을 낳은 후궁이나 왕족, 그리고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무덤은 원(園)으로 조성된다. 여기 서오릉에는 명종의 장남인 순회세자와 그의 부인 공회빈 윤 씨가 안장된 순창원(順昌園)이 있고,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 씨가 안장된 묘소인 수경원(綏慶園)이 자리 잡고 있다.
또한 그 외 왕족들이나 폐위된 왕들의 무덤은 묘(墓)로 조성되어 남아 있는데, 서오릉에는 숙종의 후궁이자 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 씨의 묘인 대빈묘(大嬪墓)가 자리 잡고 있다. 희빈 장 씨의 묘는 원래 경기도 광주에 있다가 1969년에 지금의 자리로 이장되었다. 정비(正妃)는 아니지만 국왕이 되는 원자를 생산한 후궁은 통상적으로 원(園)으로 조성되어야 하지만, 정쟁에 휘말려 사약을 먹고 죽은 희빈 장 씨는 본래의 대우를 받지 못하고 그대로 묘(墓)로 남아 있다.
7. 숙종과 인현왕후, 인원왕후의 능, 『명릉(明陵)』
서오릉 역시 매표소에서 시작하여 관람 동선에 맞게 하나씩 살펴보고 가도록 하자.
조선의 제19대 임금인 숙종은 경종, 영조, 연령군의 아버지이다. 숙종은 조선 6대 왕이었던 단종(端宗) 이후로 가장 완벽한 정통성을 타고난 왕이었다. 여기서 잠깐 단종의 정통성을 살펴보자면, 단종은 적자, 적손, 장자, 장손에 원손-세손-세자-왕이라는 조선 역사상 유일무이한 정통성을 가진 혈통계의 끝판왕이었다. 비록 계유정난이라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지만, 계유정난이 당대에도 명분이 부족한 반정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이유가 바로 단종의 완벽한 정통성 때문이었다. 반면 숙종은 태어났을 때 아버지 현종이 세자가 아닌 왕이었기 때문에 원손 – 세손 시절이 없이 원자 - 왕세자 - 왕 단계를 거쳤다.
14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고 당시 모후인 명성왕후와 증조모인 장렬왕후가 살아 있었기 때문에 수렴청정이 이루어질 만도 했지만, 숙종은 즉위하자마자 대비전의 수렴청정을 건너뛰고 곧바로 친정(親政)을 했다. 이는 조선왕조에서 매우 특이한 경우로 이는 정통성을 떠나 숙종의 총명함과 결단력이 왕가의 어른들과 조정의 대신들에게도 모두 인정받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숙종은 왕비를 네 번 맞이하였고, 이 중 두 번째 왕비가 인현왕후 민 씨, 세 번째가 희빈 장 씨이다. 우리가 드라마를 통해 잘 알듯이 숙종과 인현왕후, 희빈 장 씨는 삼각관계이다. 숙종과 희빈 장 씨는 애틋한 관계였지만 결국은 숙종에 의해 희빈 장 씨는 사사(賜死)된다.
숙종은 장장 46년에 이르는 치세 동안 무수한 환국(換局) 정치를 통해 매우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던 중흥 군주이다. 숙종 대의 환국은 총 세 번이 일어났는데, 당시 서인과 남인은 붕당으로 갈려져 있었다. 이처럼 신하들이 편을 갈라서 싸우고 있으니까 그러한 대립을 이용해 왕에게 유리하게 한 쪽 세력을 처형한 것이 바로 환국이다. 그렇기 때문에 숙종의 왕권을 굉장히 강했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 1694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이 집권하였는데, 이 세 번의 환국으로 처형당한 사람은 51명, 파직이나 유배를 떠난 사람은 376명이다. 보통 탕평 정치는 영조, 정조 때 많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지만, 이처럼 이미 숙종 때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조선의 정치를 이야기할 때 그 시대를 상징하는 정치형태가 있는데, 선조 시대의 붕당정치, 숙종 시대의 환국 정치, 영조와 정조 시대의 탕평 정치, 순조, 헌종, 철종에 이르는 세도 정치까지 조선 후기 정치는 이처럼 변화무쌍(變化無雙) 하였다.
숙종 시대에는 장길산이라는 황해도 지역의 도적 우두머리가 있었던 시기인데, 장길산은 임꺽정, 홍길동과 함께 조선의 3대 도적이다.
숙종은 평안도, 함경도, 제주도를 제외한 전 지역에 대동법을 시행해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대동법은 광해군 때 처음 시행하였는데, 100년이 지난 숙종 때가 되어서야 전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또한 숙종 때는 본격적으로 화폐를 제조하기 시작했는데, 그 화폐가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상평통보(常平通寶)이다. 고려시대나 태종 때에도 화폐를 발행하였으나 제대로 사용되지는 못하였다. 조선 숙종 때에는 처음으로 제대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당시 대동법이 시행 중이라 화폐가 널리 활용되기 좋은 환경을 가졌던 덕분이다. 그로 인해 숙종 시대 전반에는 상품화폐 경제의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국가의 재정 역시 탄탄해졌다.
그 외에도 숙종은 백두산에 청과의 국경선을 다시 긋고, 정계비(定界碑)를 세우면서 북방의 영역을 확고히 하였으며, 탕춘대성과 문수산성 등의 여러 성을 쌓으면서 수도 방어에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숙종 때는 안용복이라는 인물이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라는 것을 확고하게 하였는데, 당시 안용복은 일본으로 잡혀가서 자신이 조선의 관리라고 속이고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땅이라는 문서를 받아온다. 그러나 오다가 쓰시마에서 해당 문서를 빼앗겼다고 하는데, 어쨌든 이를 통해 당시에도 독도는 조선의 영토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숙종은 정종과 단종, 사육신과 소현세자 빈 강 씨의 신원을 회복시키는 등 조선왕조의 과거사를 정리하는데 기여하였다.
이렇게 46년간 조선을 다스리던 숙종은 1720년 6월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조선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권을 가졌던 왕이다.
숙종 27년(1701)에 인현왕후 민 씨가 세상을 떠나자 명릉에 제일 처음으로 능을 조성하였다. 숙종은 인현왕후의 능을 공사할 때 허우(虛右, 오른쪽 자리를 비우게 함) 제도로 공사하여 자신의 능자리를 미리 만들었다. 그리고 이후 숙종 45년(1720)에 숙종은 인현왕후의 능 옆으로 능을 조성하여 잠들게 되었다.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은 나란히 놓인 쌍릉인 반면, 가장 오랜 기간 숙종의 정비였던 인원왕후는 반대쪽 언덕에서 단릉의 형태로 죽어서도 홀로 남편을 바라보고 있다.
숙종의 능이 이곳으로 정해진 이유와 관련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숙종이 하루는 평상복을 입고 민심을 살피기 위해 궐을 벗어나 어느 냇가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 냇가에서 한 젊은이가 울고 있는 것이 보여 그 이유를 물으니, 갈처사라는 유명한 지관이 이곳에 무덤을 쓰면 좋다고 해서 땅을 파는데, 아무리 파도 물이 고이니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숙종은 그 지관이 장난을 쳤다고 여기고, 젊은이를 불쌍히 여겨 관청에 가서 쌀 300석을 받아올 수 있도록 적은 서신을 적어주었다. 그리고는 지관이 살고 있는 허름한 오두막집을 찾아가 청년의 일을 따져 물었다. 그러자 지관은 “모르면 잠자코 계시오. 저 땅은 무덤자리로 들어가기도 전에 쌀 300석을 받고 명당자리로 들어가는 자리라오!”라며 따져 묻는 숙종에게 오히려 핀잔을 주었다. 그의 신통함에 놀라 자신이 국왕인 것을 밝히고, 훗날 숙종이 묻힐 묏자리를 골라달라고 부탁하였다. 전해지는 일화에 따르면, 지금의 명릉 자리가 바로 신통한 지관 갈처사가 택한 입지라고 한다.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 다르면 숙종이 아버지 현종의 묘소를 찾았다가 그곳에서 고양이 한 마리를 발견하곤 궁으로 데려온다. 숙종은 고양이에게 아버지 현종의 넋이 있다고 믿었고, 금손이라는 이름까지 붙여 주며 애지중지 키운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숙종은 정무를 보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금손과 함께 시간을 보냈으며, 함께 겸상을 하고 부인들과 합궁 일에도 금손을 찾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1720년 숙종이 승하하자, 신기하게도 고양이 금손은 식음을 전폐하고 13일 만에 숙종의 뒤를 따랐다고 한다. 인원왕후의 명에 의해 금손은 지금도 숙종의 곁에 묻혀서 그 곁을 지키고 있다.
7. 추존 덕종과 소혜왕후의 능, 『경릉(敬陵)』
덕종(의경세자)은 조선 세조의 적장자이자 아들에 의해 추존된 국왕이다. 묘호가 덕종(德宗)이고, 생전에 불리던 이름은 도원군(桃源君)이다. 의경세자의 정실부인이 바로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 인수대비 한 씨(소혜왕후)이다. 한 살 연상이었던 소혜왕후와는 5년간의 결혼생활 동안 슬하에 월산대군, 명숙공주, 자을산군까지 2남 1녀를 두었다. 세자 시절 아버지 세조의 명으로 정식으로 간택한 귀인 권 씨, 귀인 윤 씨, 숙의 신 씨 등 3명의 후궁을 두었으나 슬하에 자녀는 없다.
의경세자는 자식복이 있어서 두 아들인 월산대군과 자을산군은 학식과 덕망이 깊고 인품이 훌륭한 수재들이었고, 두 형제의 우애가 매우 돈독했다고 한다. 사후에 차남인 성종(자을산군)의 강력한 의지로 왕으로 추존되는데 조선 최초의 왕세자 출신 추존왕이다. 가계도를 떠 따져보자면, 세종의 첫 손자이고, 예종의 친형이며, 단종의 사촌형, 연산군과 중종의 할아버지이다.
그러나 의경세자는 병약하여 잔병치레를 자주 하였고, 세조 3년(1457)에 병이 크게 들어 세조의 명으로 21명의 승려가 경회루에 올라 공작재(孔雀齋) 베풀고 병의 치유를 빌었으며, 당대의 권력자인 한명회, 신숙주 등도 함께 참여하여 속한 쾌유를 기원하였다. 그러나 의경세자는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예견하였는지 붓을 들어 다음과 같이 써 내려갔다.
비바람 무정하여 모란꽃이 떨어지고, 섬돌에 펄럭이는 붉은 작약(芍葯)이 주란(朱欄·붉은 칠을 한 난간)에 가득 찼네. 명황(明皇)이 촉(蜀) 땅에 가서 양귀비를 잃고 나니, 빈장(嬪裝·임금의 수청을 들던 궁녀)이야 있었건만 반겨보지 않았네.
세조와 의경세자는 공적인 자리와 사적인 자리를 가리지 않고, 늘 함께 다닐 정도로 가까운 부자 지간이었는데, 그 예로 의경세자가 병이 들었을 때 세조는 자신이 임금이 되기 전의 집인 사가에 세자를 보내 치료하도록 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세조 스스로도 거처를 옮겨 의약품을 챙기는 등, 친히 의경세자의 병구완을 했다. 10여 일 뒤 병세에 잠깐 차도를 보이자 세조는 세자를 돌본 측근들에게 후한 상금까지 내렸다. 어머니인 정희왕후는 의경세자의 병이 깊어지자 화원에게 초상화를 그리라고 명했는데, 의경세자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에야 전에 그려두었던 장남의 초상화를 보면서 하늘을 원망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세조는 죽은 맏아들을 위해 친히 여러 차례 묏자리를 찾아다니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세조가 의경세자를 얼마나 끔찍하게 아꼈는지 알 수 있다. 의경세자가 사망한 뒤 왕통은 그의 장남인 월산대군이 아닌 동생인 예종에게 넘어갔는데, 이는 왕위 계승의 법칙인 종법제(宗法制)에서 어긋나는 행위였지만 딱히 반발은 없었다. 세조의 왕권이 워낙 강력하기도 하였고 어린 단종에게서 왕위를 찬탈하는 일을 거든 중신들로서도 종법을 따지며, 의경세자의 장남이지만 어린 월산대군을 후계자로 밀어붙일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소혜왕후 한 씨
소혜왕후 한 씨는 덕종의 아내이며, 세조의 맏며느리이자 월산대군과 성종의 어머니이다. 남편 의경세자가 아들 성종에 의해 의경왕으로 추존되자 인수왕비(仁粹王妃)가 되었고, 이후 덕종(德宗)으로 추존되자 인수왕대비(仁粹王大妃)로 존봉(尊奉)되었다. 이후, 성종의 뒤를 이어 손자 연산군이 즉위한 이후엔 자숙이라는 존호가 더해졌으나 최초에 받은 존호 그대로 인수대왕대비로 호칭되고 있다. 사후 연산군 때에 '소혜왕후(昭惠王后)'라는 시호를 받았다.
남편이 의경세자에서 의경왕으로 추존되면서, 왕비로 추존되었지만, 왕비의 통상적인 의미인 '임금의 아내(중전)'로는 지냈던 적은 없었고, 거의 대비로만 지내다 보니 대중에게는 소혜왕후보다는 인수대비라는 호칭이 더 잘 알려져 있다. 연산군과 중종의 친할머니이다.
연산군과는 폐비 윤 씨 문제로 날카롭게 대립하였는데, 연산군 10년(1504) 1월 8일, 인수대비는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느꼈는지, 문안을 온 신하에게 "내가 이미 늙었고 본 것도 많으니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다. 다만 주상(主上)이 본래 소찬(素饌)을 들지 못하니, 내가 만일 죽게 되더라도 3일 안에 육선(肉膳)을 드리도록 하라."라고 말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때를 전후로 대비의 건강이 위중하다는 기록이 여러 차례 남아 있다.
왕(王)이 항과 봉의 머리털을 움켜잡고 인수대비(仁粹大妃) 침전으로 가 방문을 열고 욕하기를 ‘이것은 대비의 사랑하는 손자가 드리는 술잔이니 한 번 맛보시오.’ 하며, 항을 독촉하여 잔을 드리게 하니, 대비가 부득이하여 허락하였다. 왕이 또 말하기를, ‘사랑하는 손자에게 하사하는 것이 없습니까?’ 하니, 대비가 놀라 창졸간에 베 2 필을 가져다주었다. 왕이 말하기를 ‘대비는 어찌하여 우리 어머니를 죽였습니까?’ 하며, 불손한 말이 많았다. 뒤에 내수사(內需司)를 시켜 엄씨·귀인 정씨의 시신을 가져다 찢어 젓담그어 산과 들에 흩어버렸다.
연산군일기 52권, 연산 10년(1504) 3월 20일 신사 5번째기사
본래 왕릉을 쓸 때는 정자각에서 바라보았을 때 좌측에 왕을, 우측에 왕비를 안장한다. 그러나 경릉은 부인인 소혜왕후가 상좌인 좌측에 안장되어 있다. 이것은 승하할 당시의 신분 차이 때문인데, 의경세자의 경우는 세자의 신분이었지만 소혜왕후의 경우는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로서 승하했기 때문에 군신 관계에 따라 위가 되는 것이다. 능의 석물 또한 문인석만을 갖춘 의경세자와는 달리 소혜왕후의 경우 무인석까지 갖추고 있다.
8. 숙종의 첫 번째 왕비, 인경왕후의 능, 『익릉(翼陵)』
숙종의 첫 번째 왕비 인경왕후 김 씨는 현종 2년(1661)에 태어나 현종 12년(1671)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1674년에 숙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숙종 사이에서는 두 공주를 낳았으나 일찍 죽게 되는 비운을 겪는데, 숙종 6년(1680)에 천연두를 앓다가 경덕궁 회상전에서 20세로 세상을 떠났다.
천연두는 현재는 예방주사 한 대면 해결되는 병도 아닌 병이지만 당시의 형편으로는 불치의 병이었다. 숙종은 병에 걸린 왕비에게 따뜻한 위로의 눈빛 한 번 건네지 못하고 자신도 천연두에 전염될 수 있으니 창경궁으로 옮겨야 했다.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의 향로와 어로는 직선으로 경사가 있기 때문에, 중간에 계단을 두어 지형에 따라 설치하였다. 익릉의 정자각은 서오릉 내에 있는 정자각 중에서 유일하게 익랑이 설치되어 있는 정자각이다. 능침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난간석에는 12간지를 글자로 새겨 놓았다. 그 밖에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등을 배치하였고, 대부분의 석물 조각은 임진왜란 이후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익릉은 서오릉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를 잡았으며 봉분 역시 웅장한 모습으로 조성되었으며, 석물의 크기도 숙종의 명릉에 비해 크게 조성되었다. 젊은 나이에 요절하게 된 인경왕후의 기구한 운명을 익릉의 봉분과 석물들이 그나마 위로하고 있다.
9. 영조의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의 능, 『홍릉(弘陵)』
영조의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 서 씨는 숙종 18년(1692)에 가회방(嘉會坊) 사저에서 태어났다. 경종 1년(1721)에 왕세제빈으로 책봉된 후 1724년에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영조는 정성왕후를 투명인간 대하듯이 차갑게 대했는데, 그 이유는 첫날밤 있었던 대화 때문이다.
영조가 정성왕후의 손을 잡고 “손이 참 곱구려”라고 말하니 정성왕후는 부끄러워하며 “고생을 해본 적이 없어서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영조의 안색이 바뀌면서 정성왕후를 멀리하게 된 것이다. 영조는 정성왕후의 대답을 무수리 출신으로 온갖 고생을 하면서 손이 거칠어진 자신의 어머니 숙빈 최 씨를 모욕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어머니의 신분은 영조의 평생 콤플렉스였기 때문에 당시 정성왕후의 대답은 영조가 그냥 넘길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정성왕후는 영조의 그러한 대우에도 불구하고 남편 영조를 살갑게 잘 모셨으며, 후궁과 그 자식들까지도 잘 대해주었다. 사도세자도 친자식처럼 잘 대해주었으며 시어머니였던 숙빈 최 씨와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 등 왕실 어른들도 극진히 잘 모시던 착한 며느리였다.
조선 역대 왕비 중에서 중전 재임을 가장 오래 하였으나 영조 사이에서 소생을 낳지 못하였다. 두 후궁에서 낳은 효장세자와 사도세자가 왕세자로 책봉될 때 양자로 입적하기도 하였으며, 영조와 사도세자가 대립하게 되자 그 중심에 서서 갈등을 풀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후 영조 33년(1757)에 창덕궁 관리합에서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정성왕후가 세상을 떠난 후 영조는 친히 왕후의 행장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왕궁 생활 43년 동안 항상 웃는 얼굴로 맞아주고, 양전을 극진히 모시고, 게으른 빛이 없었으며, 숙빈 최 씨(영조의 생모)의 신주를 모신 육상궁 제전에 기울였던 정성을 고맙게 여겨 기록한다.
정성왕후 서 씨가 세상을 떠나자 예종의 창릉 동쪽 언덕인 현재의 자리에 능을 조성하였다.
영조는 정성왕후의 능을 조성하면서 숙종의 명릉(明陵) 제도를 참고하여 쌍릉 형식으로 조성할 계획을 세우고, 자신의 능 자리를 미리 잡아 능의 오른쪽 자리를 비워두는 허우제(虛右制)로 홍릉을 조성하였다. 석물 배치 역시 쌍릉의 형식으로 배치하고 비어 있는 자리에 십자(十字) 모형을 새겨 표기하게 하였다.
그러나 1776년에 영조가 세상을 떠나고 정조가 즉위하면서, 영조의 능 자리에 대한 대신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여러 차례 논의 끝에 효종의 구 영릉(寧陵) 자리로 최종 결정되어 원릉이라는 이름으로 영조의 능을 조성하였다. 이로 인해 홍릉의 오른쪽 자리는 현재의 모습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렇게 평생 동안 남편에게 버림받고 외롭고 쓸쓸한 삶을 살았던 정성왕후는 죽어서도 영조와 함께하지 못하게 되었다. 어쩌면 정조의 입장에서는 아버지와 할머니를 아껴주던 정성왕후가 죽어서라도 편하게 쉴 수 있도록 영조 옆이 아닌 다른 자리로 모신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진입 및 제향 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비각 안에 있는 표석도 쌍릉의 형식을 생각하여 글을 새겼다. 능침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다. 그 밖에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등을 배치하였다. 홍릉의 무석인은 투구와 등에 장식이 많이 되어 있고, 뒷면에는 문양이 촘촘히 넣어져 있는 목 가리개를 위로 올렸다.
10. 예종과 안순왕후의 능, 『창릉(昌陵)』
예종은 세조와 정희왕후 윤 씨의 둘째 아들로 세종 32년(1450)에 수양대군의 사저에서 태어났다.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 해양대군(海陽大君)에 봉해졌고, 형인 의경세자(추존 덕종)가 20세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나자 세조 3년(1457)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468년에 왕위에 올랐는데, 세자 시절 얌전하고 똑똑했기 때문에 신하들은 큰 아버지인 문종 같은 군주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신하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예종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군주가 아니었다.
즉위 초에 남이의 옥사로 진압하였으며, 예종 1년(1469) 세종의 영릉(英陵)을 여주로 천장하였다. 그리고 성종 때 완성된 경국대전 편찬작업에 박차를 가한 것도 예종의 업적이다.
그러나 예종은 재위 1년 2개월 만에 경복궁 자미당에서 20세로 세상을 떠났다. 실록에는 죽기 전날까지 멀쩡하였는데 발병을 앓고 있었다고 한다. 고질적인 발병이 지금의 봉와직염이 되었고 점점 악화되어 패혈증으로 죽었다고 전해진다.
예종은 효성이 지극했던 아들이었다. 조선 후기의 학자 이긍익이 지은 야사모음집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예종이 부왕 세조가 세상을 떠난 것에 충격을 받아 건강을 해쳤다며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예종이 세자일 때 세조가 병환이 생기니 수라상을 보살피고 약을 먼저 맛보며 밤낮으로 곁을 지키며 한잠도 못 잔 지가 여러 달이 되었다. 세조가 죽자 슬픔이 지나쳐 한 모금의 물도 마시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건강을 해치게 되어 이해 겨울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예종의 두 번째 왕비 안순왕후 한 씨는 세조 9년(1463)에 왕세자의 후궁인 소훈(昭訓, 내명부 세자궁 종 5품)에 간택되었고, 예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예종이 세상을 떠난 후 원자인 제안대군이 왕위를 이어받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성종)이 예종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위에 올랐다. 성종이 즉위한 후 인혜왕대비가 되었고, 연산군 즉위 후 대왕대비가 되었다. 그 후 연산군 4년(1498)에 창경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창릉은 조선 8대 예종과 두 번째 왕비 안순왕후 한 씨의 능으로 서오릉에서 최초로 왕릉으로 조성된 능으로,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태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이 예종, 오른쪽 언덕이 안순왕후의 능이다.
진입 및 제향 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수복방, 수라간,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창릉의 두 능침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석물의 상설은 왕과 왕비가 비슷하다. 예종 능침의 장명등은 지붕돌이 없어진 상태이고, 혼유석을 받치는 고석의 무늬가 도깨비가 아닌 북고리로 조각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