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일형 답사
1. “전하, 종묘사직을 보존하옵소서”, 사직단
고대 중국의 제도를 기록한 서적인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에 실려 있는 좌묘우사(左廟右社) 원칙에 따라 도성을 건설할 때 궁궐 왼쪽엔 종묘를 오른쪽엔 사직단을 두었다. 사직은 토지를 관장하는 사신(社神)과 곡식을 주관하는 직신(稷神)을 가리킨다. 두 신을 제사 지내는 단을 만들어 모신 곳이 사직단(社稷壇)이다.
조선 시대에는 임금과 왕족, 관련 직무를 맡은 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성역이기 때문에 양반조차도 쉽게 들어갈 수가 없었다.
현재 사직단 영역에는 단군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단군성전과 본래 경희궁에 있었다가 인왕산 아래로 옮겼다는 국궁터 황학정이 있다. 공원 광장에는 율곡 이이와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 동상이 있다.
사직대제는 매년 2월과 8월, 그리고 동지와 섣달 그믐날 밤에 거행되었다. 1908년 일제의 강압으로 폐지되었다가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 당시 복원한 이후 해마다 개천절에 서울 사직단에서 전주 이 씨 주관으로 봉행해오고 있다.
사직단은 서울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전국 곳곳에 지어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를 올렸다. 한양의 종묘와 사직단의 역할을 지방의 객사와 지방 사직단이 맡은 것이며 그 때문에 전국 각지에서 사직과 연관된 지명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사직 야구장으로 유명한 부산 사직동도 동래 사직단이 있던 곳이며 광주광역시와 청주시의 사직공원도 마찬가지로 사직이 있던 곳이다.
조선 시대 왕이 외척이나 간신들에게 놀아나고 정사를 게을리할 때 신하들은 “전하, 종묘사직을 보존하옵소서.”하고 읍소를 하였다. 이처럼 종묘와 사직은 나라의 근간이었다.
2. 궁궐의 도시, 서울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서울에 궁궐이 있는 건 알아도 막상 궁궐을 보러 가려고 하면 경복궁에는 누가 살았는지 창덕궁과 창경궁은 뭐가 다른지 덕수궁 돌담길이 연인들에게 왜 유명한지 경희궁은 어디인지 등등 어렴풋한 기억과 의문을 갖게 된다. 그래서 본격적인 서울 편 기행에 앞서 서울의 궁궐에 대해 간략하게라도 알고 가면 더 준비해서 알찬 일정을 만들 수 있다.
먼저 궁궐의 종류를 알아보면 그 용도에 따라 법궁(정궁), 이궁, 별궁, 행궁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법궁(法宮)은 왕조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정궁을 말하며 조선의 경복궁이 이에 해당된다. 이궁(離宮)은 정궁에 화재나 변고가 있을 때 예비로 쓰게 되는 궁을 말하며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을 말한다. 한편 별궁(別宮)은 임금이 왕위에 오르기 전이나 혹은 임금이 왕위에서 물러나 상왕이 되었을 때 머무는 곳이고 행궁(行宮)은 임금이 피난을 가거나 휴가를 갈 때 잠시 머무르는 궁궐이다. 행궁에는 화성행궁, 남한산성 행궁 등이 있다.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과 이궁인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을 우리는 한양의 5대 궁궐이라고 한다.
먼저 경복궁은 태조 1년인 1395년 가장 먼저 지어진 궁궐이다. 조선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한양에 새로운 도성을 건설하였다. 경복궁 좌우로 나라의 근간이 되는 종묘와 사직을 세웠고 나라의 근간이 될 교육을 담당할 문묘와 성균관도 만들었다. 하지만 조선 7대 임금인 세조는 왕위찬탈 이후 창덕궁으로 옮겨갔고 후대 임금들도 경복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1592년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한양의 모든 궁궐은 폐허가 되었다. 전쟁 후 다른 궁궐등은 재건에 힘을 쏟았지만 경복궁은 길하지 않은 곳이라는 의견이 있어서 제26대 임금인 고종이 즉위할 때까지 그대로 방치되었다.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이후 1895년 경복궁에서 을미사변이 일어났고 다음 해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했다. 이때부터 경복궁은 궁궐로 쓰이지 않았다.
창덕궁은 제3대 임금인 태종에 때 지어진 궁궐로 역대 가장 많은 임금이 머문 궁궐이다. 창덕궁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원래의 지형 위에 지어진 자연친화형 궁궐이며 후원이라고 불리는 정원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그대로 배경으로 둔 채 정자 등의 휴식공간을 세워 아름다움을 더한 정원이다. 이러한 아름다움 때문에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창덕궁 낙선재는 대한제국 황실의 최후를 함께 한 장소인데 마지막 황제 순종은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긴 후 주로 낙선재에서 살았으며 순종의 비인 순정효황후와 순종의 동생 영친왕의 비 이방자 여사,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인 덕혜옹주가 이곳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창경궁은 조선 제9대 임금 성종이 세 명의 대비를 위해 지은 궁궐이다. 원래의 창경궁은 세종이 즉위하면서 아버지 상왕 태종이 거처할 수강궁(壽康宮)을 지었다. 그리고 60여 년이 지나 성종은 그 수강궁 터에 창경궁을 건립하였다. 창경궁 역시 창덕궁처럼 지형의 높고 낮음을 그대로 두고 거대한 암반도 살려서 집을 앉히고 자연적인 정원을 꾸몄다. 1908년에는 한반도를 강제점령한 일본에 의해 전각들이 철거되는 수난을 겪으며 그 자리에 동물원 식물원 등이 세워지고 일본의 국화인 벚꽃이 가득 찬 일본식 공원이 되고 말았다. 이름도 창경원(昌慶苑)으로 격하되어 불렸다. 그래서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해방 후에도 오랫동안 놀이공원으로 남아 있던 창경궁은 1986년에야 다시 궁궐의 모습을 제대로 되찾게 되었다.
덕수궁은 본래 이름이 경운궁이었는데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저택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 이후 모든 궁이 불타버려서 돌아갈 곳을 잃은 선조가 이곳에 들어와 살았고 광해군도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이후 광해군은 새로 지어진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이곳에 경운궁이라는 명칭을 지어주었고 이후 대궐 대접을 받게 되었다. 덕수궁이라는 이름은 1907년부터 쓰이기 시작하였는데 을미사변 이후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은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이후 고종은 환구단을 세우고 대한제국 황제로 등극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일본은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고 이에 고종은 다른 나라에 억울함을 호소하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 특사를 보냈다. 그런데 일본은 헤이그 특사 사건의 책임을 물어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이때 을사늑약과 헤이그 특사 파견도 모두 경운궁 안에 있는 중명전에서 이뤄졌다. 일본은 새로 즉위한 순종을 창덕궁으로 옮기도록 하였고 이때 순종은 아버지가 사는 경운궁의 이름을 덕을 누리며 오래 사시라는 뜻을 가진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경희궁은 광해군의 명으로 1617년에 착공하여 1623년에 완공했다. 조선 후기 동안 정궁인 창덕궁에 이은 제2의 궁궐로 양대 궁궐 체제의 한 축을 담당했다. 많은 왕들이 경희궁에서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거처하면서 창덕궁이 지닌 정궁으로서의 기능을 일정 부분 나눠서 수행했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경복궁의 동쪽 궁궐인 창덕궁과 창경궁을 지칭하는 '동궐'과 대비시켜 경복궁의 서쪽 궁궐을 뜻하는 ‘서궐’로 불렀다.
3. 서울의 랜드마크, 경복궁(景福宮)
경복궁은 서울시 종로구 사직로에 있는 조선의 궁궐 중 하나이며 조선의 법궁(정궁)이다. 사적 제117호로 지정받았다.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고 한양 천도를 단행하면서 조선 시대에 가장 먼저 지은 궁궐이다.
삼봉집에 나오는 다음의 글을 통해 경복궁뿐 아니라 한양도성 전반을 기획한 정도전의 생각과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다.
신이 깊이 생각해 보니 궁궐은 임금께서 신하와 더불어 국정에 대한 일을 하는 곳입니다. 온 세상이 우러러보는 곳이기에 신하와 백성이 함께 만드는 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궁궐의 제도는 웅장하고 존엄해야 하며 궁궐의 이름은 아름답게 지어 보고 듣는 이로 하여금 감동을 느끼게 해야 합니다.
전하께서는 왕위에 오르신 지 3년이 되던 해에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신 뒤 종묘를 세우시고 궁궐을 지으셨습니다. 이듬해(1395년) 10월 4일에는 전하께서 친히 곤룡포와 면류관을 착용하시고는 돌아가신 선왕후(목조, 익조, 환조와 그 후비들)를 새로 만든 종묘에 모신 뒤에 새로 지은 궁궐에서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푸셨습니다. 이 잔치는 조상신의 은혜에 감사드리고 후손의 복을 빌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날 술이 세 번 돌아간 뒤에 전하께서 신 정도전에게 이르셨습니다.
“지금 이곳(한양)으로 도읍을 정하고 종묘제례를 한 뒤 새 궁궐을 준공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신하들을 불러 잔치를 베풀었다. 경(정도전)은 마땅히 이 궁궐의 이름을 지어 조선과 함께 그 아름다운 이름이 영원하도록 하라.”
정도전은 시경(詩經) 주아(周兒) 편에 나오는 아래의 문구에서 2자를 따서 景福宮(경복궁)이라고 지어 올렸다.
旣醉以酒 (기취이주) - 임금이 내리신 술에 이미 취하고
旣飽以德 (기포이덕) - 임금의 큰 덕에 배가 부르다네
君子萬年 (군자만년) - 우리 임금 천만년 사시고
介爾景福 (개이경복) - 큰 복 누리시며 만수무강하옵소서
공자께서는 춘추(春秋)에서 백성의 힘은 귀한 것이므로 건축하는 데 쓰게 하는 것은 삼가라고 하셨습니다. 임금이 되어 백성의 힘과 노력을 빌려 안락을 취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러므로 전하께서 앞으로 넓은 이 궁궐에 거처하실 때에는 가난한 선비들을 감싸주시고 여름이 되어 궐 안에 서늘한 기운이 돌면 백성에게 서늘한 기운을 골고루 베풀어 주실 방법을 생각하십시오. 그렇게 만백성과 만조백관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실 생각을 하신다면 그들은 전하를 봉양하는 마음을 결코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경복궁은 이처럼 신진사대부가 계획한 궁궐이기 때문에 ‘검이불루 화이불치'(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라는 유교적 이념을 반영하였으며 이전 왕조들의 궁궐에 비해 화려한 장식 없이 수수하고 검소한 형태로 지어졌다.
경복궁의 입지 결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조선 건국 초 개성 수창궁에서 등극한 이성계는 조정 대신들과 천도를 결정하고 무학대사에게 도읍지를 찾아달라고 청했다. 무학대사는 예전부터 신령스러운 산으로 알려진 계룡산으로 내려가 산세와 지세를 살폈으나 아무래도 도읍지로는 적당치 않았다. 발길을 북으로 옮겨 한양에 도착한 스님은 봉은사에서 하룻밤을 쉬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 뚝섬 나루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니 넓은 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사방으로 지세를 자세히 살핀 스님은 그곳이 바로 새 도읍지라고 생각했다.
“음, 땅이 넓고 강이 흐르니 과연 새 왕조가 뜻을 펼만한 길 지로구나.”
무학대사는 흐뭇한 마음으로 걸어오는데 한 노인이 소를 몰면서 소리쳤다.
“꼭 무학 같구나. 왜 바른 길로 가지 않고 굳이 굽은 길로 들어서느냐?”
순간 무학대사의 귀가 번적 뜨였다. 고개를 들고 돌아보니 길 저쪽으로 소를 몰고 가는 한 노인이 채찍으로 소를 때리며 꾸짖고 있었다. 스님은 얼른 노인 앞으로 달려갔다.
“노인 어른, 지금 소에게 뭐라고 하셨는지요?”
“미련하기가 무학 같다고 했소.”
“그건 무슨 뜻의 말씀이신지요?”
“아마 요즘 무학이 새 도읍지를 찾아다니는 모양인데, 좋은 곳 다 놔두고 엉뚱한 곳만 찾아다니니 어찌 미련하고 한심한 일이 아니겠소.”
무학대사는 노인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스님은 공손히 합장하고 인사를 올리며 말했다.
“제가 바로 그 미련한 무학이옵니다. 제 소견으로는 이곳이 좋은 도읍지라고 보았는데 노인장께서 일깨워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더 좋은 도읍지가 있으면 이 나라 천년대계를 위하여 일러 주시기 바랍니다.”
노인은 채찍을 들어 서북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서부터 10리를 더 들어가서 주변 지형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시오.”
“노인 어른, 참으로 감사합니다.”
무학대사가 정중하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순간, 노인과 소는 온 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스님은 가벼운 걸음으로 서북쪽을 향해 10리쯤 걸었다. 그때 스님이 당도한 곳이 바로 지금의 경복궁 자리 근처였다.
“과연 명당이로구나.”
삼각산, 인왕산, 남산 등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땅을 보는 순간 무학대사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스님은 그 길로 태조와 만나 한양을 새 도읍지로 정하여 도성을 쌓고 궁궐을 짓기로 했다.
“스님, 성은 어디쯤을 경계로 하면 좋겠습니까?”
태조는 속히 대역사를 시작하고 싶었다.
그러나 입지선정 및 도성의 방향 등 여러 부분에서 무학대사와 신진사대부들의 의견이 갈렸다. 태조는 입장이 난처했으나 결국은 신진사대부들의 의견을 따르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무학대사는 홀로 탄식했다.
“억불의 기운이 감도니 이제 불교도 그 기운이 다해가는구나.”
그리고 노인이 무학대사에게 10리를 더 들어가라고 일러준 곳은 갈 왕자와 십 리를 써서 왕십리라고 불렀다. 일설에 의하면 소를 몰고 가다 무학대사의 길을 안내한 노인은 바로 풍수지리에 능했던 도선국사의 후신이라 한다.
경복궁은 조선이 건국된 지 3년이 지난 1394년 12월에 착공되어 1395년 9월 말에 1차 완공되었다. 흔히 비교되는 명나라의 자금성보다 먼저 지어진 궁전이다. 자금성은 1406년에 착공되어 1420년에 완공되었다. 처음 완공 당시 경복궁의 규모는 390여 칸이었는데 흥선대원군 중건 당시 규모가 7225칸이었다는 점을 보면 상당히 작고 조촐한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후 1399년 정종이 개경으로 천도하면서 4년 만에 경복궁은 빈 궁궐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후 1405년 태종이 다시 한양으로 천고를 단행했는데 태종은 경복궁으로 돌아오지 않고 창덕궁을 새로 건설하여 들어갔다.
태종은 꽤 솔직하게 ‘내가 무인년에 말하기 부끄러운 일을 했는데 어찌 차마 경복궁에 거처할 수 있겠느냐’며 거부하였다. 그러나 태종은 외국 사신 접대 및 국가의 큰 의례나 행사가 있을 때는 경복궁을 사용하였다. 또 태종 본인도 조선의 법궁은 경복궁이라 여겼고 본인이 계속 창덕궁에 거처한다면 후세 왕들도 경복궁에 거처하지 않을 수 있다고 우려하였다. 결국 태종은 경복궁으로 옮길 뜻을 밝히고 박자청에게 경복궁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추가적인 중수 공사를 명하였다. 1412년에는 연못에다가 어찌 건물을 올릴 수 있느냐는 신하들의 우려도 불구하고 경회루 건설을 지시했고 박자청은 이를 실현시켰다. 왕세자 양녕대군이 친필로 직접 경회루의 현판을 써서 태종을 기쁘게 한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이후 세종대부터는 경복궁은 다시 왕이 실제 거처하는 정궁으로서의 기능을 하게 된다. 세종은 상왕인 태종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주로 창덕궁에 거처했지만 태종이 승하한 후 세종은 경복궁 공사를 명하였고 집권 중기 이후부터는 거의 경복궁에 머물면서 정사를 돌봤다. 특히 비만 및 눈병으로 고생하던 후기에는 거의 경복궁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이처럼 경복궁은 세종대를 거치면서 제대로 궁궐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 조선 전기 내내 조선의 정궁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으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그 비극의 운명이 시작된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선조가 한양을 떠나자 도성은 혼란에 빠졌는데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들은 일본군이 입성하기도 전에 백성들의 손에 이미 모조리 불에 타 소실되고 말았다.
이후 한양으로 환도한 선조는 정릉동에 있던 월산대군의 사저(私邸)를 고쳐지어 임시 궁궐로 사용하였고 그곳을 정릉동 행궁이라 불렀다. 선조는 경복궁 대신 창덕궁 먼저 중건하도록 결정하여 1605년부터 창덕궁 중건 공사가 시작되었다. 선조는 경복궁 터가 너무 폐허가 되어 복구하는 데 엄청난 물자와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예측되자 결국 경복궁 중건을 포기하고 창덕궁을 먼저 중건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게 되었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즉위 후 중건된 창덕궁에 거주하면서 창경궁을 재건하였고 새로 경희궁과 인경궁을 짓는 등 여러 궁궐을 동시 다발적으로 지었지만 경복궁은 끝내 중건하지 않았다. 풍수지리적인 이유로 경복궁 중건을 일부러 피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경복궁은 조선 후기 내내 중건되지 못했고 궁궐의 터는 일반인 출입금지 지역으로 묶인 채 270여 년간 벌판으로 방치되고 있었다.
1864년 고종의 섭정 자격으로 정권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집권 이듬해인 1865년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경복궁 중건을 시작했다. 2년 후인 1867년에 마침내 경복궁이 중건이 완료되었는데 흥선대원군이 중건한 경복궁은 7225칸 규모였다. 경복궁 중건에 소요되는 재원은 당시 조선 1년 예산의 10배 정도 되는 막대한 금액이었으며 이를 조달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은 원납전을 걷고 당백전까지 발행하는 등 무리한 정책을 펼쳤는데 당백전은 인플레이션을 일으켜 조선 경제를 엉망으로 만들었고 이는 결국 그의 실각의 원인이 되었다.
당시 팔도에서 동원된 장정들이 일의 고달픔과 흥선대원군의 무리한 공사 강행에 따른 불만을 풍자한 노래가 있는데 바로 『경복궁 타령』이다. 중건 당시 상황들이 묘사되어 있다.
남문(南門)을 열고 파루(罷漏)를 치니 계명산천(鷄鳴山川)이 밝아온다
을축(乙丑) 사월(四月) 갑자일(甲子日)에 경복궁을 이룩하세
도변수(都邊手)의 거동을 봐라 먹통을 들고서 갈팡질팡한다
단산봉황(丹山鳳凰)은 죽실(竹實)을 물고 벽오동(碧梧桐) 속으로 넘나든다
남산하고 십이 봉(十二峯)에 오작(烏鵲) 한 쌍이 훨훨 날아든다
왜철죽 진달화 노간죽하니 맨드라미 봉선화가 영산홍이로다
우광쿵쾅 소리가 웬 소리냐 경복궁 짓는 데 회(灰)방아 찧는 소리라
조선 여덟도 유명탄 돌은 경복궁 짓는 데 주춧돌 감이로다
우리나라 좋은 나무는 경복궁 중건에 다 들어간다
근정전(勤政殿)을 드높게 짓고 만조백관(滿朝百官)이 조하(朝賀)를 드리네
석수장이 거동을 봐라 망망칠 들고서 눈만 꿈벅한다
경복궁 역사(役事)가 언제나 끝나 그리던 가속(家屬)을 만나나 볼까
춘당대(春塘臺) 연못에 노는 금잉어 태평성세(太平聖世)를 자랑한다
수락산 떨어져 도봉이 생기고 북악산 줄기에 경복궁 짓세
삼각산은 천년산(千年山)이요 한강수는 만년수(萬年水)라
한양조(漢陽朝)가 생긴 후에 경복궁을 이룩했네
광화문을 중심하여 좌우편에 십자각 섰네
북악산을 등에 지고 한강수를 띠하였네
광화문은 정문이요 북으로는 신무문(神武門)일세
동쪽에는 건춘문(建春門)이요 서쪽에는 영추문(迎秋門)일세
근정전은 정전(正殿)이요 강녕전(康寧殿)과 사정전(思政殿)이라
아미산(峨嵋山) 뒤의 함화당(咸和堂)은 향원정(香遠亭) 조망이 더욱 좋다
경회루(慶會樓)의 웅장함은 반천 년 역사를 자랑한다
북악산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경회루라
연꽃 우거진 향원지(香遠池)에 묘한 정자가 향원정(香遠亭)이라
흥선대원군이 이렇게 막대한 국력을 소모해 가면서까지 중건한 경복궁이지만 정작 고종은 중건된 경복궁을 좋아하지 않았다. 경복궁에 입주한 지 5년 만인 1873년에 고종은 아버지 흥선대원군 몰래 경복궁 북쪽 구석에 민가 형태의 건청궁을 지은 후 아관파천 때까지 거의 그곳에 거처했다. 1895년 을미사변이 벌어진 장소도 건청궁 안 곤녕합이다. 을미사변 후 고종은 경복궁을 버리고 러시아 대사관으로 피신을 하였으며 그 후 1897년 고종은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으로 환궁을 하였고 그해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환궁 당시 경운궁은 민가를 개조한 전각 두 채만 달랑 남아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고종은 1896년부터 1902년에 걸쳐 6년간 대대적인 공사를 벌였다.
한일합방 이후에는 식민지 조선의 사기를 꺾기 위한 총독부의 만행으로 인해 크게 훼손되었다. 일제는 우선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하며 동쪽 담장을 안으로 밀어 넣으면서 약 4000여 동의 건물을 없애 버렸고 이후 경복궁 내부 중앙 축선에 근정전과 광화문을 가로막는 형태로 조선총독부 청사 건물을 지은 뒤 광화문을 다른 자리로 옮겨버리기까지 했다. 이 외에도 수많은 전각들을 훼손하거나 통째로 일본으로 밀반출하는 등 일제강점기 내내 온갖 수난을 겪었다.
그리고 일제가 훼손한 공간들은 조선물산공진회나 다른 박람회들을 여럿을 개최하는 등 일종의 컨벤션센터로 이용하거나 일본식 사찰이, 이토 히로부미의 사당 등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일제강점기 때는 흥례문 터에 지어진 조선총독부 청사 및 집옥재 일대에 총독 관저의 경비를 맡은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집옥재 일대의 경우 광복 이후에도 이 잔재가 남아서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30 경비단 병력이 경복궁 내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는 1996년 30 경비단이 33 경비단과 통폐합해 제1경비단을 창설하고 부대를 이전하면서 해결되었다.
이렇듯 오랫동안 수난을 당하던 경복궁은 광복 50주년을 맞은 1995년 문민정부가 시행한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일환으로 비로소 재조명받게 된다. 문민정부는 과거사 잔재 청산을 내세우며 구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를 천명하였다. 총독부 건물은 건축 당시 동아시아에서 손꼽힐 수준의 건물이었기 때문에 철거에 대한 찬반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지만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연설을 하며 철거를 단행하였다.
“옛 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는 단순히 식민 잔재의 예행적인 청산에 그치는 것이 아닌 그것은 우리 모두의 의식 속에 남아있는 그릇된 역사의 잔재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뜻합니다.”
조선총독부의 첨탑은 천안 독립기념관으로 이동하였는데 그 보관 장소는 해가 지는 서쪽 그리고 지반으로부터 5미터 아래에 보관을 하고 있는데 이는 제국주의의 멸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4. 경복궁을 수호하는 여러 동물들
경복궁에는 동물을 비롯해 식물과 무생물 등 다양한 문양과 조각이 배치되어 있는데 실존 또는 상상 속의 동물들이 곳곳에 다양한 모습으로 배치되어 있어 보는 우리에게 웃음을 주면서 한편으로는 궁금증을 유발한다. 각각의 동물 문양에는 국가와 왕실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하고 왕의 상징인 궁궐을 수호해 달라는 염원이 담겨 있다.
이러한 염원은 입구인 광화문에서부터 시작되는데 바로 광화문 동쪽과 서쪽에서 출입자를 주시하며 바라보고 있는 해태이다. 해태는 상상 속의 동물로 중국의 요임금 시대에 태어났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모습은 마치 소와 닮았고 중국에서 처음 알려진 해태의 특징은 이마에 있는 커다란 뿔이었다. 그러나 상상 속의 동물인 만큼 시대마다 지역마다 외양에 대한 묘사가 다양하다.
해태의 가장 큰 특징은 그가 정의의 상징이라는 것인데 중국 문헌인 이물지(異物志)에는 "해태는 동북 변방에 있는 짐승이며 성품이 충직하여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면 바르지 못한 사람을 뿔로 받고 사람들이 서로 따지는 것을 들으면 옳지 못한 자를 문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러한 영향으로 조선 시대 법을 관장하는 기관인 사헌부의 수장 대사헌의 관복에는 해태 흉배가 새겨져 있었고 현재에도 국회, 대법원, 경찰청, 대검찰청, 사법연수원에도 해태상이 세워져 있다. 해태는 해치라고도 불리는데 이러한 이름을 사람들은 한자어를 한글로 풀어 ‘해님이 파견한 벼슬아치’라고도 불렀다.
특히 해태는 조선에서는 불을 막아주는 성스러운 동물로 잘 알려져 있어서 민간에서는 정월에 불을 다루는 부엌문에 해태를 그렸다고 전해지며 경복궁 역시 그러한 염원 때문인지 광화문 앞에 해태를 배치하였다. 정의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경복궁 앞의 해태는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막기 위해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관악산이 풍수지리상 그 능선 자락의 모양이 타오르는 형상을 한 불기운의 산이었는데 실제로 태조가 한양에 경복궁을 짓자 궁궐에 화재가 자주 발생하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 원인을 관악산으로 보고 이를 막기 위해 궁궐의 출입구에 해태상을 지었다는 이야기이다.
현재 광화문 앞에 놓인 해태는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세운 것이다. 이는 강한 왕실과 나라를 만든다는 사실을 표방하기 위함이고 더 나아가 세도정치 시기에 문란해진 법과 정의를 회복시키고 왕권을 회복하여 국가를 반석 위에 올려놓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보이고자 했다.
또한 해태는 경복궁이 왕과 왕실의 영역임을 표시하는 기능도 가지고 있다. 여기부터는 왕의 영역이니 아무리 고위 관료라도 해태 앞에서부터는 예의를 갖춰 말에서 내려 걸어가라는 일종의 하마비 같은 표지판의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런데 해태상을 보면 한결같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있는 모습인데 그 이유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주시하기 위함이다.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보다 고개를 약간 돌려서 바라보면 주시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으며 이렇게 하늘의 벼슬아치인 해태가 고개를 돌리고 쳐다보면 나쁜 마음을 품은 사람이 가슴이 뜨금했을 것이다.
광화문 양쪽의 해태는 모두 정면인 남쪽을 바라보며 궁궐 출입자를 경계하면서 온 세상의 불의를 지켜보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흥예문을 지나 근정문으로 가는 길에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이 다리는 영제교이다. 백성의 일상 공간과 임금의 공간을 구분해 주면서 동시에 연결해 주는 다리인데 이 영제교 양 옆의 석축 위에는 ‘천록’이라는 상상의 동물이 각각 2마리씩 엎드려 있으면서 사악한 기운이 다리를 건너지 못하도록 지켜보고 있다.
천록은 영원히 백가지 복을 부른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나쁜 기운을 제거하기 때문에 벽사(辟邪)라고도 불린다. 궁궐도 들어오려고 하는 나쁜 기운을 몰아내고 궐 안의 보물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앞서 말했듯이 경복궁 곳곳에는 수많은 신비의 동물들이 조선왕조의 권위와 안녕을 지키고 있는데 뭐니 뭐니 해도 그 중심에 있는 동물은 바로 용이다. 용은 천상의 용맹과 왕의 위엄을 갖추어주는 신비의 동물이며 바로 왕권의 상징이다. 이러한 용은 경복궁 여러 장소에서 볼 수 있다.
먼저 경회루 연못의 북쪽에 위치한 작은 정자 하향정 밑에는 용이 살고 있었다. 경회루가 연못이다 보니 바닥에 모래나 흙 등이 쌓이자 1997년 그것을 걷어내기 위한 공사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하향정 물밑에서 청동으로 만든 용이 발견되었다. 몸길이가 1미터 46센티미터이고 무게는 70킬로그램이 넘는 거대한 크기의 용이었다. 이 용은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당시 화재로부터 궁궐을 보호해 달라는 기원을 담아 1867년에 연못 아래에 가라앉혔다. 화재가 잦았던 경복궁을 보호하기 위한 염원을 비와 연결된 물의 상징인 용에게 담았던 것이다.
또한 흥선대원군은 근정정 지붕의 용마루에도 용 부적을 넣어두어 경복궁의 화기를 잡으려고 하였다. 근정전 내부에도 많은 용이 살고 있는데 근정전 중앙에 있는 왕이 앉는 자리인 용상에는 여러 마리의 황룡들이 둘러싸고 있다. 천장에는 더욱 특별한 용이 있는데 여의주를 가지고 놀고 있는 두 마리의 황룡으로 왕의 위계를 표현하는 발톱을 7개나 가지고 있어 칠조룡이라 부른다. 조선의 군주는 중국의 황제보다 작은 4개의 발톱만 사용할 수 있었으나 흥선대원군이 세도정치로 인해 땅에 떨어진 왕권을 회복하고 그 권위를 중국의 황제 이상으로 강화하려고 했던 의지가 반영되었다.
근정전을 지키고 있는 동물들에 대해서도 함께 알아보고 가면 궁궐을 더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다. 근정전 월대에는 난간을 두르고 사신과 해태상, 십이지신을 나타내는 동물들이 조각되어 있는데 앞에서 정면으로 바라볼 때 오른쪽에는 청룡, 왼쪽에는 백호, 앞쪽에는 주작이 뒤쪽에는 현무가 이 근정전을 지키고 있다.
청룡은 동서남북 중에서 동쪽을 지키는 영수(靈獸) 로서 계절로는 봄이며 나무의 신이며 색으로는 청색이다. 백호가 나타내는 성질은 쇠이고 그것은 해가 지는 서쪽이요 계절로는 추수하고 정리해야 하는 가을이며 색으로는 흰색이다. 주작이 나타내는 성질은 불이고 남쪽을 지키며 계절은 여름이며 색으로는 붉은색이다. 현무가 나타내는 성질은 물이고 북쪽을 지키고 있으며 색으로는 깊은 물이 나타내는 검은색이다. 그래서 네 방향을 지켜주는 사신상(四神像)이라고 부르며 각각의 방향에 따라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라고 부르고 있다.
또한 근정전 월대 난간에는 해로운 것을 막아주고 수호신 역할을 하는 십이지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 중 개와 돼지는 부정한 동물로 궁 출입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빠져 있다.
한편 근정전 월대로 오르는 길은 가운데 답도(踏道)와 양옆의 계단이 있는데 답도는 왕만이 지나다닐 수 있는 길이었으며 계단으로 되어 있지 않고 판석으로 되어 있었는데 이는 왕은 항상 가마를 타고 다녔기 때문이다. 답도 양쪽의 계단은 가마꾼들이 다니는 계단이었다. 답도의 판석에는 봉황이 새겨져 있는데 이 봉황이 나타나는 때는 태평성대를 상징하기 때문에 그런 이상적인 정치를 해줬으면 하는 마음을 새겨 넣은 것이다.
또 경복궁의 각 전각마다 동물 모양의 장식 기와가 놓여 있는데 이들 역시 궁궐에 불이 나지 않고 나쁜 기운이 들어오지 않도록 궁궐을 수호하고 있는 역할을 한다. 건물의 지붕 구조를 살펴보면 지붕 위 가장 높은 가로로 길게 늘어선 부분을 용마루라고 하고 용마루에서 수직으로 내려오는 마루를 내림마루라고 하며 또 내림마루에서 45도 각도로 내려오는 마루를 귀마루라고 한다. 용마루의 양쪽 끝에는 치미나 취두를 올리고 내림마루에는 용두를 귀마루에는 잡상을 올린다.
여기서 치미는 솔개의 꼬리 모양을 하고 있으며 용꼬리와도 같은 형상인데 주로 삼국시대에 주로 사용하였으며 고려시대에도 있었으나 조선시대에는 취두로 바뀌었다. 취두는 독수리 머리 모양을 하고 있으며 용의 형상과 같이 조각되었고 궁궐건물에만 사용되었다. 용두는 용의 머리 모양이고 용의 머리 모양으로 궁궐이나 왕릉의 정자각, 침전, 문묘, 행궁, 지방관아 등에만 사용되었고 일반 민가에서는 사용할 수 없었다.
잡상은 삼장법사를 시작으로 손오공, 저팔계 등 동물의 토우를 세워 놓은 장식 기와로 건물의 위엄을 표시하면서 동시에 화재나 액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잡상은 아무 데나 올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궁궐과 혹은 궁궐과 관련된 건물에만 올릴 수 있었으며 왕릉도 왕과 왕비가 계신 곳이니 정자각에 잡상이 올라간다. 흔치 않은 예로 남양주 흥국사 대웅보전과 공주 신원사 중악단에도 잡상이 올려져 있는데 이는 이곳이 왕실의 제사와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잡상은 송나라에서 유래가 되었는데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궁궐 건축에 유행하였다. 잡상의 수는 항상 홀수가 되도록 하는데 이는 짝수는 음의 성질을 가지고 있어 잡귀가 범접하기 쉽고 재앙이 따른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는 경복궁 경회루에 가장 많은 11개가 올려져 있다.
잡상의 다른 명칭은 '어처구니'인데 목수가 건물을 완성하고 마지막으로 올려놓는 ‘어처구니’를 깜빡 잊고 올려놓지 않아서 유래된 말이다. 기껏 잘 지어놓고 어처구니를 올리지 않으면 건축이 미완성이 되니 작은 것을 마무리하지 않아 다 해놓고도 욕을 먹는다는 의미이다. 아무리 건물을 잘 지어도 잡상이 올려지지 않은 건물은 완성된 건물이 아니다. 그래서 어처구니가 없다는 말은 다 해놓고도 마무리를 하나를 못해 생긴 어이없는 상황을 말한다.
근정전을 지키고 있는 동물들에 대해서도 함께 알아보고 가면 궁궐을 더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다.
5. 경복궁의 문 알아보기
광화문(光化門)은 경복궁의 남문이다. 처음 지어졌을 때의 이름은 정문(正文)이었다. 정문의 의미는 이 문을 통해서 나가는 임금의 명령이 백성에게 바르게 전달되어야 하고 이 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백성의 소리는 임금에게 바르게 전달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세종 때에 와서 ‘임금의 큰 덕(德)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의미의 광화문이 되었다. 그 뜻을 더 세부적으로 풀어보면 덕을 갖춘 자가 왕이 되면 그 은혜와 혜택이 온 나라에 비치게 된다. 즉 덕의 정치를 펼친다는 의미인데 덕으로 다스리면 백성들은 감화하여 스스로 다르게 된다는 생각을 반영한 것이다.
또한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은 석축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다른 궁궐의 정문이 목조로 이루어진 것과 비교가 되는데 그것은 바로 조선의 정궁 경복궁, 광화문에서부터 그 격조가 한 층 높음을 말해주고 있다.
1395년에 세워졌으며 2층 누각인 광화문 앞의 양쪽에는 한 쌍의 해태 조각상이 자리 잡고 있다. 광화문의 석축부에는 세 개의 홍예문(虹霓門, 아치문)이 있다. 가운데 문은 임금이 다니던 문이고 나머지 좌우의 문은 신하들이 다니던 문이었는데 오른쪽 문은 문신이 왼쪽 문은 무신이 출입했다. 광화문은 항상 개방되어 있던 것이 아니라 왕이 출입할 때에만 신하들도 이용할 수 있었다. 평상시 왕족들은 동쪽의 건춘문을 이용하였고 신하들은 서쪽의 영추문을 이용하였는데 통해 경복궁 내부 구성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알 수 있다. 동쪽의 건춘문을 들어오면 왕의 가족들이 생활하는 공간이 있고 서쪽의 영추문으로 들어오면 신하들이 근무하는 궐내각사로 구성되어 있다.
광화문의 가운데 문 천장에는 남쪽을 지키는 주작이 그려져 있고 오른쪽 문에는 기린이 왼쪽 문에는 현무가 그려져 있다. 오른쪽 문의 기린은 상상 속의 동물로 훌륭한 인재가 태어날 때 세상에 나타난다고 한다. 곧 국가에 훌륭한 인재들이 많아지기를 기대하는 바람이 담겨 있다. 왼쪽문의 현무는 무(武)를 상징하는 존재이므로 무신들은 이 문을 통해 출입하였다.
근정전으로 가기 위해 문 3개를 지나야 하는데 그중 첫째가 광화문이다.
건춘문(建春門)은 경복궁의 동문으로 만물의 기운이 움트는 ‘봄이 시작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건춘문은 주로 세자와 동궁 영역에 위치한 각사에서 일하는 신하들이 출입하던 문이다. 현재의 문은 고종 2년(1865년) 경복궁 중건 당시 건립된 것이다. 봄과 동쪽은 예로부터 세자를 뜻하는 말이었다. 건춘문 근처에 동궁전이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
영추문(迎秋門)은 경복궁의 서문으로 ‘가을을 맞이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건춘문과 대비되는 개념의 이름으로 서쪽 방위의 개념에 맞게 지어졌다. 이 문은 주로 문무백관이 출입하던 곳으로 특히 서쪽에 위치한 궐내각사에 근무하던 신하들이 많이 이용하였다. 현재의 문은 1975년에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복원된 것이다. 조선 중기 문신인 송강(松江) 정철의 관동별곡(關東別曲)에는 영추문이 다음과 같이 등장하고 있다. 문무백관들이 서문인 영추문으로 출입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江강湖호애 病병이 깁퍼 竹듁林님의 누엇더니,
關관東동 八팔百백里니에 方방面면을 맛디시니,
어와 聖셩恩은이야 가디록 罔망極극하다.
延연秋츄門문 드리다라 慶경會회 南남門문 바라보며,
下하直직고 믈너나니 玉옥節졀이 알패셧다.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병이 되어 창평에 지내고 있었는데,
임금께서 8백 리나 되는 강원도 관찰사의 소임을 맡겨 주시니,
아아, 임금의 은혜야말로 갈수록 끝이 없다
연추문으로 달려 들어가 경회루 남쪽 문을 바라보며
임금께 하직 인사를 하고 물러나니 옥절(관찰사가 지니는 옥패)이 앞에 서 있다.
- 정철의 관동별곡 중 -
신무문(神武門)은 경복궁의 북문이며 태조가 창건할 때는 없었으나 세종 15년(1443년) 궁성의 사대문을 맞추기 위해 건설하였다. 다만 풍수지리적인 문제 때문에 자주 닫혀 있었고 조선 시대에는 신무문 바깥으로 경복궁의 후원과 연결되었지만 청와대가 들어선 다음부터는 경호 문제로 비공개되었다가 2007년 9월 29일 건청궁 복원 공사 완료에 맞추어 45년 만에 민간인에게 개방했다.
동십자각(東十字閣)은 궁성의 동남쪽 모서리에 서있는 각루(角樓)인데 궁성 담장이 헐리면서 현재와 같이 길 한가운데 서있게 되었다. 동십자각은 서십자각과 함께 궁성 전면 양 모서리에 궁궐 안팎을 감시할 수 있도록 세운 시설이다. 현재는 동십자각만 보존되어 있고 서십자각은 일제강점기 때 철거되었다.
6. 경복궁의 관람순서 알아보기
한양도성 전반을 기획한 정도전은 경복궁을 설계할 때 남북을 큰 획으로 그어 그 중심축에 주요 건축물들이 늘어서게 배치를 하면서 3문 3조의 영역으로 구상하였다. 3문은 입구에서부터 정전인 근정전까지 거치는 광화문 흥례문 근정문 3개의 문을 의미한다. 3조는 외조, 치조, 연조로 구성되어 있는데 외조는 주로 외교업무나 왕실 의례나 행사가 이루어지는 영역으로 근정전과 경회루 영역이다. 치조는 왕이 실제 정무를 보고 받고 근무하는 영역으로 사정전 영역이다. 연조는 내전이라고 하여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데 강녕전과 교태전 영역이다.
경복궁 관람은 이와 같이 3조의 배치에 따라 관람 동선을 잡아서 계획하면 보다 재미있고 효율적인 관람을 할 수 있다.
정전인 근정전으로 가려면 3개의 문을 지나야 하는데 첫 번째 문이 광화문이다. 광화문에는 출입문이 3개가 있는데 가운데 문은 왕이 드나들던 어문이며 양옆의 동쪽 문으로 문관이 서쪽 문으로 무관이 각각 드나들었다. 가운데 문 천장에는 사신 중 남쪽을 주관하는 주작이 화려하게 그려져 있고 양쪽 문의 천장에는 각각 기린과 현무가 그려져 있다. 광화문 양옆으로는 동십자각과 서십자각이 있었으나 궁궐의 축소로 동십자각은 도로 한복판에 따로 떨어져 나간 채 외로이 서 있고 서십자각은 그 흔적조차 없어졌는데 일제가 1923년 9월 효자동으로 통하는 전찻길을 개설하면서 경복궁 서남쪽 모퉁이의 궁궐을 모두 헐어냈는데 서십자각도 이때 함께 철거되어 없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광화문 밖 남쪽으로는 정치와 행정의 중심축인 육조거리가 있었고 그 육조거리는 다시 경제의 중심인 운종가와 맞닿아 있었다. 이는 광화문이 한양의 정치와 경제의 중심축을 잇는 곳에 있음으로써 당시의 왕조사회에서 궁궐이 갖는 위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광화문 앞 육조거리는 궐외각사(闕外各司)로 동쪽에 의정부, 이조, 한성부, 호조, 기로소(耆老所)가 있었고 서쪽엔 예조, 병조, 사헌부, 형조, 공조, 장예원이 있었다. 길은 넓혀지고 변하더라도 그 본래 운명은 변하지 않는가 보다. 광화문 앞에는 현재도 정부서울청사와 외교부 청사 그리고 외국 대사관들이 있으면서 정치적 상징성을 이어오고 있다.
광화문으로 들어가서 조금 걸어가면 바로 두 번째 문인 흥례문(興禮門)을 볼 수 있다. 흥례의 의미는 ‘예를 일으킨다’인데 이 문의 원래 이름은 홍례문(弘禮門)이었는데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당시의 청나라 건륭제의 이름이 홍력(弘曆)이어서 홍(弘)을 피하기 위해 흥례문으로 바뀌었다. 중국 황제의 이름을 피하고자 한 것도 있지만 당시 열강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조선의 위상을 갖고 싶어 했던 흥선대원군의 의지가 담겨 있기도 하다. 지금의 흥례문과 그 권역은 조선총독부 건물이었던 옛 중앙청을 철거한 다음 2001년에 복원되었다.
흥례문에 들어서면 동서로 물길이 지나는데 이를 금천(禁川)이라 부르고 그 격에 맞는 치장을 갖춘 특별한 돌다리를 세운다. 금천 위에 세운 다리를 일반적으로 금천교(禁川橋)라 부른다. 경복궁의 금천교는 영제교이고, 창덕궁은 금천교, 창경궁은 옥천교라 부른다.
왕의 신성한 공간과 외부 공간을 구분 짓는 물길을 두고 이를 금천이라 한 것이다. 경복궁의 영제교는 잡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사람들이 궁 안으로 들어가기 전 마음을 바르게 가다듬으라는 의미의 경계 지점에 세운 금천교이다. 궁궐에 들어오는 관리들 역시 금천교를 지나면서 그 아래 맑은 물에 몸과 마음을 정화한 다음 국정을 논하라는 뜻으로도 보인다.
흥례문을 바라보며 왼편으로 난 하나의 문이 있는데 이 문은 유화문(維和問)이다. 유화란 ‘온화함과 조화로움’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 문은 서쪽의 궐내각사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흥례문 일대에서는 조회뿐만 아니라 국문이나 교서 반포 등이 빈번하게 이루어졌으므로 궐내각사와 빈청의 관원들이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는 문이 필요했는데 그 역할을 한 것이 유화문이다.
유화문 오른쪽으로는 두 칸짜리 작은 전각이 하나 있는데 이곳은 기별청(奇別廳)이다. 기별이란 ‘소식을 알린다’는 의미이며 기별청은 왕명을 출납하거나 승정원에서 매일 아침 적어서 알리는 관보인 기별지를 작성하던 곳이다. 기별지에는 다양한 소식들이 실렸는데 주로 임금이 받은 상소문에 대한 내용과 그에 대한 답변 조정의 인사이동 소식과 과거 시험 날짜 등이 적혀있다. 정보의 전달이 극히 제한되었던 조선시대에 기별지는 조정의 소식을 알 수 있는 귀중한 매체였다.
흥례문을 바라보며 오른편 행각 끝으로는 덕양문(德陽門)이 있으며 덕양은 ‘덕이 밝다’라는 의미이다.
흥례문 권역을 지나 다시 세 번째 문인 근정문(勤政門)을 통해 들어가면 바로 근정전(勤政殿)이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근정은 ‘정치를 부지런히 함’을 의미한다. 정도전은 ‘치세가 이루어지려면 정사를 부지런하게 해야 한다’는 뜻을 여러 경전의 표현을 빌려 작명하였다. 정도전이 태조에게 올린 근정(勤政)의 뜻은 다음과 같다.
근정전과 근정문에 대하여 말하자면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부지런하지 못하면 폐하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작은 일도 그러한데 하물며 정사는 어떻겠습니까? 『서경』에 말하기를 ‘경계하면 근심이 없고 법도를 잊지 않는다’고 하였고 또 ‘안일과 욕심으로 제후들을 가르치지 말고 삼가고 두려워하십시오. 하늘의 일을 사람들이 대신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순임금가 우 임금의 부지런한 바입니다. 또한 ‘아침부터 해가 중천에 뜰 때와 날이 기울어질 때까지 밥 먹을 겨를도 없이 만백성을 다 즐겁게 하셨다’ 고 하였으니 이는 문왕의 부지런한 바입니다. 임금의 부지런하지 않을 수 없음이 이러합니다. (중략)
그러나 임금의 부지런한 것만 알고 그 부지런할 바를 알지 못한다면 그 부지런한 것이 너무 복잡하고 너무 세밀한 데에만 흘러서 볼 만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선대의 유학자가 말하길,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낮에는 어진이를 찾아보고 저녁에는 법령을 닦고 밤에는 몸을 편하게 한다.’는 것이 임금의 부지런한 것입니다. 또 말하기를 ‘어진이를 구하는 데에 부지런하고 어진이를 쓰는 데는 빨리 한다’ 했습니다. 신은 이로써 이름 짓기를 청하옵니다.
그리고 근정문 양 옆으로 작은 문이 두 개 있는데 동쪽의 작은 문은 일화문(日華門)이며 ‘해의 정화’를 의미한다. 이 문은 문반이 근정전을 출입할 때 이용하였다. 서쪽의 작은 문은 월화문(月華門)인데 월화는 ‘달의 정화’를 의미하며 이 문으로는 무반들이 출입하였다.
근정문 동쪽 행각에는 열세 개의 주련이 걸려 있는데 여기서 주련이란 좋은 글귀나 시 등을 기둥이나 벽에 세로로 써 붙이는 것을 말하며 보통 하얗게 만든 판자에 연꽃이나 당초무늬를 새기고 그 안에 글귀를 적는다. 근정문의 주련 중 아홉 번째와 열 번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休戚與同 忠愛冞篤(휴척여동 충애미독)
기쁨과 슬픔을 더불어 함께 하면 충성심과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 돈독해지며,
恬嬉是戒 文武俱全(염희시계 문무구전)
편하게 놀고 즐기는 것을 경계하면 문(文)과 무(武)가 두루 온전해진다.
문무 대신들의 안일함을 질책하며 임금과 신하가 국가를 올바로 경영하는 데 갖추어야 할 덕목을 설명하였다.
근정전은 왕의 즉위식이나 대조회와 같은 국가의 공식행사가 거행되던 장소이다. 근정전의 앞마당은 전정(殿庭)이라고 불리며 전체가 박석으로 갈려있다. 사방을 행각으로 둘러쌓고 북쪽 한 자락에 근정전을 자리 잡으며 넓은 마당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마당에는 중앙의 어도를 중심으로 하여 동쪽에는 문반의 품계석, 서쪽에는 무인의 품계석이 놓여 있어 행사 때 양반의 문무백관들이 자신의 품계에 맞게 도열하였다. 그리고 근정전의 뒤쪽은 마치 배경으로 가져다 놓은 듯이 인왕산과 북악산이 병풍을 쳐 놓은 것처럼 받쳐주고 있다. 이처럼 자연의 경치를 빌리는 것을 차경(借景)이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자연을 가지려 하지 않고 빌리는 것이다.
근정전 마당은 조정(朝廷)이라 부르는데 조정에는 거칠게 떼어낸 돌 박석(薄石)이 바닥 포장재로 깔려있다. 근정전의 마당에 깔린 박석은 투박하게 다듬어서 언뜻 보기에도 상당히 울퉁불퉁하고 거친 느낌이다. 제대로 마무리를 한 것 같지 않아 혹자는 부실공사가 아니냐는 핀잔을 줄 수소 있겠지만 이 거친 마감마저도 의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매끄럽게 다듬질한 석재 표면은 보기에는 깔끔해 보일 지라도 장시간 야외에서 진행하는 행사의 경우 사람들은 햇빛의 반사로 인한 눈부심으로 몹시 지치게 된다. 박석의 거친 마감은 이런 자연현상에 대한 과학적인 배려로 빛의 되쏘임 현상을 차단하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표면이 거칠어 미끄러운 가죽신을 신은 관리들이 미끄러지지 않게 해 주었으며 비가 오면 자연스럽게 배수가 되도록 눈에 띄지 않는 지표면의 경사를 두고 포장되었다.
비 오는 날 근정전 마당 박석 위로 쏟아지는 물길을 보면 일제히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 양 끝의 수구로 빠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박석의 자연스러운 형태와 여러 기능들은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했던 조선의 건축에 어울리는 훌륭한 재료였다. 화강암을 거칠게 떠내어 깔아놓은 박석이 지니는 자연스러운 돌 맛이 얼마나 과학적이고 세련되었는지는 근정전 조정에서만 느껴 볼 수 있다.
근정전은 정면 5칸, 측면 5칸, 팔작지붕을 얹은 다포식 건물이며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근정전 전각은 2층의 월대위에 우뚝 솟아있어 더욱 웅장하고 위엄 있어 보인다. 월대의 정면 중앙계단에는 담도를 위, 아래 모두 설치하였다. 답도 양 옆으로는 임금만 내디딜 수 있는 디딤돌 계단을 놓고 그 옆의 소맷돌에는 길게 엎드려 있는 형상의 해태를 배치하고 있다. (이 구역은 출입금지 표시가 되어 있어 있다.) 답 도는 디딤돌 사이에 비스듬히 내리막길로 끼워져 있고 그 안에는 구름 속에서 노니는 봉황을 그리고 각각 사각의 귀퉁이에는 당초문양을 넣었다. 당초는 덩굴식물로 봄이 되면 새 순을 내고 무한히 뻗어나가는 형상은 왕조의 번영을 기원하는 문양이다. 월대위에는 사신상, 12지신, 해태 등이 조선 왕실의 상징인 근정전을 수호해주고 있다. 사신상과 12 지신상에 대한 이야기는 위에서 했으니 생략하도록 하자. 남쪽 동서 모퉁이에는 궁궐을 지키는 해태가족이 조각되어 있는데 그 모습이 아주 재미있게 표현되었다. 암수 한 쌍이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며 각자 자기 위치에서 왕을 호위하는 근위병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으며 어미를 따라 나온 새끼는 어미 배에 찰싹 붙어 있는 앙증맞은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이 나라 백성들은 물론 짐승까지도 대를 이어 임금과 궁궐 지키겠다는 충성스러운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조각이다.
근정전뿐 아니라 경복궁의 모든 동물상들이 해학적이고 자칫하면 우스꽝스럽게 표현되었는데 당시 석공의 뛰어난 센스와 재치를 엿볼 수 있다. 근엄하고 삼엄하기만 했던 궁궐에서 이러한 해학적 요소를 허락했다는 것에서 조선왕조의 너그러움을 헤아릴 수 있는 대목이다.
근정전 천장 한복판에는 여의주를 놓고 노닐고 있는 두 용이 그 웅혼한 기상을 드러내고 있다. 금박을 입힌 목조각으로 발톱이 일곱 개인 칠조룡(七爪龍)은 근정전이 무소불위의 지존의 왕이 주관하는 공간임을 말해 주고 있다.
용은 왕의 지위를 상징하는 최고의 덕목을 고루 갖춘 존재이며 왕 그 자체이다. 전설에 의하면 용은 모두 81개의 비늘을 몸에 지니고 있는데 그 외에 턱밑에 거꾸로 나 있는 비늘 한 개를 역린이라고 부른다. 영화로도 제작된 적이 있었는데 역린과 관련해서는 전국시대의 유명한 법가 사상가인 한비자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 쓴 글을 접한 진시황은 “그를 만날 수만 있다면 한이 없겠다.”라고 할 만큼 뛰어난 인물이었다. 지금도 그가 쓴 글이 전해지고 있는데 책의 이름은 『한비자』이다. 그 가운데 역린과 관련된 글이 있는데 글의 소제목은 세난(說難)이다. 유세의 어려움이라는 뜻인데 글을 읽어보면서 뜻을 헤아려 보도록 하자.
송나라에 부자 하나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큰 비가 내려 담이 무너졌다. 그러자 그의 아들이 말했다. “담을 고치지 않으면 도둑이 들지 모릅니다.” 잠시 후 이웃사람이 와서 같은 말을 했다. “빨리 고치십시오. 도둑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날 밤 도둑이 들었다. 그러자 부자는 자신의 아들에 대해서는 판단력이 뛰어나다고 여긴 반면 충고를 해 준 이웃에 대해서는 의심을 품었다.
관기사와 이웃사람의 말은 모두 맞는 것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말 때문에 화를 입었으니 사실을 정확히 판단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 사실을 어떻게 전달하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옛날 미자하란 미소년이 위(衛) 나라 왕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어느 날 어머니의 병이 위중하다는 말을 들은 미자하는 임금의 명을 사칭하여 임금의 수레를 타고 집에 다녀왔다. 위나라 법에 따르면 이는 다리 절단에 해당하는 죄였다. 그러나 후에 이 사실을 안 왕은 이렇게 말하였다. “미자하의 효성이 얼마나 지극한가! 그는 자신의 다리보다 어머니를 더 중하게 여겼도다.” 또 어느 날인가는 임금이 복숭아밭에 산책을 갔는데 복숭아 하나를 먹던 미자하가 나머지를 왕에게 바쳤다. 그러자 왕이 말했다. “미자하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하구나. 자신이 먹던 것이란 사실조차 잊고 내게 바치다니!”
그 후 세월이 흘러 미자하의 용모가 쇠하고 임금의 사랑 또한 식게 되었다. 그러자 왕은 이렇게 말하였다. “미자하는 내 명령을 사칭하고 내 수레를 훔쳐 탔을 뿐 아니라 제가 먹던 복숭아를 나에게 준 녀석이다. 용서할 수 없다.”
미자하의 행동은 처음과 나중이 다르지 않았으나 처음에는 칭찬을 받았고 후에는 벌을 받았으니 이는 군주의 사랑이 변한 까닭이다.
신하가 군주의 총애를 받을 때는 그의 지혜 또한 군주의 마음에 들 것이지만 총애가 사라지고 나면 뛰어난 지혜마저도 벌을 받게 된다. 왕에게 유세를 하고자 할 때는 우선 왕의 마음을 살펴야 한다. 용은 길들이면 타고 다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목에는 역린(逆鱗)이라 해서 거꾸로 난 비늘이 있으니 그것을 만지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죽음에 이르게 된다. 군주에게도 역린이 있으니 그에게 유세하고자 하는 자는 역린을 건드리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그렇게만 한다면 유세는 대체로 성공할 것이다.
근정전의 어좌 위에는 사찰에서 불상의 머리 위에 설치된 것과 비슷한 구조물이 있는데 이를 닫집이라고 부른다. 왕권의 존엄을 나타내기 위해 설치하는데 닫집의 헛기둥에는 연봉이 거꾸로 매달려 있다. 이는 연봉이 물에 잠긴 형상으로 화재를 예방하고자 하는 의미가 있다. 닫집의 보개 천장에도 한 쌍의 황룡이 조각되어 있다.
근정전의 용상은 북쪽 중앙에 아주 높게 설치되어 있고 어좌에 오르는 계단은 앞뒤 좌우 모두 4개이다. 어좌는 용을 조각하고 금박을 올려 화려하게 꾸미고 어좌 뒤에는 역시 용, 연꽃, 모란을 투각한 나무로 만든 삼곡병(三曲屛)으로 치장한다. 그리고 그 뒤에 일월오봉병이 둘러지는데 그림은 일월오악도(日月五嶽圖)로 불리기도 한다. 푸른 하늘의 왼편에 흰 달이 오른편에는 붉은 해가 다섯 개의 봉우리를 비추고 있고 붉은 줄기의 소나무와 양쪽 계곡에서 쏟아지는 힘찬 폭포가 물보라를 만들고 산 아래에는 넘실대는 파도가 펼쳐져 있다. 일월오악도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코스인 사정전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그리고 궁궐을 다니며 지붕 쪽 처마 밑에 그물이 걸려 있는데 이를 ‘부시’라고 한다. 최근 설치를 한 것이 아니라 옛날부터 새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사용하였다. 새의 배설물은 미관상으로도 좋지 않지만 강한 산성이라 목조 건축인 궁궐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설치하였으며 이런 그물을 치기 힘든 공간에는 ‘오지창’이라는 창을 설치하여 새들이 앉는 것을 막았다.
근정전을 뒤로하고 다음 코스인 사정 전으로 이동하여 보자. 근정전 북쪽 담장이 곧 사정전의 행각이다. 사정전(思政殿)은 임금이 일상생활을 하며 정사를 돌보고 신하들과 함께 경전을 강론하는 편전(便殿)이다.
이곳 사정전 마당에서는 세종이 상왕이었던 태종과 함께 요즘의 골프와 비슷한 타구를 치며 즐거운 여가를 보낸 곳이기도 하지만 한때 비극의 현장이기도 하였다. 바로 1456년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던 박팽년,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이 세조에게 친국을 당하기도 한 현장이다.
또한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는 세조가 성삼문과 박팽년을 친국하는 내용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성삼문과 박팽년은 세조에게 받은 녹을 먹지 않고 창고에 쌓아 두었는가 하면 세조에게 ‘나으리’라고 불러 세조의 분노를 유발하였으며 박팽년은 장기에 신(臣)이라는 글자를 사용하지 않고 비슷한 글자인 거(巨) 자로 대신 썼다고 한다. 그렇게 단종 복위 운동에 나섰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은 모두 13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6명만 사육신으로 부른다.
사정전이란 이름 역시 정도전이 지었으며 ‘선정(善政)을 생각하다’라는 의미이다. 정도전이 태조에게 올린 뜻풀이는 다음과 같다.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얻을 수 있고 생각하지 않으면 잃어버리는 법입니다. 대개 임금은 한 몸으로써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계시지만 수많은 백성들은 슬기롭고 어리석고 현명하고 불초(不肖)한 자들이 섞여 있고 번거로운 수많은 일들은 옭고 그르고 이롭고 해로운 일들이 섞여 있어서 임금이 된 이가 만일에 깊이 생각하고 세밀하게 살피지 않으면 어찌 일의 마땅함과 부당함을 구별하여 처리하겠으며 사람의 착하고 착하지 못함을 알아서 등용하거나 퇴출할 수 있겠습니까? (중략)
『서경』에 말하기를 ‘생각하면 슬기롭고 슬기로우면 성인이 된다.’ 했으니 생각이란 것은 사람에게 그 쓰임이 지극한 것입니다. 이곳에서 매일 아침 정사를 돌보시고 온갖 보고문이 올라오면 결단을 내리셔서 지휘하시는 데 더욱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 신은 사정전(思政殿)이라 이름 짓기를 청합니다.”
통치에는 연습시간이 없다. 통치자의 결정은 작은 것이라도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고 백성의 삶을 결정하기 때문에 통치자는 늘 생각하고 늘 깨어있어야 하며 늘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정전의 이름을 생각하며 우리도 한 가정의, 직장의,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맡은 위치와 역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 좋겠다.
사정전과 관련하여 세종의 일화를 하나 살펴보면 사정전에서는 매일 새벽 3~5시 사이에 ‘상참(常參)’이라는 어전회의가 열렸는데 세종은 과중한 업무에도 불구하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상참에 참석했다고 한다. 어느 날 우의정 류관이 “주상께서 매일 회의에 참석하시느라 피곤하실 터이니 하루 걸러 참석하시는 것이 어떠하온지요?”라고 여쭈었더니 세종은 “우의정께서 매일 입궐하기 힘드신가 본데 앞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기 위해 오시려거든 미리 다른 사람을 시켜서 알리도록 하오”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연산군 때에는 상참과 경연이 잠시 폐지되기도 하였다. 통치에는 연습시간뿐 아니라 휴일이나 일체의 게으름도 없어야 함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사정전의 북쪽에는 임금의 자리인 어좌가 있고 어좌 뒤로 일월오봉병이 놓여 있는데 이는 일월오악도를 병풍처럼 둘러놓았음을 말한다. 이 그림에서 해는 왕을 달은 왕비를 상징하고 오악은 국토를 상징한다. 조선시대 오악은 중앙의 북한산, 동쪽의 금강산, 서쪽의 묘향산, 북쪽의 백두산, 남쪽의 지리산을 말한다. 산봉우리 사이에서 쏟아지는 물은 백성을 상징하는데 ‘백성은 물과 같다’라는 말이 있다. 즉 평안하게 해 주면 배를 잘 떠다니게 하지만 화나게 하면 배를 뒤집어 버릴 수도 있다는 뜻이다. 유교적 관점에서 임금이 백성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주고 있다. 해와 달과 산봉우리 그리고 물은 국가를 상징하고 있으며 이러한 국가가 소나무와 같이 변치 않고 항상 푸르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이러한 일월오봉병은 정전의 어좌 뒤에만 설치되는 것이 아니고 왕의 집무실인 편전이나 창덕궁의 신선원전 감실 등 왕을 모시는 전각에 늘 설치되었고 왕이 궁 밖으로 행차할 때도 따라다녔다.
어좌 위로는 운룡도(雲龍圖)가 걸려 있다. 신령한 용이 구름을 뿜어내고 있는 그림인데 용이 뿜어내는 구름은 용 스스로의 능력 때문이며 이 신령스러운 구름으로 인해 용은 더욱 영묘(靈妙)해진다. 이 의미를 해석해 보면 현명한 임금이 있음으로 해서 어진 신하들이 있을 수 있고 또 어진 신하들이 있음으로 해서 임금은 더욱 훌륭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왕권과 신권이 조화로워야 함을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근정전이 국가의 대사나 의식을 치르는 곳이었다면 사정전은 왕이 평상시 거처하며 정사를 보살피는 편전이다. 근정전 뒤 사정문을 들어서면 한가운데 있는 건물이며 사정전 동쪽에는 만춘전이 서쪽으로는 천추전이 있는데 이 건물들은 경복궁 창건 당시 지어졌으나 명종 때인 1553년에 화재로 인해 소실되어 재건하였는데 이후 임진왜란 당시 모두 불탄 것을 고종 때인 1867년 경복궁 중건 때 함께 중건하였다.
사정전의 동편 즉 오른쪽에는 만춘천이 있고 서편 즉 왼쪽에는 천추전이 있다. 여기서 만춘(萬春)은 ‘만년의 봄’이라는 뜻이며 천추(千秋)는 ‘천년의 가을’이라는 뜻이다. 이 두 전각은 사정전의 보조적 기능을 가진 건물로 사정전에서의 공식적인 정무를 보는 반면에 만춘전과 천추전은 임금이 편하게 신하들과 만나 나랏일을 의논할 때 주로 이용하는 작은 편전의 역할을 하였다. 또한 사정전에는 없는 온돌이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추운 겨울에는 임금이 이곳에서 정사를 돌보고 경연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천추전은 세종이 집현전 학사들과 훈민정음을 창제하느라 고심하던 곳이며 과학자들이 천체의 현상을 관찰하는 간의와 천체의 위치를 관측하는 혼천의 그리고 해시계인 앙부일구와 물을 이용하여 스스로 시간을 알려주는 자격루, 비의 양을 측정하는 측우기 등을 만든 곳이기도 하다.
사정전의 서편 즉 왼쪽 행각에는 두 개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용신당과 협선당이다. 용신(用申)은 ‘써서 펼친다’는 뜻으로 재능 있고 어진 신하들의 힘을 활용하여 선정을 이룬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협선(協善)은 ‘임금과 신하가 서론 선(善)을 돕는다.’는 의미로 선(善)이 정치의 중요한 바탕임을 드러내고 있다.
사정문(思政門)은 사정전의 남쪽에 있는 출입문으로 경복궁을 중건할 때 만들었으며 3칸으로 되어 있는데 임금은 가운데 문으로 통행을 하였으며 신하들은 양쪽 문을 이용하였다. 사정문 좌우로 배치된 행각에는 서쪽부터 천자문의 순서대로 천자고(天字庫), 지자고(地字庫), 현자고(玄字庫), 황자고(黃字庫), 우자고(宇字庫), 주자고(宙字庫), 홍자고(洪字庫), 황자고(荒字庫), 일자고(日字庫), 월자고(月字庫)의 순서로 배치되어 있다. 이곳은 임금에게 필요한 물품들을 보관하던 창고 기능을 한 것으로 보이며 현재는 창고의 모습은 없고 명패만 붙어 있다.
사정문 행각을 따라 오른편 끝으로 가면 작은 문이 하나 나 있는데 사현문이다. 사현(思賢)은 ‘군주가 어진이 얻기를 생각한다.‘ 는 의미로 군주의 정치란 독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명한 자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져야 한다는 유교의 일반적 사고를 잘 드러내고 있다.
사정전 오른편의 행각 북쪽에는 또 하나의 문이 있는데 연태문이다. 연태(延泰)란 '태평을 맞이한다.‘ 는 뜻이다. 사정전을 떠나기 전에, 조선 왕조가 50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이어질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인지 잠시 생각해 보면 그것은 바로 조선 왕조 내내 치열하게 이루어졌던 경연(經筵)과 사관(史官)들의 투철한 직업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경연은 고려부터 시작하여 조선 시대까지 임금이 유학의 경서를 읽고 연구하고 더불어 신하들과 국정을 협의하던 행사로 쉽게 말하면 임금이 신하들이랑 통치에 필요한 유학의 내용을 토론하는 행사이다. 즉 유교 경전(經典)을 공부하는 자리라는 뜻인데 고려 시대에는 서연(書筵)이라고 칭했으나 공양왕 때 경연으로 명칭이 바뀌고 이것이 조선 시대까지 계승되었다. 조선 시대 서연이란 이름은 세자를 교육하는 자리의 이름이 되었고 담당하는 관리들은 시강원이라고 불렀다.
경연은 그 특성상 대부분이 신하가 군주에게 유교 경전을 '가르치는' 형태로 이루어졌고, 그 과정에서 군주의 실책이나 이후의 정책 계획에 대한 비판이 가해졌다. 군주로서는 경연 자체의 가치를 무시할 수 없었으므로 이 비판을 가급적 수용해야 했고 이를 통해 왕권과 신권이 조화되는 효과가 일어났다.
그래서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던 태조, 태종, 세조, 연산군, 광해군은 경연에 참석하기 싫어하였다. 반면 경연을 좋아하던 왕들도 있었는데 세종과 영조, 정조이다. 세종은 즉위 기간 동안 경연 횟수가 600회가 넘었을 정도로 경연을 즐겼으며 게다가 가르치는 입장인 신하들이 오히려 쩔쩔 멜 정도로 학식이 뛰어났다. 정조 역시 경연을 좋아하였는데 재위 5년부터는 현저히 줄기 시작한 경연은 마침내 16년 이후로는 사실상 폐지되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더 이상 배울 게 없어서였다. 정조는 젊은 나이에 이미 경학과 문장에서 따라 올 사람이 없어 경연을 하면 정조가 신하들을 가르치는 일이 더 많았다. 따라서 정조는 경연에 흥미를 잃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는 경연을 사실상 폐지하고 자신이 직접 중·하급 관리를 가르쳐 발굴하는 초계문신제를 펼쳤다.
경연에 사용된 주요 교재는 사서오경과 역사서를 중심으로 제왕학에 도움이 되는 책들이었다. 교재들의 사용 빈도는 왕의 선호도에 따라 조금씩 달랐으나 대개 사서와 오경은 거의 모든 왕조에서 골고루 사용되었다. 또한 당나라 왕조의 기틀을 마련한 태종 이세민의 정치 철학이 담겨 있는 정관정요(貞觀政要), 조선 역대 선왕들의 행실 중 모범이 될만한 사실만을 추려 모아 편찬한 역사책인 국조보감(國朝寶鑑), 11세기 중국 북송대의 정치가 사마광이 주도하여 편찬한 역사서인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이 사용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세조는 자신은 경연을 폐지했지만 성균관 유생들과 무신들에게는 끊임없이 배울 것을 권하면서 "유생이 글만 읽으면 약해서 뭐에 쓰고 무신이라고 공부 안 하면 금수와 뭐가 다르냐?"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물론 신하들 역시 모두 경연을 좋아한 건 아니었다. 행정업무를 보는데도 시간이 빠듯한데 그 와중에 경연을 제대로 준비 못 했다가는 논박당하기 때문에 따로 시간을 내어 공부를 해야 했기 때문에 당연히 여유시간은 없어졌다. 현대 직장인들이 회의시간을 길게 보내는 걸 싫어하는 이유와도 같다.
조선 시대에는 전직 관원도 있었지만 겸직 관원도 있었다. 예문관의 봉교 2명, 대교 2명, 검열 4명이 춘추관의 관원을 겸하여 매일매일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였는데 이들 8명의 관원을 ‘사관(史官)’이라고 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역사를 중요시해서 이 직책 또한 중요시되었다. 보통 사관은 춘추관의 관원과 예문관 한림이 겸직하는데 실력과 가문이 두루 좋은 인재를 뽑았다. 젊은 사관들은 자부심과 사명감이 투철해 자연히 왕과 권력자들에게는 껄끄러운 존재였으며 수난도 많이 당했다. 태종실록에는 태종과 사관 민인생과 나누었던 다음과 같은 대화가 전해지고 있다.
태종 : “史筆宜直書. 雖在殿外, 豈不得聞予言?”
"사관의 붓은 곧게 써야 한다.
비록 대전 밖에 있더라도 내 말을 듣지 못하겠는가?"
사관 민인생 : “臣如不直, 上有皇天.”
"신이 곧게 쓰지 않는다면 신의 위에 하늘이 있습니다."
태종이 왕이 평소에 기거하는 편전까지 사관이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자 이를 두고 태종이 민인생과 논쟁을 한 기록이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민인생은 기록을 하려고 고위 관료만 참석할 수 있는 연회 때 몰래 따라가고 얼굴을 가리고 태종의 사냥을 쫓아가는 등 직업정신이 투철한 인물이었다. 그러다가 하도 당한 태종이 편전 출입을 허락하지 않아 휘장 안에 숨어 엿본 것이 발각이 나서 귀양을 가게 되면서 결국 그 전설은 막을 내린다. 조선왕조실록과 사관들의 비범함을 설명하기 위해 가장 많이 인용되는 기록인 '왕께서 말에서 떨어졌는데 사관에게 이를 쓰지 말라고 하였다 ‘는 기록도 바로 태종 때 기록이다
사관의 기록인 사초는 실록 편찬 전까지는 그 누구도 심지어 왕이라고 해도 열람할 수가 없었다. 연산군이 무오사화 때 이를 읽어보고 사관들을 대거 숙청하였던 이류로 사초를 열람하는 것은 '폭군이나 하는 행위'로 여겨졌다. 때문에 연산군 이후에는 실록 얘기를 꺼내기만 해도, '연산이다. 연산이 했던 짓이다!' 라며 치를 떠니 감히 임금들이 행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 연산군도 사초를 자신이 직접 두 눈으로 읽어본 것은 아니고 사초의 내용을 간접적으로 확인해 본 게 다였다. 심지어는 기록을 하고 있는 사관들조차도 왕이 돌아가신 후에야 실록 편찬의 목적으로 열람할 수 있었다.
여기 사정전에서 왕과 신하 간에 치열하게 이루어졌을 경연제도와 사관들의 사초 작업을 생각해 보면 조선의 왕들은 끊임없이 신하들과 학문과 국정운영에 대해 고민하고 토론하고 해결책을 찾음으로써 또한 군신 간에 서로 견제함으로써 하루하루를 살았고 사관들 역시 죽음을 불사한 직업정신으로 조선왕조 오백 년의 역사를 현재의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이야말로 조선왕조 오백 년을 지탱한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사정전 뒤편에 있는 향오문을 거치면 왕의 침전인 강녕전이 나온다.
여기서 '향오'는 '오복을 향함'이라는 뜻인데 다섯 가지 복이란 ‘수(壽: 목숨)’, ‘부(富: 재물)’, ‘강녕(康寧: 건강 및 편안함)’, ‘유호덕(攸好德: 덕을 베풀기 좋아함)’, ‘고종명(考終命: 제 명에 편히 죽음)’이다. 향오문의 이름에는 임금이 오복을 누리고 백성들도 오복을 누릴 수 있게 정치를 해달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강녕전의 강녕(康寧)은 ’ 편안하고 건강함‘을 의미한다. 강녕전은 오복의 세 번째 '강녕'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국가 통치자가 제대로 된 정치를 하려면 통치자의 건강과 편안함은 기본 중에 기본이며 그런 의미에서 임금은 이 공간에서 자신의 강녕을 위해 부지런해야 했을 것이다. 임금은 자신의 건강까지도 자신만의 것이 아닌 온 백성들의 것이어야 했던 것이다.
강녕전은 정면 11칸, 측면 5칸으로 침실로 따지면 엄청난 규모를 자랑한다. 강녕전의 규모만 봐도 왕실의 위엄을 느낄 수 있는데 가운데 3칸에 대청마루를 두고 양쪽에 침실을 구성하였는데 침실방은 우물 정(#) 자 모양으로 좌측에 9개, 우측에 9개 방이 있다. 한가운데 방을 왕이 사용하고 주위의 방에는 상궁이 숙직하였다.
강녕전 건물에는 용마루가 없는데 이 같은 지붕을 무량각(無梁閣) 양식이라고 한다. 무량각 지붕은 일반 지붕보다 별도의 기와와 마감 공법이 필요해 더 어려운 공법이다. 이렇게 용마루를 만들지 않은 까닭은 임금이 곧 용인데 용 위에 또 용을 두는 것은 합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상시엔 왕의 침전으로 쓰였지만 이따금씩 주요한 행사가 열리기도 하였다. 왕비가 신하 및 왕족들에게 조회를 받는다던가 궁중 잔치라던가 또는 왕실 혼례의 일부 의식 등 여러 행사들이 이곳에서 많이 열렸다. 이럴 경우 대청에 앉을자리를 마련하고 월대까지 한 공간으로 묶어 활용했으며 좌, 우 온돌방은 행사 핵심 인물들의 준비 공간으로 사용했다. 1890년대 고종 재위 중반에 서양과 교류를 시작하던 시기엔 각 나라 외교관들을 접견하는 장소로도 이용하였다.
강녕전 동쪽에는 연생전이라는 건물이 있는데 연생(延生)은 '생명의 기운을 맞이한다 '라는 의미이다. 서쪽에는 경성전이라는 건물이 있고 경성(慶成)이란 '완성함을 기뻐한다.‘이다. 이 두 건물은 모두 소침(小寢)이며 그 이름음 모두 정도전이 지어 올렸는데 다음과 같이 작명의 의의를 설명하였다.
“연생전과 경성전에 대해 말씀드리면 하늘과 땅은 만물을 봄에 낳게 하여 가을에 결실하게 하고 임금은 만백성을 인(仁)으로써 살리고 의(義)로써 만듭니다. 그러므로 임금은 하늘을 대신해서 만물을 다스려 그 정령을 시행하는 것이 한결같이 천지의 운행을 근본으로 삼으므로 동쪽의 소침을 연생전이라 하고 서쪽의 소침을 경성전이라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천지가 만물을 낳는 것을 본받음을 보이고 그 정령을 밝히게 한 것입니다.”
또 다른 부속 건물로 연길당이 있는데 위치는 강녕전의 동북쪽, 즉 연생전 뒤편의 건물이다. 연길(延吉)은 '복을 맞아들인다' 는 의미이며 이 공간은 2019년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소장 중인 《경복궁 중건일기》가 번역 후 공개되면서 정확한 용도가 드러났다. 바로 왕의 식사를 데워 수라상에 올려 들이던 중간 부엌이었다. 음식을 만드는 소주방과 강녕전 간 거리가 꽤 있어 상을 가지고 오는 동안 음식이 식을 수 있었기 때문에 중간에 음식을 한 번 더 데울 곳이 필요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강녕전의 서북쪽, 즉 경성전 뒤편에는 응지당이라는 건물이 있으며 그 기능은 연길당과 같다. 응지(膺祉)란 '복을 받음‘이란 의미이다.
나머지 강녕전의 현판들은 한 번씩 둘러보고 넘어가도록 하자. 강녕전 남쪽 향오문 동편에는 청심당(淸心堂 - 마음을 밝게 함), 안지문(安至門 - 평안함에 이름)이 있고 서편으로는 연소당(延昭堂 - 광명을 맞이함)이 있다.
또한 향오문 서편에는 문이 한나 나 있는데 용부문(用敷門 - 백성들에게 오복을 퍼서 줌)이며 그 옆에는 건의당(建宜堂 - 마땅함을 세운다)이 있다.
강녕전 동쪽 행각의 맨 아래쪽에는 수경당(壽慶堂 - 장수를 누리는 복)이 있고 그 위로 지도문 지도문(志道門 - 도에 뜻을 둠)이 있고 바로 위로 계광당(啓光堂 - 밝은 빛이 열림)이 있다.
강녕전 서쪽 행각에는 내성문(乃成門)의 의미는 ‘성(成)을 이룬다’인데 오행에서 서쪽은 결실, 곧 공을 이룸을 의미하므로 서쪽 문에 이러한 이름을 붙였다.
강녕전을 지나 북쪽으로 이동하면 양의문(兩儀門)이 나오는 이 문을 통과하면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交泰殿)을 만날 수 있다. 여기서 양의란 ‘하늘과 땅, 음과 양, 남자와 여자‘라는 의미로 왕과 왕비가 조화를 이루며 살라는 염원을 담고 있다. 교태전의 교태는 '음양이 잘 어울려 태평을 이룬다.‘는 의미로 왕과 왕비가 조화를 염원하고 있다. 교태전의 다름 이름으로 사극에서 흔히 나오는 중궁전이라고도 한다. 왕비는 평소에 음양의 원칙에 따라 서쪽 방에서 머물다가 왕이 올 땐 동쪽 방에서 합방했다고 한다.
건물은 정면 9칸, 측면 4칸 집으로 가운데 3칸은 넓은 대청마루, 양쪽에 2칸씩 온돌방과 1칸씩 마루방을 두고 있다. 강녕전과는 달리 양쪽에 부속 건물인 원길헌과 함홍각이, 뒤쪽에 건숙각이 연결되어 있다. 각 건물들은 복도로 연결되어 있어 이동하기에 편리하다. 강녕전과 마찬가지로 왕이 있는 공간이므로 지붕에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 건물이다.
교태전 뒤편에는 작은 언덕이 있는데 이곳은 거의 구중궁궐에 갇혀 지내는 왕비를 위한 정원으로 아미산 언덕이다. 아미산은 중국의 불교와 도교의 성지인 어메이산에서 유래되었는데 천하의 절경이었다고 한다. 이곳의 언덕은 ’ 화계‘라는 꽃 계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미산은 경회루 연못을 파면서 나온 흙을 쌓아서 만들었다. 아미산은 굴뚝이 아름답기로 알려져 있는데 겨울에는 아미산의 꽃들이 피지 않으니 굴뚝을 보다 아름답게 만들어 왕비에게 겨울 정원을 만들어주기 위해 만든 것이며 그 아름다움으로 인해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굴뚝은 육각형 모양에 밝은 주황색 벽돌을 둘러쌓았으며 겉면에 온갖 비유와 상징 의미가 있는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그 상징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굴뚝의 몸통 부분에 4층으로 문양을 새겨놓았는데 맨 위에 있는 당초문양은 오랜 생명력을 상징한다. 두 번째 열에는 봉황, 박쥐, 학 등을 새겨놓았는데 이들은 고고함, 행복, 장수, 복 등을 염원하는 의미이다. 세 번째 열에는 모란, 국화, 매화 등을 새겨놓았는데 왕실의 부귀함, 고고함 등을 상징하며 맨 아래 열에는 해치, 불가사리, 박쥐 등을 새겨놓았는데 이는 벽사와 왕비의 행복을 바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교태전의 부속건물 중 하나인 원길헌은 교태전의 동쪽에 붙어 있으며 교태전과 이어져 있다. 원길(元吉)은 ' 크게 선하여 길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한 서쪽으로는 함홍각이라는 건물이 연결되어 있는데 여기서 함홍(含弘)은 '포용하고 너그럽다' 는 의미이다. 두 건물 모두 조선 초기엔 없었고 1867년(고종 4년) 경복궁 중건 당시 처음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그 용도로는 왕비의 진료나 고종이 외국 공사를 접견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고도 하나 주로 왕비를 모시는 상궁들이 거처하는 방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건순각은 교태전 북쪽에 붙어 있으며 후원영역에 있는 건물인데 건순(健順)은 '굳세고 유순함‘을 의미하며 이 공간은 왕비가 출산을 할 때 사용하던 건물이었다.
교태전의 서쪽으로 함원전이 있는데 함원(含元)은 '원기를 간직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세종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주로 불교 관련 행사가 자주 열렸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왕조는 억불(抑佛) 정책을 내세웠지만 세종 등 여러 왕과 왕비가 불교에 심취했다는 기록이 실록에 남아 있다.
함원전 남쪽으로는 강녕전 가까이 흠경각이 있는데 흠경(欽敬)은 ’ 하늘을 공경하여 공손히 사람에게 필요한 시간을 알려준다' 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농업 발전을 위해 천체의 운행을 이해하고 시간을 정밀하게 측정하고자 했던 왕의 고민과 노력이 깃들어 있는 건물이다. 세종은 1438년에 흠경각 건립을 명하고 여기에 옥루기륜, 앙부일구 등의 시간 측정기구와 천문관측기구인 강의를 만들어 설치하였다.
이제 왕과 왕비의 공간을 뒤로하고 왕세자가 있는 동궁 권역으로 넘어가 보자.
왕세자는 새로 떠오르는 해처럼 왕위를 이을 사람이기에 내전의 동쪽에 거처를 배치하고 이를 동궁이라 불렀다. 자선당은 사정전의 동쪽에 있으며 자선(資善)은 '선을 도움 받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세자와 세자빈이 머무는 장소이다. 자선당 동편으로는 비현각이 있는데 비현(丕顯)은 '덕을 크게 밝히다'라는 의미로 왕세자가 공부를 하며 정무도 보던 외전에 해당한다. 일제가 조선물산공진회라는 박람회 개최를 핑계로 1914년에 동궁 일대를 완전히 철거했고 현재 건물들은 1999년에 복원한 것이다.
특히 이 자선당은 국외로까지 다녀온 수난의 여정을 가지고 있다. 경복궁의 많은 건물들은 일제 강점기에 철거되었고 자선당을 비롯한 일부 건물들은 일본인에게 팔려가기도 하였다. 자선당은 경복궁 철거에 앞장섰던 오쿠라가 빼돌려 자기 집 정원으로 옮긴 뒤 ‘조선관’이라는 이름을 붙여 사설 박물관으로 사용했다.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이 건물은 불타 없어지고 기단과 주춧돌만 남은 자리에 오쿠라호텔이 들어섰다. 이 호텔 정원에 버려져 있던 돌들을 1993년에 김정동 교수가 발견하여 노력 끝에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화재로 인해 이미 상해 버린 돌들은 자선당 복원 때 쓰이지 못하고 건청궁 동편 녹산한쪽에 놓여 있다.
동궁 뒤편으로는 소주방이 위치하고 있는데 바로 경복궁의 주방이다. 소주방(燒廚房)의 뜻은 ‘불을 쓰는(燒) 주방(廚房)’이다. 각 궁마다 주방이 있었으나 현재는 경복궁과 창덕궁에만 남아있고 그나마도 창덕궁 주방은 서양식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전통적인 궁궐 주방은 경복궁 주방뿐이다. 소주방의 구성은 왕과 왕비의 일상 수라를 지어 올리던 내소주방과 궁중 잔치나 고사 음식을 차리는 외소주방 그리고 왕의 간식은 다식, 떡, 죽 등을 차리던 생물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소주방의 북쪽으로는 자경전이 위치하고 있다. 자경전의 정문은 만세문(萬歲門)인데 이곳에 거처하는 주인이 오랫동안 무병장수 하기를 바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자경(慈慶)은 ‘왕의 어머니가 복을 누린다’는 의미로 정조가 즉위하면서 혜경궁 홍 씨를 위해 창경궁에 자경당을 지은 데서 비롯되었다. 고종 4년(1867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고종의 양모인 조대비(신정왕후 조 씨)를 위해 지었다. 조대비는 고종의 즉위에 결정적 기여를 한 인물이다. 자경전은 보물 제809호로 지정되어 있다.
자경전 일원은 서북쪽의 복안당과 동쪽으로 청연각과 협경당을 연결해 놓았는데 복안당에는 온돌을 들여 겨울용 침전으로 사용하였으며 청연루에는 누마루를 설치하여 여름용 거실로 삼았다. 복안(福安)은 ‘행복과 평안’을 기원하고 있으며 협경(協慶)은 ‘함께 복을 누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청연(淸讌)은 ‘맑고 한가함’ 또는 ‘조촐한 연회’를 뜻한다.
자경전에는 대비가 머무는 장소인만큼 온돌방을 많이 마련하였는데 각 방들과 연결된 10개의 연기 길을 모아 북쪽 담장에 하나의 큰 굴뚝을 만들었다. 땅 밑으로 난 연기 길은 담장과 그 앞으로 한 겹 내밀어 쌓은 벽 사이로 이어져 있다. 굴뚝 벽면 중앙에 십장생들을 묘사하고 위아래로는 학과 불가사리, 벽사상 등을 배치하여 악귀를 막고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았다. 굴뚝의 기능에 충실하면서도 조형미가 빼어나 조선 시대 궁궐 굴뚝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보물 제810호로 지정되어 있다.
자경전의 서쪽이며 교태전의 아미산 북쪽으로는 흥복전이 위치하고 있다. 흥복(興福)은 ‘복을 일으킨다’는 의미로 왕의 후궁들이 살던 공간인 빈궁(嬪宮)이다. 침전으로 쓰였던 수많은 전각과 복잡한 행각들은 거의 사라지고 현재는 함화당과 집경당만이 남아있는데 일제가 동궁터에 지은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운영하면서 사무실로 쓰기 위해 헐지 않아 남아있는 것이다. 또한 신정왕후가 이곳 흥복전에서 승하한 것으로 보아 대비전의 용도로도 쓰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함화당과 집경당은 복도로 연결되어 있으며 고종이 건청궁에 머물 당시 여기서 외국 사신을 접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함화(咸和)는 ‘모두가 화합한다’라는 뜻이며 집경(緝敬)은 ‘계속하여 공경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집경당 뒤편의 향원정을 지나 경복궁 최북쪽에 위치한 영역으로 건청궁을 볼 수 있다. 건청(乾淸)이란 ‘하늘이 맑다’는 것을 의미하며 건립 시기는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보다 늦은 고종 10년(1873년)이다. 경복궁 중건 후 5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신료들의 반대가 심했으나 고종은 공사비 조달은 임금의 사비인 내탕금(內帑金)으로 짓는다고 하며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건청궁은 왕비의 처소인 곤녕합, 왕의 처소인 장안당, 서재인 관문각으로 이루어졌으며 1895년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가 암살된 비극의 장소이기도 하다. 1909년에 헐린 후 1939년에는 이 자리에 미술관이 들어섰고 해방 이후 민속박물관으로 쓰이다가 헐렸다. 2007년에 관문각을 제외한 전각들을 복원했다. 건청궁은 1887년 우리나라 최초로 전깃불을 밝힌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당시 전기의 도입은 미국의 에디슨 전기회사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이는 동아시아 최초였다.
그 무렵 에디슨의 일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고 한다.
‘세상에, 동양의 신비한 왕궁에 내가 발명한 전등이 켜지다니… 꿈만 같다!’
경복궁 전각들 중 ‘궁’이라는 이름을 가진 곳은 건청궁이 유일하다. 건청궁은 고종을 위한 궁궐 안의 궁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고종이 건청궁에서 생활한 것은 10년 남짓뿐이다. 을미사변 이후 고종은 늘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야 했고 일본이 장악하고 있는 경복궁에서 벗어나기 위해 1896년 2월 11일 새벽에 변복을 한 채 세자만 데리고 궁을 빠져나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갔다. 이를 ‘아관파천’이라 하는데 그 이후 조선 왕조는 다시는 경복궁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건청궁의 장안당은 국왕이 정무를 보는 편전으로 쓰였다. 장안(長安) ‘오랫동안 평안하게 지낸다’는 의미이다. 장안당의 현판은 고종이 친필로 탁본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서쪽의 부속건물로 침실로 사용되었던 정화당(正化堂 - 올바른 교화)과 추수부용루(秋水芙蓉樓 - 가을 물속의 연꽃)가 붙어 있다.
장안동 동쪽으로는 곤녕합이 자리 잡고 있다. 곤녕(坤寧)은 ‘땅이 편안하다’라는 뜻으로 왕비의 덕을 나타내었다. 곤녕합의 현판 역시 고종의 친필이며 현판 오른쪽 상단에는 임금의 글씨를 뜻하는 어필(御筆)이 새겨져 있고 왼쪽에는 고종의 낙관이 새겨져 있다. 곤녕합은 비극의 장소로 알려져 있는데 바로 고종 32년(1895년)에 명성황후가 시해된 곳이다.
곤녕합에 부속되어 있는 건물로 옥호루(玉壺樓 - 옥병 안의 얼음)가 있는데 그 이름의 뜻은 ‘깨끗한 마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며 용도는 장안당의 추수부용루와 같은 누각이다. 동북쪽에는 정시합(正始閤 - 처음을 바르게 하다)이라는 침실 공간이 붙어 있다. 곤녕합 뒤로는 복수당(福綏堂 - 복을 받아 편안하다)이 마당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주로 상궁들의 거처와 곳간으로 사용되었다.
건청궁 바로 서쪽으로는 집옥재가 있는데 집옥(集玉)은 ‘옥같이 귀한 보배를 모은다’라는 뜻으로 고종의 서재로 사용되었다. 1876년 경복궁에 큰 불이 나자 고종은 창덕궁으로 이어했다가 1885년에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와 주로 건청궁에서 생활했다. 1891년에 창덕궁 함녕전의 별당이었던 집옥재와 협길당(協吉堂 - 함께 복을 누린다)등을 건청궁 서편으로 옮겨 와 서재와 외국 사신 접견소로 사용했다.
집옥재는 양옆 벽을 벽돌로 쌓아 만든 청나라풍 건물로 밖에서 보면 단층으로 보이나 내부는 2층으로 되어 있다. 팔우정(八隅亭 - 여덟 모퉁이의 정자)은 팔각 누각으로 기둥 상부에 청나라풍의 화려한 낙양각을 달았으며 서고로 사용되었다. 반면 협길당은 고유한 조선식 건물로 온돌방을 두어 휴식 장소로 사용했다. 세 건물은 복도를 통해 서로 연결되며 각각의 특색을 지니면서도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집옥재를 보고 나와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을 지나 서쪽 끝으로 이동하면 태원전을 볼 수 있다. 태원전은 왕과 왕비, 대비가 죽은 후 발인할 때까지 관을 모시던 곳이다. 여기서 태원(太元)은 ‘하늘’을 뜻한다. 존귀한 분의 시신을 모시는 빈전이므로 하늘이란 존칭을 건물의 이름으로 붙였다.
태원전 동쪽으로는 영사재(永思齋)가 있는데 ‘오래도록 생각하여 가슴속에 새겨둔다’는 뜻이며 왕비와 후궁들이 사용했던 곳으로 태원전과 통해 있다. 태원전 남측 행각에는 공묵재(恭默齋)가 위치하고 있는데 여기는 어재실(御齋室)로 사용되었다.
태원전의 뒤쪽 서북방에는 3칸의 집에 있는데 숙문당이다. 숙문(肅問)은 ‘엄숙하게 듣는다’는 의미이며 돌아가신 이의 위패를 모시는 혼전(魂殿)으로 사용되었다. 돌아가신 선왕의 혼백이 남긴 말씀을 엄숙한 마음으로 듣는다는 뜻이다.
이제 태원전을 지나 다시 입구 쪽으로 나오다 보면 경복궁 건축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는 경회루 영역으로 걸어가 보자. 경회(慶會)는 ‘경사스러운 연회’를 뜻한다. 전각의 뜻과 같이 외국 사신을 접대하거나 임금과 신하 간에 큰 연회가 있을 때 사용되었다.
조선 태조 4년(1395) 경복궁 창건 때 연못을 파고 누각을 세웠으나 지대가 습해 건물이 기울자 태종 12년(1412) 연못을 대규모로 준설해 동서 128m, 남북 113m에 달하는 방지(方池)를 조성하도록 명했다. 당대 최고의 건축가 박자청이 건설을 맡아 8개월 만에 경회루를 완공했다. 정도전이 한양을 설계하였다면 박자청은 한양의 실제 모습을 만들어낸 토목 건축가였다.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전체가 소실되었던 이후 약 300년 뒤인 고종 4년(1867)에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다시 세워졌다. 이때 경회루의 크기 자체는 더 커졌지만 단층 지붕으로 바꿔 높이가 낮아지고 누각을 지탱하는 용 조각이 새겼던 돌기둥들이 무늬 없는 것들로 바뀌어 세워지는 등 변화가 생겼다.
경회루의 각 지붕 끝에는 잡상이 11개 올려져 있다. 이는 옆에 위치한 근정전에 올려져 있는 잡상 7개보다 많은 수인데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청나라 사신을 이곳에서 대접했기 때문에 중국 황실처럼 11개를 올렸다고 한다. 정면 7칸, 측면 5칸이며 넓이 931㎡(약 280평)의 대규모 목조건물이다. 1층은 48개의 높은 돌기둥들만 세우고 비웠으며 2층에 마루를 깔아 연회장으로 이용했다. 마룻바닥은 중앙의 3칸 중궁(中宮) 부분이 가장 높고 그다음 12칸은 한 뼘 정도 낮고 바깥쪽 20칸은 다시 한 뼘쯤 더 낮은데 중앙으로 갈수록 높은 품계의 관료들이 앉았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의 화재를 방지하기 위하여 연못에 청동 용 2마리를 넣었다는 기록이 있다. 용은 비와 물을 몰고 다니는 동물이라 화마를 막고자 했던 것이다. 1997년 연못 공사를 위해 연못의 물을 뺐을 때 하향정 근처에서 1마리가 발견되어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되었지만 나머지 한 마리는 발견되지 않았다.
무심코 보기에는 경회루의 연못이 고여있다고 생각되지만 사실 안에 여러 곳에서 샘물이 솟아 나오고 있고 또한 빠져나가는 곳이 있어서 물이 썩지 않았고 배수 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어서 장마에도 물이 범람하지 않았다고 한다.
경회루는 왕과 왕비의 후원이자 왕족들의 공간으로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었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강녕전과 교태전에서만 경회루로 갈 수 있었다.
경회루와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구종직(丘從直)은 세종 때 집현전 교서관(校書館)에서 벼슬을 하던 사람이다. 경회루의 경관이 아름답다는 말을 들어오다가 숙직을 하게 된 어느 날 몰래 경회루에 숨어 들어가 이리저리 경관을 즐기던 중 마침 내시 몇 사람을 거느리고 그곳에 거동한 세종과 마주치게 되었다.
구종직은 황급히 왕 앞에 엎드렸다. 임금은 먼저 그에게 왜 이곳에 들어왔는지 물었다. 구종직은 대답하기를
"소신이 전부터 경회루의 옥으로 만든 기둥과 요지와 같은 연못이 있어서 신선 세계와 같다는 말씀을 듣자옵고 오늘 마침 교서관에 입직하였다가 경회루가 멀지 않으므로 초야에 있던 몸으로 법을 범한 줄 모르고 구경하려 했던 것 이옵니다"
임금은 그 벌로 노래를 해보라고 했다. 구종직이 노래를 잘했는지 임금은 노래를 한 곡 더 부르게 하고 이어서 『춘추』를 외워보라 하였다. 구종직은 『춘추』 한 권을 막힘없이 줄줄 암송해 세종은 크게 감탄했다. 평소에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 신하를 기특하게 여긴 세종은 다음날 그의 벼슬을 정 9품 교서관 정자에서 종 5품 교서관 부교리로 삼았다는 이야기다.
법을 어기고도 벌은커녕 하루아침에 파격적인 승진을 하였으니 당시의 대신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삼사(三司)가 돌아가면서 구종직의 특진을 반대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관리가 한 품계를 승진하려면 일정 기간(450일 이상)을 탈 없이 지나야 할 뿐 아니라 근무성적이 뛰어나야 했다. 구종직의 경우 오늘날의 고등고시에 해당하는 대과 급제도 없이 4등급을 올린 파격적인 승진이었던 것이다.
세종은 반대하는 관리들을 모두 모아 놓고 춘추를 외우게 했으나 누구도 한 구절을 제대로 암송하지 못했다. 임금이 구종직에게 춘추 암송을 시켰더니 그는 다 외웠다. 다른 책을 물었는데도 막힘이 없었다. 세종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는 구종직에게 직을 맡겼다.
“너희들은 한 구절도 외울 수 없으면서 오히려 높은 벼슬에 앉았는데 구종직이 어찌 이 직무를 담당하지 못하겠는가. 모두 물러가라”
학문을 좋아했던 왕이니 공부 열심히 하는 신하를 아끼고 그 본을 세우려 한 것이다. 문장이 뛰어나고 역학과 경학에 밝았던 구종직은 성종 때 벼슬이 좌찬성에 이르렀다.
경회루와 관련된 애환의 역사도 있다.
단종이 세조에게 양위를 결심하고 경회루에 나와서 옥쇄를 넘겨주는 절차 끝에 세조는 조선의 일곱 번째 왕이 되었다. 박팽년은 이 일에 매우 분개하고 슬퍼하면서 경회루에 뛰어들어 자살하려고 하였으나 옆에 있던 성삼문이 “주상(단종)께서 상왕으로 계시니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후일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만류하였다.
경복궁 관람의 마지막 코스인 수정전으로 향해보자. 수정(修政)은 ‘정무를 잘 수행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근정전 서쪽에 있으며 경회루의 남쪽으로 자리 잡고 있다. 세종 때 학문을 연구하고 왕에게 주요 정책을 자문하고 건의하던 기관인 집현전이었으며 바로 여기서 위대한 훈민정음이 창제되었다. 세조 때에는 국왕의 칙령과 교명을 기록하는 기관인 예문관으로 사용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경복궁의 수많은 전각과 함께 소실되었다가 고종 때 근정전, 사정전, 경회루와 함께 수정전이란 이름으로 중건되었다.
정면 10칸, 측면 4칸에 팔작지붕을 얹은 다포식 집이다. 정면에는 넓은 월대가 조성되어 있고 월대에는 정면에 계단을 3곳 설치하였는데 중앙의 계단은 소맷돌을 두어 좌우계단과 차별화시켰다. 이것은 이곳이 임금의 출입이 자주 있는 편전임을 의미한다. 1894년에는 대한제국의 군국기무처가 여기에 있었으며 일본의 주도로 시작된 갑오개혁이 이루어진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