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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은 Apr 05. 2024

31.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王陵) - 남양주 홍유릉

1박 2일형 답사

1. 조선왕릉 알아보기 홍릉(洪陵)과 유릉(裕陵)』 경기도 남양주     

 대한제국 고종과 명성황후의 무덤인 홍릉(洪陵), 순종과 두 황후의 무덤 유릉(裕陵)을 합쳐서 부르는 명칭이다. 일단 능원은 따로지만 바로 옆에 붙어 있기 때문에 홍유릉으로 합쳐 부른다. 소재지인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의 이름을 따서, 때론 '금곡릉'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 외에도 엄밀히 홍유릉에 포함된 곳은 아니지만 바로 곁에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묘로서 조선 왕릉의 격식으로 조성한 영원(英園), 그리고 회은황세손 이구의 묘인 회인원(懷仁園)을 포함한 2기의 원(園) 및 의친왕과 의친왕비가 합장된 의친왕묘와 덕혜옹주묘를 포함한 왕자녀의 묘 2기, 그리고 고종의 후궁인 광화당 귀인 이 씨 묘, 삼축당 김 씨 묘, 귀인 장 씨 묘, 의친왕의 첩인 수관당 정 씨 묘, 수인당 김 씨 묘를 포함한 후궁의 묘 5기가 홍유릉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어 대한제국 황실의 가족 묘역과 같은 곳이다. 또한 홍유릉 주변에는 광해군묘, 흥선대원군의 묘도 있다.     


 대한제국 선포 후 2대를 끝으로 멸망하고 일제강점기를 거친 후 공화정이 들어섰기 때문에 한국사에서 마지막으로 조성된 왕릉이며, 대한제국이 황제국을 표방했기 때문에 유일한 황제릉(皇帝陵)이기도 하다.      

 고종, 순종, 명성황후, 광해군, 흥선대원군 등 역사의 주연급 인물들의 능과 묘가 모두 분포되어 있는 홍유릉으로 답사를 떠나보자.


2. 고종과 명성황후의 능홍릉(洪陵)』      

 조선의 26대 임금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고종과 명성황후의 합장릉 형식의 황제릉이다.     

명성황후 사망 시 서울시 청량리에 안장했으나 고종 사후 남양주시 금곡동으로 이전하여 같이 안장했다. 유릉과 더불어 석물과 침전 등을 황제릉의 형식으로 구성했는데, 그렇다고 중국 황제릉 형태를 모방한 것은 아니고 기존 한국 왕릉 특유의 양식을 기본으로 하되 명나라 홍무제가 안장된 효릉(孝陵)의 묘제를 참고하였다.     

 고종은 흥선대원군과 여흥 부대부인 민 씨의 둘째 아들로 철종 3년(1852) 흥선대원군의 사저인 운현궁에서 태어났다. 1863년에 철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 결정권을 가지고 있던 신정익황후 조 씨가 양자로 삼아 익종(문조)의 대통을 계승하도록 하여, 익성군에 봉해지고 관례를 거행한 뒤 왕위에 올랐다.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였기 때문에 신정익황후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흥선대원군이 국정을 총괄하게 하였다. 그 후 최익현의 상소로 인해 대원군이 하야하고 고종 10년(1873)이 되어서야 친정을 시작하였다. 재위기간 동안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어 문호를 개방하는 등 대외 개방정책을 취하였고, 군제를 개혁하고 조사시찰단을 파견하여 새로운 문물을 들여왔다.      


 하지만 친정 선포 후 외척인 민 씨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고,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으로 인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고종 31년(1894)에는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였으며, 정부에서는 갑오개혁을 실시하였다. 고종 32년(1895)에 을미사변을 겪은 후 신변의 위협을 느껴 아관파천을 단행하기도 하였으며, 1897년에는 자주독립 국가로서의 면목을 내세워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연호를 광무(光武)라 정한 후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일본의 압박이 심해지는 가운데 1905년에 을사늑약을 맺고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겼으며, 1907년에 일제로부터 국가와 민족을 보호하고자 세계만국평화회담이 열리는 네덜란드 헤이그로 특사를 파견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이를 빌미로 일본과 친일 대신의 강요로 1907년에 강제 퇴위당하였다. 그 후 1919년 덕수궁 함녕전에서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때 고종이 일본인에게 독살당했다는 설이 유포되어 3.1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명성황후 민 씨는 철종 2년(1851) 경기도 여주 사저에서 태어났다. 고종 3년(1866)에 고종의 모친인 부대부인 민 씨의 추천으로 왕비로 책봉되었고, 흥선대원군이 섭정에서 물러나자 친정 일가가 실권을 장악하였다. 일본과 수교하고, 1882년에는 임오군란으로 신변이 위태로워지자 궁궐을 탈출하여 피신생활을 하였는데,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여 군란을 진압하고 다시금 정권을 잡았다.      


 1884년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 때에도 청나라를 개입시켜 개화당 정권을 무너뜨렸으며, 1894년 갑오개혁이 실시되면서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 세력을 추방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외교정책에 불만을 품은 일본 공사에 의해 고종 32년(1895)에 경복궁 건청궁 옥호루에서 시해를 당하였는데 이 사건이 바로 ‘을미사변(乙未事變)’이다.      


 통상수교거부정책(일병 쇄국정책)을 펼쳤던 흥선대원군에 맞서 명성황후는 개방적인 정책을 펼쳤다. 1894년 흥선대원군이 일본 세력을 등에 업고 갑오개혁을 주도하자,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 세력을 추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를 사주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일본인 자객들은 명성황후의 처소인 옥호루로 들이닥쳐 궁녀들 사이에서 명성황후를 찾아내 처참하게 살해하였다. 낭인들은 시신을 궁궐 밖으로 끌어내 불에 태웠으며, 그 후 일본은 고종에게 명성황후를 폐서인 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불운한 최후를 맞은 명성황후는 곧바로 복위되었고, 대한제국 선포 후 명성황후로 추존되었다.     

 홍릉은 대한제국 1대 황제인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민 씨의 능이다. 기존의 조선왕릉 형식과 다른 대한제국 황제릉의 형식으로 조성되었다. 이는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명나라의 황제릉을 인용하고 기존의 조선왕릉을 계승하여 개혁한 형식이다. 능침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르고 혼유석, 망주석, 장명등을 설치하였다.      


 기존의 능침공간에 있던 석물(석양, 석호, 문무석인)들은 제향 공간 앞으로 배치되었고, 종류와 개수를 늘렸다. 제향 공간에는 정자각 대신 일자형 건물의 침전을 세우고, 안에는 당가(唐家)를 설치하였다. 침전 앞에는 문무석인, 기린석, 코끼리석, 사자석, 해태석, 낙타석, 석마의 순으로 석물을 배치하였다. 기존의 조선왕릉과 달리 향로(香路)가 가운데에 깔려 있고, 판위는 홍살문을 기준으로 왼쪽에 있다. 그 밖에 수복방, 수라간, 비각, 예감, 어정 등이 능역 안팎으로 배치되었고 능역 옆에는 재실이 있다.     


3. 왕릉과 황제릉의 차이     

 홍릉과 유릉은 조선의 국명을 대한제국으로 바꾸면서 황제라 칭한 고종과 순종의 능이다. 황제릉으로 조선 왕릉과 몇 가지 차이가 있는데, 첫째는 향로를 중심으로 좌우에 어로가 설치되어 향, 어로가 3개의 단으로 되어 있다. 둘째는 조선 왕릉의 정자각에서 월대로 올라가는 계단이 정자각의 좌우에 설치되어 있는 것과 달리 정자각을 대신하는 침전(寢殿)의 정면에도 설치되어 있어 홍살문과 직선축을 형성하고 있다. 셋째는 능침구역의 봉분 앞에 위치하던 석물이 향, 어로에서 침전 사이로 배치되어 있으며 이것은 중국 황제릉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넷째는 비각의 위치인데, 홍릉 역시 비각이 침전과 수평을 이루고 있다.

홍릉의 침전, 일반 왕릉의 정자각인 아닌 침전이 위치해 있다.

 황제릉인 홍릉과 유릉의 또 하나의 큰 특징은 석물이 침전 앞 향, 어로로 내려오면서 석호와 석양이 사라졌고 그 대신 중국 명나라 황제릉에 보이는 다양한 동물이 등장한다. 우선 문석인과 무석인이 차례로 마주 보고 서고, 그 뒤로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이 순서대로 양쪽으로 정렬해 있다. 특히 유릉의 경우는 서양식 조각수법이 더욱 많이 반영되었다.

홍릉의 석물은 능침부근이 아닌 참도 옆에 위치하고 있다.

3. 순종과 순명황후순정황후의 능유릉(裕陵)     

순종은 조선 제27대 마지막 국왕이자 대한제국의 제2대 황제이며 조선 최후의 군주이다.   

  

 어머니인 명성황후 민 씨 소생의 왕자녀들 중 유일하게 요절하지 않고 장성한 자식이었고, 고종의 수많은 자녀들 중 유일한 정비 소생의 적자였다. 그만큼 순종은 대한제국 황실의 금지옥엽이었지만 건강은 좋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고종과 중전 민 씨가 후계자인 아들의 건강에 노심초사한 나머지 무속에 기대어 국가 예산을 낭비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1907년, 고종이 헤이그 특사를 보낸 것이 일본에게 발각되었고 이에 분노한 일본은 이를 빌미로 고종에게 퇴위를 강요한다. 결국 고종이 황태자에게 국정의 섭정(攝政)을 맡긴다는 조칙을 내렸는데, 일본은 이를 이용하여 순종의 즉위식을 밀어붙이고 강행하였다. 하지만 말이 황제였을 뿐 모든 실권은 일본을 등에 업은 이완용과 송병준에게 있었고, 이완용과 송병준 이 두 사람의 주도하에 일본에 대한제국의 국권(國權)을 넘겨주는 일이 착착 진행되어 나아갔다.     


일제의 강압으로 인해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면서 즉위하게 되었지만, 이에 대한 반발로 양위식장에는 고종과 순종 모두 불참해 신원 불명의 두 사람이 이들의 대역을 맡아 양위식이 진행되었다.      


“황태자가 정사를 대리하게 된 것을 진하(陳賀)하는 의식을 규례(規例)대로 중화전(中和殿)에 친림하는 것으로 마련하고, 황태자가 예를 행하는 의절(儀節)도 규례대로 마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권정례(權停例)로 하라.” 하였다.     

                                                         고종 실록_ 고종 44년(1907년, 대한 광무 11년) 7월 19일     


 권정례(權停例)란 '황제가 참석해야 할 조정의 축하 의식에 황제가 나오지 아니한 채 임시방편으로 거행하던 식(式)'이다. 권정례가 아주 흔한 사례는 아니지만 유례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광해군의 세자 책봉도 전란 중인 데에다 서자, 그것도 차남이라는 선조 입장에서는 내키지 않는 약점 때문에 임시 세자라는 의미로 권정례를 치렀다.      


 순종은 즉위하던 해, 서열로 바로 아래이며 이미 장성한 동생인 의친왕 강(堈)을 놔두고, 자신보다 23살이나 어린 둘째 동생 영친왕을 황태제가 아닌 황태자로 책봉한다. 순종실록을 보면, 영친왕은 순종의 이복동생이지 아들이 아니므로 황태자가 아니라 '황태제(皇太弟)'로 해야 한다고 신하들이 진언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순종은 조선 초 정종이 동생인 태종을 세제가 아닌 세자로 삼은 일을 전례로 들면서 영친왕을 황태자로 책봉했다.     


 등극 후 일본의 간섭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기 위한 정미 7 조약(丁未七條約)이 강제로 체결되었고, 융희 3년인 1909년에는 기유각서가 강제 체결되어 사법권을 강탈당했다. 결국 융희 4년(1910년)에 친일파에 의해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되어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 후 이왕(李王)으로 강등되어 창덕궁에 거처하며 망국의 한을 달래다가 1926년 양력 4월 25일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53세로 세상을 떠났다.     


【 구차히 산 지 17년, 2천만 생민(生民 : 국민)의 죄인이 되었으니 잠시도 이를 잊을 수 없다. 지금의 병이 위중하니 한마디 말을 않고 죽으면 짐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리라. 이 조칙을 중외에 선포하여 병합이 내가 한 것이 아닌 것을 백성들이 분명히 알게 되면 이전의 소위 병합 인준과 양국의 조칙은 스스로 파기에 돌아가고 말 것이리라. 백성들이여, 노력하여 광복하라. 짐의 혼백이 어둠 속에서 여러분을 도우리라. 】     


 1926년 4월 25일 새벽 6시 15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53세로 창덕궁 대조전에서 위와 같은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신문에는 '5백 년 종사의 마지막 황상(皇上) 승하'라는 제목의 기사가 전면을 장식하였다. 그해 6월 10일 발인하는 날, 순종의 발인 행렬이 유릉을 향하여 창덕궁 돈화문을 나서 단성사 앞을 지날 때였다. 황제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러 나온 수많은 군중 속에서 수천 장의 격문이 날아오르며 “대한 독립 만세!” 함성이 터져 나왔다. 마지막 황제의 인산일을 기하여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순종의 마지막 유언을 백성들이 알 리 만무하였으나, 마지막 황제의 죽음은 백성들의 독립에 대한 욕망을 더욱 고조시키게 된 것이다.     


 순종의 첫 번째 황후 순명효황후 민 씨는 고종 19년(1882)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광무 1년(1897) 황태자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순종 등극 전인 광무 8년(1904)에 경운궁(덕수궁) 강태실에서 33세로 세상을 떠났다. 순종 등극 후 순명황후로 추존되었다.     


 순종의 두 번째 황후인 순정효황후 윤 씨는 광무 10년(1907)에 황태자비로 책봉되었고, 같은 해에 순종이 등극하자 대한제국 최초의 황후로 책봉되었다. 황후는 한일 합방 체결을 반대하여, 병풍 뒤에서 옥새를 치마 속에 감추고 어전회의를 듣고 있다가 백부 윤덕영에게 빼앗겼다고 한다.      


 결국 융희 4년(1910) 한일합병조약 체결되면서 이왕비(李王妃)로 강등되어 창덕궁에 거처하게 되었다. 일제의 침략행위를 경험하였고, 광복과 한국전쟁을 겪었어도 대한제국의 황후로서 품위를 잃지 않았다. 만년에는 불교에 귀의하여 생활하다가 1966년 양력 2월 3일에 창덕궁 낙선재에서 72세로 세상을 떠났다.      

 1950년, 순정효황후는 한국전쟁 당시에 미처 피신하지 못하고 창덕궁에 남아있었는데, 이때 인민군들이 창덕궁에 들이닥쳐 행패 부리는 것을 보고 크게 호통을 쳐서 내보냈다고 한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로서 당당함과 강한 모습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유릉은 대한제국 2대 순종과 첫 번째 황후 순명황후 민 씨, 두 번째 황후 순정황후 윤 씨의 능이다. 유릉은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한 봉분 안에 황제와 두 황후를 같이 모신 합장릉(合葬陵)의 형식으로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가장 왼쪽에 순정황후, 가운데에 순종, 오른쪽에 순명황후를 모셨다. 유릉은 홍릉(洪陵)과 마찬가지로 대한제국 황제릉의 형식으로 조성되었다.     


 유릉은 광무 8년(1904) 순명황후가 황태자비의 신분에서 세상을 떠나자, 다음 해 현 용마산(어린이대공원 부근)에 유강원(裕康園)이라는 이름으로 조성되었다가, 1907년 순종이 황위에 오른 후 유릉으로 높였다. 1926년 순종이 세상을 떠나자, 용마산에 있던 유릉을 홍릉 동쪽 언덕에 옮기는 것으로 정하고 순종과 순명황후, 순정황후의 능 자리도 함께 공사하였다. 이후 순명황후를 먼저 모시고 순종을 합장하였으며, 1966년 순정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유릉에 합장되어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유릉은 홍릉에 비해 능역 규모가 좁지만, 홍릉과 같은 형태로 조성되었다. 능침의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고, 그 주변으로 석상(혼유석), 망주석, 장명등만 배치하였다. 제향 공간인 침전 앞으로 문석인, 무석인, 기린석, 코끼리석, 사자석, 해치(해태)석, 낙타석, 석마 순으로 석물을 배치하였는데, 석마만 2쌍 배치하였다.

 

유릉의 제정(祭井), 제향 때 사용할 물을 긷는 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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