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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은 Jun 24. 2024

8. 답사의 신, 서원(書院)에 가다! -무성서원 -

당일형 답사

무성서원 현가루

1. 유네스코 세계유산한국의 서원무성서원(武城書院)     


 무성서원은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에 있는 서원이다.      

 전북 정읍은 우리 기억에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라고 잘 알려져 있다. 또 문학 시간에 필수로 접하게 되는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가요 ‘정읍사(井邑詞)’의 고장이기도 한다. 정읍 시내에는 이순신 장군을 모신 충렬사가 있는데 그 이유는 이순신 장군이 정읍현의 초대 현감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정읍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 최익현 선생과 임병찬 선생이 의병운동을 시작한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달하 노피곰 도드샤

달님이시어 높이 높이 도드시어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멀리멀리 비춰 주십시오

어긔야 어강됴리

어긔야 어걍됴리

                                     - 백제가요 정읍사 중 -      


 이곳 무성서원의 이름은 공자와 관련이 있다. 공자의 제자 중 자유(子游)가 다스렸던 노나라의 무성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자유가 백성들을 예악(禮樂)으로 잘 다스린 덕에 거문고를 타며 부르는 노랫소리가 마을을 울려 퍼졌다. 이에 서원의 이름이 ‘무성’이 되고 평화로운 노랫소리를 의미하는 ‘현가(絃歌)’하는 이름이 입구인 누각에 걸렸다.      


 무성서원이 자리한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는 칠보산에 기대어 형성된 마을이다. 마을의 전면과 측면에 넓은 들이 있고 들 가운데로 칠보천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형 마을이다. 서원의 입지 측면에서 보면 무성서원은 다른 서원들과는 달리 향촌 내, 그것도 마을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는 매우 이례적인 입지이다. 서원의 배치 형태는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墓)의 형태로 남북으로 중심 축선을 두고 누각, 강당, 내삼문, 사당이 일렬로 배치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때부터 유교를 들여와 공부하였는데 고구려의 태학에서는 유교 경전을 가르쳤고 백제의 아직기와 왕인은 일본에 유학을 전했다. 신라인 중에서는 설총과 최치원이 대표적인 유학자이다. 흥선대원군 집권 당시 훼철되지 않은 서원 중에는 설총을 배향한 서악서원과 최치원을 배향한 무성서원이 삼국시대 인물을 배향하는 서원으로 남아 있다.     


 무성서원은 통일신라 말 고운(古韻) 최치원(崔致遠) 선생이 태산 태수로 부임해 8년 동안 선정(善政)을 베풀고 고을에 많은 치적을 남긴 후 이임해서 떠나자 주민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세우고 태산사(泰山祠)라고 한 데서 유래되었다. 살아있는 사람을 사당에 모시고 제사를 지낼 정도로 고을 사람들의 최치원에 존경과 신뢰는 무한했다.      


 이후 중종 39년(1544) 태인 현감으로 부임한 신잠(申潛) 선생이 6년간 선정을 베풀다가 강원도 간성 군수로 전출하자 역시 주민들이 생사당을 세워 배향하다가 최치원의 태산사와 병합하였다.     


 그 후 광해군 7년(1615) 고을의 유림들이 서원을 세웠는데 숙종 22년(1696) ‘무성서원(武城書院)’으로 사액을 받았다. 이후 불우헌 정극인, 눌암 송세림, 묵재 정언충, 성재 김약묵, 명천 김관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대부분 이 지역 출신 인물들로 향촌 사회 교화와 유학 교육을 위하여 힘썼다.     

무성서원 현가루
무성서원 강학당, 누각인 현가루를 지나면 강학당의 모습이 들어온다. 무성서원의 강학당은 앞뒤로 트여있어서 앞의 확연루와 뒤에 있는 사당을 한 번에 볼 수 있다.

3. 무성서원(武城書院)의 배향 인물     


고운(古韻최치원(崔致遠선생     

 당나라에서 공부한 최치원은 유교, 불교, 도교 사상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특히 유교 사상에 대해서는 ‘풍류’라는 우리 민족 고유의 문화를 바탕으로 유교의 충, 효, 도 사상을 이해하였다. 최치원은 학문의 목적이 ‘도(道)’에 있음을 밝히며, “하늘이 귀하게 여기는 것은 사람이요, 사람이 존중히 여기는 것은 도(道)이다. 사람이 도를 크게 발전시키는 것이요, 도는 사람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도가 만일 높아진다면, 사람은 저절로 귀하게 된다. 도를 도울 수 있는 것은 오직 덕을 높이는 것이니, 곧 도를 높이며 덕을 귀히 여기는 것은 오직 법의 첫머리이다.”라고 하며 인간의 도(道)와 덕(德)을 지향하는 유교적 학문관을 지니고 있었다. 전국에 최치원을 기리는 유적지는 수없이 많으나 무성서원은 최치원이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 이곳에서 관직 생활을 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최치원이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마지막 은둔지였던 합천 농산정에서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만이 남아있다. 하지만 최치원이 남긴 발자취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최치원이 지은 『계원필경』뿐만 아니라 지방의 외직을 전전하면서 남긴 치적은 오늘날까지 칭송되고 있다. 경남 함양의 태수가 되어 수해를 방지하기 위해 만든 상림(上林)은 지금 천연기념물이 되어 주민의 안식처가 되어 있고, 태산(현재 정읍) 태수 재임 중 만든 피향정도 보물로 지정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최치원 선생의 글을 모아 놓은 계원필경(桂苑筆耕)에는 당나라에서 황소의 난을 진압하면서 썼던 글인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이 실려있다.      


 “지금 나는 황제가 내려 준 군대를 거느리고 역적을 토벌하려는 것이지 너와 같은 역적을 상대로 싸우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토벌을 하기에 앞서 한 번 더 은혜로 회유하여 회개할 기회를 주려는 것인데, 그래도 듣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이 무력으로 너희가 침탈한 장안을 수복할 수밖에 없다.”


                                                                                         - 최치원, 토황소격문 중 일부 -     

      

영천자(靈川子신잠(申潛     

 조선 중기 중종~명종 때의 문신이자 서화가이다. 상주목사를 지냈고, 중종 때 조광조가 건의해 만들어진 현량과(賢良科) 출신이다. 호는 영천자(靈川子)인데, 경기도 구리의 아차산에서 20여 년 동안 서화에 몰두했기에 스스로 호를 아차산인(峨嵯山人)이라고도 하였다.      


 세종 시대 신숙주의 증손자이고, 조광조의 문인(門人)이며, 퇴계 이황의 가르침을 받았다. 시 ·서 ·화에 모두 능하여 삼절(三絶)이라 불렸으며, 특히 묵죽(墨竹)과 포도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한다. 저서에는 『영천집(靈川集)』, 그림에 『설중기려도(雪中騎驢圖)』 등이 있다.     


 신잠 선생은 태인 현감으로 있는 7년 동안 동서남북 사방에 네 개의 학당을 세워 교육의 기틀을 다지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불우헌(不憂軒정극인(丁克仁선생     

 조선 전기 문신 겸 학자이다. 세종 11년(1429) 29세의 나이로 식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진학하였다. 1437년에는 당시 세종대왕이 흥천사(興天寺)를 중건하기 위하여 토목공사를 일으키자, 유생들을 이끌고 부당함을 항소하다가 왕의 진노를 샀고, 결국 성균관에서도 쫓겨났다. 귀양을 다녀온 뒤 부인 임실 임 씨의 친정이 있는 전라도 태인현으로 내려가 집을 짓고 거처하며 집의 이름을 불우헌(不憂軒)이라고 지었다. 그는 불우헌 앞에 있던 냇물인 비수천(泌水川) 주변에 송죽을 심고 밭을 갈면서 향리의 자제들을 모아 가르치는 한편으로 향약계축(鄕約契軸)을 만들어 향리의 교화에 힘썼다.     


 정극인 선생이 상소했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성종실록에 실려 있다.         

       

 문학적 소양이 매우 뛰어나, 가사 문학의 효시(嚆矢)인 ‘상춘곡’과 단가인 ‘불우헌가’ 등을 지어 한국 문학사에 큰 공헌을 했으며, 불우헌집(不憂軒集)이라는 2권 1 책 분량의 문집을 남겼다. 특히 상춘곡은 현대의 국어 교육과정이나 문학사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작품 중의 하나로 수능시험의 단골 작품이다.     

 

엊그제 겨울 지나 새봄이 도라오니

桃花杏花(도화행화)는 夕陽裏(석양리)예 퓌여 잇고

綠楊芳草(녹양방초)는 細雨中(세우 중)에 푸르도다.

칼로 몰아낸가, 붓으로 그려 낸가

造化神功(조화신공)이 物物(물물)마다 헌사롭다.     


                                                                     - 정극인 상춘곡 중 -


눌암(訥庵송세림(宋世琳)

 조선 초기에 활동한 문인화가이다. 24세 때인 1502년 별시에 장원급제하였으나 곧 상(喪)을 당하고 병을 얻어 길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해동잡록(海東雜錄)』에 "송세림 선생은 일찍이 과거에 장원을 했다. 그런데 초상 중 너무 슬퍼한 나머지 병을 얻었으므로, 드디어 자취를 감추고 나오지 않아 갑자사화(1504)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후 스스로 취은(醉隱)이라 호 하고, 마을 사람들의 우스개 이야기들을 모아서 책을 엮어 ‘졸음을 쫓는 방패’라는 뜻인 『어면순(禦眠楯)』이라 하였다.      


묵재(默齋정언충(鄭彦忠)

 조선 중기의 학자로 정읍 출생이며 중종 29년(1534)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성리학에 전념하였으며 특히 역학(易學)에 통달하였다. 후에 후릉 참봉(厚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거절하고, 이항, 김인후, 김약묵 선생 등과 함께 향학을 일으켜 후진을 양성하였다. 정조 20년(1796) 청백리로 천거되었다.     


성재(誠齋김약묵(金若默)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중종 때 여러 관직을 거친 뒤 명종 7년 한산 군수로 나갔을 때 검소하고 근면한 관리로 표창을 받았다. 그 뒤 사헌부 집의(執義)를 지내고 정 3품에 올라 양주목사(楊州牧使), 내자시정(內資寺正)을 지냈으며, 학문이 뛰어났다. 필암서원에 배향된 김인후 선생이 그의 묘지명을 지었으며, 무성서원에 배향되었다.     


명천(鳴川김관(金灌)

 광해군 7년(1615)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였다. 과거 시험을 보러 한양에 갔을 때, 당시 대북파의 거두 이이첨이 도덕군자로 소문난 그를 만나보기 위해 시험장으로 찾아왔다. 그러나 김관은 임해군, 유영경 등을 폐출시키고, 강화부사(江華府使)를 시켜 영창대군을 죽게 만든 이이첨을 만나고 싶지 않아 그 자리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독서에 전념하면서 후학 양성에 힘썼다. 인조 5년(1627)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소모사(召募使) 직을 맡고 있던 문원공(文元公) 사계(沙溪) 김장생을 만나러 갔다. 이때 김장생으로부터 칭찬을 들었다.

     

4. 무성서원(武城書院)의 주요 공간     


 무성서원은 다른 서원과는 다른 매우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일반적인 서원은 강당의 양옆에 유생들이 기거하는 동재와 서재가 있는데 반해, 무성서원은 유생들이 기거하는 강수재와 서원을 관리하는 고직사가 사당, 명륜당 등 서원의 핵심 부분으로부터 분리되어서 담장 밖으로 나와 있다. 이러한 구조적 특징과 배향하는 인물의 수로 봐서는 무성서원이 다른 서원에 비해 강학보다는 제향 공간으로서의 상징성이 더 크다고 짐작할 수 있다.      


현가루(絃歌樓

 무성서원의 문루인 현가루는 안동 병산서원 만대루와 마찬가지로 1891년 나중에 만들어졌으며, 1903년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가루는 《논어》의 현가불철(絃歌不輟)에서 따온 이름으로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그치지 않는다는 뜻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힘든 상황이 되어도 학문을 계속한다’라는 뜻이다.     \


 또한 칠보산의 아름다운 풍경을 노래한 고현팔경(古懸八景) 중에도 현가루는,

‘제3경. 무성현가(武城絃歌) 무성현의 현가루에서 글 읽는 소리’로 소개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2층 누각의 형태이며 1층 나무 기둥 사이에 세 개의 문을 만들었고, 2층은 4면이 트인 마루가 놓인 구조이다. 2층 누각에는 「무성서원 중수기」를 비롯한 여러 현판이 걸려있다. 현가루에 오르면 마루 바닥에 경전을 공부하던 유생들이 교수의 눈을 피해 고누놀이를 하는 그림판이 있는데, 아마도 후대에 그려진 것일 수도 있지만 당시 유생들에게도 현재의 학생들처럼 놀이문화가 있었음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병오창의기적비(丙午倡義紀蹟碑)

 현가루 오른편으로 가면 가장 먼저 병오창의기적비를 볼 수 있다. 병오창의기적비는 무성서원에서 병오년(1905년) 최익현과 임병찬의 주도로 호남에서 처음 일으킨 의병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작성된 공적비이다. 1904년 을사늑약 이후 최익현과 임병찬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고종 황제의 밀칙(密勅)을 받고 전국 규모의 ‘대한독립의군부’를 결성하여 의병운동을 일으켰다. 이 공적비는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켰던 의병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고 있다. 또한 동시에 그러한 의병운동으로 인해 무성서원이 지금까지 무사히 보존되고 있음에 감사하고 경건한 마음을 가지게 한다. 

무성서원, 병오창의기념비

강수재(講修齋)     

 무성서원 강수재는 유생들의 거주 공간이다. 원래는 동쪽 기숙사인 강수재와 서쪽 기숙사인 흥학재가 있었으나 현재는 강수재만 남아있다. 강수재는 숙종 22년(1696) 사액을 받은 후에 고직사를 기숙사로 변경한 것이다. 현재의 건물은 고종 24년(1887)에 세워진 것으로 이후에 여러 번 수리하였다.     


 서원의 강학 공간은 한 울타리 안에 강당과 동재와 서재를 조성하지만, 무성서원은 강학당과 유생들의 생활공간인 강수재가 담장에 의해 별도 영역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강수’는 『논어』 「술이편」“덕을 닦지 못하는 것과, 학문을 강마(講磨)하지 못하는 것과, 의를 듣고도 옮겨가지 못하는 것과, 불선을 고치지 못하는 것이 나의 걱정거리이다(德之不修 學之不講 聞義不能徙 不善不能改 是吾憂也)”에서 따온 말로, 학문을 습득하고 심신을 수양한다는 의미이다.      


태산사(泰山祠)

 태산사 내삼문에는 “성조액은(聖朝額恩)”과 “사림수선(士林首善)”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는데 이를 ‘주련’(주련 : 벽이나 기둥에 써 붙이는 문구)이라 한다. 성조액은(聖朝額恩), 즉 임금께서 편액을 내려 주신 은혜를 입다. 사림수선(士林首善), 사림 중에 최고란 뜻이다. 무성서원의 위상을 실감할 수 있는 문구이다.      


 신라 때는 태인면의 옛 지명이 ‘태산군’으로 불리던 때가 있었는데 최치원 선생이 정읍의 태산 군수로 부임한 시절에 쌓은 공적을 기리고자 태산사를 설립하게 되었다.  사당 이름을 지명에서 따온 것이 특이한데, 한편 중국의 태산은 오악 중 하나로서 불교, 도교, 유교 및 민간신앙에 영감을 주는 원천으로 유명하다. 

무성서원, 태산사

신용희 불망비(不忘碑)

 ‘불망비(不忘碑)’란 후세에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세워진 비석이란 뜻으로 을사늑약에 반발하여 전개된 항일 의병 당시 최익현 선생의 뜻에 따라 의병대에 합류했던 독립운동가 신용희(申龍熙) 선생을 기리는 비석이다. 신용희 선생은 1907년 의병을 이끌고 장성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장렬하게 전사한다. 신용희 선생의 불망비는 일제강점기 때인 1925년에 세워졌다.     

무성서원, 신용희 불망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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