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일형 답사
1. 서원(書院) 이야기
서원(書院)은 조선시대 성현(聖賢)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학자를 키우기 위해 전국 곳곳에 설립한 사설 교육 기관으로 오늘날의 지방사립대학교라고 볼 수 있다. 서원의 공간은 크게 성현(聖賢)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건물인 사우(祠宇)와 청소년을 교육하는 서재(書齋)로 나눌 수 있다.
서원의 교육은 원장(院長), 강장(講長), 훈장(訓長) 등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원장은 서원의 대표자로 보통 퇴직 관료나 당대의 유명한 석학이 맡았으며, 이들은 서원 기강 확립과 원생들의 행실 규찰을 담당했지만 서원 운영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강장은 서원에 입학한 원생들에게 경학과 예절을 가르치는 역할이었고, 훈장은 면학과 교관의 일종인 훈육을 책임지는 역할이었다.
서원의 운영은 서원의 모든 일을 주관하며 재장(齋長)이라고도 불린 도유사(都有司) 또는 장의(掌議)가 맡았다. 이 밖에도 도유사 다음가는 직책인 부유사(副有司), 여러 사무를 분담해서 맡은 유사(有司), 간사 역할을 하는 직월(直月), 서기 역할을 하는 직일(直日)등이 있었다.
성균관이나 향교는 번잡한 도시에 있어서 앞으로는 번거로운 학칙에 얽매이고 뒤로는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기 쉬우니, 어찌 서원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퇴계 이황
서원은 성균관, 향교와 함께 조선시대 대표적인 고등 교육 기관으로, 국립으로 전국 각 도시에 분배된 향교와 대비되는 사립학교로서 지역 문화를 대표하는 장소였다. 그래서 서원은 교육 기능과 교화 기능을 그 양축으로 삼고 있었다. 조선 중기 사대 사화를 비롯한 정치적 혼란으로 말미암아 학자들은 지방에 은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하게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선배 유학자들을 기리고 제사하는 사당의 기능까지 통합한 서원을 창설하기 시작한 것이다.
먼저 교육 기능에 대해서 살펴보면, 서원에서 교육의 목표는 인품이 훌륭한 성현을 본받고 그러한 관리를 양성하는 데 있었다. 이를 위해 학생들은 다른 교육 기관과 마찬가지로 소학에서부터 시작하여 사서오경을 중심으로 공부에 전념했다. 그리고 사서와 오경을 모두 익힌 다음에는 가례, 근사록과 같은 성리학에 관한 책들을 익히도록 했다.
서원의 또 한 가지 기능인 교화 기능은 주로 선현에 대한 제사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제사의 대상에 있어서는 성균관이나 향교와는 차이가 있었다. 성균관과 향교의 문묘(文廟)에 배향된 인물은 공자를 비롯해 안회, 증자, 자사, 사성(四聖)과 공자 문하의 십철, 그리고 송나라 6현과 우리나라 18현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은 신라, 고려,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나라의 최고 정신적 지주에 오른 한국의 유학자 18명을 말하며 동국 18현(東國 十八賢)이라고도 한다. 그 18명의 배향 인물은 다음과 같다.
홍유후(弘儒侯) 설총, 문성공(文成公) 안유, 문경공(文敬公) 김굉필, 문정공(文正公) 조광조
문순공(文純公) 이황, 문성공(文成公) 이이, 문원공(文元公) 김장생, 문경공(文敬公) 김집
문정공(文正公) 송준길, 문창후(文昌侯) 최치원, 문충공(文忠公) 정몽주, 문헌공(文憲公) 정여창
문원공(文元公) 이언적, 문정공(文正公) 김인후, 문간공(文簡公) 성혼, 문열공(文烈公) 조헌
문정공(文正公) 송시열, 문순공(文純公) 박세채
그러나 서원은 사학(私學)이라는 특성상 대부분 지역의 문중에 의해 건립되었던 까닭에 자신의 문중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인물 가운데 뛰어난 인물을 배향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국립인 성균관과 향교에 비해 배향 인물의 선택 폭이 훨씬 넓었다.
성균관이나 향교와 마찬가지로 서원에서도 봄과 가을에 걸쳐 일 년에 두 차례의 제사를 지냈다. 제사일은 성균관과 향교에서 봉행하는 석전(釋奠)에 비하여 그 격이 낮았던 관계로 그 날짜를 석전보다 뒤로 하였다. 즉, 석전이 상정일(上丁日)에 봉행되는 데 비하여 서원의 제사는 중정일(中丁日) 또는 하정일(下丁日)로 잡아 거행함으로써 그 격을 구분하였다.
이외에도 서원에서는 다양한 기능을 담당했는데 지방의 인재들이 모이는 집회 장소였으며, 학생들의 학문을 위해 다양한 도서를 보관하는 도서관의 기능과 책의 출판 기능도 담당했다. 그래서 많은 서원에는 장판각 또는 장판고라는 서고가 있다. 이외에도 서원은 지방의 풍속을 순화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는 곳이었고 또한 그 지역의 여론을 선도하였음은 물론, 지역별 향약을 기준으로 효자나 열녀 등을 표창하고 윤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사람을 규탄하는 등의 직접적인 교화 활동도 하였다.
서원의 기원은 당나라 시기였으나 실질적인 형태는 송나라 때에 와서 완성되었으며, 특히 서원의 위상은 주자에 의해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서원이 처음 설립된 것은 1543년이었는데, 당시 풍기 군수였던 주세붕이 안향을 추모하기 위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을 설립하였다. 안향은 중국의 ‘주자학’이라는 학문을 우리나라에 도입한 최초의 학자였다. 주세붕이 세운 최초의 서원은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라 칭했지만, 후에 풍기 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이 서원에 대한 국가적인 지원을 건의하였고 이에 명종이 서적 등의 물자와 함께 친필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 사액(賜額)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퇴계 이황을 비롯한 성리학자들에 의해 서원의 보급 운동이 일어나면서 전국에 많은 서원이 건립되었다. 그리하여 명종 대에 건립된 수가 17개소에 불과했던 서원이 선조 대에는 100개가 넘었으며, 18세기 중반에는 전국에 700여 개소에 이르렀다.
이처럼 서원이 늘어나면서 부작용이 커졌다. 서원에 딸린 토지에는 세금이 부과되지 않았고, 서원의 노비는 국역(國役)을 지지 않았다. 따라서 서원이 증가함에 따라 국가 재정에 문제가 생겼다. 엄청난 숫자의 서원들 때문에 민생에 끼치는 폐단이 엄청났고, 심지어는 살아있는 사람을 모시거나 성현도 아니지만 가문의 조상이라는 이유로 모시느라 집안마다 서원을 만들고, 한 사람을 모시는 서원이 5~6곳에 이르는 등 그 부작용이 말이 아니었다.
19세기부터 세도 가문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서원의 중앙에서의 정치적 영향력은 사실상 없어졌지만, 무엇보다도 지방경제에 미치는 폐단이 말이 아니었다. 선현의 제사를 지낸다는 명목으로 지방 농민들을 사사로이 수탈하였으며 이에 반발하는 지역민들을 향약이나 반상의 도리를 어겼다 하여 처벌하거나 지역 사회에서 매장시키는 전횡을 저지르고 나라에서 막대한 식량과 노비를 제공받으면서 세금을 내지 않는 면세 특권이 있어 국가 재정을 악화시켰다.
특히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병을 보낸 만력제(萬曆帝)를 제사 지내기 위한 ‘만동묘’와 송시열을 모신 ‘화양동서원’은 워낙 입김이 세서 지역의 백성들에게 서원의 제사 비용을 부담시켰으며 할당된 비용을 내지 못한 백성들을 함부로 붙잡아서 폭행하거나 고문하는 등 그 폐해가 말이 아니었다. 당시 이 일대에 "원님 위에 감사, 감사 위에 참판, 참판 위에 판서, 판서 위에 삼정승, 삼정승 위에 승지, 승지 위에 임금, 임금 위에 만동묘지기"라는 노래가 퍼졌을 정도였다.
서원의 폐단에 맨 처음 손을 댄 것은 숙종이었다. 숙종은 한 사람을 중복되게 모시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고, 그의 아들 영조 대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인 서원 정리가 이뤄진다. 영조 3년(1727) 12월에는 한 사람당 하나의 서원만 허가하면서 비교적 나중에 세워졌던 서원들을 정리했으며 영조 23년(1747)에도 허가 없이 사적으로 세운 서원들을 정리했다. 고종 대에서는 흥선대원군의 등장으로 서원 정리의 속도가 빨라지는데 당장 고종 1년(1864)에는 사사로이 세워진 서원과 중첩되는 서원들을 정리하였다.
사실 유학자들도 서원이 대거 정리될 것이라는 분위기를 읽긴 읽었는지 이미 고종 1년에 대원군의 직계 조상인 인평대군을 모시는 서원을 세웠으나, 이 역시 철폐된다. 그 후 고종 5년에 서원의 원장을 고을 수령이 맡게 하고, 허용된 정원 이외의 병역 기피자들을 모조리 군역에 넣는가 하면 면세 혜택을 없애 서원의 특혜를 모두 없애고, 관의 통제하에 둔 다음에 곧이어 사액서원 47개소만 남기고 전면 철폐했다. 숙종, 영조 대에 줄곧 지적된 중첩된 서원은 사액서원이라 하더라도 예외 없이 모두 철폐되었다. 이 당시 난립해 있던 서원은 1,000여 곳이 넘었으며 안동 한 곳에만 40여 개의 서원이 있었다.
"진실로 백성에게 해가 되는 것이 있으면 비록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나는 용서하지 않겠다. “
흥선대원군, 유림 세력들이 극도로 반대하던 서원 철폐 정책을 강행하고 절대로 굽히지 않겠다는 발언.
2. 유네스코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병산서원(屛山書院)
병산서원은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에 위치한 서원으로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생과 그의 제자이자 셋째 아들인 류진 선생을 배향한 서원이다. 이곳은 류성룡이 31세 때인 1575년에 풍산 상리에 있는 ‘풍악서당(豊岳書堂)’을 이곳으로 옮겨와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풍악서당은 고려 시대부터 있었는데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리를 피해 안동으로 피난을 왔다가 난리 중에도 풍악서당에서 유생들의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크게 감동하여 많은 서책과 사패지(賜牌地)를 내려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원래 풍악서당이 있던 곳은 사람의 왕래가 잦아 주변 환경이 혼잡하고 산만하여 학문에 방해가 되었다. 이에 류성룡이 이건을 주도해 선조 5년(1572) 경치가 뛰어나면서 사람의 왕래가 적은 지금의 병산서원 위치로 옮겨졌다.
1607년 류성룡이 사망한 후 지역 유림이 ‘풍악서당’ 안에 그를 추모하는 존덕사를 짓고 선생의 위패를 모셨으며 매년 봄과 가을 향사를 받들면서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4년 뒤 서원 앞 낙동강 건너 병풍 모양으로 둘러서 있는 병산의 이름을 따서 ‘병산서원’으로 바꿨다. 그 후 철종 14년(1863)에 병산서원으로 사액을 받았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았다. 사적 제26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한국의 서원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9개의 서원 중 하나이다.
경주의 옥산서원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중복으로 등재되어 있는데 2010년 7월 31일에 하회마을의 일원으로 먼저 등재되었으며 2019년 7월 6일에는 한국의 서원 중 하나로도 등재되어 세계유산 2관왕이 되었다.
2020년 4월 25일, 안동시 풍천면 인금리에서 시작된 산불이 강풍에 재발화하면서 병산서원은 최대 위기를 맞았다. 초속 10m 안팎의 강풍으로 진화작업이 순탄치 않자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화재 예방에 총력을 기울였고 안동 산불 화마(火魔)로부터 병산서원을 지켜낼 수 있었다.
3.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생
조선의 문신, 외교관이며 학자이다. 황해도 관찰사 류중영과 구 안동 김 씨 진사(進士) 김광수(金光粹)의 딸 김소강(金小姜)의 아들로 외가가 있던 경상북도 의성에서 태어났다. 그 후 안동에서 지내다가 20대에 퇴계 이황의 제자로 들어갔다.
책을 읽을 때 한 번 눈을 스치면 환히 알아 한 글자도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을 정도로 머리가 좋아 이황의 수제자로 명망이 높았으며 이황도 "이 사람은 하늘이 내린 사람이다."라며 높이 평가했다. 어린 시절 한양으로 올라와서 지냈다고 하는데 이때 충무공 이순신과도 친밀하게 지냈다. 한양에 살 무렵에는 지금의 충무로에 살았는데 지금도 충무로에 가면 '서애길'이라는 길이 있고 그곳에 류성룡의 집터라는 표석이 있다.
1564년 명종 때에 소과에 합격했고 1566년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여러 내직을 거쳤으며 선조가 즉위한 뒤에도 중용되어 그럭저럭 순탄한 관직 코스를 밟았으며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 다만 그가 활동을 시작한 시기는 선조의 즉위와 함께 갓 집권한 사림파가 다시 동인과 서인으로 나누어지는 시기였고 류성룡도 당쟁에 휩쓸리게 되었는데 그는 상대적으로 이황과 조식의 제자가 많았던 동인에 속했다.
특히 정여립의 난과 관련한 기축옥사와 그와 관련한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있었는데 그는 원만한 처신과 선조의 비호로 별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러나 건저 문제(세자 책봉 문제)로 서인의 영수 정철이 실각하자 이후 서인에 대한 처우를 두고 동인이 이산해, 정인홍이 이끄는 강경파 북인과 온건파 남인으로 분열하는데 류성룡은 남인의 영수가 되었으며 이 무렵 우의정에 임명되어 뒤이어 정승이 되었다.
"지금 조정의 신하들 가운데 명민하고 능란하며 경우가 바르고 말솜씨 있는 사람은 류 정승만 한 이가 없다."
이항복, 선조수정실록
이때쯤 일본의 전국시대가 종결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의 야욕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었던 참이었는데 서인이었던 황윤길의 강력한 왜군 침입 예고와 대비 주장에 이순신이나 권율 등을 천거해서 등용하도록 조치하고 각 지역의 방비를 튼튼히 하는 등 전쟁 준비를 하려고 노력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졌고 조선군은 속절없이 무너져 선조가 몽진을 가야 할 상황까지 몰리고 말았다. 이때 전란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간관들의 탄핵으로 인해 잠시 이산해와 함께 파직되었다가 복직되었고 이때 비변사의 도제조이면서 의정부의 수장인 영의정이자 도체찰사가 되어 조선의 내정과 군사를 모두 총괄했으며 조선 후기의 군영으로 유명한 훈련도감을 설치한 것도 바로 그였고 원군으로 온 명나라 군대를 원만히 상대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그 외 화포를 제조하고 성곽을 수축했으며 새로 설치된 훈련도감의 관리역으로 임명되어 병법서를 강의하는 등 군비 확충에도 많은 일을 했다. 전시에 행해진 류성룡의 조치들은 유연하고도 실용적이었는데 누르하치가 뜬금없이 조선에 구원병을 보내겠다는 제안을 하자 "당나라가 안녹산의 난을 막으려고 위구르와 티베트에 원병을 청했다가 난리가 났듯 이걸 받아들이면 훗날의 우환이 될 수 있으니 거절하는 게 좋겠다. 다만 여진족으로서는 예전부터 우리에 대한 원한이 크므로 단호히 물리쳐 괜히 자극할 게 아니라 '도와준다는 것은 고마운데 지금은 왜란이 거의 평정되었으므로 굳이 너희한테까지 수고를 끼치고 싶지는 않다' 정도로 사양하는 게 좋겠다"라는 의견을 내면서 다가올 상황에 대처했다.
전란이 끝나갈 무렵인 1598년 명나라 경략 정응태가 "조선과 일본이 합세해서 명나라를 치러 온다"라고 명나라 조정에 무고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를 해명하기 위해 무게감 있는 대신이 가야 한다는 여론이 우세했고 선조 또한 류성룡에게 이를 해명하러 갔다 오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류성룡은 노모가 있다는 이유로 사양하였다. 이를 빌미로 북인 세력은 남인의 영수였던 류성룡을 탄핵하였고 결국 삭탈 관직되어 낙향했다. 이후 1600년 복직되었으나 벼슬을 하지 않고 은둔 생활을 하면서 저술에 힘썼는데 그 시기에 써진 저작 중 하나가 바로 『징비록(懲毖錄)』이다. 자신이 겪은 임진왜란의 실태와 참상 및 이를 반성하는 의미에서 저술한 것으로 지금까지도 임진왜란 연구사의 중요한 자료로 꼽히고 있다.
세종 시대의 황희, 같은 시대의 이원익, 정조 시대의 채제공 등과 더불어 조선을 대표하는 명재상으로 꼽힌다. 행정, 군사, 외교 등 어떤 업무에도 능숙한 인물이었으며 사람 보는 눈도 뛰어나서 수많은 인재를 등용했다.
개인적으로는 바둑, 의술, 점술, 천문에도 통달하여 그와 관련한 일화들을 많이 남겼다. 특히 바둑은 국수(國手)라고 불릴 정도로 당대 조선을 대표하는 고수였다고 한다. 이여송과 선조가 바둑을 둘 때 선조를 위해 양산을 받치고 거기에 구멍을 내어 구멍 틈으로 들어오는 빛으로 선조에게 훈수를 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4. 역사 속 ‘병산서원’
서원은 사림과 향촌 유림의 의견 표출을 할 수 있는 핵심 공간이었으며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 있을 때 지역의 여론을 주도한 곳이다. 병산서원은 조선 후기 안동 뿐 아니라 영남 지역 전체 사림들의 여론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었는데, 대표적인 예로 회퇴변무소(晦退辨誣疏)와 예송논쟁소(禮訟論爭疏)가 있다. 회퇴변무소는 광해군 3년(1611년) 정국을 주도했던 북인들이 남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회재 이언적과 퇴계 이황의 문묘 배향을 철회하려는 움직임에 반발해 영남권 문인들이 상소문을 올리며 반대했던 사건이다. 이를 주도한 게 병산서원의 문인들이었다.
현종 시기에 진행된 예송논쟁에서도 병산서원 유림의 역할이 눈에 띈다. 현종 7년(1666) 3월 17일 승정원에 제출된 영남 유림의 복제소(服制疏)는 류성룡의 후손들이자 병산서원의 유림이 주도한 상소였다. 효종의 죽음으로 인한 자의대비의 복제 논란 때 영남 남인들이 서인의 예론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린 것인데 당시 영남 유생 1,100명이 참여하였다. 비록 1차 예송의 결과를 뒤엎는 데는 실패했지만 2차 예송논쟁 때는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지며 정국의 주도권을 다시 장악하게 된다.
병산서원이 배향하고 있는 류성룡이 남인의 영수였던 데다 예송논쟁 등 치열한 당쟁기를 거치면서 반대파의 극심한 견제가 계속됐기 때문에 왕으로부터 사액을 받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철종 14년인 1863년에야 사액이 결정됐지만 곧이어 철종이 사망해 왕이 내리는 새로운 이름의 현판은 받지 못했다. 사액서원이지만 다른 사액서원처럼 국왕이 내리는 현판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종전의 병산을 그대로 사용하는 이유이다.
5. 병산서원(屛山書院)의 주요 공간
복례문(復禮門)
‘논어 「안연(顔淵)」편에 “안연이 인(仁)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하기를, ‘자신의 사욕을 이겨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 인을 실행하는 것이니, 하루라도 자신의 사욕을 이겨 예로 돌아간다면 천하 사람이 모두 어질다고 할 것이다.
顔淵問仁 子曰 克己復禮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안연문인 자왈 극기복례위인 일일극기복례 천하귀인언)
사람마다 욕망과 탐욕의 유혹을 이겨내고 예(禮)로서 자신을 절제하여 유학의 종착점인 인(仁)을 이룩하라는 의미에서 ‘복례문’이라 하였다. 복례문은 다른 서원의 외삼문과는 다르게 가운데의 솟을대문만 있고 양옆은 벽면으로 건축되었다.
복례문을 지나면 왼편으로 물길을 끌어들여 만든 광영지(光影池)라는 천원지방(天圓地方) 형태의 연못이 있다. 규모는 크지 않으나 수심(修心)과 양성(養性)을 근본으로 하여 학문에 정진할 수 있도록 배려한 서원 속의 작은 정원이다. 광영지의 ‘광영(光影)’은 주자의 관서유감 시의 天光雲影共徘徊 (천광운영공배회)에서 인용한 것이다.
觀書有感(관서유감) 글 읽는 즐거움 -朱熹(주희)-
半畝方塘一鑑開(반무방당일감개)조그마한 연못은 거울 같아서
天光雲影共徘徊(천광운영공배회)하늘빛과 구름이 함께 노닌다,
問渠那得淸如許(문거나득청여허)묻건대 어찌하여 그리 맑은 고
爲有原頭活水來(위유원두활수래)끝없이 샘물 솟아 그렇더란다
昨夜江邊春水生(작야강변춘수생)어젯밤 강변에 봄비 내려서,
艨艟巨艦一毛輕(몽동거함일모경)크나큰 전함도 깃털 같아라,
向來枉費推移力(향래왕비추이력)애써서 밀어도 소용없더니
今日流中自在行(금일류중자재행)오늘은 물길에 저절로 가네,
만대루(晩對樓) : 보물로 지정(2020.12.28)
복례문과 광영지를 지나면 눈앞에서 펼쳐지는 건축물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에 감탄할 시간이다. 서원 건축의 백미, 병산서원 만대루이다. 만대루는 서원 누각이 가져야 하는 기능을 잘 유지하면서, 동시에 자연경관을 이용하는 전통적인 조경 기법을 잘 살렸고, 인공적 조작과 장식을 억제하고 건축의 기본에 충실한 성리학적 건축관을 잘 보여주는, 우리나라 서원 누각의 대표작으로 많은 답사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당나라 시인 두보가 삼국지의 유비가 최후를 맞은 곳인 유명한 백제성 절벽 위의 누대를 바라보면서 지은 시의 ‘翠屏宜晚對(취병의 만대)’에서 종일토록 바라보아도 싫지 않다는 뜻에서 만대루라 하였다.
白帝城樓(백제성루) - 杜甫(두보) -
江度寒山閣(강도한산각) - 강은 차가운 산 전각을 지나고,
城高絕塞樓(성고절새루) - 성은 아득한 변방 누각에 높다.
翠屏宜晚對(취병의만대) - 푸른 절벽은 늦을 녘에 마주 대할 만하고
白谷會深遊(백곡회심유) - 흰 바위 골짜기는 여럿 모여 그윽이 즐기기 좋구나.
急急能鳴雁(급급능명안) - 울 줄 아는 기러기 빠르디 빠르고,
輕輕不下鷗(경경부하구) - 내려오지 않는 갈매기 가볍디가볍다.
彝陵春色起(이릉춘색기) - 이릉에 봄빛이 일어나니,
漸擬放扁舟(점의방편주) - 작은 배를 점점 띄우려 한다.
두보의 시구처럼 만대루는 ‘푸른 절벽은 저녁 무렵 마주 대할 만하다’는 의미인데 누각의 이름을 주변 자연경관의 아름다움을 빗대서 표현한 것이 특이하다.
만대루는 정면 7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각의 기둥과 기둥 사이에서 바라보는 낙동강과 병산의 절경은 각각 7개의 산수화가 놓여 있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절경 중의 절경이다. 많은 미술사학자, 역사가, 건축가, 답사객들이 극찬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만대루 천장의 대들보 한쪽에는 북이 달려 있는데, 이는 서원의 금기인 여자, 사당패, 술이 반입되었을 때 두드리는 북이다.
입교당(入敎當)
입교당은 서원의 중심 강당으로‘입교(立敎)’는 『小學』 ‘立敎’ 편에서 하늘로 부여받은 착한 본성에 따라 인간 윤리를 닦아가는 가르침을 바르게 세운다는 것에서 인용한 것이다. 유생들이 배워야 할 성현의 가르침인 오륜(五倫)을 바르게 세운다는 의미이며, 성현의 가르침을 받아 자기의 몸을 바로 세우고 나아가 선비로서의 사명을 바로 세우는 공부를 하였다.
명성재(明誠齋)
입교당 동쪽 협실인 명성재는 서원의 원장이 기거하는 방이다. ‘명성’이란 『중용』의 “성(誠)으로 말미암아 밝아짐을 성(性)이라 이르고, 명(明)으로 말미암아 성실해짐을 교(敎)라 이르니, 성실하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성실해진다”는 구절에서 유래한 것이다. 교육을 통해 성실함과 참됨에 이르게 한다는 의미이다. 남계서원의 강당인 명성당과 그 의미하는 바가 같다.
경의재(敬義齋)
입교당 서쪽의 협실인 경의재에는 서원의 교수들이 기거했습니다. 『주역』의 「곤괘」에는 “군자는 경(敬)으로 안을 곧게 하고, 의(義)로 밖을 방정하게 하여 경과 의가 바르게 서면 덕이 외롭지 않다”에서 나온 말이다. 경(존경)으로써 마음을 수양하고 의(정의)를 판단 기준으로 삼아 행동하라는 의미이다.
『논어』에 “경으로 자신을 닦는다”, “행동은 돈독하고 경건해야 한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퇴계 이황은 경을 만사의 근본이며 성인의 학문으로 제시했다. 유교에서 의는 사리(事理), 즉 일의 마땅한 도리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따라서 경의란 학문을 함에 있어 사리를 분명히 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는 의지를 밝히는 것이다.
동직재(動直齋)
‘동직(動直)’은 주돈이가 쓴 『통서(通書)』의 “사욕이 없어지면 마음이 고요할 때 텅 비게 되고, 움직일 땐 올곧게 된다”에서 가져왔다. 강당 쪽의 작은 방은 학생회장 격인 유사(有司)의 독방이거나 서적을 보관하는 장서실이고 2칸 규모의 큰 방은 학생들이 단체로 기거하는 방이었다. 좌고우저(左高右低)의 원리에 따라 동재인 동직재에는 상급생들이, 서재인 정허재에는 하급생들이 기거하였다.
정허재(靜虛齋)
정허재는 병산서원 서재로 동재처럼 주돈이의 글에서 가져온 구절이며, ‘정허(靜虛)’는 홀로 마음을 비우면 사물을 꿰뚫어 보아 통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병산서원의 동재와 서재인 동직재, 정허재는 개인의 욕심을 비우고, 사물을 올바르게 판단하며, 정직하게 행동하라는 배움의 뜻을 함축하고 있다.
존덕사(尊德祠)
존덕사는 병산서원의 사당으로 ‘존덕(尊德)’은 류성룡의 학덕을 존경한다는 의미이다. 1613년 사당을 짓고 1614년 류성룡의 위패를 모시며 병산서원을 세웠는데, 1620년 이황을 모시는 여강서원이 건립되자 위패를 그쪽으로 옮겼다. 그러던 중 1629년 한 고을에 두 사당이 있어도 좋다는 근거가 생겨 병산서원으로 다시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복원했다. 현재는 서애 류성룡과 그의 아들인 수암 류진을 배향하고 있다. 서애 선생의 위패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영의정문충공서애류선생'(領議政文忠公西厓柳先生)
한편 사우의 출입구인 내삼문에는 태극(太極)이, 기둥에는 주역의 팔괘(八卦)가 그려져 있는 점이 특징이다. 존덕사 앞에는 정료대가 놓여 있는데 아마도 야간에 제사를 지낼 때 필요한 야간조명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구조이며 풍판이 설치된 맞배지붕 건물이며 변형된 익공(翼工) 양식의 겹처마로 단청이 되어 있으며 전면 좌우에 계단을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