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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은 May 29. 2024

6. 답사의 신, 서원(書院)에 가다! -도동서원 -

당일형 답사

1.서원(書院) 이야기     


 서원(書院)은 조선시대 성현(聖賢)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학자를 키우기 위해 전국 곳곳에 설립한 사설 교육 기관으로 오늘날의 지방사립대학교라고 볼 수 있다. 서원의 공간은 크게 성현(聖賢)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건물인 사우(祠宇)와 청소년을 교육하는 서재(書齋)로 나눌 수 있다.     

 

 서원의 교육은 원장(院長), 강장(講長), 훈장(訓長) 등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원장은 서원의 대표자로 보통 퇴직 관료나 당대의 유명한 석학이 맡았으며, 이들은 서원 기강 확립과 원생들의 행실 규찰을 담당했지만 서원 운영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강장은 서원에 입학한 원생들에게 경학과 예절을 가르치는 역할이었고, 훈장은 면학과 교관의 일종인 훈육을 책임지는 역할이었다.     


 서원의 운영은 서원의 모든 일을 주관하며 재장(齋長)이라고도 불린 도유사(都有司) 또는 장의(掌議)가 맡았다. 이 밖에도 도유사 다음가는 직책인 부유사(副有司), 여러 사무를 분담해서 맡은 유사(有司), 간사 역할을 하는 직월(直月), 서기 역할을 하는 직일(直日)등이 있었다.     

     

성균관이나 향교는 번잡한 도시에 있어서 앞으로는 번거로운 학칙에 얽매이고 뒤로는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기 쉬우니, 어찌 서원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퇴계 이황     


 서원은 성균관, 향교와 함께 조선시대 대표적인 고등 교육 기관으로, 국립으로 전국 각 도시에 분배된 향교와 대비되는 사립학교로서 지역 문화를 대표하는 장소였다. 그래서 서원은 교육 기능과 교화 기능을 그 양축으로 삼고 있었다. 조선 중기 사대 사화를 비롯한 정치적 혼란으로 말미암아 학자들은 지방에 은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하게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선배 유학자들을 기리고 제사하는 사당의 기능까지 통합한 서원을 창설하기 시작한 것이다.     


 먼저 교육 기능에 대해서 살펴보면, 서원에서 교육의 목표는 인품이 훌륭한 성현을 본받고 그러한 관리를 양성하는 데 있었다. 이를 위해 학생들은 다른 교육 기관과 마찬가지로 소학에서부터 시작하여 사서오경을 중심으로 공부에 전념했다. 그리고 사서와 오경을 모두 익힌 다음에는 가례, 근사록과 같은 성리학에 관한 책들을 익히도록 했다.     


 서원의 또 한 가지 기능인 교화 기능은 주로 선현에 대한 제사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제사의 대상에 있어서는 성균관이나 향교와는 차이가 있었다. 성균관과 향교의 문묘(文廟)에 배향된 인물은 공자를 비롯해 안회, 증자, 자사, 사성(四聖)과 공자 문하의 십철, 그리고 송나라 6현과 우리나라 18현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은 신라, 고려,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나라의 최고 정신적 지주에 오른 한국의 유학자 18명을 말하며 동국 18현(東國 十八賢)이라고도 한다. 그 18명의 배향 인물은 다음과 같다.

     

홍유후(弘儒侯) 설총, 문성공(文成公) 안유, 문경공(文敬公) 김굉필, 문정공(文正公) 조광조

문순공(文純公) 이황, 문성공(文成公) 이이, 문원공(文元公) 김장생, 문경공(文敬公) 김집

문정공(文正公) 송준길, 문창후(文昌侯) 최치원, 문충공(文忠公) 정몽주, 문헌공(文憲公) 정여창

문원공(文元公) 이언적, 문정공(文正公) 김인후, 문간공(文簡公) 성혼, 문열공(文烈公) 조헌

문정공(文正公) 송시열, 문순공(文純公) 박세채     


 그러나 서원은 사학(私學)이라는 특성상 대부분 지역의 문중에 의해 건립되었던 까닭에 자신의 문중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인물 가운데 뛰어난 인물을 배향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국립인 성균관과 향교에 비해 배향 인물의 선택 폭이 훨씬 넓었다.  

   

 성균관이나 향교와 마찬가지로 서원에서도 봄과 가을에 걸쳐 일 년에 두 차례의 제사를 지냈다. 제사일은 성균관과 향교에서 봉행하는 석전(釋奠)에 비하여 그 격이 낮았던 관계로 그 날짜를 석전보다 뒤로 하였다. 즉, 석전이 상정일(上丁日)에 봉행되는 데 비하여 서원의 제사는 중정일(中丁日) 또는 하정일(下丁日)로 잡아 거행함으로써 그 격을 구분하였다.     


 이외에도 서원에서는 다양한 기능을 담당했는데 지방의 인재들이 모이는 집회 장소였으며, 학생들의 학문을 위해 다양한 도서를 보관하는 도서관의 기능과 책의 출판 기능도 담당했다. 그래서 많은 서원에는 장판각 또는 장판고라는 서고가 있다. 이외에도 서원은 지방의 풍속을 순화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는 곳이었고 또한 그 지역의 여론을 선도하였음은 물론, 지역별 향약을 기준으로 효자나 열녀 등을 표창하고 윤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사람을 규탄하는 등의 직접적인 교화 활동도 하였다.     


 서원의 기원은 당나라 시기였으나 실질적인 형태는 송나라 때에 와서 완성되었으며, 특히 서원의 위상은 주자에 의해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서원이 처음 설립된 것은 1543년이었는데, 당시 풍기 군수였던 주세붕이 안향을 추모하기 위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을 설립하였다. 안향은 중국의 ‘주자학’이라는 학문을 우리나라에 도입한 최초의 학자였다. 주세붕이 세운 최초의 서원은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라 칭했지만, 후에 풍기 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이 서원에 대한 국가적인 지원을 건의하였고 이에 명종이 서적 등의 물자와 함께 친필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 사액(賜額)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퇴계 이황을 비롯한 성리학자들에 의해 서원의 보급 운동이 일어나면서 전국에 많은 서원이 건립되었다. 그리하여 명종 대에 건립된 수가 17개소에 불과했던 서원이 선조 대에는 100개가 넘었으며, 18세기 중반에는 전국에 700여 개소에 이르렀다.     


 이처럼 서원이 늘어나면서 부작용이 커졌다. 서원에 딸린 토지에는 세금이 부과되지 않았고, 서원의 노비는 국역(國役)을 지지 않았다. 따라서 서원이 증가함에 따라 국가 재정에 문제가 생겼다. 엄청난 숫자의 서원들 때문에 민생에 끼치는 폐단이 엄청났고, 심지어는 살아있는 사람을 모시거나 성현도 아니지만 가문의 조상이라는 이유로 모시느라 집안마다 서원을 만들고, 한 사람을 모시는 서원이 5~6곳에 이르는 등 그 부작용이 말이 아니었다.     


 19세기부터 세도 가문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서원의 중앙에서의 정치적 영향력은 사실상 없어졌지만, 무엇보다도 지방경제에 미치는 폐단이 말이 아니었다. 선현의 제사를 지낸다는 명목으로 지방 농민들을 사사로이 수탈하였으며 이에 반발하는 지역민들을 향약이나 반상의 도리를 어겼다 하여 처벌하거나 지역 사회에서 매장시키는 전횡을 저지르고 나라에서 막대한 식량과 노비를 제공받으면서 세금을 내지 않는 면세 특권이 있어 국가 재정을 악화시켰다.     


 특히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병을 보낸 만력제(萬曆帝)를 제사 지내기 위한 ‘만동묘’와 송시열을 모신 ‘화양동서원’은 워낙 입김이 세서 지역의 백성들에게 서원의 제사 비용을 부담시켰으며 할당된 비용을 내지 못한 백성들을 함부로 붙잡아서 폭행하거나 고문하는 등 그 폐해가 말이 아니었다. 당시 이 일대에 "원님 위에 감사, 감사 위에 참판, 참판 위에 판서, 판서 위에 삼정승, 삼정승 위에 승지, 승지 위에 임금, 임금 위에 만동묘지기"라는 노래가 퍼졌을 정도였다.     


 서원의 폐단에 맨 처음 손을 댄 것은 숙종이었다. 숙종은 한 사람을 중복되게 모시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고, 그의 아들 영조 대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인 서원 정리가 이뤄진다. 영조 3년(1727) 12월에는 한 사람당 하나의 서원만 허가하면서 비교적 나중에 세워졌던 서원들을 정리했으며 영조 23년(1747)에도 허가 없이 사적으로 세운 서원들을 정리했다. 고종 대에서는 흥선대원군의 등장으로 서원 정리의 속도가 빨라지는데 당장 고종 1년(1864)에는 사사로이 세워진 서원과 중첩되는 서원들을 정리하였다.     

 사실 유학자들도 서원이 대거 정리될 것이라는 분위기를 읽긴 읽었는지 이미 고종 1년에 대원군의 직계 조상인 인평대군을 모시는 서원을 세웠으나, 이 역시 철폐된다. 그 후 고종 5년에 서원의 원장을 고을 수령이 맡게 하고, 허용된 정원 이외의 병역 기피자들을 모조리 군역에 넣는가 하면 면세 혜택을 없애 서원의 특혜를 모두 없애고, 관의 통제하에 둔 다음에 곧이어 사액서원 47개소만 남기고 전면 철폐했다. 숙종, 영조 대에 줄곧 지적된 중첩된 서원은 사액서원이라 하더라도 예외 없이 모두 철폐되었다. 이 당시 난립해 있던 서원은 1,000여 곳이 넘었으며 안동 한 곳에만 40여 개의 서원이 있었다.     


"진실로 백성에게 해가 되는 것이 있으면 비록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나는 용서하지 않겠다. “     


 흥선대원군, 유림 세력들이 극도로 반대하던 서원 철폐 정책을 강행하고 절대로 굽히지 않겠다는 발언.


2. 유네스코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도동서원(道東書院)     

 도동서원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에 있는 서원으로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선생을 배향한 서원으로 1568년 지방 유림에서 비슬산 동쪽 기슭에 세워 쌍계서원(雙溪書院)이라고 하였고 1573년에 사액을 받았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04년에 사당을 먼저 지어 위패를 봉안하고 이듬해 강당 등 서원 일곽을 완공했는데 건립을 주도했던 인물이 김굉필의 외증손자이자 뛰어난 예학자 한강 정구와 퇴계 이황이었다. 1605년에 사림들이 지금의 자리에 사우를 중건하여 '보로동서원(甫勞洞書院)'이라고 하였고, 1607년에는 선조로부터 친필로 쓴 '도동서원(道東書院)'이라는 편액을 하사 받아 지금의 도동서원으로 중건되었다. 광해군 2년(1610) 김굉필이 동방 5현으로 문묘에 종사된 후 도동서원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숙종 4년(1678)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추가로 배향하였다.      


 186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로 병산서원, 도산서원, 옥산서원, 소수서원과 더불어 5대 서원으로 꼽힌다. 서원 건축이 가져야 할 모든 건축적 규범을 완벽히 갖추고 있는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서원으로 평가받는다.     


 서원 내부에는 보물 제350호 도동서원 강당 사당 부장원(道東書院講堂祠堂附墻垣)이 있는데 강당(중정당), 사당, 담장을 말한다.     


'도동(道東)'의 의미는 '성리학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도는 중국에서 전해진 도(道)가 아니라 우리나라인 동방의 도를 의미한다. 일찍이 퇴계 이황은 김굉필을 두고 ‘동방도학지종(東方道學之宗)’이라고 칭송할 정도로 김굉필은 조선 도통의 계보를 잇는 중요한 인물로 정몽주와 함께 문묘에 배향되어야 한다는 요청이 중종 12년인 1517년부터 꾸준히 제기되었는데 이는 김굉필의 학문적 계보가 김종직-김숙자-길재-정몽주로 연결된다는 이유가 그중 하나였다.     


 당시 사림들은 김굉필의 학문적 계보 때문이 아니라 배운 것을 실천하고 후학에게 가르치면서 그가 삶에서 보여준 유교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였다. 김굉필은 단정하고 엄숙하며, 성리학의 가르침 특히 『소학』의 가르침을 독실하게 이해하고 실천하였다. 어린아이들이 보는 『소학』을 30세가 될 때까지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하여 ‘소학동자’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였다. 천거를 받아 관직에 나가기 전까지 처가인 합천에 ‘한훤당’이라 이름 붙인 서재를 짓고 학문을 연마하며 후학을 가르쳤다. 『소학』을 충분히 익히게 한 다음 『대학』을 가르쳐 성리학의 가르침을 근본부터 짜임새 있게 하였다는 평을 받았다.     


 도동서원은 조선 선비들에게 『소학』이 어떤 의미였고 ‘소학동자’라 불리던 김굉필이 정치적 업적은 크게 드러난 바 없음에도 정몽주와 조광조를 잇는 조선 도통의 주요한 계승자로 여겨진 이유를 깨닫게 해 준다. 함께 배향된 정구는 무너진 도동서원을 중건한 김굉필의 외손으로 『소학』에서 강조하는 예(禮)를 학문적으로 이론화하고 구체화하여 조선 사회의 규범으로 현실화시킨 중요한 인물이다. 도동서원은 조선 전기에서 중기 이후에 이르기까지 김굉필과 정구가 보여준 조선 유학의 독실한 가르침과 실천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도동서원은 우리나라 건축물 배치로서는 보기 드문 구조이다. 뒤로는 대니산이 있고, 앞으로는 낙동강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입지 조건에 동북향으로 자리하고 있는 형식이다. 이는 주변의 산수 및 지형지세를 고려하여 굳이 남향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 서원은 전면으로 평야와 백사장 그리고 낙동강이 흐르는, 시원하고 넓게 열려 있는 지형을 갖춘 곳이다.     


 도동서원은 조선 시대 서원 건축 공간의 전형성이 가장 우수하게 표현된 서원으로 평가된다. 한국 서원 건축 공간의 기본 배치는 강학 공간을 앞에 두고 제향 공간을 뒤에 두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인데 규모를 갖춘 서원은 문루로 대표되는 유식(遊息) 공간을 서원 진입 부분에 추가한다. 한국 서원 건축의 전학후묘 배치는 앞이 낮고 뒤가 높은 전저후고(前底後高)의 지형을 활용한 것이다. 높은 위계의 건축물이 지형적으로 높은 곳에 입지하는 것이 위계적으로 높은 권위를 상징한다고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학후묘의 공간 배치는 전후 상하를 꿰뚫는 종적 중심축을 기준으로 대칭적 건물 배치로 완성된다. 실제 도동서원은 경사지라는 지형 조건을 활용하여 수많은 축대를 쌓아 층위를 만들고 그 위에 건물을 배치하였다. 수월루로 대표되는 유식 공간, 강당과 동재, 서재로 구성된 강학 공간, 사당이 자리한 제향 공간이 위계에 따라 ‘전저후고’ 지형 위에 축선을 중심으로 누각 - 중문 - 강당 - 내삼문 - 사우 건물이 차례로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서원 건축뿐 아니라 대부분의 전통 건축물은 남쪽을 바라보는 남향이 일반적이지만 도동서원은 낙동강을 앞에 놓고 서원을 건축했기 때문에 북쪽을 향하고 있다. 방위에 연연하지 않고 주변의 산과 강의 위치를 고려해 건물을 배치한 것은 매사에 당당하고 꿋꿋했던 김굉필을 모신 서원답다고 할 수 있다.

도동서원의 전경

3. 대칭의 미학, 도동서원(道東書院)

 도동서원 건축에 담겨 있는 핵심 개념을 『중용(中庸)』인데, 이는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고 한쪽으로 치우치지도 아니한, 떳떳하고 변함이 없는 상태나 강도’를 말한다. 도동서원의 중심축은 입구의 은행나무를 시작으로 수월루, 강당, 사당가지 일직선으로 이어져 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중용이라는 철학적 개념은 도동서원에서 그 실체를 찾아볼 수 있다. 도동서원의 건물은 한국 어느 건축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대칭을 만들어 내고 있다. 유생들을 위한 공간은 물론 노비들이 기거했던 전사청마저 완벽한 대칭을 만들고 있다. 심지어 아궁이마저 땅속으로 매립하여 완벽한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완벽한 대칭이 이루고자 하는 바는, 치우치지 않고 정확한 중심을 잡았을 때 어디로든 쉽게 흔들리지 않는 진리, 선비라면 마땅히 평생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표현하고자 도동서원의 건물들은 어디로든 치우치지 않는 대칭을 이루고 있다.     


 또한 처마에는 단청을 달지 않았는데 이러한 장식을 배제한 처마는 가식을 지양하며 청렴한 삶을 살았던 선비들의 삶을 재현해주고 있다.      

도동서원의 전사청, 대칭의 미학을 보여주고 있다.

3.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선생

 

 김굉필은 단종 시기(1454년) 태어나서 연산군(1504년) 시기까지 50년을 살았다. 한성부 정릉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때 선대의 고향인 대구 달성군 현풍으로 이주해서 성장했다. 김굉필은 쌍둥이 태어났는데 아버지 김유는 쌍둥이 형제를 포함하여 13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모두 어려서 요절하고 김굉필만 살아남아 독자로 자랐다.


 성종 3년(1472) 18세가 되던 해에 경남 합천군에 사는 순천 박 씨 가문으로 장가를 들었다. 이때 김굉필은 처가 주변의 개천 건너 지동(地動)이라 부르는 작은 바위 아래에 조그마한 서재를 지은 후 한훤당(寒暄堂)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그리고 김굉필은 이 한훤당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그 후 1474년 20세가 되던 해에 김굉필은 운명적인 만남을 하는데, 합천 바로 옆에 있는 함양에 군수로 와있던 점필재(佔畢齋) 김종직을 찾아가 제자가 된 것이다. 이때 김종직은 기뻐하며 ‘소학(小學)’을 건넨 뒤 훗날의 대성을 기대하였다. 김굉필은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소학’ 공부에 몰입하는데 ‘소학’은 아동들을 가르치기 위해 주자의 제자 유자징이 편찬한 것으로 김굉필은 소학을 읽다가 깨달은 바를 다음과 같이 시로 나타내었다.     


글을 읽어도 천기(天機)를 알지 못했더니

소학에서 지난날의 잘못을 깨달았네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해 자식 도리를 다하련다

어찌 구구히 가볍고 따스한 가죽옷과 살찐 말을 부러워하리오    

 

 김굉필은 스스로를 ‘소학동자(小學童子)’로 자처하였고 사람들이 혹 나랏일은 물으면 “소학을 배우는 동자가 어찌 큰 대의를 알겠는가”라고 답했다고 한다.     


 26세가 되던 1480년에 식년과 생원시 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유생으로 수학하였다. 이때 장문의 상소를 올려 원각사 승려의 불법을 다스릴 것을 포함한 척불과 유학의 진흥에 관한 견해를 피력하기도 했다.      

 성종 25년(1494) 경상도 관찰사 이극균의 천거로 남부 참봉(종 9품)에 제수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42세인 1496년 군자감 주부(종 6품)에 제수되었으며, 곧 사헌부 헌감을 거쳐 이듬해에는 형조좌랑(정 6품)이 되었으나 7개월 만에 사직상소를 올리고 고향을 내려갔다.      


 44세가 되던 연산군 4년(1498) 스승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김굉필과 동문인 김일손이 실록에 실은 것이 빌미가 되어 연산군에 의해 무오사화가 발생한다. 이때 김굉필은 김일손이 김종직의 문인이라고 진술한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처벌을 받게 된다. 김굉필은 평안북도 희천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후 다시 전라남도 순천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김굉필은 유배지에서도 학문 연구와 인재 양성에 전념하였는데 희천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제자인 조광조를 만나 자신의 학문을 전한다. 김굉필의 직속 제자답게 조광조 역시 소학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연산군 10년(1504) 다시 갑자사화가 발생하자 성종이 폐비 윤 씨를 폐출할 때 찬성했다는 죄목으로 탄핵을 받고 김굉필은 전라도 순천 유배지에서 처형당하였다. 김굉필의 부인은 “책을 봐서 사형에 처해졌다”라고 책을 전부 불태우고 자식들과 함께 경상남도 창녕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2년 뒤,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연산군 때 화를 입었던 인물들이 사면되고 복권되면서 김굉필은 도승지에 추증되었고, 자손들은 관직에 등용되는 혜택을 받게 되었다. 이후 사림파의 개혁정치가 추진되고 조광조를 비롯한 그의 제자들의 정치적 성장으로 그의 업적이 재평가됨에 따라 중종 12년(1517) 의정부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이후 선조 8년(1575)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1577년에는 문경공(文敬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광해군 2년(1610) 대간과 성균관 및 각도의 유생들의 지속적인 상소에 의해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더불어 동방 5현으로 성균관 문묘에 종사되었다. 이 동방 5현 중에서도 김굉필은 다시 첫머리에 꼽히는 수현(首賢)이다.       


 김굉필은 아산의 인산서원, 서흥의 화곡서원, 회천의 상현서원, 현풍의 도동서원, 순천의 옥천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김굉필은 정몽주, 길재, 김숙자, 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유학사의 정통을 계승하였고 퇴계 이황은 김굉필을 ‘근세 도학(道學)의 조종(祖宗)’이라고 추앙하였다. 그의 학문은 제가 조광조를 통하여 백인걸, 율곡 이이, 김장생, 송시열로 이어지며 서인학파를 형성하였다.      


 김굉필의 진실되고 독실한 유교적 삶과 가르침은 조광조와 같은 후대 선비들의 학풍으로 자리 잡으면서 성리학에 기여한 김굉필의 공로가 인정받게 되었다. 조광조 역시 기묘사화로 죽임을 당했지만, 김굉필을 통해 전해진 『소학』 중심의 가르침과 실천은 이후 조선 선비들의 사상과 학풍에 크게 자리 잡아갔다.     


4.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

 김굉필이 남긴 실천 도학을 도동서원에 구현한 한강 정구는 퇴계 이후 영남학파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김굉필의 외증손자였다. 정구는 영남학파를 대표하는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曺植)에게서 배웠고, 퇴계와 남명학파의 학문을 통합하고자 힘썼다. 퇴계와 남명의 사후 독자적인 학문 세계를 열어나가며, 다양한 분야의 저술과 많은 문인들을 길러냈다. 특히, 정구의 경세론이 허목(許穆)을 통해 근기학파에 전해져 실학파 등의 경세(經世)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정구는 도동서원 가까운 곳에 정자 낙고재(洛皐齋)를 짓고 거처하면서 도동서원의 설립을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도동서원의 원규(院規)를 만들어서 서원 교육과 운영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도동서원 원규」에는 어린아이를 비롯하여 20세 이하인 자들을 위해 별도의 양몽재(養蒙齋)를 두고 있다는 점이 주목되는데, 이는 인재 양성이 도동서원의 건립의 주요 목적 중 하나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정구는 대니산(戴尼山) 아래에 도동서원을 창설하면서 선비들이 도동(道東)의 의미를 깊이 체득하고 유교 도학의 전통을 이어갈 방도를 생각했다. 정구는 후학들의 도동의 의미 체득과 전통 전승을 위하여, 서원의 입지, 원규, 제향, 건물 배치 그리고 각종 석물(石物)과 건축의 디테일까지 기획하였다. 김굉필이 일상에서 실천한 도덕과 의리를 후대 선비들이 체득하여 따라야 할 임무가 중하고, 가야 할 길은 멀다는 것을 알고 그 뜻을 담아 김굉필의 은거지인 도동리에 도동서원을 세운 것이다.      


 이처럼 정구는 외증조할아버지 되는 김굉필의 정신세계를 가장 잘 재현할 수 있는 터를 찾고, 서원 건물의 공간 배치와 서원의 규모와 제도를 결정하였다. 「도동서원에 한훤당 김 선생을 봉안하는 글」에서 서원의 새 입지 선택의 기준을,      


첫째, 대니산을 주산으로 하여 낙동강을 경관으로 전망하는 것,

둘째, 보다 조용한 환경,

셋째, 김굉필의 연고지와 가까운 점 등 세 가지로 밝히고 있다.      


戴尼崇崇淸洛沄沄(대니숭숭청락운운) [대니산 높디높고 낙동강은 넘실넘실]

中有精廬廟貌攸尊(중유정려묘모유존) [그 가운데 서원 사당 모습 엄숙하네]

昔日雙溪城市湫喧(석일쌍계성시추훤) [전의 쌍계 터는 시끄러운 저잣거리]

玆焉移卜密邇丘園(자언이복밀이구원) [여기 옮긴 자리는 은거지와 가깝다네]     


5. 도동서원(道東書院)의 주요 공간     


도동서원 은행나무

 도동서원 입구에서는 시선을 압도하는 거대한 은행나무를 볼 수 있다. 유교식 건축에서는 건축물이 완성되면 기념식수를 심는데, 이는 공자가 관료 생활을 마치고 말년에 노나라로 돌아와서 저술 활동과 교육활동을 하였는데 거대한 은행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을 가르친 ‘행단강학(杏壇講學)’에서 유래하였다.     


도동서원에 오면 처음 만나는 것이 주차장 옆 거대한 은행나무다. 김굉필의 외증손자 한강 정구가 도동서원을 세우면서 심었다고 알려진 나무로 수령이 400년이 넘을뿐더러 둘레가 장정 여섯 명이 팔을 이어야 할 정도다. ‘김굉필 나무’라고 불리는 은행나무는 오랜 풍상을 견뎌 오면서 이곳저곳 버팀대를 받쳐 놓았지만, 나무의 기상은 당당하고 장엄함을 보여 주기에 충분하다.     


 보통의 은행나무는 하늘을 향해서 일자로 쭉 뻗어 올라가 있는데 도동서원의 은행나무는 가지가 한쪽으로 누워있는데 한훤당 선생을 모시고 있는 사당 방향으로 절하듯이 누워있음을 볼 수 있다. 은행나무조차도 고개를 뻣뻣이 들지 못하고 선생을 향해 예를 갖추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도동서원과 한훤당 선생의 클래스를 느낄 수 있다.

김굉필 은행나무

도동서원 주차장에 도착하자 누렁이 한 마리가 반겨주었는데, 근엄한 표정으로 마치 서원을 안내하듯이 수월루 앞까지 이끌어주었다. 누렁이 마저도 도동서원의 품격을 말해주는듯 하다.

김굉필 신도비

 과거에 왕이나 벼슬이 종 2품 이상인 인물이 돌아가시면 묘비 외에도 신도비를 세울 수 있게 해 주었다. 보통의 신도비 귀부는 1개인데 이 신도비의 특징은 귀부가 2개인 쌍귀부이다. 우리나라에 현재 전하고 있는 쌍귀부는 총 5개가 있는데, 그중 4개는 신라시대의 작품이지만 조선시대 작품으로 쌍귀부, 몸돌, 이수가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는 것은 도동서원이 유일하다.

     

 신도비 전면 상부에능 '증 우의정 시 문경공贈右議政諡文敬公寒)', 후면 상부에는 '한훤당 김 선생 신도비(暄堂金先生神道碑)'라 쓰여 있다. 신도비에는 선생의 일생가 업적, 가르침 등이 적혀 있는데 일부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선생은 여러 아들들을 훈계하여 말씀하기를, '너희들은 항상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두어 감히 게을리하지 말며, 사람들이 혹 자신을 비판하거든 절대로 따지지 말라.' 하였다. 또 말씀하기를, '남의 악을 말하면 마치 피를 입에 머금고 남에게 뿜는 것과 같아서 먼저 자기 입을 더럽히게 된다. 마땅히 경계하라.' 하였다. 또한 여러 딸들을 가르치되 시부모에게 순종하고 제사를 정성껏 받들며 동서들을 존경하고 부인의 직책을 부지런히 하며 노비들을 구휼하고 말을 많이 하지 말며 재리(財利)를 삼가는 등의 조목으로 권고하고 경계하였다.     

                                                                                                                김굉필 신도비 일부     


수월루(水月樓)

 수월루(水月樓)의 수월(水月)은 ‘낙동강에 비치는 달’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마도 어둠을 밝히는 달처럼 이곳의 유생들도 어두운 세상을 밟게 비추라는 한훤당 선생과 도동서원의 가르침을 의미를 담고 있다.     

 현재의 수월루는 처음 도동서원이 들어섰을 때는 없었으며 1849년에 작은 규모로 처음 지어졌다. 그 뒤 불이 나서 터만 남았다가 1974년에 다시 지었다. 복원 당시 2층 누각 형태로 너무 크게 지어 도동서원의 철학과 격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었다.      


 수월루 아래의 외삼문의 특징은 왼쪽과 가운데는 닫혀있고 오른쪽 문만 열려 있는 점이 특이하다. 대부분의 서원들이 동입서출(東入西出)을 원칙으로 하는 반면에 도동서원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동입동출(東入東出)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도동서원의 누각인 수월루, 대부분의 서원들이 동입서출(東入西出)을 원칙으로 하는 반면에 도동서원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동입동출(東入東出)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환주문(喚主門)

 환주(喚主)란, ‘자기 자신의 주인을 부른다. 즉 마음을 불러 일깨우라’라는 의미이다. 말 그대로 주인을 부르는 문이면서 동시에 나를 부르는 자아의 문이다. 한훤당 선생의 명성과 업적에 비해 출입문인 환주문은 높이도 낮고 굉장히 소박한데 여기서 검약과 절제를 상징하는 선생과 후배 유학자의 세계관을 볼 수 있다. 서원 문을 들어설 때는 고개를 숙이고 경건하고 절제된 마음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배움의 문을 통해 도동서원의 선비들은 겉치레보다 마음가짐을 더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바닥에는 연꽃 모양의 돌인 정지석이 놓여 있는데 낮은 문으로 고개를 숙이고 발걸음 하나도 조심스럽게 출입하라는 유학자들의 메시지이다. 환주문 위 지붕 위에는 절병통이라는 항아리를 엎어놓았는데 이는 빗물이 지붕 안으로 스며드는 것을 방지해 주는 역할을 한다.      


중정당

 중정당은 정면 5칸, 옆면 2칸 규모의 건물이며 주심포 맞배지붕을 얹혔으며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형태이다. 중정당을 정면에서 바라볼 때 왼쪽 협실이 원장의 집무실이고, 오른쪽 방이 스승들이 사용했던 현재의 교무실 같은 공간이다.      


 중정당 전면과 안쪽 정면에는 도동서원 현판 두 개가 걸려있는데 전면의 검은 글씨 현판은 이황의 글씨를 모각(模刻)한 현판으로, 그 아래 ‘도동서원 액판 밑에 쓰다’라는 제목의 작은 현판이 달려 있는데 정구가 이황의 글씨를 모각하여 이 현판을 달게 된 연유를 이렇게 기록하였다.     


 “이 서원에 들어오는 우리 선비들은 이 편액을 우러러보고 어찌 서로 선생의 학덕을 흠모하며, 도동의 의미를 깊이 체득하여 끊임없이 노력함으로써, 우리 학문의 전통이 끊이지 않을 방도를 생각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


 정구 선생은 퇴계의 제자였다. 당시 퇴계 선생은 서원 10개를 시로 읊고 친히 서원 현판 편액을 써서 내려주었는데 9개만 완성하고 하나를 마무리 짓지 못하였다. 이런 이유로 정구 선생은 도동서원을 지을 당시 퇴계 선생이 살아 있었다면 반드시 도동서원에도 친필 편액을 내려주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퇴계 선생의 글씨를 모각하여 붙여놓게 된 것이다.     


 작은 현판에는 공자의 도가 동쪽 우리나라로 와서 수백 년 끊어졌으나 김굉필 선생이 이었으니, 김굉필 선생을 모신 도동서원의 이름은 무겁지 않을 수 없다는 정구 선생의 생각이 담겨 있다.    

  

 안쪽 정면에 걸린 흰색 글씨 현판은 경상도 도사 배대유(裵大維)가 쓴 선조 사액 현판이고, 강당 이름인 중정당 현판은 봉조하 이관징(李觀徵)의 글씨이다. 강당 벽면에는 특전을 주는 것을 허용하라는 국왕의 전교를 등서한 ‘전교(傳敎)’를 비롯하여 경상 감사 김안국이 현풍의 학자들에게는 김굉필의 학문을 세상에서 으뜸으로 추존한다는 내용을 적은 ‘김안국 시판(金安國詩板)’과 ‘백록동규(白鹿洞規)’, ‘국기(國忌)’, ‘서원 규목(書院規目)’ 등이 걸려있다.

중정당 내부의 선조 사액 현판

도동서원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중정당을 바치고 있는 기단석이다. 1604년 사당 건립 사실이 알려지자 전국에 있는 김굉필의 제자들이 스승을 추모하기 위해 저마다 마음에 드는 돌을 모아 와서 쌓았다. 그래서 모양과 크기는 물론 색깔이나 돌의 재질 역시 저마다 다르다. 4각형, 6각형, 심지어 12각형까지 각양각색의 돌들이 서로 섞여 빈틈없이 맞물리며 조화를 이루고 있다. 비 오는 날 도동서원을 방문한다면 이 기단석이 보여 주는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12각형의 기단석이 3개 숨어 있다고 하니 찾아보는 재미도 느껴보자.

중정당의 석축 기단, 각양각색의 기단석들이 맞물리며 조화를 이루고 있다.

중정당으로 오르는 계단 쪽 기단을 살펴보면 각각 세호라고 불리는 다람쥐는 닮은 작은 동물이 꽃송이 문양과 함께 조각되어 있다. 정면에서 볼 때 오른쪽에는 위로 오르는 모습의 다람쥐가, 왼쪽에는 아래로 내려오는 모습의 다람쥐가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중정당 앞의 두 계단의 사용 방법을 표시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기단석에는 네 마리의 용머리가 조각되어 있는데, 용이 낙동강의 범람과 불의 기운을 막아 도동서원을 보호해 주고 동시에 용이 하늘로 오르듯 이곳에서 학문을 닦은 선비들도 과거급제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네 개의 용머리 가운데 왼쪽에서 두 번째 것만 진짜 용머리이고 나머지는 모두 복원된 것이다. 한때 이 네 개의 용머리를 문화재 절도범이 훔쳐 갔는데 우여곡절 끝에 다시 찾게 되었다. 하지만 또다시 도난당할 것을 염려해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는 안동에 있는 한국국학진흥원 박물관에 따로 보관하도록 하였다.      


 중정당의 기둥 상단부에는 흰색 종이가 감싸져 있는데 이는 상지(上紙)라고 한다. 이는 동방오현(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중 가장 웃어른이자 위대한 스승인 김굉필 선생에 대한 존경과 예의 표현으로 도동서원에만 존재한다. 상지는 낮에는 햇빛을 받고, 밤에는 횃불을 받아 먼 곳에서도 인식이 가능한데, 말을 타고 가던 이는 말에선 내려 예를 표하고 배를 타고 가던 이 역시 상지를 보고 김굉필 선생에게 예를 갖추었다. 이러한 이유로 도동서원 입구에는 보통의 서원에 있는 하마비가 없다.


 중정단은 온돌 장치가 있지만 연기가 나갈 굴뚝을 찾기가 어려운데, 뒤쪽의 아래 기단을 따라가다 보면 작은 구멍이 보인다. 이곳이 중정단 기단 굴뚝인데 이렇게 굴뚝을 건물 아래 기단으로 낸 까닭은 당시에는 밥조차 제때 먹지 못하는 동네 사람들을 배려하기 위해 밥을 지을 때 최대한 연기가 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기단 굴뚝에서 배출된 연기는 일차적으로 건물의 외벽을 타고 처마 안쪽에서 머물다가 천천히 허공으로 흩어져 연기에 의한 소독 및 방충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도동서원의 강당인 중정당, 6개의 기둥에 김굉필 선생의 위상을 보여주는 상지가 붙어 있다.

거인재(居仁齋)와 거의재(居義齋)

 거인재와 거의재는 서원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입니다. 두 건 물은 강당 앞에서 서로 마주 보며 인과 의를 대비시킨 편액을 사용하고 있다. 거인재와 거의재는 『맹자』에 나오는 “인에 머물고 의를 따른다(居仁由義)”와 “인은 사람의 편안한 집이요, 의는 사람의 바른 길이다”에서 가져온 것이다. 거인재와 거의재는 인과 의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며 바른 배움에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중정당을 바라보고 오른쪽이 동쪽, 왼쪽이 서쪽이라는 전통적 방위개념에 따라 오른쪽 건물이 거인재(居仁齋)이고 왼쪽 건물이 거의재(居義齋)이다. 따라서 동재인 거인재에 기거하는 원생이 선배이다. 그래서 자세히 보면 두 건물은 비슷한 것 같으나 확연히 다르다. 거인재의 격을 더 높이기 위해 거의재에는 없는 쪽마루가 놓여 있고 마루 쪽 벽면이 나무로 되어 있으며 창문이 있다. 또한 거인재의 기둥은 가공이 어렵고 섬세한 둥근기둥이고 거의재의 기둥은 사각기둥이다.

도동서원의 기숙사인 거인재(상)와 거의재(하)

생단(牲壇)

 중정당을 바라보고 오른쪽으로 이동하면 생단(牲壇)이 있는데 이곳은 향사 전날 제물로 쓸 돼지를 올려놓고 제관들이 품평하는 장소이다. 한 사람이라도 제물의 품질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처음부터 다시 준비해야 한다. 생단은 이렇게 제사를 준비하는 모든 과정에서 마음가짐이 얼마나 깨끗하고 정성스러워야 하는가를 말없이 일깨워준다.     


사당(祠堂)

 중정당 뒤편으로 돌아가면 내삼문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타난다. 내삼문으로 오로는 계단의 특이한 점은 문이 세 개인데 계단은 두 개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는 내삼문 역시 외삼문과 마찬가지로 동입동출(東入東出)의 원칙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오른쪽의 짧은 계단과 문은 제례를 집행하는 제관이 다니는 길이다. 이 계단을 오를 때는 우선 발을 모아 오른발 먼저 오르고 나서 왼발을 따라 올라 디딘다. 내삼문의 가운데 문은 ‘신문(神門)’으로 아무나 함부로 드나들면 안 된다. 향사를 지낼 때 축문, 제수 등 신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행동을 할 때 출입이 가능하다.      


 내삼문을 지나면 도동서원 가장 안쪽, 가장 높은 곳에 김굉필 선생과 정구 선생을 모시고 있는 사당이 보인다. 사당에 들어가면 정면에 김굉필의 위패가 있고 오른쪽에 정구의 위패가 있다.


 사당 내부 벽면에는 두 점의 벽화가 있는데, 창건 당시 그림으로 알려 있는 이 벽화는 김굉필의 시 ‘선상(船上)’과 ‘노방송(路傍松)’을 그린 그림이다. 아쉽게도 그림에 낙관이 없어서 누구의 그림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벽화에는 그림의 제목이 적혀 있는데 밖에서 사당을 바라볼 때 왼쪽 벽화의 제목은 강 중간에 떠 있는 배 한 척을 의미하는 ‘강심월일주(江心月一舟)’이고, 오른쪽 벽화는 눈 내린 길가에 서 있는 아주 오래된 소나무를 뜻하는 ‘설로장송(雪路長松)’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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