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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은 May 16. 2024

4. 답사의 신, 서원(書院)에 가다! -도산서원 -

도산서원 시사단(試士壇)

1. 퇴계와 서원

 

 우리나라에서 한국사를 공부한 사람들이라면, 또 굳이 한국사를 공부하지 않아도 퇴계 선생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이웃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흠모하는 조선의 대학자이자 조선 성리학을 완성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퇴계에 대해 알아보려면 그의 학문적 성과만으로도 수많은 시간과 지면을 할애해야 하겠지만 여기서는 퇴계가 서원에 관여한 부분에 국한해서 적으려고 한다.     


 퇴계의 삶은 대체로 세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출생부터 33세까지 출사 전의 수학기, 34세에서 50세까지의 관료기, 51세 이후의 은거 강학기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퇴계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시기는 50세 이후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조정에서 물러나 수많은 제자들에게 학문을 강론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주요 저작물들이 주로 이때 지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이때 퇴계는 관학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서원 건립을 주도하였다.   


 퇴계가 출사했을 때 지은 시를 살펴보면 벼슬 생활의 구속감과 환멸을 시적으로 표현하였다. 퇴계는 당시 정치적 현실과 자신과의 깊은 괴리를 견딜 수 없는 구속으로 의식하고, 이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였다. 그래서 내직보다는 외직을 선호하였으며, 그것도 고향과 가까운 지역으로 나가기를 희망하였다. 그의 나이 48세 때 단양 군수로 외직을 구하여 나갔으며, 그해 11월에 다시 고향과 가까운 풍기 군수가 되었다. 풍기 군수 시절 퇴계는 신재 주세붕에 의해 세워진 백운동서원을 국가가 인정해 주는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으로 승격시켰다. 49세 12월에 풍기 군수를 사직하고 물러나 50세 때 계상에 한서암寒栖庵을 지었다. 이때 「퇴계(退溪)」라는 시를 짓게 된다.     


몸이 물러나니 내 분수에 편안하지만

학문이 퇴보하니 노년이 걱정스럽네

계상에 비로소 거처를 정하고

흐르는 물 보면서 날마다 성찰하네      


 벼슬에서 물러나 비로소 자신의 분수를 지키고 학문에 전념할 수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는 한편, 이미 노년에 접어든 때라 학문에 정진할 수 있는 세월이 길지 않음을 걱정하고 있다. 그래서 한서암 앞을 흐르는 퇴계를 보면서 자신을 성찰하며 학문에 정진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런가 하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제자를 받아들이는데 이를테면 조목, 김부필, 김부륜, 종형제, 금난수, 이덕홍 및 예안 출신 제자들이 퇴계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아래 시는 이때의 심정을 시적으로 형상화하였다.     


골짝의 바위 사이에 띠집을 옮겨 얽으니

때마침 바위에 붉은 꽃 어지러이 피었네

예는 가고 지금은 와 때는 이미 늦었지만

밭 갈고 글 읽으니 즐거움은 그지 없네


 ‘밭 갈고 글 읽으니 즐거움은 그지없네’라는 시구에서 알 수 있듯, 이처럼 도산 은거기에 지은 시에는 세상과 자아와의 모순은 사라지고 평온한 정신적 자유를 누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51세 때 계상서당을 건립한다. 이 시기는 퇴계의 학문도 원숙해 가는 시기인데, 1553년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저술하고, 1554년 김인후, 노수신과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에 대한 토론을 전개하였으며, 1556년에는 퇴계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가 완성되었다.     


 이때 퇴계는 특별한 만남을 가지게 되는데 바로 율곡 이이와의 만남이다. 퇴계 나이 58세 때 23세의 젊은 율곡이 예안을 찾아온 것이다. 이때 율곡은 사임당의 탈상이 끝난 뒤에도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19세 때 불도를 닦기 위해 금강산으로 입산하였다. 1년 정도 지나 하산하여 「자경문自警文」을 지어 “먼저 뜻을 크게 하여 성인을 표준으로 삼는다. 조금이라 도 성인에 미치지 못한다면 나의 일은 끝나지 않는다.”라고 하며, 성인의 학문인 유학에 전념하기로 다짐하였다. 22세(1557) 되는 해 가을에 성주 목사인 노경린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혼인하고, 다음 해 장인이 머물고 있던 성주를 방문하고 강릉으로 돌아가는 길에 예안을 지나며 퇴계 선생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율곡이 퇴계를 만난 때는 금강산에서 내려온 지 3년이 되는 해였다.

     

 퇴계와 만나 대화한 주제 중의 하나는 율곡은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자 퇴계는 젊은 때의 잘못은 선현들도 면하기 어려웠다며 격려하는 내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계상서당이 협소하여 새로운 서당의 터를 모색하게 된다. 1556년 제자 면진재, 금응훈이 서당 터를 확보하고 공사를 시작하여 1560년 11월에 완공하고, 기숙사인 농운정사는 1561년에 완공되었다. 퇴계는 그해 겨울 「도산기(陶山記)」를 짓는다. 도산서당의 출발은 스승을 존경하는 제자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도산서당 시절은 퇴계의 학문이 완성된 시기이기도 하고, 가장 많은 제자들이 수학하였다.


 특히 1558년에는 영주의 이산서원(伊山書院) 건립에 깊이 관여하였다. 서원이 건립되자 그는 이산서원 원규인 「이산원규伊山院規」와 서원이 건립되게 된 내력을 기록한 「이산서원기伊山書院記」를 지었다. 「이산원규」는 영남지역은 물론 타 지역 서원 원규의 기본 모델이 되었다.      


 한편, 퇴계는 자신이 직접 서원 건립에 참여하기도 하지만 서원건립과 관련한 제자들의 문의에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제시하는 등 당대 영남 지역 서원 건립에 있어서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였다. 퇴계는 1565년에 「서원십영書院十詠」이라는 한시를 짓는데, 이 시에서 는 당시 전국의 주요 서원 9개를 제시하였다. 이를테면 풍기의 죽계서원(竹溪書院), 영천의 임고서원(臨臯書院), 해주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성주의 영봉서원(迎鳳書院), 강릉의 구산서원(丘山書院), 함양의 남계서원(灆溪書院), 영주의 이산서원(伊山書院), 경주의 서악정사(西岳精舍), 대구의 화암서원(畫巖書院) 등이다. 9개 서원 가운데 서원 건립에 있어서 퇴계와 직간접적인 연관이 있는 서원이 5개 서원이다. 이로 볼 때 퇴계가 얼마나 서원 건립에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퇴계가 왜 이토록 서원 건립에 온 힘을 쏟았을까?


퇴계는 서울의 성균관과 사부학당(四部學堂), 그리고 지방의 향교 등의 관학이 공부만 하여 출세를 도모하는 장소로 전락한 것을 보고 매우 염려하였다. 그래서 참다운 학문을 통해 진리를 추구하는 학문연구의 장소로서 사학인 서원의 설립을 희망하였다. 당시 향교와 국학이 제도와 규정에 얽매이고 과거 공부에 주력하여 옳은 학문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하였고, 단순히 출세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공교육의 폐단을 바로잡고자 하였다.      


 그것은 바로 위인지학(爲人之學)을 추구하기보다 위기지학(爲己之學)을 통해 참 선비를 길러내야 하는데, 이는 기존의 공교육의 환경에서는 실현될 수 없고, 서원을 통한 교육만이 현실의 교육환경을 개선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인간 유형을 창출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퇴계는 1570년 7월, 그의 나이 70세에 역동서원에서 제자들에게 『심경』을 강의하고, 그해 12월 8일 세상을 떠났는데 이것으로 볼 때 퇴계가 만년에 서원의 건립과 교육에 얼마나 큰 관심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

    

 퇴계 사후 4년 뒤, 제자들에 의해 도산서당 뒤쪽에 도산서원을 건립하고, 이듬해 ‘도산서원(陶山書院)’이라 사액되었으며, 1576년 2월에 퇴계의 위패를 서원에 봉안하였다. 이후 도산서원은 영남을 비롯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서원이 되었다. 그 이유는 생전에 퇴계가 많은 제자들과 학문을 강론했던 공간에 서원을 건립한 상징성과 퇴계가 추구했던 학문의 무게감이 더해져서 도산서원은 우리나라 서원의 상징이 되었다. 한 말의 유학자 ‘곽종석’은 “퇴계는 우리 동방 도학의 할아버지요, 도산은 우리 동방 서원의 으뜸”이라고 하여, 퇴계의 학덕과 도산서원의 위상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2. 퇴계와 서원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한국의 서원’에 모셔진 선현 또는 서원 자체가 퇴계와 관련이 없는 곳은 없는데, 이는 퇴계가 서원의 건립과 발전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다. 각 서원과 퇴계의 인연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영주 소수서원은 창건 6년 후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가 향사 때 의례 절차를 정비하고 축문을 제정하였고, 조정에 ‘소수서원’으로 편액을 내려 주도록 청원하였으며 「서원십영書院十詠」이라는 시를 지어 ‘나라의 은혜 입어 국학이 되었네.’라고 축하하였고, 면학을 권장하는 시 여러 편을 지어 유생들에게 읽도록 하였다. 그중 한 편이 서원 입구 경렴정에 현판으로 제작되어 걸려있으며, 경렴정(景濂亭) 현판 역시 퇴계가 썼다. 서원 운영의 원활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며 당시 군수와 원장에게 편지를 보내 시정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또한 퇴계는 소수서원에 배향되어 있는 안향이 도입한 성리학을 집대성하여 조선의 정치와 사상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퇴계는 함양 남계서원에서 주향으로 모신 정여창 선생을 『회시조사서(回示詔使書)』에 기록하였고, 또 『서원십영(書院十詠)』에서 '서원을 존중하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 라고 하였는데 이 시는 남계서원 입구 표지석 뒷면에 새겨져 있다. 또한 남계서원에서는 서원의 원규(院規)를 퇴계가 지은 『이산원규(伊山院規)』에서 두 개 조항을 더하여 시행하고 있다.     


 경주 옥산서원과 관련된 퇴계의 행적을 살펴보면, 이언적 선생 『행장(行狀)』을 지어 ‘선생의 덕업과 행적을 세상에 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훌륭한 도학자로 존숭하였다. 옥산서원의 원규 역시 퇴계의 「이산원규」 중 7개 조항을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 서원 옆 계곡의 암석에는 퇴계의 글씨 『세심대(洗心臺)』가 새겨져 있고, 또 이언적 선생의 후손들은 독락당(獨樂堂)에서 퇴계의 유묵을 국가 보물로 지정받아 보존하고 있다.     


 대구 달성 도동서원에서는 주향으로 모신 김굉필 선생을 퇴계가 ‘근세 도학의 종주’가 될 것이라 하였고, 함께 배향된 한강 정구 선생은 퇴계의 제자이며 퇴계의 가르침을 원규에 반영하고 서원의 현판 역시 스승의 글씨로 집자(集字)하여 걸었다     


 전남 장성 필암서원의 주향인 하서 김인후 선생은 퇴계와 성균관 유생 시절 같이 지냈는데, 헤어지며 퇴계는 김인후 선생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선생은 영남의 빼어난 인물이고 이백과 두보의 문장에 왕희지와 조맹부의 필체를 지니셨다.’ 또한 배향된 고암 양자징 선생은 퇴계의 가르침을 받아 『도산급문제현록(陶山及門諸賢錄)』에 등재된 인물이기도 하다     


 충남 논산 돈암서원의 주향인 김장생 선생과 퇴계의 관계가 확인되는 기록은 없으나, 김장생의 아버지가 경상감사 재직시절에 도산서원 건립을 도우셨고, 배향된 동춘당 송준길 선생은  “퇴계 선생은 진실로 백세의 스승이므로 선생의 한마디 말씀이나 한 글자도 학자들이 진귀하게 여겨 아끼고 보물로 소중히 간직하는데, 더구나 올바른 성정에서 나온 시이겠는가. 아버지께서는 바로 율곡 선생의 문인으로 퇴계에 대한 존숭을 전해 받았다”라고 하였고, 또 꿈속에서 퇴계의 가르침을 받고 아래와 같은 시를 짓기도 하였다     


임자(1672)년 1월 11일 밤 꿈에 퇴계 선생을 모시고 함께 자면서 간절한 가르침을 받았는데,

꿈 깬 뒤에도 남은 향기가 몸에 가득하므로 느낌이 있어 이 시를 짓는다.


壬子元月十一日夜夢. 侍退溪先生聯枕從容. 承誨款懇. 覺來. 猶覺餘芬襲體. 感而有作     

평생 동안 퇴도 선생 흠앙했더니  平生欽仰退陶翁

사후에도 정신이 감통하였네.  沒世精神尙感通

오늘 밤 꿈속에서 가르침 받았는데  此夜夢中承誨語

깨어 보니 달빛만 창문에 가득하네.  覺來山月滿窓櫳      


 전북 정읍 무성서원 관련해서는, 주향이신 고운 최치원 선생 유촉지(遺躅地)인 합천 가야산, 마산 월영대, 봉화 청량산을 찾아가 추모하는 시를 남겼고, 함께 배향된 영천자 신잠 선생의 『묵죽도(墨竹圖)』에 화제(畫題) 3편을 지으셨다.     


 경북 안동 병산서원에서는 제자인 서애 류성룡 선생을 주향으로 제향하고 있으며, 서애 선생은 21세 때 퇴계 문하에서 『근사록(近思錄)』 등을 배웠으며 은퇴 후에도 스승을 생각하며 '슬프고 처량하여 천고의 한이 되어 올려보고 내려봐도 흐느낌만 나네.'라고 말하였으며 스승의 『연보(年譜)』에 발문을 지어 간행하기도 하였다.     


 경북 안동 도산서원은 퇴계를 주향으로 모시고 있으며 선생이 생전 만든 서당 뒤편이 서원으로 확장되었다. 선생께서 지으신 『이산원규(伊山院規)』가 강당에 걸려있다. 건축물과 경물에 설치된 현판과 표지석 등의 글들은 선생의 가르침으로 요약되어 있다.


 이처럼 퇴계는 주향 또는 배향된 선현을 존경하거나 스승과 제자 관계도 있지만 서원 창설과 운영에도 깊은 관련이 있었다. 퇴계 역시 『서원십영(書院十詠)』 ‘총론’에서 ‘다행히 여러 서원이 있어 선비를 이끌어 가리라’라고 기대하며 우리나라에서 서원으로 인해 도덕적 이상사회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하였다.     


3. 유네스코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도산서원(陶山書院)     

 도산서원은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에 있는 서원이다. 이 지역은 한때 이 땅을 지배하던 모든 정치와 사상이 태어난 산실이었다. 도산과 낙동강변이 어우러지는 경건한 땅, 이곳에서는 영남학파라 불리며 명실상부 조선을 이끌어온 수많은 선비들이 탄생한 곳이다.      


 위대한 스승 이황은 세상을 떠났지만 제자들은 그 뜻을 계속 이어나가기로 했다. 1572년 이황의 위패를 모실 사당을 건립하기로 하고 서원 창건에 들어갔다. 하지만 스승을 기리기 위한 제자들의 계획은 난관에 봉착한다. 도산 계곡에는 이미 스승이 손수 조성한 도산서당이 서 있었다. 스승이 정한 터를 떠나 새 터를 잡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스승이 만든 서당을 허물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과연 이황의 제자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제자들은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서당의 구조를 그대로 살리면서 서원으로 확대하는 방법을 생각해 낸다.      


 도산서원의 정문에는 조선 서원 건축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함이 있다. 병산서원의 만대루, 옥산서원의 무변루, 도동서원의 수월루, 돈암선원의 산앙루처럼 서원의 위상과 위엄을 상징하는 문루(門樓)가 서지 않았다. 그 이유는 만약 문루가 만들어졌다면 제자들이 만든 서원 정문이 스승이 만든 도산서원을 위에서 내려다보게 된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아서는 안 된다는 제자의 도리를 건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고 스승의 옛 터전을 지키기 위해 새로운 건물에 소홀한 것도 아니었다. 두 개의 공간을 하나의 서원 안에 공존시키기 위해 도산서원 내부에는 십(十) 자로 두 개의 길이 나 있다. 강당의 역할을 하는 전교당과 도서관으로 쓰이던 장판각, 광명실은 모두 수직길로 서 있다. 반면 수평길에는 이황이 세운 도산서당과 농운정사이다. 서원은 그 규모로 보나 격으로 보나 서당보다 앞설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제자들은 도산서원을 만들 때 두 개의 길을 같은 비중으로 배치하여 서당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였다.    

  

 수직길을 따라 쭉 올라가다 보면 서원의 핵심 공간이라 할 수 있는 전교당(典敎堂)이 나오는데 이 건물은 이상하게도 조선에서 보기 드문 4칸짜리 건물이다. 전교당의 또 이상한 점은 서원의 강당에 당연히 있어야 하는 원장실이 없다. 원장실로 쓰였을 자리에 대신 놓인 것은 어디론가 이어진 길이다. 길이 향하는 곳은 상덕사(尙德祠), 이황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공간이다. 원장실 대신 이황의 위패로 가는 길이 존재하는 서원 이것이야말로 도산서원의 영원한 원장을 퇴계 이황이라는 제자들의 마음과 존경을 건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모든 부와 명성을 뒤로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대학자 퇴계 이황, 어지러운 세상을 바꾸고자 그가 선택한 방법은 성리학을 완성하고 후학을 키우는 것이었다. 그리고 제자들은 스승의 큰 뜻을 저버리지 않았다. 스승이 잡은 터에 선비들이 강학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그 뜻을 이어나갔다. 도산서원의 건립으로 스승의 꿈은 현실이 되었다. 수많은 유생들이 배움의 길을 걷고자 도산서원을 찾았고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학문에 매진했다. 서애 류성룡, 한강 정구, 고봉 기대승, 학봉 김성일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선비들이 도산서원을 거쳐 갔고 이곳에서 나온 사상은 이후 조선을 유지하는 근간이 되었다. 스승의 작은 손길 하나를 간직하면서 그 뜻을 받들고자 했던 제자들, 긴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도산서원에는 큰 스승 이황을 향한 제자들의 노래가 흐르고 있다.      


 도산서원은 서원철폐령(1864~1871)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전국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1963년 1월 21일에는 도산서원 강당인 전교당이 보물 제210호로, 상덕사와 삼문 및 사주토병이 보물 제211로 지정되었으며, 1969년 5월 31일에는 도산서원 전역이 사적 제170호로 지정되었다. 상덕사를 지정할 당시에는 묘우(廟宇)를 둘러싼 토담 역시 지정 대상이었지만, 1969년 보수공사 때 돌담장으로 바뀌어 1970년 7월 29일 자로 지정항목에서 제외되었다. 2020년 12월 28일에는 도산서당이 보물 제2105호로, 농운정사가 보물 제2106호로 지정되었다.      

원장실 대신 이황의 위패로 가는 길이 존재하는 서원 이것이야말로 도산서원의 영원한 원장을 퇴계 이황이라는 제자들의 마음과 존경을 건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4. 도산서원(陶山書院)의 공간     

 서원 답사를 위해 입구부터 시작되는 건물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서원으로 들어가기 전 서원 앞에 펼쳐진 낙동강에는 마치 섬처럼 우뚝 솟아오른 공간이 있는데 이곳은 시사단(試士壇)이다.      


시사단(試士壇)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가 퇴계의 학문과 사상을 추모하고 영남지역 선비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하여 도산서원에서 과거시험을 치르도록 명하였다. 이 명령서를 전교(傳敎)라고 하는데 현판으로 제작되어 전교당 대들보 아래에 걸려있다. 명령을 받은 규장각 사신들이 도착하여 과거시험을 치르고자 하였는데 이때 예상 밖으로 선비들이 많이 모여 도저히 서원의 경내에서는 시험을 치르기가 어려워 강 건너 송림(松林)에서 치르게 되었다. 시험을 보기 위해 온 선비는 7,228명이고 제출된 답안지는 3,632장이었다.  이 시험의 합격자는 등급을 크게 상ㆍ중ㆍ하로 나누고 각 등급에서 또 구분하였다. 그래서 강세백, 김희락은 삼상(三上)에 합격하여 임금 앞에서 치르는 전시(殿試)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고, 삼중(三中)에 2명, 삼하(三下)에 26명이 합격하였다. 정조는 이와 관련한 모든 기록을 편집하여 경상도 관찰사에게 책자를 만들어 간행토록 하고 책판은 도산서원에 보관하도록 하였는데 이 책이 『교남빈흥록(嶠南賓興錄)』이다. 그리고 이 도산별과를 기념하기 위하여 정조 20년(1796)년에 단(壇)을 쌓고 영의정 채제공이 짓고 쓴 비문을 새겨서 세웠다.     


 1993년부터 도산별과를 기념하기 위하여 매년 음력 3월 25일(1792년 시행일)에 도산별과를 안동시장이 주최하여 도산서원에서 기념하는 행사를 거행하고 한시백일장도 열고 있다. 전국에서 매년 200여 명의 선비들이 모여 참가하고 있으며 2015년부터는 학생부를 추가하여 젊은이들에게도 문호를 열어 확대하고 있다. 도산별과를 치른 자리가 1975년 안동댐으로 인하여 물속에 잠기게 되어 현재처럼 인공 섬을 만들고 비와 비각을 옮겨 놓았다.

도산서원 시사단(試士壇)

열정(冽井)

열정은 도산서당이 있을 때부터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이다. 열정이란 이름은 『역경(易經)』에 나오는 ‘물이 맑고 차가우니 마실 수 있다 [井冽寒泉食].’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우물은 마을이 떠나가도 옮겨가지 못하고, 아무리 물을 퍼내도 줄지 않으며, 오가는 사람 모두가 마실 수 있다. 이와 같이 세상에 널린 지식을 부단한 노력으로 쌓아 우물과 같이 사회에 꼭 필요한 인재가 되라는 뜻을 담고 있다.  

   

 옛 선비들은 수양하는 곳에 샘을 꼭 만들었다. 샘은 쉬지 않고 새물을 솟아 갈증을 해소하게 하듯이 선비는 항상 스스로를 깨우쳐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는 것과 같아서 샘은 곧 선비정신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샘은 깨끗하게 관리하지 않으면 썩게 되어 산새도 찾지 않게 된다. 샘은 덮어두지 않고, 쉼 없이 새 물을 길어 올릴 때에야 비로소 스스로 역할을 하게 된다.     


 퇴계가 도산서당에 몽천(蒙泉)과 열정(冽井)을 두었듯이 다산 정약용 역시 다산초당에 약천(藥泉)을 둔 것도 차를 우려내는 물이 필요했지만 더 중요한 목적은 선비정신을 기르기 위함일 것이다.     

 퇴계는 “서당의 남쪽에 맑고 차며 단맛의 옹달샘이 있다 [書堂之南 石井甘冽].”라며 열정과 관련한 시를 짓기도 하였다     


차가운 우물 冽井     

서당 남녘에 돌샘이 달고 차갑도다.  書堂之南 石井甘冽

오랫동안 묻혀 있었으니 이제부터 덮지 말라.  千古烟沈 從今勿冪


바위 사이 솟는 샘이 맑고도 차가워라 石間井冽寒

저절로 솟아 흐르니 마음 어이 슬프리오 自在寧心惻

한가한 이 사람이 서당 세웠으니 幽人爲卜居

표주박 한잔 물을 진실로 서로 얻었도다. 一瓢眞相得

농운정사(隴雲精舍)

 농운정사(隴雲精舍)는 도산서당의 부속시설로서 퇴계의 제자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던 기숙사 같은 곳이다. 이 건물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한자로 ‘공(工)’ 자이며 옛날 길쌈을 하던 베틀에 날줄을 매는 ‘도투마리’ 모양을 하고 있다. 퇴계가 공부하는 제자들이 거처할 집이므로 공부를 열심히 하여야 한다는 염원으로 설계를 하였다. 방에는 크고 작은 창문이 많은데 이는 공부하는 공간이니 쾌적한 환경을 유지하기 위함이고, 마루는 마주 보는 한쪽만 터져 있는데 여름의 뜨거운 햇살을 피하여 시원하게 하기 위한 의도로 만들어진 공간이다.      

 농운정사는 조선의 학계나 정계에서 큰 활동을 한 영남의 선비들이 젊은 시절 퇴계의 가르침을 직접 받으며 공부하던 산실이며, 그 원형이 잘 남아있는 유적이다. 이 건물에서 공부한 인물은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그중 상덕사에 배향된 퇴계의 제자 조목(趙穆)을 비롯해 영남의 큰 학맥을 이룬 김성일(金誠一), 임진왜란의 국난을 헤쳐 나간 류성룡(柳成龍) 등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거쳐간 곳이다     


시습재(時習齋)

농운정사 동편 마루에는 시습재(時習齋)라고 쓰여있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재(齋)는 일반적으로 방을 이르기 말이기 때문에 동편의 방을 지칭하는 현판으로 볼 수 있다. 시습(時習)이라는 말은 많이 쓰이는 말로 『논어(論語)』 에서 따왔음은 쉽게 알 수 있다. 즉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기쁘지 아니한가?”이다. 퇴계가 아래 시에 적은 바와 같이 이곳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새가 알에서 깨어나 쉼 없이 날개 짓으로 날기를 연습하여 비로소 창공을 날듯이 거듭 생각하고 실천하여 참 맛을 얻으면 삶은 고기와 같이 입과 턱을 즐겁게 한다.’는 염원을 담았다.     


시습재                                    時習齋     

날로 명성 일삼아서 새 날 듯이 익히고는 日事明誠類數飛

거듭 생각 다시 실천 때때로 나아가오  重思複踐趁時時

공부가 이룩되어 깊은 맛을 얻고 보면  得深正在工夫熟

아름답게 삶은 고기 입에 맞을 뿐이리요  何啻珍烹悅口頤     


시습재 현판 글씨 역시 퇴계가 예서체로 쓴 글씨이다. 이 글씨에서 특이한 점은 ‘시(時)’자에 ‘일日’ 자의 한 부분인 ‘口’ 속에 비둘기를 그린 것과, ‘토(土)’ 자의 위 가로 획을 두 점으로 이은 것이다. 『서도자전(書道字典』이라는 책에서도 찾기 힘든 글자로서 퇴계가 글자의 아름다움을 위하여 창작한 듯하다.

시습재(時習齋) 현판

관란헌(觀瀾軒)

농운정사 서편에 있는 공간인 관란헌(觀瀾軒) 현판이다. 퇴계가 쓴 글씨이며 “전서·예서·해서의 서풍이 어우러져 상당히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편안한 글씨”이다. 글자대로 번역하면 ‘물결을 바라보는 마루’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속내는 물결이 주는 교훈을 깨우쳐서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물은 작은 구멍이라도 채우지 않으면 흐르지 아니하고 구멍을 하나하나 채우며 마침내 바다에 도달한다. ‘군자가 성인의 뜻을 두고 덕을 닦아 나가는 데 있어도 하나하나의 덕을 차례차례 완성시켜 나아가지 아니하면 성인(聖人) 같은 이상적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관란헌                          觀瀾軒     

넓고도 양양하니 그 이치 어떻던고  浩浩洋洋理若何

일찍이 성인께서 이렇다고 탄식했소  如斯曾發聖啓嗟

도체가 다행히도 이로부터 나타나니  幸然道體因茲見

공부를 하려면 끊어지지 않게 해야 하오 莫使工夫間斷多

관란헌(觀瀾軒) 현판

도산서당(陶山書堂)

 퇴계가 도산서당과 농운정사의 짓는 일을 마치고 지은 「도산기(陶山記)」에는 “영지산(靈芝山)에서 다시 뻗었으니 ‘도산’이라고도 하였고, 이 산에 옛사람들이 도자기를 굽던 터가 있어서 ‘도산’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도산서당                                         陶山書堂     

순임금이 친히 그릇 구우면서 즐겁고 편안하셨고  大舜親陶樂且安

도연명 몸소 농사하니 즐거운 얼굴이셨다.   淵明躬稼亦歡顔

성현의 그 심사를 내가 어찌 터득하리  聖賢心事吾何得

늘그막에 돌아왔으니 한가롭게 지내리라.  白首歸來試考槃     


 도산서당은 목조 기와 맞배지붕에 동·서쪽에 날개 처마를 단 세 칸 반으로 방과 마루, 부엌으로 구성되었으며 동편의 날개 처마 아래에는 살평상을 꾸몄다. 도산서당은 본래 퇴계가 광헌공(廣軒公)의 사랑채를 본떠서 한 칸으로 지으려 하였는데 공사를 하던 승려 정일(靜一)이 마루 한 칸을 더 늘려지었다고 한다.   


 1556년에 면진재(勉進齋) 등 제자들이 이곳을 찾아서 퇴계에게 좋은 터가 도산 남쪽에 있다고 이야기하니 와서 보고는 ‘평생 찾던 학문할 곳이 바로 여기로구나’ 하며 기뻐하고 제자들과 아들, 손자를 데리고 다시 살펴보고 거듭 감탄하였다. 이듬해에 바로 착공하여 1561년 봄에 준공하고, 이어서 농운정사는 가을에 준공하였으니 4년 여가 걸렸다     


 ‘도(陶)’자를 옥편에서 찾아보면 질그릇을 의미한다. 질그릇은 흙을 곱게 정선(精選)하고 반죽하여하여 그릇의 형체를 만들어 유약(釉藥)을 발라 높은 온도의 불에 구워야 비로소 쓰임이 있는 그릇이 되는 것이다. 퇴계가 순임금과 도홍경, 도연명의 삶을 흠모하기도 하였지만, 서당현판에 ‘도산(陶山)’을 선택한 의미는 질그릇을 만드는 정성으로 제자를 기르시겠다는 다짐과 공부하는 제자들도 흙이 갖은 노력과 고난을 거쳐야 쓸모 있는 그릇이 되듯이 열심히 공부하여 세상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를 기대해서일 것이다.     


 ‘도산’에서 산(山) 자를 상형문자로 표현한 것은 공부하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데, 즉 산을 오르는 것과 같이 공부를 처음부터 차근차근 열심히 하여 정상에 올라야 한다는 가르침을 보여주고 있다.    

 

 도산서당은 퇴계의 학문의 실험장이고, 도학의 수련장이었으며, 나아가 16세기 우리나라 철학 연구의 본산으로서 참다운 인간을 양성하는 전당(殿堂)이었다.


퇴계 선생이 머물렀던 가운데 온돌방의 이름은 완락제(玩樂齋)인데, 완락은 성리학의 창시자 주자의 ‘명당실기’에 나오는 구절을 축약한 단어로 ‘완상하여 즐기니 족이 여기서 평생토록 지내도 싫지 않겠다.’라는 뜻이다. 이곳 도산서당이 퇴계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알 수 있는 구절이다.

도산서당

암서헌(陶山書堂)

 암서헌(巖栖軒)은 주자의 시 「운곡십이영雲谷十二詠」 중, ‘스스로 오랫동안 능하지 못했다고 믿었기에 바위에 깃들어서 약간 효과를 바라노라.’라는 말에서 골라낸 것이다.     

 선생은 아래 시에서 ‘암서(바위에 깃드는 뜻)의 깊은 뜻을 늘그막에 알았으니 스스로 소홀할까 두렵구나.’라고 하며 학문하는 사람은 조심하기를 깊은 연못에 임하는 것 같이하며, 얇은 얼음을 밟는 것같이 해야 한다는 정신 집중을 강조하였다.      


암서헌                                         巖栖軒

증자는 안연더러 실하면서 허한 듯 하다했으니 曾氏稱顔實若虛

병산은 처음에 이를 끌어 주자를 계발했네.    屛山引發晦翁初

바위에 깃드는 뜻 늦게야 알았으니           暮年窺得巖栖意

박약이니 연빙이니 공부 허술할까 두렵소.    博約淵冰恐自疎

 암서헌 동편 날개처마 아래에 살평상이 설치되어 있다. 「도산서당영건기사陶山書堂營

建記事」에 “동쪽에 날개처마를 덮었다”라고 날개처마에 대해 언급하였다.


몽천(蒙泉)

 도산서당 유정문 아래 동쪽에는 ‘몽천(蒙泉)’이라고 붉은 글씨로 쓴 표지석이 있는 우물이 있다. 몽천은 산골에서 솟아나는 샘물인데 퇴계가 역경(易經)의 몽괘(蒙卦)에서 의미를 취해 직접 이름을 지었는데, 몽매한 제자를 바른길로 이끌어가는 스승의 도리를 의미한다. 한 방울의 샘물이 수많은 어려움과 여정 끝에 바다에 이르듯이 제자들이 끊임없이 노력해서 뜻을 이루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퇴계는 이 샘물을 도산서당의 터를 잡은 이유 중의 하나로 꼽았다. 이 지역의 자연 배경이 학문을 수양하고 제자를 양성하는데 적합하다고 여기었다.  

도산서당 몽천(蒙泉)


 도산서당 마당 동쪽에는 정사각형의 작은 연못이 있는데 퇴계 선생이 1560년 도산서당을 짓고 서당 동편에 작고 네모진 연못을 파고 그 가운데 연꽃을 심어 ‘정우당’이라고 하였는데 한자 뜻 그대로 옮긴다면 ‘깨끗한 벗이 사는 연못’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깨끗한 벗은 바로 연꽃을 이르는 말이다.      


 중국 송나라 유학자 주렴계가 『애련설(愛蓮說)』이라는 글에서 국화는 꽃 중의 은자(隱者)라고 하였고, 모란은 부귀(富貴)의 꽃이라고 하였는데, 연꽃은 꽃 중의 군자(君子)라고 하였다. 연꽃은 진흙탕에 살면서도 몸을 더럽히지 아니하고, 속은 비었으나 줄기는 곧아 남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향기는 멀수록 맑고, 바라볼 수는 있지만 가지고 놀 수 없어서 꽃 중의 ‘군자’라고 하였다.

도산서당 정우당(淨友塘)

진도문(進道門)

 서원의 일반적인 구조를 살펴보면 들어가는 길 입구에 홍살문이 있고, 다음이 문루이고, 다음이 외삼문이고, 다음이 마당인데 마당에는 좌우에 동재와 서재가 있고, 마당 북쪽에 강학당이 있고, 강학당 뒤편에 사당을 모셨는데 사당에 들어가는 문이 내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홍살문은 훌륭한 선현의 위패를 모신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것이고, 문루는 공부하는 선비들이 쉬기도 하고 풍류를 즐기기도 하고 집회의 장소로 활용하기도 한다. 외삼문은 서원을 출입하는 문으로서 이 문안에서는 선비로서 체통을 지키며 경건하고 엄숙하게 행동을 하여야 한다. 외삼문은 문루 아래, 또는 따로 문을 설치하거나, 문을 하나로 꾸민 경우도 많다.      


 도산서원의 외삼문은 진도문(進道門)이다. “의지를 굳세게 하면 뜻을 굳게 지켜 잘못되지 않는 것이니 도에 나아가는 데 용감하다(剛則守得定不回 進道勇敢)”라는 ‘횡거’(중국 북송시대 철학가)의 말에서 인용하였다. 즉 공부를 하고자 하는 사람은 마음이 굳건해야 용감하게 도(道)를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서원 전체 경내에서 진도문을 중심으로 바깥은 서당구역이고, 안쪽은 서원구역으로 구분된다. 즉 바깥은 퇴계 선생이 학문 연마와 제자를 기르던 구역이고, 안쪽은 후세의 선비들이 선생의 가르침을 배우고 깨우치는 구역이다. 도산서당을 확장하여 도산서원이 되었다. 서원에 출입하는 선비들은 진도문 바깥에서 선생의 가르침을 받아 안쪽에서 깨우쳐서 참된 인간으로 나아가게 된다.

도산서원 진도문(淨友塘)

광명실(光明室)

 광명실(光明室)은 누마루 형식의 목조 두 칸 집으로 진도문 좌우에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다. 퇴계 선생이 주자(朱子)의 「장서각명藏書閣銘」에 ‘우리에게 광명을 끼쳐주었네(惠我光明)’라는 글에서 따서 광명실이라고 하였다. 또 『시경詩經』 「주송경지周頌敬之」에도 “나 소자가, 총명하지 못하여 공경하지 못하나, 날로 나아가고 달로 진보하여, 배움을 이어 밝혀서 광명함에 이르고자 한다(維予小子 不聰敬止 日就月將 學有緝熙于光明)”라는 말도 있다.     


 배움의 길은 깊고 멀어서 어느 정도 성취했다고 하여 그만두는 것은 진정한 배움의 태도가 아니다. 배움의 성과가 깊은 데까지 이르러 빛이 날 때까지 계속하는 것이 우리 조상들의 공부하는 태도였다. 즉 현대의 개념인 평생학습이라야 올바른 학문의 태도라는 것이다. 광명실 현판의 글씨는 퇴계 선생의 친필로 지금의 현판은 2009년에 다시 새겨서 걸었다. 옛 현판은 훼손 또는 도난을 우려하여 모두 한국국학진흥원 장판각에 보관하고 있다.

도산서원 광명실(光明室)

서원의 고전적과 목판들을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하기로 결정하고, 처음 옮기던 날(2003. 4. 14) 상덕사에 아뢴 고유문은 다음과 같다.     


 계미년 3월 13일 후학 류단하는 감히 밝게     


 선사 도산부자 퇴계이선생 영령께 고하옵니다.

공손히 생각하옵건대 선생께서는 선비들의 모범이시고 국가의 원로이셨습니다. 우리 동남지역

을 인도하시어 배우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습니다. 재주에 따라 가르치시어

각기 그 그릇을 이루어주셨습니다. 인재가 크게 일어나 국가의 기틀이 되었습니다. 좌우에 책을 두시고 학문에 힘쓰셨습니다. 서가에 가득한 경전을 보존함에 아무런 걱정이 없었습니다. 계속해서 오늘에 이르렀으며 아직도 그 가르침은 잘 보존되고 있습니다. 현재의 서고가 허술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장차 국학진흥원에 옮겨서 더 오래도록 보존하려 하옵니다. 지금 옮기면서 여러 가지 감정이 어지럽습니다. 엎드려 생각하오니 존령께서는 허물하시지도 꾸짖으시지도 마시옵기를 삼가 경건하 게 아뢰옵나이다.


홍의재(弘毅齋)

 『논어(論語)』 태백편(泰伯篇)에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선비는 마음이 넓고 뜻이 굳세어야 한다. 임무는 무겁고 길은 멀다. 인仁의 도리를 실천할 수 있는 무거운 소임을 다해서 원대한 목표를 달성할 수가 있다”라고 하였다. ‘홍(弘)’은 마음이 크고 넓다는 뜻이고 ‘의(毅)’는 의지가 굳세고 결단력이 있다는 뜻이다. ‘인(仁)’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고 또 인간의 도리를 실천하는 것이 멀고도 큰일이다. 따라서 마음이 크고 넓어야 하고 의지가 굳세고 결단력이 있어야 한다. 홍의재(弘毅齋)란 바로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인(仁)’은 공자의 중심사상이다. 인은 모든 생명체의 본질이다. ‘인(仁)’은 이기적인 욕심이 제거된 인간의 순수한 본질적인 마음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이기심과 욕망에 속박되어 있기 때문에 마음이 넓고 의지가 굳고 때로 결단력이 없으면 ‘인(仁)’을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선비는 마음이 넓고 뜻이 굳세어야만 인(仁)의 도리를 실천할 수 있는 무거운 책임을 다할 수 있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홍의재 현판의 테두리에는 구름 문양을 그려 기거하는 유생들에게 높고 넓게 공부하라는 것과 현판의 화려함을 더하였다.

도산서원 홍의재(弘毅齋)
홍의재 현판의 테두리에는 구름 문양을 그려 기거하는 유생들에게 높고 넓게 공부하라는 것과 현판의 화려함을 더하였다.

박약재(愽約齋)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문(文)에 대해서 널리 배우고, 예(禮)로써 요약하면 도(道)에 어

긋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박(愽)’자와 ‘약(約)’자를 따서 ‘박약재(愽約齋)’라고 하였다.     


 중화(中和)는 유교(儒敎)의 중심사상인데, 중(中)은 인간의 본질을 말하고 화(和)는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침이 없이 모든 사람들이 화합하여 살아가는 모습을 말한다. 중화의 도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성현의 말씀이 담긴 책을 통해 박학다식(博學多識) 해야 한다. 이것이 박학어문(博學於文)의 의미이다.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이기심(利己心)을 버리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모든 사람과 화합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禮)를 따라야 한다. 대인관계에 있어서 예로써 행동해야만 한다. 이것이 약지이례(約之以禮)의 의미이다. ‘불반(弗畔)’이란 중화의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을 표현한 말이다. 따라서 ‘박약(博約)’이란 ‘널리 배워 예로써 살며 중화의 도리를 실천하자’라는 의미로 공자의 제자인 안연(顔淵)의 공부 방식이다.  

   

박약재 현판의 테두리 문양은 국화와 구름이다. 특히 국화의 꽃잎을 드러낸 문양은 바람개비 같은 역동성이 있으며 자연스럽고 품위가 있어 상품 문양 등에 활용되기도 한다.

도산서원 홍의재(弘毅齋)
테두리 문양은 국화와 구름이다. 특히 국화의 꽃잎을 드러낸 문양은 바람개비 같은 역동성이 있으며 자연스럽고 품위가 있어 상품 문양 등에 활용되기도 한다.

도산서원(陶山書院), 전교당(典敎堂)     

 강학당으로 가면 전면에 도산서원(陶山書院) 현판이 걸려있다. 현판 좌측에 작은 글씨로 ‘萬曆三年六月 日 宣賜’라고 써져 있는데, 이 말은 ‘선조 8년(1575)년 6월 어느 날 임금이 내리다.’라는 말이다. ‘선조(宣祖)’가 아니라 ‘선사宣賜’로 적혀있는데 그 이유는 사액 당시 임금이 생존한 상태로 현판을 비롯한 서책과 전답 노비 등을 내렸기 때문이다. 임금의 묘호는 사후에 정하기 때문에 생존 시에는 ‘선조(宣祖)’라는 묘호가 없었다. 따라서 ‘선사(宣賜)’는 ‘선조 임금이 베풀어 하사(下賜)하다’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도산서원 현판은 우리에게 한석봉으로 알려져 있는 석봉(石峯) 한호가 썼다고 하고, 글씨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1575년 6월 어느 날, 선조는 석봉을 어전에 불러 편액 글씨를 쓸 준비를 하도록 했다. 그리고 무엇을 쓸 것인지 알려주지 않고 부르는 대로 쓰라고 말했다. 처음부터 ‘도산서원’ 편액 글씨를 쓰라고 하면, 젊은 석봉(당시 32세)이 퇴계와 도산서원의 명성이나 위세에 눌려 글쓰기를 양보하거나 마음이 흔들려 글씨를 망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글씨 쓰는 순서도 거꾸로 하기로 했다. 선조는 그에게 첫 글자로 집 ‘원(院)’ 자를 쓰라고 했다. 석봉은 ‘원(院)’ 자를 썼다. 다음은 글 ‘서(書)’ 자를 쓰게 하고, 이어서 ‘산(山)’ 자를 쓰도록 했다. 석봉은 쓰라는 대로 여기까지는 잘 썼다. 이때까지만 해도 어떤 편액 글씨를 쓰는지 몰랐다. 마지막 한 자가 남았다. 바로 질그릇 ‘도(陶)’ 자다. 이 자를 말하면 석봉도 도산서원 편액을 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선조는 ‘도(陶)’ 자를 쓰라고 했고, 석봉은 그때 도산서원 편액 글씨를 쓰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도’ 자를 쓰라는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해도 잘되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가슴이 두근거리는 가운데 붓을 떨며 가까스로 ‘도’ 자를 완성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쓴 ‘도’ 자가 다른 세 자와 달리 약간 흔들린 흔적과 어색한 점이 있다고 전한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이 봐서는 그 점을 알아채기 쉽지 않은 것 같다.               

석봉 한호가 쓴 ‘도산서원’ 현판

 전교당(典敎堂)의 ‘전(典)’은 ‘법’이란 뜻도 있고, ‘책’이라는 뜻도 있다. 합해서 풀이하면

주로 윤리와 법을 기록한 책을 지칭하는 글자이다. ‘당(堂)’은 한쪽에 방이 있고 중앙에 마루가 있는 구조로 된 집이다. 전교당은 ‘인간이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고 배우는 집’이란 의미로 읽을 수 있다. 전교당은 다른 서원의 강당과는 다르게 동쪽의 협실이 없는데, 이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비어 있는 동쪽에 퇴계 선생을 모시고 있는 사당을 배치함으로써 퇴계 선생을 영원한 원장으로, 영원한 스승으로 모시고 싶은 후학들의 마음이 담겨 있다.

도산서원(陶山書院) 강학당인 전교당, 동쪽 협실이 없는 점이 특이하다.

한존재(閑存齋)

 공자(孔子)는 “하늘의 덕은 바르고 가운데 함이니, 평상시 말을 미덥게 하며, 행실을 삼가, 간사함을 막고 그 정성을 보존하며, 세상을 착하게 해도 자랑하지 않으며, 덕을 넓게 펼쳐 교화시키니, 하늘의 능력이 마음속에 있어 위대한 사람을 본받는 것이 이롭다는 말은 군자가 실천해야 할 덕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존재(閑存齋)는 앞의 ‘간사함을 막고 그 정성을 보존한다(閑邪存其誠)’라는 말에서 따왔다.     


 한존재는 서원의 상유사가 기거하며 원무(院務)를 결정하고 집행하는 방이다. 상유사는 서원을 경영하는 자리이다. 상유사는 어떠한 경우에도 간사한 말을 물리쳐야 하고, 정성스러운 말을 받아들여 바른 판단으로 서원을 운영한다는 방침을 게시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현판 테두리에 연꽃 문양이 그려져 있는데 역시 군자를 상징한다. 한존재는 서원에서 가장 웃어른이 계시는 방으로 아무나 함부로 드나들거나 행동을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도산서원(陶山書院) 강학당인 전교당의 서쪽 협실, 한존재(閑存齋)

정조대왕 전교 (正祖大王 傳敎)

 조선시대 과거시험은 예비시험 격으로 소과, 소과 합격자 등이 1차(초시), 2차(복시), 3차(전시)에 걸쳐 보는 대과(大科)가 있었다. 소과는 서울과 지방에서 각각 실시되지만, 대과는 서울에서만 열렸다. 도산 별과는 정조가 조선 최고 성리학자 퇴계 이황 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지방 선비들의 사기를 높여 주기 위해 1792년 도산서원 앞 시사단(試士壇)에서 연 대과시험이다. 당시 지방에서 유일하게 열린 대과시험인 도산 별과에는 경상도를 중심으로 1만여 명의 유생이 몰렸고 이 중 7,228명이 응시, 제출된 답안지는 3,632장에 달했고, 밀봉되어 규장각으로 보낸 답안지는 정조가 직접 채점을 했다. 정조의 퇴계 선생과 도산서원에 대한 관심과 신뢰는 대단했는데 그 내용이 아래 전교문으로 전해지고 있다.      


壬子三月初三日

傳曰欲尊正學宜尊先賢以奉使行之入其境昨有致祭玉山書院之命而更思行於玉山不爲於

陶山其可乎哉向來邪學之漸染也惟嶠南人士謹守先正正學不撓不奪不涅不汚自是以往

增我曠慕方春廚傳恐貽民弊有意未免咨且聞其道里不甚於迂回仍遣閣臣李晩秀奉命回路

馳至禮安縣先正文純公李滉書院致祭祭文製下先令內閣知委道臣處道臣似在巡路亦卽直

關該邑爲先正子孫及隣邑人士之來參致祭者預須會待祭之日閣臣坐典敎堂招諸生立於進

道門內庭以䝴去書題揭示各令應製收捧試券還朝日以啓如是則小邑支應爲弊必當不少令

廟堂申飭道伯區劃穀物

通政大夫承政院左副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奎章閣檢校直閣 知製 敎 臣李晩

秀奉

敎謹書      


 전교에 이르기를 정학을 높이려고 하면 마땅히 선현을 높이 받들어야 한다. 사신이 그 지역에 들어감에 어제 옥산서원에 치제토록 명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옥산서원에만 치제(致祭)를 하고 도산서원에는 치제치 않는다면 옳겠는가? 요즈음 사학(천주교)이 점차 퍼지고 있다. 오직 영남의 인사들만이 선정의 정학을 조심스럽게 지켜 꺾이지 않고 빼앗기지 않고 물들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았으니 이로 말미암아 나의 한없는 그리움이 더해졌다. 이 봄철에 먹고 자는 데 민폐를 끼칠까 두려운 뜻이 있으니 걱정을 버리지 말라. 또 들으니 그 길의 거리가 멀지 않아 돌아오도록 거듭 보내니 각신 이만수가 명을 받들고 돌아오는 길에 예안으로 달려가 선정 문순공 이황의 서원에 치제토록 하라. 제문은 지어 내려 보내겠다. 미리 내각에 당부하여 감사가 알도록 하고 감사가 순시하고 있으면 즉시 해당 고을에 알려라. 선정의 자손들과 인근 고을 人士들이 와서 치제에 참석하려는 사람들은 미리 와서 모여 기다리도록 하라. 치제 날에 각신은 전교당에 자리를 정하여 앉아 여러 유생들을 불러 진도문 안뜰에 세우고 지니고 간 서제를 걸어 보이도록 하여 각각 글을 짓도록 하고 시권을 거두어 조정에 돌아오는 날에 보고하라. 이렇게 하면 작은 고을에 준비하느라 폐가 반드시 많을 것이니 조정에 당부하여 경상감사가 곡식을 준비토록 하라.     


 통정대부승정원좌부승지겸경연참찬관춘추관수찬관규장각검교직각지제교 신이만수 전교를 받들어 씁니다.

도산서원(陶山書院) 정조대왕 전교 (正祖大王 傳敎)

상덕사(尙德祠)

 상덕사는 서원의 가장 높고 깊은 자리에 있다. 퇴계 선생과 제자 월천 조목 모시고 있는 곳으로 가장 경건하고 엄숙하게 행동해야 하는 곳이다. 사당(祠堂)은 선생을 뵙는 의례를 봉행하거나 특별한 일이 없으면 열어 놓는 곳이 아니다. 상덕사(尙德祠)라는 글자를 우리말로 옮기면 ‘덕(德)을 숭상(崇尙)하는 사당’이다.     


 일반적으로 자손을 있게 한 조상의 신주를 모신 가묘에는 묘호(廟號)가 없다. 그러나 훌륭한 선현을 모시고 가르침을 계승하고자 하는 서원에는 묘호가 있다. 묘호에는 지명이나 모셔진 선현의 호 또는 시호(諡號)를 쓰는 경우도 있지만 모셔진 선생의 가르침을 요약한 묘호가 많다. 공자를 모신 성균관이나 향교의 사당은 대성전(大成殿)이라고 하고, 석가모니를 모신 사찰의 본전을 대웅전(大雄殿)이라고 하여 성현을 모신 사당의 묘호에는 전(殿)을 쓰고, 선현(先賢)을 모신 사당은 묘(廟)를 쓰거나 사(祠)를 쓴다. 참고로 예외로 대구 도동서원과 함양 남계서원 사당에는 묘호가 없다.

도산서원(陶山書院) 상덕사(尙德祠)

5. 도산서원(陶山書院)을 그린 그림들     

표암 강세황, 도산서원도     

 강세황은 조선 후기의 문인, 화가, 평론가이다. 그림제작과 작품에 대한 평론 활동을 주로 했으며 한국적인 진경산수화를 발전시켰고, 풍속화와 인물화를 유행시켰으며, 새로운 서양화법을 수용하는 데도 기여했다.      

 도산서원도(陶山書院圖)는 영조 27년(1751)에 강세황이 도산서원의 실경을 그린 그림이다. 그림은 도산서원을 중심에 두고, 앞쪽에 탁영담(濯纓潭), 반타석(盤陀石) 등을 흐르는 강물과 함께 그렸고, 왼쪽의 곡류 외에는 분천서원(汾川書院), 애일당(愛日堂), 분강촌(汾江村) 등을 그렸다. 그림에는 강세황이 쓴 발문이 적혀있는데, 여기에는 병중의 이익(李瀷)이 그려달라고 특별히 부탁한 사실과, 자신의 소감을 비롯하여 현지답사 내용 및 제작시기 등을 비교적 자세히 적고 있다. 이 그림은 마(麻)의 올을 풀어서 늘어놓은 것 같이 섬세한 기법으로 산과 계곡을 표현한 작품으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표암 강세황, 도산서원도(姜世晃 筆 陶山書院圖)

겸재 정선,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     

 겸재 정선은 조선 후기에 활동한 문인화가로서 진경산수화가 대대적으로 유행하는 계기를 만든 선구적인 인물이다. 유학자(儒學者)로서의 소양이 풍부하였고 『주역』과 『중용』 같은 경학에도 밝았을 뿐 아니라 『도설경해(圖說經解)』라는 저서를 수십 권이나 지었다고 전하는 것으로 볼 때, 문인 사대부로서 학식을 쌓아나가는 데도 소홀함이 없었다.     


 계상정거도는 퇴계 사후 177년이 지난 1746년 겸재 정선이 71세가 되던 노년에 그린 그림이다. 퇴계가 생전에 머물렀던 도산서원의 전신인 도산서당을 중심으로 주변 풍경을 담은 산수화이다. 계상정거(溪上靜居)는, ‘시냇물이 흐르는 곳에서 조용히 지낸다’는 뜻이다. 앞에는 강이 흐르고 뒤로는 산으로 둘러싸인 배산임수의 풍경으로 산 아래 작은 암자가 한 채 보인다. 암자 안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퇴계 선생이 조용히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다.     


 겸재의 계상정거도는 우리나라 천 원권 지폐 뒷면에 실려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지폐 앞면에는 퇴계 선생이 실려 있는데, 『모든 권좌에서 물러나 시냇물이 흐르는 곳에 자리 잡고 고요하게 산다』는 뜻인 선생의 호인 ‘퇴계(退溪)’와, 『조정의 일을 그만두고 물러나 냇가에서 조용히 지낸다』라는 ‘계상정거(溪上靜居)’의 의미가 일맥상통한다.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 원본이 수록된 『퇴우이선생진적첩』은 현재 삼성문화재단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겸재 정선,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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