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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은 May 13. 2024

3. 답사의 신, 서원(書院)에 가다! - 옥산서원 -

옥산서원의 입구인 역락문, '벗이 먼 곳으로부터 오는 것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有朋而自遠方來 不亦樂乎)'에서 따왔다.

1. 서원(書院) 이야기     

 서원(書院)은 조선시대 성현(聖賢)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학자를 키우기 위해 전국 곳곳에 설립한 사설 교육 기관으로 오늘날의 지방사립대학교라고 볼 수 있다. 서원의 공간은 크게 성현(聖賢)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건물인 사우(祠宇)와 청소년을 교육하는 서재(書齋)로 나눌 수 있다.      


 서원의 교육은 원장(院長), 강장(講長), 훈장(訓長) 등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원장은 서원의 대표자로 보통 퇴직 관료나 당대의 유명한 석학이 맡았으며, 이들은 서원 기강 확립과 원생들의 행실 규찰을 담당했지만 서원 운영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강장은 서원에 입학한 원생들에게 경학과 예절을 가르치는 역할이었고, 훈장은 면학과 교관의 일종인 훈육을 책임지는 역할이었다.     


 서원의 운영은 서원의 모든 일을 주관하며 재장(齋長)이라고도 불린 도유사(都有司) 또는 장의(掌議)가 맡았다. 이 밖에도 도유사 다음가는 직책인 부유사(副有司), 여러 사무를 분담해서 맡은 유사(有司), 간사 역할을 하는 직월(直月), 서기 역할을 하는 직일(直日)등이 있었다.      

    

성균관이나 향교는 번잡한 도시에 있어서 앞으로는 번거로운 학칙에 얽매이고 뒤로는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기 쉬우니, 어찌 서원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퇴계 이황  

   

 서원은 성균관, 향교와 함께 조선시대 대표적인 고등 교육 기관으로, 국립으로 전국 각 도시에 분배된 향교와 대비되는 사립학교로서 지역 문화를 대표하는 장소였다. 그래서 서원은 교육 기능과 교화 기능을 그 양축으로 삼고 있었다. 조선 중기 사대 사화를 비롯한 정치적 혼란으로 말미암아 학자들은 지방에 은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하게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선배 유학자들을 기리고 제사하는 사당의 기능까지 통합한 서원을 창설하기 시작한 것이다.     


 먼저 교육 기능에 대해서 살펴보면, 서원에서 교육의 목표는 인품이 훌륭한 성현을 본받고 그러한 관리를 양성하는 데 있었다. 이를 위해 학생들은 다른 교육 기관과 마찬가지로 소학에서부터 시작하여 사서오경을 중심으로 공부에 전념했다. 그리고 사서와 오경을 모두 익힌 다음에는 가례, 근사록과 같은 성리학에 관한 책들을 익히도록 했다.     


 서원의 또 한 가지 기능인 교화 기능은 주로 선현에 대한 제사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제사의 대상에 있어서는 성균관이나 향교와는 차이가 있었다. 성균관과 향교의 문묘(文廟)에 배향된 인물은 공자를 비롯해 안회, 증자, 자사, 사성(四聖)과 공자 문하의 십철, 그리고 송나라 6현과 우리나라 18현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은 신라, 고려,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나라의 최고 정신적 지주에 오른 한국의 유학자 18명을 말하며 동국 18현(東國 十八賢)이라고도 한다. 그 18명의 배향 인물은 다음과 같다.      


홍유후(弘儒侯) 설총, 문성공(文成公) 안유, 문경공(文敬公) 김굉필, 문정공(文正公) 조광조

문순공(文純公) 이황, 문성공(文成公) 이이, 문원공(文元公) 김장생, 문경공(文敬公) 김집

문정공(文正公) 송준길, 문창후(文昌侯) 최치원, 문충공(文忠公) 정몽주, 문헌공(文憲公) 정여창

문원공(文元公) 이언적, 문정공(文正公) 김인후, 문간공(文簡公) 성혼, 문열공(文烈公) 조헌

문정공(文正公) 송시열, 문순공(文純公) 박세채     


 그러나 서원은 사학(私學)이라는 특성상 대부분 지역의 문중에 의해 건립되었던 까닭에 자신의 문중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인물 가운데 뛰어난 인물을 배향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국립인 성균관과 향교에 비해 배향 인물의 선택 폭이 훨씬 넓었다.     


 성균관이나 향교와 마찬가지로 서원에서도 봄과 가을에 걸쳐 일 년에 두 차례의 제사를 지냈다. 제사일은 성균관과 향교에서 봉행하는 석전(釋奠)에 비하여 그 격이 낮았던 관계로 그 날짜를 석전보다 뒤로 하였다. 즉, 석전이 상정일(上丁日)에 봉행되는 데 비하여 서원의 제사는 중정일(中丁日) 또는 하정일(下丁日)로 잡아 거행함으로써 그 격을 구분하였다.     


 이외에도 서원에서는 다양한 기능을 담당했는데 지방의 인재들이 모이는 집회 장소였으며, 학생들의 학문을 위해 다양한 도서를 보관하는 도서관의 기능과 책의 출판 기능도 담당했다. 그래서 많은 서원에는 장판각 또는 장판고라는 서고가 있다. 이외에도 서원은 지방의 풍속을 순화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는 곳이었고 또한 그 지역의 여론을 선도하였음은 물론, 지역별 향약을 기준으로 효자나 열녀 등을 표창하고 윤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사람을 규탄하는 등의 직접적인 교화 활동도 하였다.     


 서원의 기원은 당나라 시기였으나 실질적인 형태는 송나라 때에 와서 완성되었으며, 특히 서원의 위상은 주자에 의해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서원이 처음 설립된 것은 1543년이었는데, 당시 풍기 군수였던 주세붕이 안향을 추모하기 위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을 설립하였다. 안향은 중국의 ‘주자학’이라는 학문을 우리나라에 도입한 최초의 학자였다. 주세붕이 세운 최초의 서원은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라 칭했지만, 후에 풍기 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이 서원에 대한 국가적인 지원을 건의하였고 이에 명종이 서적 등의 물자와 함께 친필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 사액(賜額)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퇴계 이황을 비롯한 성리학자들에 의해 서원의 보급 운동이 일어나면서 전국에 많은 서원이 건립되었다. 그리하여 명종 대에 건립된 수가 17개소에 불과했던 서원이 선조 대에는 100개가 넘었으며, 18세기 중반에는 전국에 700여 개소에 이르렀다.     


 이처럼 서원이 늘어나면서 부작용이 커졌다. 서원에 딸린 토지에는 세금이 부과되지 않았고, 서원의 노비는 국역(國役)을 지지 않았다. 따라서 서원이 증가함에 따라 국가 재정에 문제가 생겼다. 엄청난 숫자의 서원들 때문에 민생에 끼치는 폐단이 엄청났고, 심지어는 살아있는 사람을 모시거나 성현도 아니지만 가문의 조상이라는 이유로 모시느라 집안마다 서원을 만들고, 한 사람을 모시는 서원이 5~6곳에 이르는 등 그 부작용이 말이 아니었다.     


 19세기부터 세도 가문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서원의 중앙에서의 정치적 영향력은 사실상 없어졌지만, 무엇보다도 지방경제에 미치는 폐단이 말이 아니었다. 선현의 제사를 지낸다는 명목으로 지방 농민들을 사사로이 수탈하였으며 이에 반발하는 지역민들을 향약이나 반상의 도리를 어겼다 하여 처벌하거나 지역 사회에서 매장시키는 전횡을 저지르고 나라에서 막대한 식량과 노비를 제공받으면서 세금을 내지 않는 면세 특권이 있어 국가 재정을 악화시켰다.     


 특히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병을 보낸 만력제(萬曆帝)를 제사 지내기 위한 ‘만동묘’와 송시열을 모신 ‘화양동서원’은 워낙 입김이 세서 지역의 백성들에게 서원의 제사 비용을 부담시켰으며 할당된 비용을 내지 못한 백성들을 함부로 붙잡아서 폭행하거나 고문하는 등 그 폐해가 말이 아니었다. 당시 이 일대에 "원님 위에 감사, 감사 위에 참판, 참판 위에 판서, 판서 위에 삼정승, 삼정승 위에 승지, 승지 위에 임금, 임금 위에 만동묘지기"라는 노래가 퍼졌을 정도였다.     


 서원의 폐단에 맨 처음 손을 댄 것은 숙종이었다. 숙종은 한 사람을 중복되게 모시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고, 그의 아들 영조 대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인 서원 정리가 이뤄진다. 영조 3년(1727) 12월에는 한 사람당 하나의 서원만 허가하면서 비교적 나중에 세워졌던 서원들을 정리했으며 영조 23년(1747)에도 허가 없이 사적으로 세운 서원들을 정리했다. 고종 대에서는 흥선대원군의 등장으로 서원 정리의 속도가 빨라지는데 당장 고종 1년(1864)에는 사사로이 세워진 서원과 중첩되는 서원들을 정리하였다.     

 사실 유학자들도 서원이 대거 정리될 것이라는 분위기를 읽긴 읽었는지 이미 고종 1년에 대원군의 직계 조상인 인평대군을 모시는 서원을 세웠으나, 이 역시 철폐된다. 그 후 고종 5년에 서원의 원장을 고을 수령이 맡게 하고, 허용된 정원 이외의 병역 기피자들을 모조리 군역에 넣는가 하면 면세 혜택을 없애 서원의 특혜를 모두 없애고, 관의 통제하에 둔 다음에 곧이어 사액서원 47개소만 남기고 전면 철폐했다. 숙종, 영조 대에 줄곧 지적된 중첩된 서원은 사액서원이라 하더라도 예외 없이 모두 철폐되었다. 이 당시 난립해 있던 서원은 1,000여 곳이 넘었으며 안동 한 곳에만 40여 개의 서원이 있었다.     


"진실로 백성에게 해가 되는 것이 있으면 비록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나는 용서하지 않겠다. "     


 흥선대원군, 유림 세력들이 극도로 반대하던 서원 철폐 정책을 강행하고 절대로 굽히지 않겠다는 발언.


유네스코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옥산서원(玉山書院)     

 옥산서원은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있는 서원으로 문묘 종사와 종묘 배향을 동시에 이루고, 영남학파의 정신적 지주로 추대되고 있는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선생을 주향 하는 서원으로 도산서원과 함께 영남지역 남인들의 정신적 본산이며, 조선시대 서원 건축의 대표 양식을 보여준다.     


 옥산서원은 안동의 병산서원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중복으로 등재되어 있는데 2010년 7월 31일 양동마을의 일부로 먼저 등재되었으며, 2019년 7월 6일에는 한국의 서원 중 하나로도 등재되어 세계유산 2관왕이 되었다.     


 선조 5년(1572년) 경주부윤 이제민이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처음 세웠고, 그다음 해인 1573년에 선조로부터 ‘옥산(玉山)’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옥산서원은 회재 선생이 독락당 주변 깨끗한 냇물을 끼고 있는 바위 다섯 곳에 각각 관어대(觀魚臺), 탁영대(濯纓臺), 세심대(洗心臺), 징심대(澄心臺), 영귀대(詠歸臺)라 이름한 오대(五臺) 중 세심대에 있으며, 세심대에 흐르는 계곡물은 상중하 폭포로 용추를 이루며 서원 오른쪽인 북쪽에서 남쪽으로 감돌아 흘러 나간다. 세심대는 용추에서 떨어지는 물로 마음을 씻고 자연을 벗 삼아 학문을 구하는 곳이라는 뜻이 있다.     


 회재 선생의 학문은 퇴계 이황에게 이어져 영남학파 성리학의 선구가 되었다. 영남학파의 선구자인 이언적을 모신 서원인 만큼 안동의 도산서원과 함께 영남 남인의 양대(兩大) 서원 역할을 했고, 나아가 한국 성리학의 메카로 자리매김하였다. 옥산서원은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살아남았고, 6·25 전쟁 격전지였던 ‘경주 안강전투’에 쏟아지던 포화도 피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장서를 보유하고 있는 서원 중 하나이다. 보관된 서적 중 대표적인 것이 국보인 『삼국사기』, 보물인 『정덕계유사마방목』, 『해동명적』, 『속대학혹문』, 『원조오잠』 등이 있다. 또한 한석봉, 김정희, 이산해 등 당대 명인의 친필 현판 역시 그대로 남아있다.

옥산서원 정문인 역락문(亦樂門)

3.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선생

 조선의 대표적인 유학자이며 정치가이다. 본관은 여주 이 씨이며, 호는 회재(晦齋), 자계옹(紫溪翁)이 있다. 경주 양동마을에서 출생하였으며 영남 남인의 선구자이자 조선시대 최초의 철학적 사유인 태극 논쟁을 벌인 성리학의 거두로 이선기후설(理先氣後設)과 이기불상잡설(理氣不相雜說)을 강조하는 사상을 확립했으며, 이러한 그의 사상은 퇴계 이황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의 사상적 근간이 되었다.     

 

 동시에 그는 의정부 종1품 좌찬성, 이조판서, 예조판서, 대사헌, 대사성, 한성부 판윤, 경상도 관찰사 등 고위직을 역임하며 사후 영의정으로 증직(贈職)된 정치인이기도 했다. 학문적 업적으로 그는 동방 5현이자 동국 18현으로서 문묘에 모셔졌으며, 정치적 업적으로 명종의 배향공신이 되어 종묘에도 모셔졌었는데 명종의 신주가 영녕전으로 옮겨지면서 이언적의 신주는 여주 이 씨 종가로 옮겨갔다. 국왕의 신주가 영녕전으로 옮겨지면 배향공신의 신주는 후손에게 돌려주고 불태우게 한다.      


 현재 문묘(대성전)와 종묘(공신당)에 모두 이름을 올린 사람은 이언적, 이황, 이이, 김집, 송시열, 박세채 뿐이다.     


 회재 선생의 본래 이름은 이적(李迪)이었으나 후에 피휘(避諱)로 인해 중종이 선비 언(彦)을 이름에 포함하여 개명하도록 명했다. 아버지는 성균관 생원으로 한양에서 유학하며 문과를 준비했는데 이언적이 10세 때인 1500년 요절했다. 이후 외삼촌 손중돈(孫仲暾)의 임지를 따라다니며 외삼촌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손중돈은 김종직의 제자로 의정부 우참찬, 이조판서까지 올라갔을 정도로 명망 높은 사람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손소'로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적개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18세 때인 1508년 함양 박 씨와 혼인하였고 20세 때인 1510년 외할머니 풍덕 류 씨가 별세하면서 종가(宗家)인 양동마을에 무첨당(無忝堂)을 짓고 분가하였다. 젊었을 때 인근 사찰인 정혜사에서도 학문을 닦았는데, 당시에는 유교와 불교가 상호 보완적 관계였기 때문에 이러한 학업이 가능했었다. 23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였고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37세에는 세자시강원 문학이 되어 세자였던 인종의 스승이 되었다. 이후 사헌부 지평, 이조정랑, 사헌부장령, 밀양 도호부사 등 여러 관직을 거쳐 1530년 사간원 사간이 되었다. 그러나 사간원 사간을 역임할 당시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에 반대했다가 훗날 김안로가 외척이 되어 부상한 직후 성균관 사예로 좌천되었다. 이후 낙향하여 별장인 독락당을 짓고 학문 활동에 전념하였다. 그가 종가인 무첨당으로 가지 않고 은둔한 것은 관직에서 사실상 쫓겨난 신분이었기 때문에 가족과 친인척들에게 피해가 미칠까 우려해서였다.     


 1547년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인해 평안북도 강계로 유배되는데 이후 저술 활동에 전념하였다. 63세에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을 저술하다 1553년 엄동설한에 사망한다. 회재 선생은 당시 양재역 벽서사건과 연관이 되었기에 공개적으로 오지 못하고 아들 이전인이 아버지의 시신을 대나무봉 두 개에 의지하여 선산까지 모셔 왔다. 동상으로 피폐해진 몸을 가누며 부친의 정신이 스민 유품을 고스란히 모셔 왔다. 당시 운구를 했던 대나무와 회재 선생의 수많은 유품들이 옥산서원 유물전시관에 보관되어 있다.  

    

 회재 선생의 저서에는 『회재집(晦齋集)』, 『구인록(求仁錄)』,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봉선잡의(奉先雜儀)』 등이 있다.      


 이황은 그의 저술을 접하고 크게 영향을 받고 찬탄하여 직접 행장(行狀)을 지었다. 명나라 사신이 왔을 때 조선에도 주자를 훌륭하게 해석한 학자가 있는지 물었을 때 이언적의 저술을 보여주기도 했다. 선조 즉위 이후 1568년 그의 유문을 수집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며 1569년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하고 그의 종가인 양동마을 무첨당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또한 시호가 문원(文元)으로 내려졌고 종묘에 배향되는 종묘배향공신의 은전이 내려졌으며 1610년에는 문묘에 종사되었다.  

   

4. 옥산서원(玉山書院)의 주요공간     

 옥산서원은 전형적인 서원의 건축구조이다. ‘외삼문(역락문) – 누각(무변루) – 기숙사(동재·서재) – 강당(구인당) – 내삼문 – 사당(체인묘)’가 차례로 있다. 무변루는 정면 7칸, 측면 2칸의 중층 맞배지붕의 2층 누각이다. 그런데 반대편 구인당에서 바라보면 정면 5칸, 측면 2칸 단층처럼 보이는데 이는 완주 화암사의 네 건물이 처마를 맞대고 있듯이 옥산서원도 구인당·동재·서재·무변루가 서로 처마를 맞대어 ‘□’ 모양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무변루 양 끝이 동재와 서재에 가려져 2칸이 안 보인다.     


역락문(亦樂門)

 옥산서원에 들어가기 위한 출입문으로 논어의 첫 부분 구절인 '벗이 먼 곳으로부터 오는 것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有朋而自遠方來 不亦樂乎)'에서 따왔다. 공부를 함에 있어서 입신양명을 목적으로 하지 말고 자신의 인격수양을 위해서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학문의 즐거움을 아는 사람만 들어오라’는 의미이다. 이는 도산서원의 역락서재와도 같다. 현판의 글씨는 명필 한석봉의 글씨이다.      


 불규칙한 돌들을 기단으로 쌓고 그 위에 역락문을 앉혔다. 그래서 역락문에 오르기 위해서는 계단이 필요하다. 계단은 역락문 우측 칸과 가운데 칸 위치에 2개만 만들어져 있다. 역락문은 3칸의 문으로 된 삼문 형식인데 오른쪽 칸의 문만 열려 있고 가운데 칸과 왼쪽 칸은 굳게 닫혀있다. 보통 서원의 출입문이 오른쪽으로 들어가서 왼쪽으로 나오는 것에 비하면 이곳은 왼쪽 칸은 아예 이용할 수 없게 막혀 있다. 아마도 대구 달성 도동서원처럼 유학의 도(道)가 동쪽으로 왔음을 의미하는 것 같다.     


무변루(無邊樓)

 역락문을 들어서면 무변루가 벽처럼 막아서고 있는데 역락문에서 무변루로 가려면 작은 도랑 위에 있는 다리를 건너야 한다. 무변루의 원래 이름은 납청루였는데, 이는 허균의 아버지이자 경주 부윤을 지낸 초당 허엽이 1574년에 지은 『옥산서원기』를 보면 알 수 있다. 옥산서원기에는 이 누각의 처음 이름이 납청루(納淸樓)였다고 적혀있다. 즉 맑음을 받아들이는 누각이라는 뜻이다.      


 ”누는 납청이라고 명명하였다. 맑은 것은 기운이고 기운은 양(陽)이니, 이 누에 오르는 자가 맑은 기운을 받아들여 양을 기르고, 양을 길러 도(道)가 모인다면 제대로 되었다고 할 수 있다. "

                                                                                                         허엽의 옥산서원기 중 일부

허엽의 옥산서원기(玉山書院記)

 그러나 당시 영의정 노수신은 문루의 이름이 '스승이 남긴 뜻에 맞지 않다'라고 하여 무변루로 고쳤다. 무변루의 ‘무변’은 북송(北宋)의 유학자인 주돈이의 ‘풍월무변(風月無邊)’에서 유래한 것이다. 해석하면 ‘서원 밖 계곡과 산이 한눈에 들어오게 하여 그 경계를 없애는 곳’이 된다. 이는 무변루가 주변의 자연경관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음을 의미한다.      


 서원의 문루는 장수유식(藏修遊息)으로 대표되는 교육과 소통의 기능을 수행하는데 무변루는 창건 이래 지역 유생의 교육 장소로 성리학적 질서 확립과 지식 보급에 큰 역할을 했다.      


 무변루의 규모는 정면 7칸, 옆면 2칸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좌·우 측면에는 가적지붕(눈썹지붕)을 설치했다. 건물의 아래층은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위층은 온돌방과 누마루(다락처럼 높게 만든 마루)로 구성돼 있는데, 위층은 가운데에 대청마루를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둔 뒤 다시 좌우에 누마루를 구성하는 매우 독특한 평면을 이루고 있다. 한국 서원 건축양식에 처음 도입한 누마루 형식의 건물이다. 무변루에 설치된 기와 중에서 1674년(숭정 38), 1782년(건륭 47), 1839년(도광 기해) 명문이 확인되고 있으므로 이때에도 중수하였을 것이고, 이후 1844년에도 중수가 확인된다.     


 무변루의 현판은 정면이 아닌 2층 대청 안쪽에 걸려 있어 밖에서는 볼 수 없는 구조이다. 현판은 한석봉이 쓴 글씨이며 좌측에 ‘靡欠靡餘(미흠미여) 罔終罔始(망종망시) 光歟霽歟(광여제여) 遊于太虛(유우태허)’ 라고 적혀있는데 이는 ‘모자람도 남음도 없고, 끝도 시작도 없다. 빛이여 맑음이여’라는 의미이다.      


 무변루에는 국기판(國忌版)이 걸려 있는데, 조선의 역대 국왕 및 왕비의 기일을 작성한 것이다. 태조 이성계부터 정조까지 기재되어 있다.      


국기[國忌]     

태조강헌대왕(太祖康獻大王) 5월 24일 건원릉(健元陵)

신의왕후한씨(神懿王后韓氏) 9월 23일 제릉(齊陵)

신덕왕후강씨(神德王后康氏) 8월 13일 정릉(貞陵)

정종공정대왕(定宗恭靖大王) 9월 26일 후릉(厚陵)

정안왕후김씨(定安王后金氏) 6월 25일 후릉(厚陵)

태종공정대왕(太宗恭定大王) 5월 10일 헌릉(獻陵)

원경왕후민씨(元敬王后閔氏) 7월 10일 헌릉(獻陵)

세종장헌대왕(世宗莊獻大王) 2월 17일 영릉(英陵)

소헌왕후심씨(昭憲王后沈氏) 3월 24일 영릉(英陵)

문종공순대왕(文宗恭順大王) 5월 14일 현릉(顯陵)

현덕왕후권씨(顯德王后權氏) 7월 24일 현릉(顯陵)

단종공의대왕(端宗恭懿大王) 10월 24일 장릉(莊陵)

정순왕후송씨(定順王后宋氏) 6월 4일 사릉(思陵)     

                                                                                      무변루 국기판(國忌版) 내용 중 일부

무변루 국기판(國忌版)

무변루는 양쪽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있는데 이 계단은 통나무를 계단 모양대로 잘라 걸쳐놓았다. 2층에는 양옆의 방에 온돌이 설치되어 있는데 옥산서원만의 특이한 공간이다. 이 공간은 아마도 옥산서원이 지역 명문 서원인만큼 객사의 기능을 했을 것이다. 무변루 대청에는 북이 걸려 있는데 이는 옥산서원에서 불명예 퇴소하는 유생이 경계의 뜻으로 두드리는 북이다.      


민구재(敏求齋)

 무변루를 지나면 오른쪽으로 상급생들의 기숙사인 동재, 민구재가 있다. ‘민첩하게 구한다’는 뜻의 민구(敏求)는 공자가 제자들에게 “나는 옛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찾아서 배운 사람”이라고 한 논어(論語)의 민이구지자야(敏以求之者也)에서 취한 것이다. 민구재 앞마당에는 관솔불을 피워 서원을 밝히던 정료대가 위치해 있다.     


 암수재(闇修齋)

 무변루를 지나면 왼쪽으로 하급생들의 기숙사인 서재, 암수재가 있다. 암수재의 암수(闇修)는 주자가 스스로의 학문에 대해 “드러나지 않는 가운데 나날이 새롭고 밝게 학문을 펼쳐 나간다(闇然自修)”고 한 말에서 취한 것이다.

옥산서원(玉山書院) 민구재(敏求齋)와 암수재(闇修齋)

옥산서원(玉山書院), 구인당(求仁堂)     

 옥산서원의 강학당에는 옥산서원 현판이 두 개가 걸려 있는데, 정면에서 보이는 옥산서원 현판은 추사 김정희가 쓴 글씨이고, 강학당 안쪽에서 보이는 옥산서원 현판은 아계 이산해가 쓴 글씨이다. 두 명인이 쓴 글씨가 옥산서원 유물전시관에 소장되어 있다.

아계 이산해(위)와 추사 김정희 글씨 '옥산서원'. 네 장의 종이에 한자씩 썼다. 〈옥산서원 소장〉

 옥산서원 구인당의 현판은, 강당 대청 뒷벽의 가운데 윗부분에 걸려 있는데 이 편액은 한석봉의 글씨이다. 구인당의 ‘求仁’은 이언적이 쓴 『求仁錄』에서 따온 것으로 성현의 학문은 오로지 인(仁)을 구(求)하는 데 있다는 이언적의 성리학의 핵심 사상을 의미한다. 구인당 내부에는 한석봉과 김정희, 이황이 쓴 현판이 곳곳에 남아 대학자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옥산서원 현판은 구인당이 화재로 소실된 이후 1839년에 다시 받은 편액으로, 글씨는 추사 김정희가 썼다. 맨 아래 보이는 강당 편액인 구인당은 한석봉의 글씨이다.
구인당 내부에 있는 옥산서원 편액, 글씨는 아계 이산해가 썼다.

 구인당 양쪽의 협실은 지금의 원장실, 교무실과 같은 공간인데 각각의 공간의 이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양진재(兩進齋)

 구인당 내 동쪽 방의 이름으로 양진재의 ‘양진(兩進)’은 ‘明(도덕을 밝힌다)’과 ‘誠(의지를 성실하게 한다)’을 갖추어 전진함을 말하는 것이다. 『중용』에 ‘명은 선을 밝게 앎이요, 성은 진실하고 망령됨이 없음이니, 천리의 본연이다(誠者眞實無妄之謂 天理之本然也)’라는 뜻이다. 이는 가르치는 이가 선과 덕을 가져야 하며 성실해야 함을 이르는 말이다.     


해립재(偕立齋)

 구인당 내 동쪽 방의 이름으로 해립재의 ‘해립(偕立)’은 ‘경의해립(敬義偕立)’ 즉 ‘경건한 마음가짐과 신의로써 사물에 대처한다’는 뜻에서 취한 것이다. 경의(敬義)와 명성(明誠)은 성리학의 으뜸이 되는 항목이다. 정자(程子)는 『주역』 <전>에서 “군자는 경을 주장해 안을 곧게 하고, 의를 지켜 밖을 방정하게 해서, 경과 의를 확립하면 덕이 성해진다(君子敬以直內 義以方外 敬義立而德不孤)”고 하였다.


구인당 양쪽 협실인 양진재(兩進齋)와 해립재(偕立齋) 편액, 모두 한석봉이 쓴 글씨이다.

신도비(神道碑)

 

 서원 창건 5년 후인 1557년에 고봉 기대승이 짓고 아계 이산해가 쓴 신도비이다. 이 신도비는 원래 서원 앞 계곡에 세워져 있던 것을 서원 내로 옮겨와 비각 속에 보존하고 있다.     


 신도비와 관련하여 감동적인 일화가 한 있는데, 다음과 같다.      


 동악 이안눌(李安訥)이 경주 부윤으로 부임하였다. 이안눌은 이기의 증손자인데, 이기는 회재 선생을 양재역 벽서 사건에 모함시켜 유배를 보낸 인물이다. 이안눌은 평소 증조부의 과오를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에 회재 선생의 위패를 모신 옥산서원을 찾아 참배하고 용서를 구하려 했으나 회재 선생의 후손들이 길을 막았다. 이에 이안눌은 수레에서 맨발로 걸어 나와 증조부가 범한 잘못에 머리 숙여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했다. 이에 감동한 회재의 후손들은 길을 열어 주었다.     


 그런데 신도비에는 ‘이기가 회재 선생을 모함한 죄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적혀있었다. 이를 이안눌이 못 보게 후손들이 천으로 가려놓았는데 비문을 보여달라고 간절히 요청하자 후손들은 천을 벗기고 보여주었다. 비문을 읽어가던 이안눌은 신도비를 붙들고 통곡하며 자신의 선조에 대한 내용을 지워줄 수만 있다면 자신의 이름을 옥산서원의 노비문서에 올려도 사양하지 않겠다고 간청했다. 후손들은 이안눌의 진심에 감동하여 그 내용을 지우게 된다. 지금도 그 지운 흔적이 역력하다. 이후 경주 부윤인 이안눌은 옥산서원과 회재 선생의 고택을 수리하는데 필요한 비용을 아낌없이 지원한다.

회재선생 신도비 중 일부

체인묘(體仁廟)

 구인당 뒤에는 내삼문인 체인문(體仁門)이 있고, 그 뒤 담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사당인 체인묘와 전사청이 있다. ‘체인(體仁)’은 어질고 착한 일을 실천에 옮긴다는 말로 성리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다. 회재 선생 사상의 핵심은 자기를 먼저 완성하고 그를 바탕으로 백성을 완성시키는 데 있었다. 다시 말해 태평성대의 근본은 인을 체득함으로써 얻는 것이기에 회재 선생을 모신 사우의 이름을 체인(體仁)이라 하였다.     


 보통 서원에서 제향을 하는 사당에는 사(祀) 자를 쓰는데 옥산서원에서는 회재 선생의 인품과 학문, 업적을 기리기 위해 왕이나 왕에 버금가는 정도로 격이 높은 경우에 사용하는 글자인 묘(廟)를 쓰고 있다.

회재 선생의 사당인 체인묘 편액, 한석봉의 글씨이다.

세심대(洗心臺)

 옥산서원과 서원 앞을 흐르는 자계천 사이에 커다란 너럭바위들이 있는데 이 바위에는 세심대(洗心臺)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세심(洗心)은 계곡의 맑은 물을 보면서 마음의 티끌을 씻으라는 의미이다. 회재 선생은 일찍이 옥산서원 주변의 산세를 보고, 네 개의 산과 자계천 주변의 다섯 장소에 각각 이름을 지었다. 그것을 회재의 사산오대(四山五臺)라고 하는데 ‘관어대’, ‘탁영대’, ‘징심대’, ‘영귀대’, ‘세심대’이다. 바위에 새겨진 세심대(洗心臺) 글자와 세심대 옆 폭포의 바위 면에 새겨진 용추(龍湫)라는 글자는 퇴계의 글씨이다. 헌종 6년(1840) 구인당 낙성식 때에는 경상감사 김용희가 세심대에서 백일장을 개최하였는데 약 1만 명이 응시하였다. 그것은 정조 때 도산서원에서 치르던 도산 별시보다도 많은 인원이었다.

세심대 옆 폭포 바위 면에 새겨진 용추(龍湫), 퇴계가 쓴 글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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