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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은 Apr 26. 2024

2. 답사의 신, 서원(書院)에 가다! - 남계서원 -

1박 2일형 답사

남계서원의 문루인 풍영루, 일두선생의 인품만큼이나 고색창연하다.

1. 서원(書院) 이야기     

 서원(書院)은 조선시대에 성현(聖賢)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학자를 키우기 위해 전국 곳곳에 설립한 사설 교육 기관으로 오늘날의 지방사립대학교라고 볼 수 있다. 서원의 공간은 크게 성현(聖賢)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건물인 사우(祠宇)와 청소년을 교육하는 서재(書齋)로 나눌 수 있다.   

   

 서원의 교육은 원장(院長), 강장(講長), 훈장(訓長) 등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원장은 서원의 대표자로 보통 퇴직 관료나 당대의 유명한 석학이 맡았으며, 이들은 서원 기강 확립과 원생들의 행실 규찰을 담당했지만 서원 운영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강장은 서원에 입학한 원생들에게 경학과 예절을 가르치는 역할이었고, 훈장은 면학과 교관의 일종인 훈육을 책임지는 역할이었다.     


 서원의 운영은 서원의 모든 일을 주관하며 재장(齋長)이라고도 불린 도유사(都有司) 또는 장의(掌議)가 맡았다. 이 밖에도 도유사 다음가는 직책인 부유사(副有司), 여러 사무를 분담해서 맡은 유사(有司), 간사 역할을 하는 직월(直月), 서기 역할을 하는 직일(直日)등이 있었다.          


성균관이나 향교는 번잡한 도시에 있어서 앞으로는 번거로운 학칙에 얽매이고 뒤로는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기 쉬우니, 어찌 서원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퇴계 이황     


 서원은 성균관, 향교와 함께 조선시대 대표적인 고등 교육 기관으로, 국립으로 전국 각 도시에 분배된 향교와 대비되는 사립학교로서 지역 문화를 대표하는 장소였다. 그래서 서원은 교육 기능과 교화 기능을 그 양축으로 삼고 있었다. 조선 중기 사대 사화를 비롯한 정치적 혼란으로 말미암아 학자들은 지방에 은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하게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선배 유학자들을 기리고 제사하는 사당의 기능까지 통합한 서원을 창설하기 시작한 것이다.     


 먼저 교육 기능에 대해서 살펴보면, 서원에서 교육의 목표는 인품이 훌륭한 성현을 본받고 그러한 관리를 양성하는 데 있었다. 이를 위해 학생들은 다른 교육 기관과 마찬가지로 소학에서부터 시작하여 사서오경을 중심으로 공부에 전념했다. 그리고 사서와 오경을 모두 익힌 다음에는 가례, 근사록과 같은 성리학에 관한 책들을 익히도록 했다.     


 서원의 또 한 가지 기능인 교화 기능은 주로 선현에 대한 제사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제사의 대상에 있어서는 성균관이나 향교와는 차이가 있었다. 성균관과 향교의 문묘(文廟)에 배향된 인물은 공자를 비롯해 안회, 증자, 자사, 사성(四聖)과 공자 문하의 십철, 그리고 송나라 6현과 우리나라 18현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은 신라, 고려,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나라의 최고 정신적 지주에 오른 한국의 유학자 18명을 말하며 동국 18현(東國 十八賢)이라고도 한다. 그 18명의 배향 인물은 다음과 같다.   

   

홍유후(弘儒侯) 설총, 문성공(文成公) 안유, 문경공(文敬公) 김굉필, 문정공(文正公) 조광조

문순공(文純公) 이황, 문성공(文成公) 이이, 문원공(文元公) 김장생, 문경공(文敬公) 김집

문정공(文正公) 송준길, 문창후(文昌侯) 최치원, 문충공(文忠公) 정몽주, 문헌공(文憲公) 정여창

문원공(文元公) 이언적, 문정공(文正公) 김인후, 문간공(文簡公) 성혼, 문열공(文烈公) 조헌

문정공(文正公) 송시열, 문순공(文純公) 박세채     


 그러나 서원은 사학(私學)이라는 특성상 대부분 지역의 문중에 의해 건립되었던 까닭에 자신의 문중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인물 가운데 뛰어난 인물을 배향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국립인 성균관과 향교에 비해 배향 인물의 선택 폭이 훨씬 넓었다.    

 

 성균관이나 향교와 마찬가지로 서원에서도 봄과 가을에 걸쳐 일 년에 두 차례의 제사를 지냈다. 제사일은 성균관과 향교에서 봉행하는 석전(釋奠)에 비하여 그 격이 낮았던 관계로 그 날짜를 석전보다 뒤로 하였다. 즉, 석전이 상정일(上丁日)에 봉행되는 데 비하여 서원의 제사는 중정일(中丁日) 또는 하정일(下丁日)로 잡아 거행함으로써 그 격을 구분하였다.     


 이외에도 서원에서는 다양한 기능을 담당했는데 지방의 인재들이 모이는 집회 장소였으며, 학생들의 학문을 위해 다양한 도서를 보관하는 도서관의 기능과 책의 출판 기능도 담당했다. 그래서 많은 서원에는 장판각 또는 장판고라는 서고가 있다. 이외에도 서원은 지방의 풍속을 순화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는 곳이었고 또한 그 지역의 여론을 선도하였음은 물론, 지역별 향약을 기준으로 효자나 열녀 등을 표창하고 윤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사람을 규탄하는 등의 직접적인 교화 활동도 하였다.     


 서원의 기원은 당나라 시기였으나 실질적인 형태는 송나라 때에 와서 완성되었으며, 특히 서원의 위상은 주자에 의해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서원이 처음 설립된 것은 1543년이었는데, 당시 풍기 군수였던 주세붕이 안향을 추모하기 위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을 설립하였다. 안향은 중국의 ‘주자학’이라는 학문을 우리나라에 도입한 최초의 학자였다. 주세붕이 세운 최초의 서원은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라 칭했지만, 후에 풍기 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이 서원에 대한 국가적인 지원을 건의하였고 이에 명종이 서적 등의 물자와 함께 친필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 사액(賜額)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퇴계 이황을 비롯한 성리학자들에 의해 서원의 보급 운동이 일어나면서 전국에 많은 서원이 건립되었다. 그리하여 명종 대에 건립된 수가 17개소에 불과했던 서원이 선조 대에는 100개가 넘었으며, 18세기 중반에는 전국에 700여 개소에 이르렀다.     


 이처럼 서원이 늘어나면서 부작용이 커졌다. 서원에 딸린 토지에는 세금이 부과되지 않았고, 서원의 노비는 국역(國役)을 지지 않았다. 따라서 서원이 증가함에 따라 국가 재정에 문제가 생겼다. 엄청난 숫자의 서원들 때문에 민생에 끼치는 폐단이 엄청났고, 심지어는 살아있는 사람을 모시거나 성현도 아니지만 가문의 조상이라는 이유로 모시느라 집안마다 서원을 만들고, 한 사람을 모시는 서원이 5~6곳에 이르는 등 그 부작용이 말이 아니었다.     


 19세기부터 세도 가문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서원의 중앙에서의 정치적 영향력은 사실상 없어졌지만, 무엇보다도 지방경제에 미치는 폐단이 말이 아니었다. 선현의 제사를 지낸다는 명목으로 지방 농민들을 사사로이 수탈하였으며 이에 반발하는 지역민들을 향약이나 반상의 도리를 어겼다 하여 처벌하거나 지역 사회에서 매장시키는 전횡을 저지르고 나라에서 막대한 식량과 노비를 제공받으면서 세금을 내지 않는 면세 특권이 있어 국가 재정을 악화시켰다.     


 특히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병을 보낸 만력제(萬曆帝)를 제사 지내기 위한 ‘만동묘’와 송시열을 모신 ‘화양동서원’은 워낙 입김이 세서 지역의 백성들에게 서원의 제사 비용을 부담시켰으며 할당된 비용을 내지 못한 백성들을 함부로 붙잡아서 폭행하거나 고문하는 등 그 폐해가 말이 아니었다. 당시 이 일대에 "원님 위에 감사, 감사 위에 참판, 참판 위에 판서, 판서 위에 삼정승, 삼정승 위에 승지, 승지 위에 임금, 임금 위에 만동묘지기"라는 노래가 퍼졌을 정도였다.     


 서원의 폐단에 맨 처음 손을 댄 것은 숙종이었다. 숙종은 한 사람을 중복되게 모시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고, 그의 아들 영조 대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인 서원 정리가 이뤄진다. 영조 3년(1727) 12월에는 한 사람당 하나의 서원만 허가하면서 비교적 나중에 세워졌던 서원들을 정리했으며 영조 23년(1747)에도 허가 없이 사적으로 세운 서원들을 정리했다. 고종 대에서는 흥선대원군의 등장으로 서원 정리의 속도가 빨라지는데 당장 고종 1년(1864)에는 사사로이 세워진 서원과 중첩되는 서원들을 정리하였다.     

 사실 유학자들도 서원이 대거 정리될 것이라는 분위기를 읽긴 읽었는지 이미 고종 1년에 대원군의 직계 조상인 인평대군을 모시는 서원을 세웠으나, 이 역시 철폐된다. 그 후 고종 5년에 서원의 원장을 고을 수령이 맡게 하고, 허용된 정원 이외의 병역 기피자들을 모조리 군역에 넣는가 하면 면세 혜택을 없애 서원의 특혜를 모두 없애고, 관의 통제하에 둔 다음에 곧이어 사액서원 47개소만 남기고 전면 철폐했다. 숙종, 영조 대에 줄곧 지적된 중첩된 서원은 사액서원이라 하더라도 예외 없이 모두 철폐되었다. 이 당시 난립해 있던 서원은 1,000여 곳이 넘었으며 안동 한 곳에만 40여 개의 서원이 있었다.     


"진실로 백성에게 해가 되는 것이 있으면 비록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나는 용서하지 않겠다. "     

 흥선대원군, 유림 세력들이 극도로 반대하던 서원 철폐 정책을 강행하고 절대로 굽히지 않겠다는 발언.


2. 유네스코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남계서원(南溪書院)     

 남계서원은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에 있는 서원이다.      


 경남 함양은 덕유산과 지리산 줄기를 품은 산천이 아름다운 고장으로 손꼽힌다. 함양은 지리산과 덕유산 두 국립공원이 걸쳐있는 산중 오지이다. 조선시대 유배지로도 활용되었는데 그 영향인지 학구열이 높았다. 두 번째로 왕에게 현판을 하사 받은 사액서원인 남계서원을 비롯해 서원이 13개나 있었는데 이는 안동의 11개보다 많은 숫자다.     


 예로부터 ‘좌 안동 우 함양’이라는 말이 있다. 즉 안동에 퇴계 이황이 있다면 함양에는 일두 정여창이 있다는 말이다. 정여창의 위패를 모신 함양 남계서원은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로 설립된 서원으로 조선시대 서원 초기 건물 배치의 전형을 제시하고 있다. ‘남계(南溪)’는 서원 앞을 유유히 흐르는 하천에서 딴 이름이다.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한 서원은 남계천이 지나가는 너른 들판 너머 정여창의 고향인 개평마을을 굽어보고 있다.      

퇴계 이황은 남계서원에 모셔진 정여창을 기리며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우뚝한 함양은 정공의 고향이라

백세토록 풍화 전해 길이 덕행을 사모하네.

사당 지어 존숭함은 참으로 좋은 일이니

문왕 따라 일어날 호걸들이 어찌 없겠나.     


 명종 7년(1552) 창건하여 1566년 ‘남계서원’으로 사액을 받았고,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4년(1612)에 다시 지어졌다. 문루인 풍영루는 헌종 13년(1847) 불에 탄 것을 1849년 다시 중건하였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남계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로 지어진 서원이다. 소수서원과 달리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식으로 지어진 남계서원은 우리나라 서원 건축구조의 기틀을 세웠다. 이후의 서원들은 남계서원과 같이 ‘외삼문 – 동·서재 – 강당 – 내삼문 – 사당’의 구조로 통일되었다.  

   

4. 남계서원(南溪書院)의 배향 인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선생     

 정여창(1450~1504)은 남계서원 서북쪽에 위치한 함양 개평리에서 태어났으며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있을 때 그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젊은 시절부터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던 정여창은 성균관에서 학문을 닦았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고, 이후 지리산 아래 섬진나루에 은거하였다. 한때는 세자의 스승이 되어 연산군을 가르치기도 했으나, 연산군 4년(1498년)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제자라는 이유로 함경도 종성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문인과 제자들이 무려 2달에 걸쳐 함양까지 옮겨와 남계서원 뒤 승안산 기슭에 안장하였다. 정여창은 광해군 2년(1610)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개암(介庵) 강익(姜翼)     

 강익(1523~1567)은 함양 수동 효리에서 태어났다. 15세에 학문을 시작하였으며 당곡 정희보와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학문을 시작한 지 10여 년 후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눈을 뜬 그는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도심(道心) 회복과 사문흥기(斯文興起) 창명유교(倡明儒敎)’의 실현을 위해 45세 일생을 바쳐서 남계서원 창건에 진력했다.      


“정여창의 학문과 품행은 한 고을의 의표가 될 뿐만 아니라 학사의 모범이 될 만합니다. 그런 까닭에 추증하는 은전이 선왕조에서 융숭하였고 선비들의 추모가 오늘날에도 성대하게 일어나는 것입니다.(중략) 만약 정려하고 사액하여 널리 은전을 베푸신다면 위로는 선왕의 아름다운 뜻을 이루고, 아래로는 풍속을 교화하고 고무시키는데 일조가 될 것입니다”      

                                                                                  강익이 명종에게 보낸 사액 상소문 중     


 강익은 남계서원 초대 원장(1561년)이 되었으며 조선 후기 숙종 15년(1689)에 남계서원에 배향되었다.    

 

동계(桐溪) 정온(鄭蘊)     

 정온(1569~1641)은 함양 출신으로 15세 때에 처음으로 임훈을 찾아가 제자가 되어 학업에 정진하였으며 늦은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중요한 직책을 맡으며 정계의 중심인물로 부상하였고,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까지 인조를 호종하였다. 그러나 인조가 항복하자 수치를 참을 수 없다고 하며 자결을 시도하였으며, 이 또한 실패하자 향리로 돌아와 은거하였다.     


5.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선생     

 조선 전기 사림파를 대표하는 정여창 선생은 ‘실천 유학의 선구자’로, 퇴계 이황, 한훤당 김굉필,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과 함께 동방 5현으로 불린다. 그는 학맥상으로 정몽주의 학맥으로 분류되며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 성리학의 시조 안향에게까지 닿으며, 한국 성리학의 계보인 안향->이제현->이색->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정여창으로 이어진다.     


 논어(論語) 전문가였으며,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도학자이면서 성리학자로서 이기론과 심성론, 선악론 등을 기본으로 소학과 주자가례의 실천을 강조했다. 소학과 가례를 강조한 것은 조선 초 성리학자인 조광조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그는 그중에서도 효를 매우 강조했고, 실제로 그는 부모님에 대한 효성 깊은 일화로도 유명하다. 정치에 있어서 백성을 위하는 왕도정치를 주장했다.   

  

 여러 차례 벼슬을 마다하다가 성종 21년(1490) 과거에 급제해 연산군을 모셨지만, 1498년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유배지인 함경북도 종성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이후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까지 당하는 비극까지 겪는다. 연산군 치하의 사회적 분위기에서 김종직과 관련된 모든 인물이 반대 세력으로 몰려 단죄된 것이다.    

  

 정여창의 학문에 대한 자세는 정여창이 남긴 「입지론(立志論)」에 잘 드러나 있다. 정여창은 「입지론」에서 지식인의 요건으로서 무엇보다 뜻을 강하게 가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뜻을 강하게 가져야 할 뿐 아니라, 어느 경우에도 이를 굳게 지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될 것으로 보았다. 이와 같이 뜻을 세우고 지켜 나아갈 때 군자의 경지에 다다르게 된다고 이해한 것이며, 이는 선(善)의 구현과 실천을 중시한 것이기도 하다.      

 정여창은 특히 『중용』과 『예기』에 정통하였다. 정여창은 치인(治人)보다 수기(修己)에 더 비중을 두었으며, 심학(心學)에 근거한 이학(理學)의 연구에 치중하였다. 정여창은 이기설(理氣說)에서 선비로서의 자세와 마음가짐을 강조하였으며, 이를 위해 세상 만물 나아가 우주의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의 호 '일두'(一蠹)는 정여창이 자기 스스로를 '천지간에 태어난 한 마리의 좀벌레'라는 뜻으로 지었다. 힘든 유배 생활을 하면서 자신을 '한 마리 좀벌레'에 비유했던 정여창의 겸허했던 성품을 짐작할 수 있다.     


 성종과의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어느 날 성종이 정여창에게 술을 내렸다. 정여창은 어머니와의 약속 때문에 술을 마실 수 없었는데, 임금이 내린 술을 안 마시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는 상황이다. 정여창은 “죄송하지만 제가 어머니와의 약속 때문에 성상(임금)께서 내리신 술을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성종이 “효자의 술은 내가 마셔주지”라고 말하며 자신이 내린 술을 직접 마셔버려 그 증거를 없애버렸다. 정여창의 곧은 성품과 충직한 신하를 아끼고 보듬어준 성종의 마음을 알 수 있다.      


 명종실록 33권, 명종 21년 6월 15일 기사를 보면 진사 강익 등 30여 명이 올린 글이 남아있다. 그곳에는 일두 정여창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생각이 그대로 담겨있다.     


 삼가 살피건대 유선(儒先) 정여창(鄭汝昌)은 바로 우리 고을 사람인데 어릴 적부터 총명이 출중하였습니다. 그 아버지 정육을(鄭六乙)이 의주 통판(義州通判)으로 있을 때 중국 사신 장영(張寧)이 정여창을 보고 기특히 여겨 지금의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정여창은 장성하자 학문 연마에 힘쓰되 읽고 기억이나 하는 학습은 비루하게 여기고 성리(性理)에 관한 학문을 지극히 좋아하여 침착하게 연구한 나머지 깊이 터득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는 평상시 덕용(德容)이 순후하여 자연 남들로 하여금 심복하고 우러르게 하였습니다.

                                                                          『명종실록』 33권 명종 21년(1566) 6월 15일     


정여창 선생을 모신 서원은 전국적으로 9곳에 이른다.      


6. 남계서원(南溪書院)의 주요 공간     


풍영루(風詠樓), 준도문(遵道門)

 풍영루는 남계서원으로 들어가는 문루(門樓)이면서 유생들의 휴식처였다. 서원이 처음 지어질 때 대문은 준도문(遵道門)이었다. 풍영루는 남계서원이 세워진 후 오랜 세월이 흐른 헌종 7년(1841) 준도문 자리에 지은 누각이다. 그리하여 누각 정면에는 ‘풍영루(風詠樓)’, 반대편에는 ‘준도문(遵道門)’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풍영루는 공자와 제자들의 대화 중 증점의 답변에서 따왔다. 어느 날 공자가 제자들에게 물었다.      


공자 : 너희들의 소원이 무엇이냐?

염유 : 작은 고을을 맡아 3년 만에 풍요롭게 만들겠습니다

공서화 : 종묘 제사나 회의 때 보좌관 노릇을 하고 싶습니다.

증점 : 봄철 입는 관복이 만들어지면 관자 5, 6명과 동자 6, 7명을 데리고서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에서 바람 쐰 후 노래 부르면 돌아오고 싶습니다(春服既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春服既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

공자 : 나도 너와 함께 하고 싶다.     


 풍영루의 뒷면에는 ‘준도문’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본래는 누각 대신 외삼문인 준도문이 있었는데 풍영루가 들어서면서 뒷면에 현판만 남아있다. 『중용』 11장의 ‘군자는 도를 좇아 행하다가 그만두기도 하지만 나는 그만둘 수가 없다(君子遵道而行 半塗而廢 吾弗能已矣)’는 구절에서 빌려왔다. 끝없는 공부의 길을 독려하는 의미이다. 치열하게 공부하던 유생들에게 누각은 휴식과 교류의 공간이었다. 서원은 제향의 공간이자 자신을 갈고닦는 치열한 학업의 공간이기 때문에 더 높은 성취를 위해서는 휴식도 필요했을 것이다. 유생들은 누각에 올라 맑은 공기를 마시며 시를 읊조리기도 하고 회식도 하며 서로를 위로하고 응원하며 추억을 만들었을 것이다.     


 풍영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인 2층 누각이다. 1층 기둥은 팔각으로 돌을 다듬어 세웠고, 2층은 둥근 나무 기둥이다. 2층은 전망을 위해 사방으로 계자 난간을 둘렀다. 풍영루에 오르면 덕유산에서 시작된 남계천과 그 너머로 정여창의 생가인 개평마을이 보인다. 2층 누각에 오르면 여러 현판보다 먼저 눈길이 가는 것은 고색창연한 단청과 그림이다. 천장을 올려다보면 마루와 기둥만 제외하고 전체가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의미 깊은 것은 ‘게’를 그린 그림이다.


게딱지는 갑(甲), 장원급제를 의미하고, 두 마리의 ‘게’는 초시와 복시에서 연이어 장원급제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래서 김홍도를 비롯한 여러 문인들이 게 그림을 즐겨 그렸다. 대들보에도 입신양명을 상징하는 청룡과 황룡이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 옛날 남계서원에서 공부하던 유생들도 풍영루에서 휴식을 취하며 이 그림들을 보고 꿈을 키웠을 것이다.

남계서원, 풍영루 내부의 게 그림

 풍영루를 지나면 정여창 선생이 평소 좋아했던 연꽃을 담은 연지(蓮池)가 양편으로 조성되어 있다.      

남계서원 묘정비(灆溪書院廟庭碑)     

 남계서원에 일두 정여창, 동계 정온, 개암 강익 선생 세 분을 모시고 향사를 올리고 있음에도 이를 찬영하는 송덕비가 없어 안타까워하다가 남계서원이 건립한 지 200여 년이 지난 정조 3년(1779)에 묘정비를 세웠다. 묘정비에는 서원의 건립 내역과 정여창, 정온, 강익에 대한 행적을 서술하고 있다. 비문은 김종후가 짓고, 황운조)가 썼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가 기자(箕子) 때 오랑캐에서 중화(中華)로 바뀐 이후 2000여 년이 지나도록 유학은 여전히 미약한 형편이었다. 고려(高麗) 때에 정포은(鄭圃隱) 한 분이 있기는 하였으나 논자(論者)들은 더러 충절(忠節)로만 칭송하였으니, 당시에는 제대로 높일 줄 몰랐던 것이다. 그 후 우뚝하게 일어나 사도(斯道)를 제창하고 중국에서 추락된 도통(道統)을 이은 것은 한훤당(寒暄堂) 김굉필 선생과 일두(一蠹) 정여창 선생에서 시작되었다. 뒤를 이어 예닐곱 분의 노선생(老先生)이 나타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빛을 발하고 있어 천하 도통(道統)의 전수가 우리에게서 이어지게 되었으니, 참으로 훌륭한 일이다. 그런데 김 선생과 정 선생은 모두 화를 당해 그 말씀과 풍도가 후세에 그다지 잘 드러나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학자들이 천년 뒤에까지 숭모하며 애통해하는 이유이다. 정 선생은 대대로 함양(咸陽)에 거주하여 그 자손이 지금까지도 그곳을 지키고 있다. 가정(嘉靖) 연간에 개암(介庵) 강익(姜翼) 선생이 주창하여 남계서원을 세우고 선생의 제사를 모셨으며, 명종 21년(1566) 사액(賜額)을 받았다. 우리나라의 서원은 주세붕의 죽계(竹溪)에서 시작되었고, 남계(灆溪)가 그다음을 이었다. 아, 선생은 학자의 비조요 남계는 서원의 시초였던 것이니, 어찌 다시 이보다 더 높을 수 있겠는가. 서원이 세워진 지 200년이 지나도록 묘정(廟庭)에 비(碑)가 없었다. 이에 제생(諸生)들이 바야흐로 돌을 다듬고 글을 새겨서 비를 세울 것을 계획하고는 종후(鍾厚)에게 비문을 써줄 것을 요청하기에, 내가 감히 걸맞은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였다.   

  

양정재(養正齋)와 애련헌(愛蓮軒)

 양정재는 남계서원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이다. 양정은 유교 삼경의 하나인 『주역』 「몽쾌」에 나오는 “어리석어 바름을 기르니 성인의 공덕이다(蒙以養正 聖功也)”에서 따온 말인데, 교육을 통해 사람을 바르게 기르는 것이 곧 성인의 공덕이란 의미이다.     


 애련헌은 양정재 마루 칸의 이름으로 애련헌의 판문을 열면 연못 안의 연꽃을 감상할 수 있다. 애련은 “연꽃을 사랑하고 감상한다”는 뜻인데, 중국 학자 주돈이는 연꽃을 꽃 중의 군자라 칭송했다. 애련헌에는 주돈이와 정여창 선생을 흠모하고 두 분의 학문을 따르겠다는 후학들의 마음이 담겨 있다. 연꽃은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곧은 절개를 지닌 선비정신을 상징한다.     


 서원의 동재와 서재는 학생들의 기숙사로 사용되며, 보통은 양쪽의 방과 가운데 마루로 구성이 되는데 남계서원의 동재와 서재는 방과 누마루 두 칸으로 이뤄져 있으며, 방에는 ‘재(齋)’, 누마루에는 ‘헌(軒)’이란 이름이 각각 붙는다. 이는 동재와 서재가 공부와 생활 외에도 휴식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남계서원 양정재(養正齋)와 애련헌(愛蓮軒)

보인재(輔仁齋)와 영매헌(咏梅軒)

 보인재는 유생들의 기숙사인 서재의 이름으로, 『논어』 「안연편」에 나오는 “군자는 글로 벗을 사귀고, 벗으로써 인을 돕는다(君子 以文會友 以友輔仁)”에서 가져왔다. 벗이 있어 서로 인덕을 쌓은 본보기를 우리는 정여창과 그의 친구 김굉필의 관계에서 볼 수 있다. 친구를 통해 인격적으로 성장할 수 있고, 친구의 장점을 배워 자기의 단점을 고칠 수 있듯 우리는 서로 도우며 성장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정여창은 20세가 넘은 나이에 친구인 김굉필과 함께 당시 함양 군수로 재직하던 김종직을 찾아가 배움을 청하여 제자가 되었다. 하늘과 땅 사이의 한 마리 좀벌레를 뜻하는 ‘일두(一蠹)’라는 호에서 나타나듯 정여창은 40이 넘어서야 벼슬길에 올라 겸손과 미덕을 보였고, 김굉필은 경치가 좋은 곳에서 조그마한 서재를 짓고 자연의 섭리를 따라 조용히 수양하기를 즐기던 학자로 살고자 노력한 사람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두 사람은 정쟁에 휘말려 결국 형벌을 받게 되고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대구시 달성군에는 정여창과 김굉필이 학문에 전념하던 시절, 함께 시를 읊고 풍류를 즐기던 정자, '이노정(二老亭)'이 지금까지 남아 두 사람의 진한 우정을 전하고 있다.     


 영매헌은 서재인 보인재의 마루 칸의 이름으로 양정재와 마찬가지로 마루의 판문을 열면 연못 주변의 매화나무가 보인다. 누마루에 걸터앉아 매화 관련 시를 쓰고 읊을 만하다 하여 영매헌이란 이름을 붙였는데 건너편의 애련헌과 같이 유생들이 자연을 노래하며 휴식 시간을 갖는 기능을 하였다.     


명성당(明誠堂)

 명성당은 남계서원의 강당으로 명성(明誠)은 『중용』의 “정성을 다하여 밝아지는 것을 본성이라 하며, 밝음으로 정성이 되는 것을 가르침이라 한다. 정성스러우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정성스럽게 된다(自誠明謂之性 自明誠 謂之敎 誠則明矣 明則誠矣)”라는 말에서 가져왔다. 여기에서 ‘밝아진다’는 것은 배움을 통해 옳게 된다는 뜻으로, 가르침(敎)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명성당은 다른 서원의 강당과는 다르게 전면이 4칸인 건물이다. 우리나라 건축물은 보통 홀수 칸 건물을 짓고 중앙인 가운데 칸에 건물의 편액을 걸고 있는데, 명성당은 4칸이기 때문에 편액의 위치를 결정할 때 무척 난감한 상황이다. 4칸 건물의 중앙은 건축 부재들로 인해 편액을 걸 수 없으니, 2번째 칸 또는 3번째 칸 중에 걸게 되면 한쪽으로 치우친 편액을 걸게 되는 것이다. 남계서원은 이 문제를 아주 통쾌하게 해결했다. ‘남계’와 ‘서원’으로 각각 두 개의 편액으로 나누어 걸은 것이다. 강당의 이름표인 ‘명성당(明誠堂)’ 편액은 대청마루 안쪽 벽에 걸려있다.     


 집의재(集義齋)는 명성당 서쪽의 협실로, 집의는 『맹자』의 ‘집의소생(集義所生)’에서 나온 말이다. 맹자는 제자 공손추(公孫丑)에게 호연지기란 지극히 크고 강대한 기운으로 정의로움을 축적해 생겨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는데, 이곳 명성당은 공손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꾸준히 공부해 호연지기를 함양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거경재(居敬齋)는 명성당 동쪽의 협실로, 서원 건립에 앞장선 강익은 거경을 정자(정호와 정이 두 형제를 통칭하는 말)의 ‘거경궁리(居敬窮理 : 마음을 경건하게 하여 이치를 추구한다)’에서 취했다고 했는데, 이는 성리학의 학문 수양 방법이다. 내적 수양법인 ‘거경’은 항상 몸과 마음을 삼가서 바르게 갖는 것이며, 외적 수양법인 ‘궁리’는 널리 사물의 이치를 궁구해 정확한 지식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     


사당(祠堂)

 남계서원의 사당에서는 독특한 구조를 볼 수 있는데, 사당으로 올라가는 길은 30개가 넘는 돌계단이다. 돌계단의 입구는 넓지만 올라갈수록 조금씩 좁아지는 시각효과를 갖춘 계단이다. 그리고 계단은 한 사람만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좁고 가파르다. 이는 사당으로 올라가는 길 자체가 선생을 존경하고 예의를 갖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계단의 끝자락에는 배롱나무 4그루가 서 있는데 이처럼 사당 앞에는 보통 배롱나무를 심어 놓았다. 배롱나무의 붉은색은 변하지 않는 마음이며, 껍질에 없는 줄기는 진실된 마음이다. 선현에 대한 후학들의 변하지 하는 존경의 표현이며 학문 역시 게을리하지 않고 꾸준히 닦아나간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보통 서원의 사당에는 모시고 있는 인물에 맞는 현판이 있는데 남계서원의 사당에는 현판이 걸려 있지 않다. 이는 정여창 선생의 업적과 인품, 그 학문적 경지를 단 한마디의 편액으로는 표현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남계서원 사당으로 올라가는 길, 선생에 대한 존경과 추모의 마음을 담아 평지에서 높은 곳에 사당을 모셨다.
남계서원의 사당, 선생의 업적과 인품, 학문적 경지를 한 마디의 편액으로 표현할 수 없어서 사당의 이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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