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書院)은 조선시대에 성현(聖賢)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학자를 키우기 위해 전국 곳곳에 설립한 사설 교육 기관으로 오늘날의 지방사립대학교라고 볼 수 있다. 서원의 공간은 크게 성현(聖賢)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건물인 사우(祠宇)와 청소년을 교육하는 서재(書齋)로 나눌 수 있다.
서원의 교육은 원장(院長), 강장(講長), 훈장(訓長) 등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원장은 서원의 대표자로 보통 퇴직 관료나 당대의 유명한 석학이 맡았으며, 이들은 서원 기강 확립과 원생들의 행실 규찰을 담당했지만 서원 운영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강장은 서원에 입학한 원생들에게 경학과 예절을 가르치는 역할이었고, 훈장은 면학과 교관의 일종인 훈육을 책임지는 역할이었다.
서원의 운영은 서원의 모든 일을 주관하며 재장(齋長)이라고도 불린 도유사(都有司) 또는 장의(掌議)가 맡았다. 이 밖에도 도유사 다음가는 직책인 부유사(副有司), 여러 사무를 분담해서 맡은 유사(有司), 간사 역할을 하는 직월(直月), 서기 역할을 하는 직일(直日)등이 있었다.
성균관이나 향교는 번잡한 도시에 있어서 앞으로는 번거로운 학칙에 얽매이고 뒤로는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기 쉬우니, 어찌 서원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퇴계 이황
서원은 성균관, 향교와 함께 조선시대 대표적인 고등 교육 기관으로, 국립으로 전국 각 도시에 분배된 향교와 대비되는 사립학교로서 지역 문화를 대표하는 장소였다. 그래서 서원은 교육 기능과 교화 기능을 그 양축으로 삼고 있었다. 조선 중기 사대 사화를 비롯한 정치적 혼란으로 말미암아 학자들은 지방에 은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하게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선배 유학자들을 기리고 제사하는 사당의 기능까지 통합한 서원을 창설하기 시작한 것이다.
먼저 교육 기능에 대해서 살펴보면, 서원에서 교육의 목표는 인품이 훌륭한 성현을 본받고 그러한 관리를 양성하는 데 있었다. 이를 위해 학생들은 다른 교육 기관과 마찬가지로 소학에서부터 시작하여 사서오경을 중심으로 공부에 전념했다. 그리고 사서와 오경을 모두 익힌 다음에는 가례, 근사록과 같은 성리학에 관한 책들을 익히도록 했다.
서원의 또 한 가지 기능인 교화 기능은 주로 선현에 대한 제사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제사의 대상에 있어서는 성균관이나 향교와는 차이가 있었다. 성균관과 향교의 문묘(文廟)에 배향된 인물은 공자를 비롯해 안회, 증자, 자사, 사성(四聖)과 공자 문하의 십철, 그리고 송나라 6현과 우리나라 18현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은 신라, 고려,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나라의 최고 정신적 지주에 오른 한국의 유학자 18명을 말하며 동국 18현(東國 十八賢)이라고도 한다. 그 18명의 배향 인물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서원은 사학(私學)이라는 특성상 대부분 지역의 문중에 의해 건립되었던 까닭에 자신의 문중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인물 가운데 뛰어난 인물을 배향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국립인 성균관과 향교에 비해 배향 인물의 선택 폭이 훨씬 넓었다.
성균관이나 향교와 마찬가지로 서원에서도 봄과 가을에 걸쳐 일 년에 두 차례의 제사를 지냈다. 제사일은 성균관과 향교에서 봉행하는 석전(釋奠)에 비하여 그 격이 낮았던 관계로 그 날짜를 석전보다 뒤로 하였다. 즉, 석전이 상정일(上丁日)에 봉행되는 데 비하여 서원의 제사는 중정일(中丁日) 또는 하정일(下丁日)로 잡아 거행함으로써 그 격을 구분하였다.
이외에도 서원에서는 다양한 기능을 담당했는데 지방의 인재들이 모이는 집회 장소였으며, 학생들의 학문을 위해 다양한 도서를 보관하는 도서관의 기능과 책의 출판 기능도 담당했다. 그래서 많은 서원에는 장판각 또는 장판고라는 서고가 있다. 이외에도 서원은 지방의 풍속을 순화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는 곳이었고 또한 그 지역의 여론을 선도하였음은 물론, 지역별 향약을 기준으로 효자나 열녀 등을 표창하고 윤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사람을 규탄하는 등의 직접적인 교화 활동도 하였다.
서원의 기원은 당나라 시기였으나 실질적인 형태는 송나라 때에 와서 완성되었으며, 특히 서원의 위상은 주자에 의해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서원이 처음 설립된 것은 1543년이었는데, 당시 풍기 군수였던 주세붕이 안향을 추모하기 위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을 설립하였다. 안향은 중국의 ‘주자학’이라는 학문을 우리나라에 도입한 최초의 학자였다. 주세붕이 세운 최초의 서원은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라 칭했지만, 후에 풍기 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이 서원에 대한 국가적인 지원을 건의하였고 이에 명종이 서적 등의 물자와 함께 친필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 사액(賜額)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퇴계 이황을 비롯한 성리학자들에 의해 서원의 보급 운동이 일어나면서 전국에 많은 서원이 건립되었다. 그리하여 명종 대에 건립된 수가 17개소에 불과했던 서원이 선조 대에는 100개가 넘었으며, 18세기 중반에는 전국에 700여 개소에 이르렀다.
이처럼 서원이 늘어나면서 부작용이 커졌다. 서원에 딸린 토지에는 세금이 부과되지 않았고, 서원의 노비는 국역(國役)을 지지 않았다. 따라서 서원이 증가함에 따라 국가 재정에 문제가 생겼다. 엄청난 숫자의 서원들 때문에 민생에 끼치는 폐단이 엄청났고, 심지어는 살아있는 사람을 모시거나 성현도 아니지만 가문의 조상이라는 이유로 모시느라 집안마다 서원을 만들고, 한 사람을 모시는 서원이 5~6곳에 이르는 등 그 부작용이 말이 아니었다.
19세기부터 세도 가문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서원의 중앙에서의 정치적 영향력은 사실상 없어졌지만, 무엇보다도 지방경제에 미치는 폐단이 말이 아니었다. 선현의 제사를 지낸다는 명목으로 지방 농민들을 사사로이 수탈하였으며 이에 반발하는 지역민들을 향약이나 반상의 도리를 어겼다 하여 처벌하거나 지역 사회에서 매장시키는 전횡을 저지르고 나라에서 막대한 식량과 노비를 제공받으면서 세금을 내지 않는 면세 특권이 있어 국가 재정을 악화시켰다.
특히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병을 보낸 만력제(萬曆帝)를 제사 지내기 위한 ‘만동묘’와 송시열을 모신 ‘화양동서원’은 워낙 입김이 세서 지역의 백성들에게 서원의 제사 비용을 부담시켰으며 할당된 비용을 내지 못한 백성들을 함부로 붙잡아서 폭행하거나 고문하는 등 그 폐해가 말이 아니었다. 당시 이 일대에 "원님 위에 감사, 감사 위에 참판, 참판 위에 판서, 판서 위에 삼정승, 삼정승 위에 승지, 승지 위에 임금, 임금 위에 만동묘지기"라는 노래가 퍼졌을 정도였다.
서원의 폐단에 맨 처음 손을 댄 것은 숙종이었다. 숙종은 한 사람을 중복되게 모시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고, 그의 아들 영조 대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인 서원 정리가 이뤄진다. 영조 3년(1727) 12월에는 한 사람당 하나의 서원만 허가하면서 비교적 나중에 세워졌던 서원들을 정리했으며 영조 23년(1747)에도 허가 없이 사적으로 세운 서원들을 정리했다. 고종 대에서는 흥선대원군의 등장으로 서원 정리의 속도가 빨라지는데 당장 고종 1년(1864)에는 사사로이 세워진 서원과 중첩되는 서원들을 정리하였다.
사실 유학자들도 서원이 대거 정리될 것이라는 분위기를 읽긴 읽었는지 이미 고종 1년에 대원군의 직계 조상인 인평대군을 모시는 서원을 세웠으나, 이 역시 철폐된다. 그 후 고종 5년에 서원의 원장을 고을 수령이 맡게 하고, 허용된 정원 이외의 병역 기피자들을 모조리 군역에 넣는가 하면 면세 혜택을 없애 서원의 특혜를 모두 없애고, 관의 통제하에 둔 다음에 곧이어 사액서원 47개소만 남기고 전면 철폐했다. 숙종, 영조 대에 줄곧 지적된 중첩된 서원은 사액서원이라 하더라도 예외 없이 모두 철폐되었다. 이 당시 난립해 있던 서원은 1,000여 곳이 넘었으며 안동 한 곳에만 40여 개의 서원이 있었다.
"진실로 백성에게 해가 되는 것이 있으면 비록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나는 용서하지 않겠다. “
흥선대원군, 유림 세력들이 극도로 반대하던 서원 철폐 정책을 강행하고 절대로 굽히지 않겠다는 발언.
2. 유네스코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소수서원(紹修書院)
소수서원은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에 있는 서원이다.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영주를 대표하는 문화재이자 랜드마크이다. 가까운 거리에 역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부석사가 있다.
1543년, 풍기 군수였던 주세붕이 고려말의 유학자 안향의 연고지에 사묘를 세워 안향의 위패를 봉안했다. 안향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성리학을 들여왔고 후일 조선 건국의 주도계층인 신진사대부의 형성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게 된 인물이기도 하다. 그다음 해 유생들을 교육시킬 학사를 건립하여 소수서원의 전신이 되는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 창건되었다. 서원의 명칭인 백운동은 주자가 세운 여산의 백록동서원을 본떠서 지은 것이다.
부임하여 며칠 만에 옛 순흥부에 이르렀는데 소(沼)가 있는 숙수사 옛터가 있었습니다. 이곳은 문정공 안축이 ‘죽계별곡’을 지은 곳으로 신령한 거북 형상의 산 아래에 죽계가 있으며, 구름에 감싸인 소백산으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물 등 진실로 백록동서원이 있는 중국 여산에 못지않습니다. 구름과 산, 언덕과 강물, 그리고 흰 구름이 항상 골짜기에 가득하므로 감히 이름하여 ‘백운동’이라 이름 짓고 감회에 젖어 배회하다가 사당 건립의 뜻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주세붕이 목사(牧使) 안휘에게 백운동서원을 세우게 된 동기를 전하는 서찰
백운동서원 부지는 원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사찰인 숙수사(宿水寺)가 자리한 곳이었다.
안향은 이 숙수사에서 수학하였고 고려 원종 1년(1260)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충렬왕 12년(1286) 중국 원나라에 들어가 『주자전서(朱子全書)』를 보고 주자학을 연구했다. 섬학전(贍學田)이라는 육영재단을 설치하였고, 국학대성전(國學大成殿)을 낙성하여 공자(孔子)의 영정을 모셨으며, 제기(祭器), 악기와 육경(六經), 제자(諸子), 사(史) 등의 서적을 사들이는 등 주자학의 도입과 정착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기에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로 일컬어진다.
소수서원 입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사찰인 숙수사의 당간지주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명종 3년(1548) 11월에 퇴계 이황(1501-1570)이 풍기 군수로 오게 된다. 이황은 풍기 출신의 황준량을 통해 백운동서원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고, 풍기 군수로 온 뒤에는 서원에 자주 들러 주자학을 강론하고 유생들을 격려하였다. 봄가을의 향사 제도를 개정하는 한편 경렴정 맞은편에 취한대를 세우는 등 서원 정비에도 힘을 썼다.
서원을 정비하고 체계를 갖추는 것만으로는 지속적인 성장이 어렵다고 판단한 퇴계 이황은 서원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지원하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당시 명종에게 상소를 올렸고, 1550년 소수(紹修)라는 현판을 하사 받았다. 이렇게 해서 백운동서원은 소수서원(紹修書院)이 되었고, 서적, 토지 노비를 하사 받았다. 여기서 소수(紹修)라는 명칭은 당시 대제학이었던 ‘신광한’이 임금에게 올린 '기폐지학 소이 수지(旣廢之學紹而修之)'에서 따왔는데 이 말은, ‘이미 학문이 피폐해졌으니 이어서 닦을 수 있게 하라'라는 의미이다.
이곳 순흥 지역은 유배되어 있던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의 단종복위운동과 연관되었다 하여 이미 폐읍(廢邑)되고 향교 역시 폐쇄되었는데, 이미 폐지된 학교를 다시 세워 유학을 잇게 하겠다는 의지이다.
소수서원처럼 왕의 사액을 받게 되면 왕의 친필 현판뿐 아니라 서원 운영에 필요한 서적, 노비, 토지는 물론이고 면세, 면역 등의 혜택이 따라오게 되기에, 소수서원 이후 세워진 전국의 서원들은 경쟁적으로 사액을 받기 위해 노력하였다.
소수서원은 서원 자체가 사적 제55호로 지정되어 있고, 주요 소장 유물로 안향 초상(국보), 주세붕 초상(보물), 문성공묘(보물), 강학당(보물) 등이 있다. 옛 숙수사 터의 흔적을 알 수 있는 당간지주(보물)와 초석과 같은 유물도 남아있다. 그리고 명종 1년(1546) 2월 5일부터 현종 11년(1670) 7월 4일까지 소수서원의 운영 전반에 대한 내용이 담긴 『소수서원등록(紹修書院謄錄)』과 같은 사료도 전해지고 있다.
소수서원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건립되었던 만큼 건물 배치와 형식이 자유롭다. 강학 공간인 명륜당(明倫堂)이 동향, 배향 공간인 문성공묘(文成公廟)가 남향, 다른 건축물들 역시 특별한 중심축 없이 자유롭게 자리 잡고 있다.
보통 서원이나 향교 입구에는 은행나무가 있는데, 은행나무는 다른 나무들과는 달리 독성이 있어서 병충해에 강하고 또한 그 주변에는 벌레들이 없어서 깨끗함을 상징한다. 이러한 깨끗함은 청렴결백을 강조하는 유생들의 선비정신을 상징하기 때문에 서원뿐만 아니라 성균관이나 향교에도 심었다. 또한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인 행단(杏壇)에서 제자들을 교육시켰기 때문에 서원이나 향교에서도 은행나무를 많이 심었다. 즉, 선비정신의 상징인 은행나무를 심어 유생들의 정신적 지표로 삼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서원이나 향교에는 배롱나무를 많이 심었는데, 그 이유는 배롱나무는 해마다 껍질이 벗겨져서 속을 다 보여주기 때문에 꾸미지 않고 숨김없는 깨끗함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또한 가지마다 흐드러지게 피는 꽃은 끝없이 배출되는 인재를 뜻하기도 한다.
서원의 입구에는 양쪽으로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 있고, 서원의 출입문인 지도문(志道門)으로 통하는 길 왼쪽에는 성생단(省牲壇)이 있고, 오른쪽에는 경렴정(景濂亭)이 있다. ‘성생단’은 향사에 쓸 희생(犧牲)을 검사하는 단으로 ‘생단(牲壇)’이라고도 한다. 서원의 생단은 사당 근처에 있는 것이 관례인데, 소수서원의 생단은 서원의 입구에 있다. 경렴정은 원생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정자이다. 정자의 이름은 북송의 성리학자인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頣)를 깊이 존경한다는 뜻으로 그의 호에서 ‘염(濂)을’ 빌려왔다.
서원의 출입문인 지도문(志道門)으로 통하는 길 왼쪽에 위치하고 있는 성생단(省牲壇)
경렴정은 원생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정자이다. 정자의 이름은 북송의 성리학자인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頣)를 깊이 존경한다는 뜻으로 그의 호에서 ‘염(濂)을’ 빌려왔다.
경렴정 뒤로는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죽계천이 흐르는데 물가로 튀어나온 바위가 있는데 ‘경(敬) 자 바위’이다.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창건하고 쓴 글씨인데, '경(敬)'은 성리학에서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는 수양의 핵심으로, 선비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었다. 주세붕은 천년 후에라도 마멸되지 않도록 보존되기를 바란다는 뜻에서 바위에 새겼다.
주세붕이 숙수사를 헐어내고 서원을 건립하던 당시, 숙수사에 있던 불상들을 모두 이 바위 아래 소(沼)에 던져버렸다. 그러자 한 맺힌 불상들이 밤이 되면 첨벙거리며 뛰어올라 사람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들었다. 이를 전해 들은 주세붕이 소(沼) 위의 바위에 '敬'자를 음각(陰刻)하였더니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경(敬)은 주자철학의 근본으로 공경의 의미를 담고 있는데, 이로써 불상들의 한이 위로받았기 때문이라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 이후 퇴계가 풍기 군수로 있을 당시 이곳에 송백과 죽을 심어 취한대(翠寒臺)라고 이름 지었는데, ‘취한’이란 뜻은 ‘푸른 연화산의 산기운과 맑은 죽계의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詩)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뜻으로 옛 시 "송취한계"(松翠寒溪)에서 비취 "취"(翠) 자와 차가울 "한'(寒) 자를 따온 것이다. 또 퇴계는 '경'자 위에 '백운동(白雲洞)' 석 자를 써서 음각하고 이곳의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소수서원에서 맞은편 죽계 건너편의 취한대
정문인 지도문을 지나면 가장 먼저 학문의 공간인 강학당과 마주하게 된다. 강학당의 형태는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을 얹은 건물이다. 정면 4칸 중 좌측 3칸은 마루이며 오른쪽 1칸에 방 2개를 설치하였다. 이 방은 원장이나 강장, 훈장이 머무는 지금의 교무실, 연구실 같은 공간이다.
정문 가까이 바짝 붙은 강학당은 간소한 정문의 규모와 대비되어 실제보다 더 우뚝하고 웅장하게 보인다. 정문을 통과하자마자 강학당의 측면 쪽이 보이게 되는 좌향도, 그리고 정문에 이처럼 다가붙은 위치도 다른 서원이나 향교와는 다른 소수서원만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강학당 내부 북쪽에는 명종의 친필인 소수서원 편액이 걸려있는데, 명종은 당시 대제학에게 서원의 이름을 짓게 하여 ‘이미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다’는 뜻의 소수(紹修)로 결정하고 1550년 소수서원이라고 쓴 현판을 내렸다. 강학당 앞쪽에는 사액받기 전의 이름인 백운동(白雲洞) 현판이 걸려있다. 서원의 양대 기능 중 학문을 강론하던 건물로, 이 강당에서 길러낸 원생이 4천여 명에 달하며 대부분이 '퇴계 이항'의 제자들이었다.
강학당 뒤쪽으로는 직방재와 일신재가 나란히 있다. 먼저 직방재는 원장의 집무실 겸 숙소였으며 주역의 ‘敬以直內 義以方外’ 문장에서 따와서 지은 이름이다. 일신재는 직방재 옆에 딸린 작은 서재로 당시 교수들의 사무실 겸 숙소로 쓰였으며, ‘일신’은 ‘日日新 又日新’이라는 문장에서 따서 지은 이름이다. 원장, 교수 등의 집무실 겸 숙소를 강당 밖에 따로 마련한 것 역시 다른 서원과는 다른 소수서원만의 특징이다.
강학당의 동편으로는 지락재와 학구재 두 건물이 ㄱ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이 공간은 원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였던 곳이다. 지락재는 고학년 원생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던 곳으로 송나라 구양수의 글 중 ‘至樂莫如讀書’에서 가져온 것이고, 학구제는 저학년 원생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던 곳이었으며 성현의 길을 따라 학문을 구한다는 뜻이다. 원생들의 숙소가 강당과 비대칭으로 배치된 것도, 11자형이 아닌 ㄱ자형으로 배치된 것도 후대 서원들과는 다른 소수서원만의 특징이다.
학구재와 지락재는 인접한 일신재보다 나지막한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단순한 구조로 꾸몄고 마루를 꾸미는 난간 등은 전혀 없다. 이는 교수와 원생(스승과 제자)이라는 건물 사용자 간의 위계 차이를 건축에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강학당 서쪽으로는 ‘문성공묘(文成公廟)’가 위치해있는데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되어 있고 서원의 주인공인 안향을 모시고 있으며, 안축(安軸), 안보(安輔), 주세붕(周世鵬)의 위패를 함께 봉안하고 있다. 여기서는 매년 3월과 9월 초정일(初丁日)에 주세붕이 초안하고 이황이 보완한 홀기(笏記)에 의해 제향을 드린다. 이때 반드시 주세붕이 창작한 「도동곡(道東曲)」이라는 경기체가를 부르는데, 그 뜻은 중국 공자의 도가 회헌(晦軒) 안향에 의해 우리나라로 옮겨진 것을 찬양하는 것이다.
문성공묘와 대각선 방향으로 영정각이 있는데, 이는 소수서원에 국보를 비롯하여 보물급 문화재가 많아서 1975년 짓게 된 건물이다. 영정각의 중앙에는 송나라의 유학자인 주자(朱子)와 고려의 안향의 영정(국보)이 봉안되어 있고, 좌측으로는 신재 주세붕과 한음 이덕형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우측에는 미수 허목과 오리 이원익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봉안된 인물들의 면모를 간단하게 살펴보자면,
먼저 ‘주자’는 송나라의 유학자로 우주의 구성원리를 형이상학의 기로 보았고, 훈고학의 사상적 한계를 벗어나 우주론적인 체계를 설립했는데 이것이 바로 주자학이고, 후대에 동아시아 지역의 지배적인 이념으로 정착시킨 인물이다. ‘안향’은 여러 차례 원나라에 오가며 학풍을 견학하고, 직접 주자서를 베껴오고, 주자학의 국내 보급을 위해 섬학전을 설치하는 등 주자학을 보급하고 널리 퍼뜨린 인물이다.
‘주세붕(1495~1553)’은 백운동서원을 세운 인물로 이 영정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1543년 풍기 군수로 있을 때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후에 소수서원)을 세워 성리학을 원나라로부터 들여와 유학을 진흥시켰던 고려시대의 안향을 이곳에서 받들게 한 인물이다. 오성과 한음의 한음 ‘이덕형’은 30대 때 재상에 올라 영의정을 세 번이나 역임한 명신이었다.
‘허목’은 남인의 영수로 고학에 심취한 학자로, 주자학을 중시하던 17세기 당시의 시대 분위기와 달리 원시 유학인 육경학에 관심을 두면서 고학의 경지를 개척하였다. ‘오리 이원익’은 조선시대 문신이자 서예가로 주자학에서 이항복과 함께 대표 주자로 뽑히는 학자이다.
주자나 안향, 주세붕이야 소수서원과 관련이 깊으니 그렇다고 쳐도, 이러한 유명한 학자들의 영정이 소수서원에 모셔진 이유는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시 훼철된 서원에서 모셔 왔기 때문이다.
소수서원의 영정각에는 주자, 안향, 주세붕, 이덕형, 이원익, 허목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서원에 영정각을 두는 것은 드문 일이나 소수서원에는 보물급 영정이 많았기 때문에 특별히 영정각을 건립하였다. 이 가운데 안향의 영정은 국보, 주세붕의 영정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원본은 소수박물관에 있고 영정각에 전시된 영정은 복사본이다.
소수서원 영정각 중앙에 배치되어 있는 주자와 안향의 영정, 왼쪽이 주자이고 오른쪽이 안향이다.
소수서원 영정각 우측(관람방향)에 배치되어 있는 주세붕과 이덕형의 영정, 왼쪽이 주자이고 오른쪽이 이덕형이다.
소수서원 영정각 좌측(관람방향)에 배치되어 있는 허목과 이원익의 영정, 왼쪽이 허목이고 오른쪽이 이원익이다.
소수서원은 최초의 서원이지만 후대의 다른 서원들과는 확연히 다른 구조적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그 배치를 정리해 보면 향교 및 서원의 좌묘우학(左廟右學) 유형의 일종으로 분류할 수도 있겠지만, 위에서 언급된 소수서원 건물의 세부적 배치는 후대 어떤 서원의 구조와도 완전히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전형성을 벗어났다는 것이 자체적인 질서조차 없다는 것은 아니다. 서쪽부터 문성공묘, 장서각과 원장의 공간, 교수와 유사의 공간, 원생의 공간을 차례로 늘어 세운 것은 방위와 건축공간 배열의 위계를 연계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영정각 앞에는 해시계로 알려져 있는 일영대(日影臺)가 보존되어 있는데, 맑은 날 윗부분 돌에 꽃은 막대기의 그림자가 아랫돌에 드리워지는 것을 보고 시간을 알았다고 한다. 자연석 주춧돌 위에 문지도리석을 올려놓은 것으로 숙수사의 유적이라는 설도 있다.
영정각 앞에 보존되어 있는 일영대(日影臺)
3. 소수서원에서 공부한 사람들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답게 이름만 들어도 바로 알 수 있는 뛰어난 인재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이들 대부분은 퇴계 이황의 제자들이거나 퇴계의 학맥과 연관이 있다.
소수서원에서 학문을 닦은 사람들의 명부인 입원록(入院錄)에는 월천 조목, 초간 권문해, 약포 정탁, 학봉 김성일, 성재 금난수, 격암 남사고 등 당대의 명신(名臣)과 유사(儒士)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퇴계 이황의 풍기군수 부임을 전후하여 스스럼없이 사제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나라의 변고가 있었던 시기를 제외하고는 꾸준히 원생을 교육시켜 1888년 마지막 입원생을 받을 때까지 4,000여 명이 넘는 제자를 배출시킨 인재양성과 성리학 진흥의 요람이었다.
4. 서원의 부속 시설물
서원을 뭐니 뭐니 해도 유생들이 학문을 닦는 공간이다. 학문을 하는 유생들은 독서와 공부를 게을리하면 안 되었기에 많은 부속 시설물들이 필요했다. 지금의 도서관 같은 장서각(藏書閣)이 그런 건물이고, 전기가 없던 시절이었기에 밤에 이동 및 활동을 위해서는 서원마다 전등의 역할을 해주었던 정료대가 위치하고 있다. 대부분의 서원은 강학당 앞마당에 설치되어 있는 데 비해 소수서원의 정료대는 장서각 앞에 위치하고 있다. 아마도 밤늦은 시간이더라도 도서관 이용을 권장하는 의미라고 해석된다. 이 정료대에는 윗부분에 관솔을 피워 주변을 밝혔다. 또한 소수서원의 정료대 앞에는 사당을 참배할 때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기 위해 손을 씻고 들어갈 수 있도록 대야를 올려놓았던 관세대가 위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