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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은 Jun 27. 2024

0. 답사의 신, 서원(書院)에 가다! 답사의 길잡이

당일형 답사

1599년 퇴계가 작성한 『이산원규(伊山院規)』, 이후 각 서원의 생활을 규정하는 원규의 바탕이 되었다.


1. 서원(書院) 이야기 서원 답사의 포인트


  서원의 현판이나 비문, 안내문 등이 한자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서 자칫하면 중요한 답사의 포인트를 놓치고 올 경우가 많다. 특히 9개의 서원은 전국에 걸쳐 분포하고 있어 먼 길을 다녀와야 하므로, 가기 전에 그리고 가서도 답사의 포인트를 잡고 가야 한다.     


서원 답사에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포인트를 준비해서 가는 것이 좋다.      


 첫 번째 포인트는, ‘누구를 배향하고 있는가?’이다.

 성균관과 향교의 문묘(文廟)에 배향된 인물은 공자를 비롯해 안회, 증자, 자사, 사성(四聖)과 공자 문하의 십철, 그리고 송나라 6현과 우리나라 18현이다.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은 신라, 고려,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나라의 최고 정신적 지주에 오른 한국의 유학자 18명을 말하며 동국 18현(東國 十八賢)이라고도 한다. 그 18명의 배향 인물은 다음과 같다.     

 

홍유후(弘儒侯) 설총, 문성공(文成公) 안유, 문경공(文敬公) 김굉필, 문정공(文正公) 조광조

문순공(文純公) 이황, 문성공(文成公) 이이, 문원공(文元公) 김장생, 문경공(文敬公) 김집

문정공(文正公) 송준길, 문창후(文昌侯) 최치원, 문충공(文忠公) 정몽주, 문헌공(文憲公) 정여창

문원공(文元公) 이언적, 문정공(文正公) 김인후, 문간공(文簡公) 성혼, 문열공(文烈公) 조헌

문정공(文正公) 송시열, 문순공(文純公) 박세채     


 그러나 서원에서는 사학(私學)이라는 특성상 대부분 지역의 유림들이나 문중에 의해 건립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학파나 문중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인물 가운데 후대에 와서도 배향해야 할 뛰어난 인물을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 이유로 국립인 성균관과 향교에 비해 서원의 배향 인물은 선택 폭이 넓다.     


 서원의 위패 배열에는 질서가 있는데 주향, 병향, 열향, 배향, 종향 등으로 구분된다.     


 먼저 주향은 위패 가운데 으뜸이라는 의미이며 보통 그 서원을 상징하는 인물을 주향으로 모시고 있다. 사당에 위패가 하나만 있다면 그 인물이 바로 주향이 되는 것이고, 반면에 여러 인물을 주향으로 모시고 있는 서원도 있다.      


 병향은 위패를 나란히 모신다는 뜻으로 실제로는 주향과 버금가게 모신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모두 똑같이 모신다면 모두 주향이 되는 것이기에 ‘병향’이란 주향과 나란히 모시기는 하지만, ‘주향’보다 약간 낮은 격으로 모시는 경우를 말한다. 여러 인물 중 가장 으뜸이 되는 인물을 ‘주향’이라 하여 위패를 가운데 두고 나머지 인물들을 ‘병향’으로 구분한다. 위패의 배치는 가운데 ‘주향’을 중심으로 좌우로 배치하거나, ‘주향’을 동쪽에, ‘병향’을 서쪽에 놓아 서로 마주 보게 하기도 한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서원이 이러한 ‘병향’의 배치를 따르고 있다.      


 ‘열향’은 위패를 차등 없이 줄이어 놓는다는 의미로 위패를 동쪽에서 서쪽으로(좌측에서 우측으로) 일렬로 늘어놓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향교와 서원들은 도학의 전통에서 세운 것이기에 주, 배, 종의 위차가 있다. 하지만 사우, 향현사는 열향을 위주로 한다. 그런데 서원이 난립하면서 서원과 사우의 구별이 애매해지자. 사람들은 열향에도 위치에 따른 차등이 있다고 여기게 되었고 위차시비가 일어나게 되었다. 혹은 동쪽(좌측)이 우선 한다고 하기도 하고 혹은 가운데가 우선한다고 여기기도 하였다.     


 배향은 배석한다는 의미로, 공자 옆에 안자, 증자. 자사, 맹자와 같이 도학을 올바르게 계승했다고 여기는 인물들을 배치하는 것이 배향의 예이다. 주향을 중심으로 동 1, 서 1, 동 2, 서 2 순으로 좌측을 우선시하며 순서를 정했다.     


 종향은 공자묘에 우리나라의 여러 유학자들을 종사하는 것처럼, 학문의 영향을 입은 후대의 선현을 모시는 것을 말한다. 같은 종향이라도 좌에서 우로, 동에서 서로 우선순위가 정해져 있다.     


 또한 위패를 모신 시기에 따라 ‘원향’과 ‘추향’으로 구분되는데, 원향은 설립 당시 모신 경우를 말하고, 추향은 서원을 운영하면서 추가로 모시는 경우이다.       


 이러한 위패의 배치에 따른 논쟁과 시비도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사건이 영남학파 내에서 일어난 병호시비(屛虎是非)이다. 학파의 시조 격인 퇴계의 수제자로는 흔히 서애 류성룡과 학봉 김성일을 꼽는다. 서애와 학봉의 뒤를 이어 우복 정경세, 갈암 이현일, 대산 이상정, 손재 남한조, 정재 유치명 등으로 학통은 이어진다. 1573년 퇴계를 배향하기 위한 여강서원을 세워졌고, 1625년에 이 서원에 서애와 학봉을 추가로 배향하게 되면서 퇴계의 왼편에 누구를 모시느냐에 대한 논란이 벌어졌다. 서애 측은 벼슬이 영의정이라는 이유, 학봉 측은 나이가 연상이라는 이유로 각각 퇴계의 왼편을 주장하여 합의를 보지 못하자 당시 영남 유림의 좌장 격인 우복 정경세가 다음과 같이 결론을 짓는다.      


연치(年齒)의 차는 견수(絹隋)에 미치지 못하나 작위(爵位)의 차는 절석(絶席)에 있다는 것이다.    

  

 견수(絹隋)의 차라는 것은 예법에 나이가 5살 이상 차이가 나면 연장자로 대접하여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지 않고 조금 뒤에서 따라가야 한다는 뜻이다. 학봉은 서애 보다 4살 연상이니 견수에 미치지 못한다고 한 것이고, 절석(絶席)이란, 서애는 영의정, 곧 일국의 총리요, 학봉은 관찰사를 지냈으니, 영의정과 같은 고위직은 공적인 장소에서는 여러 사람과 같은 자리에 앉지 못하고 별도의 전용석에 앉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병호시비의 결론은 서애 측의 승리로 끝났고 그 뒤 여강서원은 숙종으로부터 호계서원의 편액을 받는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1805년 영남 유림에서 서애와 학봉, 한강(정구)과 여헌(장현광), 이른바 영남 사현(四賢)을 문묘에 종사하기로 조정에 청원하는 과정에서 다시 서애와 학봉의 순서 문제가 제기되었고, 양 문중의 갈등으로 인해 결국 영남 사현의 문묘 종사는 기각되었다. 1812년 학봉 측에서 호계서원에 대산 이상정을 추가로 배향하자는 논의가 있었는데 대산은 학봉의 계열이다. 이에 대해 서애 측은 적극 반대하였고 결국 호계서원과 절연하고 서애의 위패를 병산서원으로 옮겼다.      


 2013년 경북도청 강당에서 열린 호계서원 복설 추진 확약식에서 양 문중은 호계서원을 안동시 성곡동 안동 야외민속박물관 일대에 복설 이건하고 서애를 왼쪽에 학봉을 오른쪽에 배향하기로 합의하였다. 안동 유림이 병호시비가 시작된 지 근 400년 만이다.      


 한국의 서원 9곳에서 배향하고 있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경북 영주 소수서원 : 회헌 안향 선생을 주향으로 모시고, ‘안축, 안보, 주세붕’을 종향하였다.

경남 함양 남계서원 : 일두 정여창선생을 주향으로 모시고, ‘정온, 강익’을 종향하였다.

경북 경주 옥산서원 : 회재 이언적선생을 주향으로 모시고 있다.

경북 안동 도산서원 : 퇴계 이황선생을 주향으로 모시고, ‘조목’을 종향하였다.

전남 장성 필암서원 : 하서 김인후선생을 주향으로 모시고, ‘양자징’을 종향하였다.

대구 달성 도동서원 : 한훤당 김굉필선생을 주향으로 모시고, ‘정구’를 종향하였다.

경북 안동 병산서원 : 서애 류성룡선생을 주향으로 모시고, ‘류진’을 종향하였다.

전북 정읍 무성서원 : 고운 최치원선생을 주향으로 모시고, ‘신장, 정극인, 송세림, 정언충, 김약묵, 김관’을 종향하였다.

충남 논산 돈암서원 : 사계 김장생선생을 주향으로 모시고, ‘김집, 송시열, 송준길’을 종향하였다.     


 두 번째 포인트는, ‘각 건축물의 이름이 가지고 있는 의미이다.

 서원 건축물의 이름에는 성리학적 가치관과 덕목을 구현해 놓았는데, 이것은 공부하는 유생들에게 공부하고 생활하는 일상생활의 공간 속에서 성리학적 질서를 몸에 체득할 수 있게 함이다. 서원 답사에서 서원을 가장 잘 이해하는 길은 각 서원의 편액에 담긴 의미를 아는 것이다. 각 서원의 편액의 의미에 대한 부분은 본편에서 다루고 있으니 여기서는 ‘사액서원(賜額書院)’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본래 서원의 건립은 본래 지방의 유림에 의해 사적으로 이루어졌으므로 국가가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원이 지닌 교육 및 향사적 기능이 국가의 인재 양성과 교화정책에 깊이 연관되었기 때문에, 조정에서 특별히 서원의 명칭을 부여한 현판과 그에 따른 서적과 노비 등을 내린 경우가 있었는데 이러한 특전을 부여받은 국가 공인의 서원을 사액서원(賜額書院)이라 하였으며 사액서원이 아닌 곳과는 격을 달리하였다.    

 

 1550년 풍기 군수였던 이황의 요청으로 명종이 ‘백운동서원’에 대하여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어필(御筆) 현판과 서적을 하사하고 노비를 부여하여, 사액서원의 효시가 되었다. 그 뒤 전국 도처에 서원이 세워지면서 사액을 요구하자, 국가에서는 학문의 진흥과 선현에 대하여 보답한다는 뜻으로 대개 이를 허락하였다. 그러나 인조 이후 부자격자를 함부로 제향 하는 등 남설(濫設)의 경향이 심해지면서 사액에 대한 통제가 가해져 도덕과 충절이 뛰어난 인물을 제향 하는 곳이 아니면 허락하지 않았다. 현종 초에는 이를 제도화하여 1개 소 이상 첩향(疊享:한 인물이 여러 서원에 모셔지는 것)되고 있는 인물에 대해서는 사액 요구가 있더라도 허락하지 않도록 하였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사림에 대한 우대정책을 펴고 있는 데다가 왕명으로 특별히 사액하는 경우가 늘어나, 숙종 때는 무려 131개 서원이 사액되는 남발 현상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 뒤 영조 때에는 서원폐단의 격화로 인한 강력한 단속으로 사액은 일체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사액을 받는 경우 조정으로부터 현판과 함께 예관(禮官)이 파견되어 배향 인물에 대하여 치제(致祭)하는 특전이 베풀어졌다. 제도적으로 보장된 특전은 대개 다음과 같다.     


치제(致祭) : 국가에서 왕족이나 대신, 국가를 위하여 죽은 사람에게 제문과 제물을 갖추어 지내주는 제사


① 서원이 소유하고 있는 서원 전 가운데 3 결에 한하여 면세하였다.      

② 원생수는 정원이 없었으나 양민의 장정을 원생이라 하여 피역시키는 폐단이 발생하여, 숙종 33년(1707)에 사액서원은 20인, 비사액서원은 15인에 한하여 원생으로 인정하였다.     

③ 군역대상자를 함부로 불러들여 피역시키는 대신, 돈을 징수하는 모입수(冒入數)를 20명까지 둘 수 있도록 하였으며, 비사액서원은 제외시켰다.     

④ 사액 시 의례적으로 지급되는 노비를 포함하여 7명까지의 노비를 둘 수 있게 하였으며, 비사액서원은 5명까지로 하였다. 사액서원에 대한 이와 같은 특전은 인조 이후 여러 차례의 변경을 거치고, 특히 1704년 이후 대신들 사이의 논란을 거쳐 제도화된 것으로 영조 때 편찬된 『속대전』에 명문화되었다.     

 이러한 법제적 특전뿐만 아니라 사액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국가에 의한 공인을 의미하므로 그 서원 및 배향자에 대한 사회적인 권위를 높여주는 구실을 하여서, 모든 서원이 사액을 받고자 경쟁을 하였다.      


 세 번째 포인트는, ‘각각의 서원별로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서원은 얼핏 보기에는 모두 비슷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으나, 각각의 서원은 시대, 인물, 지역, 학문적 특성 등에 따라 매우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먼저,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고 그 구조 역시 다른 서원들과는 다르다. 소수서원은 대부분의 서원들이 건축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전학 후묘(前學後廟)의 배치가 아닌 서묘동학(西廟東學)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강학당을 중심으로 사당인 문성공묘가 서쪽에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대부분 서원의 원장실이나 교수실이 강학당 건물 내에 같이 있는데 반해 소수서원의 원장실과 교수실은 강학당 뒤편에 독립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동재와 서재 역시 강학당 뒤편 원장실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로 바라보는 11자형이 아닌 ㄴ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소수서원에는 영정각이라는 건물이 독립적으로 있는데 이는 소수서원이 보유하고 있는 안향과 주세붕의 영정이 국보, 보물급 문화재이기 때문에 서원의 자부심을 보여주는 건물이며 동시에 답사객들에게도 이 서원의 배향인물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남계서원은 두 번째로 세워진 서원으로 기존의 소수서원의 건물배치가 비교적 자유로운 반면 전학 후묘의 배치를 함으로써 서원 건축 배치의 스탠더드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남계서원의 강학당 편액은 이례적으로 두 개의 현판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남계’와 ‘서원’이 각각 다른 기둥에 걸려 있는데 이는 강학당의 정면 칸이 홀수가 아닌 짝수라서 그런 것이다. 또한 남계서원의 사당에는 현판이 걸려 있지 않은데 이는 일두 정여창 선생의 업적, 학문적 성과, 인품 등을 한마디의 말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옥산서원은 출입문인 역락문을 지나면 문루인 무변루가 보이는 구조이다. 보물로 지정된 무변루는 들어가면서는 현판을 볼 수 없고 문루를 지나서 안쪽에서 봐야 현판이 보인다. 즉 현판이 밖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니고 안쪽에 걸려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변루의 특이한 점은 2층 양쪽 공간에 온돌방이 설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손님이나 외부인이 왔을 때 객사의 기능을 했을 것이다. 강학당인 구인당을 지나 왼쪽으로 돌아가면 회재 선생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본래 서원 외부에 있었으나 서원 안으로 이동한 것이다.     

  

 도산서원의 입지는 구릉을 낀 경사진 터이기 때문에 전학 후묘의 배치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도산서원에는 입구의 문루가 없다. 문루는 서원의 출입문이면서 동시에 서원과 서원 밖을 분리하는 공간인데 도산서원에는 이러한 문루가 없다. 이는 퇴계의 후학들이 문루를 건립하면 스승의 도산서당을 아래로 바라봐야 하기 때문이다. 퇴계의 후학들의 스승에 대한 존경과 신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보통 강학당에는 중간에 강학의 공간이 있고 좌우로 원장실과 교수실이 있는데, 도산서원의 강당인 전교당에는 교수실은 있지만 원장실이 없다. 대신 원장실이 있어야 할 공간을 비워둠으로써 그 공간에 퇴계를 모시고 있는 상덕사가 보이게끔 배치하였다. 이들의 영원한 스승이자 원장님은 퇴계 선생임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필암서원은 문루인 확연루를 지나면 바로 강학당이 보이는데 강학당의 정면은 문루 쪽이 아닌 사당인 우동사를 향하고 있다. 이것은 공부하는 유생들이 항상 김인후 선생을 모신 사당을 바라보며 항상 자세를 가다듬고 마음을 정갈하게 하라는 의미의 배치이다. 그리고 사당으로 가기 전에는 필암서원만의 독특한 건물인 경장각이 위치해있다. 조선 12대 왕인 인종이 스승인 김인후 선생에게 존경과 신뢰를 상징하는 그림인 묵죽도를 내려주었는데 그 원판이 보관되어 있다. 또한 경장각의 현판은 정조 임금이 직접 써 내려주었는데 임금이 쓴 글씨는 존엄하고 신성하게 여겼기 때문에 얇은 천으로 가려져 있다. 사당의 동쪽으로는 서원의 노비들이 기거하던 한장사 건물이 있다.      


 도동서원은 입구로 들어가기 전 세워져 있는 김굉필 은행나무가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한다. 도동서원의 누각인 수월루의 삼문 중 왼편과 가운데는 항상 닫혀있고 오른쪽 문만 개방되어 있다. 즉 동입서출의 원리가 아닌 동입동출을 따르고 있는데, 이는 서원의 이름처럼 성리학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는 의미를 구현하기 위해서이다. 도동서원의 건축물들은 단청이 없이 검소하고 절제되었던 성리학자들의 가치관을 반영하였고, 강당인 중정당의 석축 기단은 전국 각지에서 공수된 돌이기에 모양과 색깔이 제각각이다. 그리고 중정당 정면 기둥 위쪽에는 흰색 종이가 감싸져 있는데 이는 ‘상지’라고 한다. 이 종이를 붙인 까닭은 김굉필 선생이 동방 5현 중 가장 웃어른이기 때문이다. 이 상지는 멀리서도 반사되어 보이기 때문에 도동서원에는 하마비가 없고 이 상지가 그 역할을 하고 있다.      


 병산서원의 입구에는 서원 건축의 백미로 많은 답사객들에게 칭송받고 있는 만대루가 병산과 낙동강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만대루는 서원 유생들의 유식과 휴식의 공간이자 동시에 지역 여론 형성의 주 무대였다. 만대루 천장의 대들보 한쪽에는 북이 달려 있는데 이는 서원에서 금기시하는 여자, 사당패, 술이 반입되었을 때 두드리는 북이다. 병산서원의 출입문인 진도문은 외삼문 형태가 아닌 하나의 문으로 이루어져 있고 양옆 공간은 막혀있다. 병산서원의 사당인 존덕사로 들어가는 내삼문에는 태극(太極) 문양이 그려져 있고, 그 기둥에는 주역의 팔괘(八卦)가 그려져 있다. 다른 서원과는 달리 병산서원 존덕사 앞에는 불을 밝히는 정료대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아마도 야간에 제사를 지내야 할 때 조명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무성서원은 신라의 학자인 최지원 선생을 주향으로 배향하고 있으며 서원이 한적한 곳이 아닌 마을 안에 자리 잡고 있다. 향촌 사회 내에 서원이 존재함으로써 지방의 학문 수양과 여론 형성에 기여했음을 알 수 있다. 무성서원의 강학당은 앞뒤로 시원하게 트여있어서 앞으로는 누각인 현가루를, 뒤로는 사당인 태산사를 한 번에 볼 수 있다. 원래 서원의 강학당과 기숙사는 한 공간 안에 있는 것이 보통인데 무성서원은 담장 밖에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무성서원에는 의병운동의 시작점임을 알 수 있는 병오창의기적비가 있다. 또한 항일의병운동가를 잊지 않고 기리는 비석이 남아있어 이 지역이 예부터 학문하는 고장일 뿐 아니라 충절의 고장임을 알 수 있다.     


2. 서원(書院) 이야기 학생 선발     


 향교 학생을 교생이라 하고 서원 학생은 흔히 원생이라 불렀다. 소수서원 원규에는 원생의 입학 자격을 대체로 성균관 입학 자격과 똑같이 규정하였다. 그러나 퇴계의 이산서원 원규에는 입학 자격에 초시 합격자라는 자격을 명시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이황이 서원을 과거 준비를 위한 장소가 아니라 자신을 다스리고 학문을 닦는 장소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서원의 입학 자격은 시대별로, 지역별로 차이가 있었으나 지역의 명문 서원들은 대체로 향교보다 격이 높아 생원, 진사와 초시 합격자를 일차적 대상으로 삼았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지역 사림의 동의를 거쳐야 했다. 어떤 서원은 입학을 원하는 선비를 모두 받아들이기도 하였고, 어떤 서원은 관권의 개입을 배제하기 위하여 수령 아들은 서원에 입학할 수 없다는 규정을 두기도 하였다. 입학한 원생은 반드시 입원록에 자필로 서명하고 입학 연도와 월을 기재하게 하였다.     


 서원의 정원은 처음에는 국가 차원에서 별달리 규제하지 않았으며, 소수서원에서는 대개 10명 정도로 규정하고 있다. 군역 문제 해결을 위한 향교 교생에 대한 고강(考講)은 서원에도 영향을 미쳤으나, 일읍일교(一邑一校)이며 관학인 향교와 달리 급격히 증가한 서원 원생을 모두 고강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렇듯 서원에 대한 고강이 사실상 면제되자 양반의 관심을 끌어 양반, 비양반 교생들이 서원에 몰리거나 서원 없는 고을에 서원을 세우는 일이 속출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논의 끝에 숙종 36년(1710) 마침내 서원의 원생 수를 규정하였는데 사액 서원 20명, 문묘 종사자의 서원 30명, 사액 서원이 아닌 곳 15명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규칙도 점차 와해되어 서원에서도 향교를 모방하여 군역을 피하는 대가로 곡식이나 포를 징수하거나 양반 신분이 아닌데도 정원 외 원생으로 등록하는 일이 점차 빈번해졌다.      


 퇴계는 명종 14년(1559) 『이산서원기(伊山書院記)』와 더불어 『이산원규(伊山院規)』를 작성하였다. 이 『이산원규』는 이후 영남지역 서원 원규의 전범이 되었는데, 유생들의 교과 과정, 공부 방법, 서적 관리, 유생 형벌, 유생의 선발 등을 규정하고 있다. 도산서원에서도 『이산원규』를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 함양 남계서원 원규는 『이산원규』의 끝에 2개 조항을 더하였고, 경주 옥산서원(玉山書院)은 소수서원과 이산원규를 참조하여 제정하였다. 또 달성 도동서원도 『이산원규』를 바탕으로 원규를 세분화한 사례에 해당된다.      

다음은 퇴계가 작성한 『이산원규』의 일부이다.     


1. 제생들 가운데 뜻을 굳게 세우고 나아가는 길을 정직하게 하며, 사업은 원대한 것으로 스스로 기약하고 행실은 도의를 귀추(歸趨)로 삼는 자는 잘 배우는 것이고, 마음가짐이 비천하고 취사(取捨)가 현혹되며, 지식은 저속하고 비루함을 벗어나지 못하고 뜻과 희망이 오로지 이욕에만 있는 자는 잘못 배우는 것이다. 만일 성품과 행실이 괴이하여 예법을 비웃고 성현을 업신여기며 정도(正道)를 위반하고 추한 말로 친한 이를 욕하며, 여러 사람을 괴롭히고 법도를 따르지 않는 자는 원중(院中)에서 함께 의논하여 쫓아내도록 한다.      

1. 제생들은 항상 각자 서재에서 조용히 있으면서 오로지 독서에 정진하고, 의심 나고 어려운 것을 강론하는 일이 아니면 부질없이 다른 방에 가서 쓸데없는 얘기로 시간을 보내어 피차간에 생각을 거칠게 하거나 학업을 폐해서는 안 된다.      

1. 까닭 없이 알리지 않고 자주 출입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무릇 의관과 행동거지와 언행에 대해 각기 간곡하게 권면하도록 힘쓰며 서로 보고 선(善)해지도록 한다.     

                                                                                         퇴계가 작성한 『이산원규』의 일부    

 

3. 서원(書院) 이야기 서원별 건립과 사액 시기     


 유네스코로 지정된 9개의 서원은 임금으로부터 사액을 받은 서원이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유지된 서원들이다. 각각의 서원별 건립 시기와 사액 시기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경북 영주 소수서원 – 중종 37년(1542) 건립, 명종 5년(1550) 사액

경남 함양 남계서원 – 명종 7년(1552) 건립, 명종 11년(1556) 사액

경북 경주 옥산서원 – 선조 5년(1572) 건립, 선조 7년(1574) 사액

경북 안동 도산서원 - 선조 7년(1574) 건립, 선조 8년(1575) 사액

전남 장성 필암서원 – 선조 23년(1590) 건립, 현종 3년(1662) 사액

대구 달성 도동서원 – 선조 38년(1605) 건립, 선조 40년(1607) 사액

경북 안동 병산서원 – 광해군 5년(1613) 건립, 철종 14년(1863) 사액

전북 정읍 무성서원 – 광해군 7년(1615) 건립, 숙종 22년(1696) 사액

충남 논산 돈암서원 – 인조 12년(1634) 건립, 현종 원년(1660) 사액     


4. 서원(書院) 이야기 흥선대원군,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     


 본래 서원은 조선 유림들이 학문에 정진하고 선현들을 배향하며 충(忠), 효(孝), 예(禮)를 가르치던 곳으로 성균관, 향교와 함께 3대 학문의 전당으로 꼽히는 교육기관이다. 오늘날로 따지면 대학 및 대학원에 속하는 교육기관이며 성년이 된 유생들에게 도덕적 가치관 교육과 선현에 대한 존경과 배향, 그리고 성리학적 소양을 갖춘 군자(君子)를 기르는 기관이다.      


 초기의 서원들은 유림들의 인재 양성, 도덕적 품성 교육, 선현의 배향 등을 목적으로 삼았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가문, 학연, 지연, 사제관계에 관련된 온갖 비리가 난무하게 되었다. 또한 선현 배향 문제도 한 사람을 중복해서 모시거나, 모실만한 인물이 아닌데도 가문의 명예를 위해 무리하게 모시거나, 심지어는 살아있는 사람을 모시는 등의 폐단이 심해졌다.     


 성현을 모신다는 이유로 농민들을 상대로 고리대금업이나 제사 비용 징수 등의 과도한 수탈을 일삼았고 이에 반대하는 이들을 서원으로 끌고 가 사사로이 처벌하였으며 심지어는 이를 말리던 지방관이 서원에 끌려가 곤장을 맞는 등의 폐단이 심해졌다. 서원이 보유한 토지는 세금이 면제되었으며 또한 서원에 소속된 노비들은 국역의 의무를 지지 않았다.      


 이러한 문제가 조정에까지 전해지면서 숙종은 사사로운 목적이나 착취 목적 등으로 서원을 세울 경우 제재를 내리고 그 서원의 유생은 과거 시험에 제한을 두게 했으며 일부는 철폐하기도 하였다. 영조 시기에는 한 사람을 중복하여 둔 서원 등을 적발하여 철폐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서원 설립이 주춤하기는 했으나 조정에서 그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단속 의지를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서원은 자꾸 늘어서 숙종의 금지령이 내려졌음에도 이후에 영조가 금지령을 더 강하게 재확인해야 했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1864년 고종의 섭정을 맡게 된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흥선대원군은 서원의 폐단에 대해 조목조목 짚어나가면서 서원 철폐의 명분을 쌓아나갔고 만동묘를 철폐한 것을 시작으로 병인양요 이후 온갖 텃세와 병폐, 비리로 얼룩진 전국의 서원들을 모두 철폐시키고 서원과 관련된 양반 및 유림은 퇴출하도록 하는 강경한 대응책을 내놓아 서원과 유림들을 압박하였다. 1865년에 이르자 우암 송시열이 세운 만동묘와 화양서원을 포함하여 47개의 서원만 남기고 모든 서원이 철폐되었다.     


 서원의 폐단은 당시 세도가인 안동 김 씨 가문조차 동의할 수준으로 심각했으며 유생들도 폐단을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흥선대원군의 주장에 전혀 반박할 수 없었는데 특히 대원군의 조치가 서원을 아예 조선에서 완전히 없애 버리겠다는 것도 아니어서 서원 철폐가 곧 성현 모욕이라는 논리도 펼치지 못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유림들은 흥선대원군이 서원 철폐 정책에 대한 대응으로 흥선대원군의 조상인 인평대군을 모시는 서원을 만들어 흥선대원군의 마음을 돌려보려 하였으나, 대원군은 인평대군의 서원도 가차 없이 철거하고 부실하고 비리가 많은 불량한 서원은 조사를 통해 완전히 철폐하도록 하고 나머지 일부 서원만을 존치하도록 하였으며 철폐된 서원의 예산은 모두 국고로 환수하도록 하였다. 1870년 9월에는 사액 서원이라고 할지라도 현재 문제가 있다면 철폐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고종은 집권 8년인 1871년에 "책을 읽고 싶다면 향교에 가서 읽어라. 향교는 왜 있느냐?"라면서 서원 철폐에 대한 입장을 확실시했다.      


 1871년 5월 9일(고종 8년 음력 3월 20일) 서원철폐령으로 47개의 서원을 제외한 대부분의 서원이 훼철되었다. 서원철폐령에도 불구하고 존치된 47개의 서원은 다음과 같다.

5) 고려 현종이 설총에게 추증한 시호.

6) 병자호란(1636) 때 조선이 청나라에 항복하는 것을 반대하고 그와 동시에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했다가 결국 청나라에 잡혀가 사살되면서 참혹한 죽음을 당했던 척화파의 강경론자 세 사람으로 홍익한, 윤집, 오달제

7) 신임옥사 4 충신

8) 박태보가 죽은 노량진에 충렬사(忠烈祠)로 창건되어 사액을 받은 뒤, 노강서원으로 승격된 해에 다시 사액을 받았다.

9) 나중에 이름이 충장사(忠莊祠)로 바뀌었다.

10) 1593년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장렬히 산화한 순국 선인들의 신위를 모시기 위해 경상도 관찰사 정사호가 건립하여 선조 40년(1607) 사액을 받은 곳이다.

11) 명나라 장수 이여송, 양원(楊元), 이여백(李如栢), 장세작(張世爵) 등을 추가 배향했다.

12) 조선 순조 때 홍경래의 난으로 죽은 충렬공 정시(忠烈公 鄭蓍)를 비롯한 7 의사를 모시기 위해 지어졌고, 1824년 사액을 받았다.


 훗날 대원군이 실각하자 유림들은 고종에게 서원 복구를 대대적으로 청했는데 서원의 폐단이 심했던 것은 유림들도 알고 있었던 터라 600개 다 복구해 달라는 요청은 하지 않았고 송시열을 모신 화양서원이나 만동묘 같은 상징적인 서원들 위주로 복구를 청했다. 하지만 고종은 만동묘만 복구해 주고 나머지 서원에 대한 복구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만동묘도 관아의 통제하에 두고 제사를 국가가 주관하게 함으로써 예전처럼 만동묘 관리들에게 권력을 주지 않았다. 유림들은 지치지 않고 복구 상소를 올렸지만, 고종은 "너희들은 서원이 없으면 성현을 존경할 줄 모르더냐?"라고 나무랐고 결국 상소는 시들해지고 유림 세력도 영향력을 잃으면서 서원 복구 움직임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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