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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은 May 20. 2024

5. 답사의 신, 서원(書院)에 가다! - 필암서원 -

당일형 답사

인종이 스승인 김인후에게 선물로 그려준 묵죽도(墨竹圖)

1. 서원(書院이야기     

 서원(書院)은 조선 시대에 성현(聖賢)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학자를 키우기 위해 전국 곳곳에 설립한 사설 교육 기관으로 오늘날의 지방사립대학교라고 볼 수 있다. 서원의 공간은 크게 성현(聖賢)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건물인 사우(祠宇)와 청소년을 교육하는 서재(書齋)로 나눌 수 있다.

      

 서원의 교육은 원장(院長), 강장(講長), 훈장(訓長) 등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원장은 서원의 대표자로 보통 퇴직 관료나 당대의 유명한 석학이 맡았으며, 이들은 서원 기강 확립과 원생들의 행실 규찰을 담당했지만 서원 운영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강장은 서원에 입학한 원생들에게 경학과 예절을 가르치는 역할이었고, 훈장은 면학과 교관의 일종인 훈육을 책임지는 역할이었다.     


 서원의 운영은 서원의 모든 일을 주관하며 재장(齋長)이라고도 불린 도유사(都有司) 또는 장의(掌議)가 맡았다. 이 밖에도 도유사 다음가는 직책인 부유사(副有司), 여러 사무를 분담해서 맡은 유사(有司), 간사 역할을 하는 직월(直月), 서기 역할을 하는 직일(直日)등이 있었다.      

    

성균관이나 향교는 번잡한 도시에 있어서 앞으로는 번거로운 학칙에 얽매이고 뒤로는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기 쉬우니, 어찌 서원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퇴계 이황     


 서원은 성균관, 향교와 함께 조선시대 대표적인 고등 교육 기관으로, 국립으로 전국 각 도시에 분배된 향교와 대비되는 사립학교로서 지역 문화를 대표하는 장소였다. 그래서 서원은 교육 기능과 교화 기능을 그 양축으로 삼고 있었다. 조선 중기 사대 사화를 비롯한 정치적 혼란으로 말미암아 학자들은 지방에 은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하게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선배 유학자들을 기리고 제사하는 사당의 기능까지 통합한 서원을 창설하기 시작한 것이다.     


 먼저 교육 기능에 대해서 살펴보면, 서원에서 교육의 목표는 인품이 훌륭한 성현을 본받고 그러한 관리를 양성하는 데 있었다. 이를 위해 학생들은 다른 교육 기관과 마찬가지로 소학에서부터 시작하여 사서오경을 중심으로 공부에 전념했다. 그리고 사서와 오경을 모두 익힌 다음에는 가례, 근사록과 같은 성리학에 관한 책들을 익히도록 했다.     


 서원의 또 한 가지 기능인 교화 기능은 주로 선현에 대한 제사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제사의 대상에 있어서는 성균관이나 향교와는 차이가 있었다. 성균관과 향교의 문묘(文廟)에 배향된 인물은 공자를 비롯해 안회, 증자, 자사, 사성(四聖)과 공자 문하의 십철, 그리고 송나라 6현과 우리나라 18현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은 신라, 고려,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나라의 최고 정신적 지주에 오른 한국의 유학자 18명을 말하며 동국 18현(東國 十八賢)이라고도 한다. 그 18명의 배향 인물은 다음과 같다.  

    

홍유후(弘儒侯) 설총, 문성공(文成公) 안유, 문경공(文敬公) 김굉필, 문정공(文正公) 조광조

문순공(文純公) 이황, 문성공(文成公) 이이, 문원공(文元公) 김장생, 문경공(文敬公) 김집

문정공(文正公) 송준길, 문창후(文昌侯) 최치원, 문충공(文忠公) 정몽주, 문헌공(文憲公) 정여창

문원공(文元公) 이언적, 문정공(文正公) 김인후, 문간공(文簡公) 성혼, 문열공(文烈公) 조헌

문정공(文正公) 송시열, 문순공(文純公) 박세채   

  

 그러나 서원은 사학(私學)이라는 특성상 대부분 지역의 문중에 의해 건립되었던 까닭에 자신의 문중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인물 가운데 뛰어난 인물을 배향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국립인 성균관과 향교에 비해 배향 인물의 선택 폭이 훨씬 넓었다.     


 성균관이나 향교와 마찬가지로 서원에서도 봄과 가을에 걸쳐 일 년에 두 차례의 제사를 지냈다. 제사일은 성균관과 향교에서 봉행하는 석전(釋奠)에 비하여 그 격이 낮았던 관계로 그 날짜를 석전보다 뒤로 하였다. 즉, 석전이 상정일(上丁日)에 봉행되는 데 비하여 서원의 제사는 중정일(中丁日) 또는 하정일(下丁日)로 잡아 거행함으로써 그 격을 구분하였다.     


 이외에도 서원에서는 다양한 기능을 담당했는데 지방의 인재들이 모이는 집회 장소였으며, 학생들의 학문을 위해 다양한 도서를 보관하는 도서관의 기능과 책의 출판 기능도 담당했다. 그래서 많은 서원에는 장판각 또는 장판고라는 서고가 있다. 이외에도 서원은 지방의 풍속을 순화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는 곳이었고 또한 그 지역의 여론을 선도하였음은 물론, 지역별 향약을 기준으로 효자나 열녀 등을 표창하고 윤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사람을 규탄하는 등의 직접적인 교화 활동도 하였다.     


 서원의 기원은 당나라 시기였으나 실질적인 형태는 송나라 때에 와서 완성되었으며, 특히 서원의 위상은 주자에 의해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서원이 처음 설립된 것은 1543년이었는데, 당시 풍기 군수였던 주세붕이 안향을 추모하기 위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을 설립하였다. 안향은 중국의 ‘주자학’이라는 학문을 우리나라에 도입한 최초의 학자였다. 주세붕이 세운 최초의 서원은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라 칭했지만, 후에 풍기 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이 서원에 대한 국가적인 지원을 건의하였고 이에 명종이 서적 등의 물자와 함께 친필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 사액(賜額)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퇴계 이황을 비롯한 성리학자들에 의해 서원의 보급 운동이 일어나면서 전국에 많은 서원이 건립되었다. 그리하여 명종 대에 건립된 수가 17개소에 불과했던 서원이 선조 대에는 100개가 넘었으며, 18세기 중반에는 전국에 700여 개소에 이르렀다.     


 이처럼 서원이 늘어나면서 부작용이 커졌다. 서원에 딸린 토지에는 세금이 부과되지 않았고, 서원의 노비는 국역(國役)을 지지 않았다. 따라서 서원이 증가함에 따라 국가 재정에 문제가 생겼다. 엄청난 숫자의 서원들 때문에 민생에 끼치는 폐단이 엄청났고, 심지어는 살아있는 사람을 모시거나 성현도 아니지만 가문의 조상이라는 이유로 모시느라 집안마다 서원을 만들고, 한 사람을 모시는 서원이 5~6곳에 이르는 등 그 부작용이 말이 아니었다.     


 19세기부터 세도 가문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서원의 중앙에서의 정치적 영향력은 사실상 없어졌지만, 무엇보다도 지방경제에 미치는 폐단이 말이 아니었다. 선현의 제사를 지낸다는 명목으로 지방 농민들을 사사로이 수탈하였으며 이에 반발하는 지역민들을 향약이나 반상의 도리를 어겼다 하여 처벌하거나 지역 사회에서 매장시키는 전횡을 저지르고 나라에서 막대한 식량과 노비를 제공받으면서 세금을 내지 않는 면세 특권이 있어 국가 재정을 악화시켰다.     


 특히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병을 보낸 만력제(萬曆帝)를 제사 지내기 위한 ‘만동묘’와 송시열을 모신 ‘화양동서원’은 워낙 입김이 세서 지역의 백성들에게 서원의 제사 비용을 부담시켰으며 할당된 비용을 내지 못한 백성들을 함부로 붙잡아서 폭행하거나 고문하는 등 그 폐해가 말이 아니었다. 당시 이 일대에 "원님 위에 감사, 감사 위에 참판, 참판 위에 판서, 판서 위에 삼정승, 삼정승 위에 승지, 승지 위에 임금, 임금 위에 만동묘지기"라는 노래가 퍼졌을 정도였다.     


 서원의 폐단에 맨 처음 손을 댄 것은 숙종이었다. 숙종은 한 사람을 중복되게 모시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고, 그의 아들 영조 대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인 서원 정리가 이뤄진다. 영조 3년(1727) 12월에는 한 사람당 하나의 서원만 허가하면서 비교적 나중에 세워졌던 서원들을 정리했으며 영조 23년(1747)에도 허가 없이 사적으로 세운 서원들을 정리했다. 고종 대에서는 흥선대원군의 등장으로 서원 정리의 속도가 빨라지는데 당장 고종 1년(1864)에는 사사로이 세워진 서원과 중첩되는 서원들을 정리하였다.     

 사실 유학자들도 서원이 대거 정리될 것이라는 분위기를 읽긴 읽었는지 이미 고종 1년에 대원군의 직계 조상인 인평대군을 모시는 서원을 세웠으나, 이 역시 철폐된다. 그 후 고종 5년에 서원의 원장을 고을 수령이 맡게 하고, 허용된 정원 이외의 병역 기피자들을 모조리 군역에 넣는가 하면 면세 혜택을 없애 서원의 특혜를 모두 없애고, 관의 통제하에 둔 다음에 곧이어 사액서원 47개소만 남기고 전면 철폐했다. 숙종, 영조 대에 줄곧 지적된 중첩된 서원은 사액서원이라 하더라도 예외 없이 모두 철폐되었다. 이 당시 난립해 있던 서원은 1,000여 곳이 넘었으며 안동 한 곳에만 40여 개의 서원이 있었다.     


"진실로 백성에게 해가 되는 것이 있으면 비록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나는 용서하지 않겠다. "     


 흥선대원군, 유림 세력들이 극도로 반대하던 서원 철폐 정책을 강행하고 절대로 굽히지 않겠다는 발언.


2. 유네스코 세계유산한국의 서원필암서원(筆巖書院)     

 필암서원은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에 있는 서원이다. 흥선대원군은 전라도 지역을 평하며 ‘학문은 장성만 한 곳이 없다(文不如長城)’라고 했다. 호남 학맥의 본산인 장성 필암서원은 1590년 호남의 유학자들이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선생의 업적과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또한 김인후 선생의 사위 고암(古巖) 양자징(梁子澂)을 배향한 사원이다.      


 지금까지 답사해 온 서원들이 보통 산속이나 중심지와는 멀리 떨어져 건립된 것과는 달리 필암서원은 평야 지대인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에 자리 잡고 있다. 김인후 사후 30년 뒤 선조 23년(1590) 현재의 장성읍 기산리에 건립하였다. 1587년 관찰사로 부임한 윤두수가 전라도 각 지역을 순시하다가 김인후가 태어나고 말년을 보낸 이곳에 서원이 없는 것을 한탄해 송강 정철과 호남 사림에게 뜻을 전해 세웠다는 기록이 『필암서원 중건상량문』에 전해지고 있다.      


이후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졌다가 인조 2년(1624)에 사림과 후손들의 주선으로 황룡면 죽산리에 복원되었다가 홍수로 인해 현종 13년(1672)에 지금의 필암리로 이동하였다.      


 현종 3년(1662) 조정으로부터 필암(筆巖)이라는 명칭으로 사액을 받음으로써 전라도 지역 유학 진흥의 요람으로서 자리를 잡았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또한 다행스럽게도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모두 피해 옛 모습이 많이 남겨져 있다.      


 멀지 않은 곳에 김인후 선생의 생가와 그가 머물던 백화정이 있고 인종과의 깊은 인연을 상징하는 배나무가 있다. 김인후 선생이 1543년 세자시강원으로 세자였던 인종을 가르쳤는데, 배나무는 김인후가 세자에게 받은 선물이었다. 세자가 김인후에게 배 3개를 하사하였는데 하나는 먹고 두 개를 잘 간직하였다가 고향에 내려와 부모님께 드렸다. 그리고 그 씨를 마당 옆에 심었는데, 몇 년이 지나 싹이 나고 크게 자라 지금의 배나무가 된 것이라 한다.     


3. 하서(河西김인후(金麟厚선생     

 호남 유일의 문묘 배향자이며 장성 대맥동(현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맥동)에서 참봉을 지낸 김령과 옥천 조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호는 하서(河西),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김인후 선생은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시문에 뛰어난 자질을 보여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여섯 살 때 "모양은 둥글어 지극히 크고 또 지극히 현묘한데, 넓고 빈 것이 땅의 주변을 둘렀도다. 덮여있는 그 가운데 만물이 다 들어가는데, 기(杞) 나라 사람은 어찌하여 하늘이 무너질까 걱정했던고"라는 '영천(詠天)'이란 제목의 시를 썼다. 우주의 이치뿐만 아닌 기우(杞憂)의 고사마저 알고 있다.     


 고봉 기대승의 삼촌인 복재 기준은 9살이던 하서를 만나 장차 세자의 신하가 되겠다고 예견한다. 10살 때 전라도 관찰사 김안국이 소학을 가르치고 "이는 나의 어린 벗이다"라고 칭찬하였다.      


 중종 23년(1528)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고 중종 35년(1540)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 관리가 되었으며 이듬해 호당에 들어가 사가독서하고 홍문관 관리가 된다. 중종 38년(1543) 홍문관 박사 겸 세자시강원이 되어 세자(후일 인종)를 보필하고 가르치는 역할을 맡는다. 김인후가 인종과 맺은 첫 인연이다. 세자의 하서에 대한 신뢰와 배려는 대단했다. 그것을 보여준 사례가 묵죽과 『주자대전』의 하사였다. 어느 날, 세자가 손수 그린 대나무 그림을 하사하고, 화축(畵軸)에 시를 쓰도록 한다. 하서는 묵죽에 다음의 시를 쓴다.      


"뿌리 가지 잎새 마디 모두 다 정미(精微)롭고, 굳은 돌은 벗인 양 범위 안에 들어 있네. 성스러운 우리 임금 조화를 짝지으사, 천지랑 함께 뭉쳐 어김이 없으시네."   

  

 그리고 인종은 하서에게 배 3개를 내린다. 한 개를 맛보니 매우 달고 시원했다. 나머지 2개를 보물처럼 간직하였다가 부모님께 드리고, 씨를 집 앞에 심는다. 이 배나무가 임금이 내린 배라는 뜻의 '어사리(御賜梨)'다. 이 배나무는 20미터가 넘게 커 지금도 열매를 맺는다.     


또한 인종은 구하기 힘든 『주자대전(朱子大全』을 내려주고 함께 술을 마시며 새 정치를 꿈꾼다. 하서가 세자와 인연을 맺은 1년 뒤인 1544년, 중종이 승하하자 세자가 왕위에 오른다. 그런데 인종은 재위 8개월 만에 승하한다. 생모 장경왕후를 일주일 만에 여윈 비운의 군주 인종, 그의 나이 겨우 서른이었다.     

 

 하서는 인종을 그리워하는 사모곡 '유소사(有所事)'를 쓴다.      


"임의 나이 삼십을 바라볼 때, 내 나이 서른하고 여섯이었소. 신혼의 단꿈이 채 깨기도 전에, 시위 떠난 화살처럼 떠나간 님아. 내 마음 돌이라서 구르지 않네. 세상사 흐른 물처럼 잊혀지련만, 젊은 시절 해로할 임 여의고 나니, 눈 어둡고 이 빠지고 머리가 희었소. 슬픔 속에 사니 봄가을 몇 번이던가, 아직도 죽지 못해 살아 있다오.……"     


 명종이 즉위하자 하서는 옥과 현감을 끝으로 36살에 관직과 인연을 끊는다. 명종은 성균관 전적, 공조 정랑, 전라도사, 홍문관 교리, 성균관 직강에 임명하여 불렀지만, 하서는 끝내 사양한다. 그는 죽기 직전 "내가 죽으면 을사년 이후의 관작일랑 쓰지 말라"라고 유언까지 남긴다.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백이숙제(伯夷叔齊)가 바로 하서 김인후였다.     


 인종에 대한 그리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인종의 기일인 음력 7월 초 하루가 되면 집 앞 난산(卵山)에 올라 종일 통곡했다. 지금 난산 정상에 통곡단이 건립되어 있고, 통곡단 입구에는 이 사실을 기록한 난산비가 있다. 제자인 송강 정철이 그 모습을 시로 남겼는데, 그 편액이 필암서원 청절당에 걸려있다.     

 

"동방에는 출처(사람의 처서) 잘한 이 없더니 홀로 담재옹(하서의 다른 호)만 그러하였네. 해마다 칠월 그날이 되면 통곡소리 온 산에 가득하다네."     


 하서는 도학과 문장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끝까지 절의(節義)를 지킨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율곡은 이런 하서를 "맑은 물에 뜬 연꽃이요, 화창한 봄바람에 비 온 뒤의 달"이라고 평하였다. 하서 김인후가 문묘에 배향될 수 있었던 이유다.     


 명종 15년(1560), 하서는 낙향한 지 15년여 만에 세상을 뜬다. 그의 나이 51세였다. 그의 사후 정조는 문묘에 배향케 하고 영의정으로 추증하였다.     


4. 필암서원(筆巖書院)의 주요 공간     


확연루(樓然廓), 스승은 본받고자 하는 제자들의 마음

 넓게 조성된 서원 앞 정원을 지나면 서원의 출입구 앞에 선 하마비와 홍살문, 그리고 200년 수령의 은행나무가 찾는 이를 반겨준다. 홍살문은 지나 들어가면 서원의 문루인 확연루(樓然廓)와 마주하게 된다.     

 확연(樓然)은 “군자의 학문은 확연히 공평하여 사물이 왔을 때 그대로 받아들여 따를 뿐이다”라고 북송 시대 유학자 정호의 글씨에서 취한 것으로 “하서(河西) 선생의 마음이 맑고 깨끗하며 확연히 크게 공평무사하다.”는 의미의 확연대공(廓然大公)을 집자한 말이다. 이는 널리 모든 사물에 사심이 없이 공평한 성인의 마음을 배우는 군자의 학문하는 태도를 뜻한다.

     

 확연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을 얹은 2층 문루이며 널문을 닫아 놓으면 안팎이 차단되지만 열면 시원스레 안팎이 연결되는 구조다. 확연루의 역할은 서원을 출입하는 문인 동시에 유생들의 휴식공간이다. 아까 들어오면서 보았던 은행나무와 확연루의 공간은 필암서원의 품격을 말해주고 있다.      


 확연루의 편액은 우암 송시열의 글씨이다. 조광조-이이-김장생으로 이어진 조선 기호학파의 학통을 충실히 계승한 우암은 보수적 정통 성리학자로 북벌론의 중심인물인 만큼 글씨체에서도 우암의 성품이 나타난다.       

청절당(淸節堂)과 동·서재

 확연루를 지나 쪽문을 통과하면 필암서원의 강학공간인 청절당(淸節堂)을 만날 수 있다. 청절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을 얹은 건물로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인데 들어 여는 문이 달려 있고, 양옆 한 칸씩은 온돌방으로 되어있다. ‘청절당’ 편액은 동춘당 송준길 선생의 글씨이다. 청절당 이란 이름은 우암 송시열이 쓴 김인후 선생 신도비문 중 ‘청풍대절(淸風大節)’이라는 구절에서 인용한 것인데 ‘청풍’은 '부드럽고 맑게 부른 바람'이라는 뜻이고, ‘대절’은 '대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 지키는 절개'라는 뜻으로 하서의 인품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청절당 처마 밑의 사액 현판 필암서원(筆巖書院)은 명종의 명으로 병계 윤봉구 선생이 쓴 글씨이다. 한편, 송시열과 송준길은 대전을 대표하는 유림이자 은진 송 씨 집안의 형제지간인데 확연루 현판은 송시열이, 청절당 편액은 송준길이 썼으니 두 형제야말로 하서 김인후와 이곳 필암서원과 깊은 인연이 있다.     


 청절당의 배치를 보면 지금까지 보았던 서원이나 향교와는 다른 것을 느낄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보통의 강학공간들은 문루의 외삼문을 마주 보며 남향을 하고 있는 반면 청절당은 북향을 하고 있다. 그 이유는 하서를 배향하고 있는 건물인 우동사를 마주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강당이 확연루의 외삼문을 등지고 있다 보니 동재와 서재는 청절당과 우동사 사이에 배치되어 있다.      


 청절당 내부에는 백록동 학규, 정조대왕의 어제 사제문, 문묘종사 반교문⦁교서⦁정조대왕 전교 등의 편액이 걸려 있다. 또 고경명, 정철, 조헌, 유근, 홍천경, 권필, 김상헌, 김우급, 김창흡, 김진옥, 윤봉구, 김시찬, 어윤중 등의 당대 최고의 문인과 학자들이 지은 시판(詩板)이 걸려 있다.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는 청절당과 우동사 사이에 있는데 동재는 진덕재(進德齋)로 ‘덕을 향해 나아간다’라는 의미이고, 서재는 숭의재(崇義齋)로 ‘의를 숭상한다’라는 의미이다. 


보통의 경우라면 동재인 진덕재(進德齋)는 선배들이, 서재인 숭의재(崇義齋)는 후배들이 사용을 해야 하지만 이곳 필암서원에서는 동재에는 문과응시자들이 서재에는 무과응시자들이 사용하였다.      


 진덕재 앞에는 계생비(繫牲碑)가 서 있는데, 봄과 가을 제사 때 사용하는 제물로 바치는 산 짐승을 묶어놓고 검사하였던 곳이다.   

   

경장각(經藏閣), 스승에 대한 무한 존경과 신뢰

 청절당 안에는 인종이 세자 시절 손수 그려 스승인 하서에게 선물한 '묵죽도(墨竹圖)' 그림의 판각을 보관하고 있는 경장각(經藏閣)이 있는데, 주위 건물과는 품격이 다르다. 절제되고 겸손한 유교식 건물인 서원과 어울리지 않게 3마리의 용머리와 국화 문양이 조각된 주심포집 3칸의 팔작지붕 집이기 때문이다. 경장각 건물에 용과 국화 문양이 조각될 수 있었던 것은 인종의 유품인 어제(御製) 묵죽과 관련이 있다.        


 서른 살에 과거에 급제하여 홍문관박사가 된 김인후는 서른셋의 나이에 자신보다 다섯 살 어린 세자(世子)의 시강(侍講)을 맡는다. 후에 인종이 된 세자는 어느 날 직접 붓을 들어 묵죽도를 그려 스승에게 주었고, 스승인 김인후는 신하로서 절의를 지키겠다는 뜻이 담긴 시(詩)를 쓴다.      


  ‘뿌리 가지 마디 잎 모두가 정밀하고 은미하며(根枝節葉盡精微), 돌을 벗 삼은 굳은 정신 화폭 안에 들어있네(石友精神在範圍). 비로소 성인의 정신이 조화롭다는 것을 알았으니(始覺聖神侔造化), 세상과 한 덩어리 되어 서로 어김없으리라(一團天地不能違)’   


  제자와 스승, 세자와 신하의 지위를 떠나, 대나무와 바위처럼 영원히 변치 않고, 서로 믿고 존경한다는 마음을 주고받은 것이다. 당대 호남을 대표하는 유학자와 검소한 생활을 즐기며 부모에 대한 효심이 깊었던 임금의 관계는, 인종이 병에 걸려 숨지면서 끝난다. 김인후는 믿고 꿈을 펼칠 수 있는 대상이 없어지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여생을 성리학 연구에 전념한다.

필암서원 경장각

 경장각은 인종의 스승에 대한 무한한 존경과 신뢰를 알 수 있는 공간이다. 경장각 편액의 글씨는 정조대왕의 친필인데 임금이 내린 존엄하고 귀한 친필이기 때문에 얇은 천으로 가려놓았다.

경장각 편액의 글씨는 정조대왕의 친필인데 임금이 내린 존엄하고 귀한 친필이기 때문에 얇은 천으로 가려놓았다.

우동사(祐東祀)

 경장각을 지나 내삼문 안을 들어가면 제사 공간이 나오고, 필암서원의 주인공인 하서 김인후와 제자이면서 사위인 고암 양자징의 신위를 모신 사당 우동사(祐東祀)가 있다. 우동의 의미는 송시열이 쓴 신도비명 중 "하늘이 우리 동방을 도와 하서 김인후 선생을 태어나게 하였다." 동방의 '동(東)'자와 돕다의 '우(祐)'자를 취한 것인데, 편액은 성리학을 집대성한 송나라 주희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하서 선생을 향한 후대 학자들의 존경과 그리움을 느낄 수 있다.      


 마을을 조금 벗어나면 하서의 삶을 정리한 신도비가 있고, 그의 무덤이 난산을 바라보며 안장되어 있다. 하서의 신도비는 두 개가 있는데 비각 안에 있는 신도비는 영조 18년(1742)에 세워졌고,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10년에 걸려서 쓴 글이라고 한다.      


 그리고 1982년 또 하나의 신도비가 건립되었는데 이는 처음 세워진 신도비에는 정조대왕이 하교한 문묘 배향 및 영의정 증직, 시호 문정(文正) 등이 내용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을 입구 쪽에는 하서 김인후라는 인물이 있게 한 자연물, 筆巖(필암)이라 새겨진 붓바위가 있고 마을 앞 난산에는 인종의 기일만 되면 하서가 통곡했던 장소인 통곡단과 그 사실을 기록한 난산비가 서 있다. 


5. 필암서원(筆巖書院)의 부속공간     


전사청

우동사로 진입하는 내삼문의 왼편에는 매년 봄과 가을에 제례를 준비하는 전사청(奠祀廳)이 있다. 

     

계생비묘정비

진덕재 앞에는 제향 때 쓰기 위한 희생(犧牲)을 검사하는 계생비(繫牲碑)가 있다. 앞면의 계생비는 송재 송일중이 쓴 것이다. 이 비는 묘정비(廟庭碑)도 겸하는데 뒷면에 서원의 설립 취지와 연혁 등의 기록이 있다. 비문은 송병선이 쓰고 글씨는 윤용구가 썼다.      


한장사

장판각 옆 동편에 서원을 관리하는 노비의 우두머리의 거처인 한 장사(汗丈舍)가 장판각과 나란히 위치해 있다. 

필암서원 한장사

장판각

토담 동쪽 밖에는 서책의 목판을 보관하는 장판각(藏板閣)이 있다. 『하서전집河西全集』과 『초서천자문』, 『자무이구곡』 및 『백련초해』 등 700여 목판을 보관하고 있다.

필암서원 장판각
인종이 스승인 김인후에게 선물로 그려준 묵죽도(墨竹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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