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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은 Jun 27. 2024

9. 답사의 신, 서원(書院)에 가다! -돈암서원 -

당일형 답사

해 질 녘 돈암서원의 누각인 산앙루

1. 유네스코 세계유산한국의 서원돈암서원(遯巖書院) 

    

돈암서원은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에 있는 서원으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선생을 주향으로 모셨고 이후 효종 9년(1658)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이어 숙종 14년(1688)에 동춘당(同春堂) 송준길( 宋浚吉), 1695년에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각각 추가 배향하였다. 이 네 명의 학자는 훗날 조선 사회를 운영하였던 기호학파의 원천이다.     


 처음에는 사계 선생의 제자들이 스승을 추모하여 사우를 건립한 뒤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오다 사당 앞에 강당을 건립하면서 서원의 단초를 이루었다. 돈암서원의 원래 위치는 현재 위치보다 서북쪽으로 1.5km 떨어진 곳이었는데 고종 18년(1881) 홍수를 피해 현재 위치로 이전하였다. 현종 원년(1660) ‘돈암서원’이라는 현판을 내려주어 사액서원으로 지역의 공론과 학문을 주도했다.      


 ‘돈암서원’에서 돈암은 근처에 있는 ‘돼지바위[遯巖]’에서 유래했다는 설명이 우세한데, 돈암서원을 연구한 한 학자는 주자(朱子)가 만년에 호로 사용한 ‘둔옹(遯翁)’의 ‘둔(遯)’에서 유래한 그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둔(遯)’은 주역 64괘 중 33번째 괘 이름으로 ‘달릴 주(走)’와 ‘돼지 돈(豚)’의 합성어인데, 돼지는 잘 달아나기 때문에 ‘달아날 돈’, ‘피할 둔’, ‘숨을 돈’으로 쓰이면서 ‘은둔’, ‘물러남’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김장생도 관직에서 물러나 연산에 은둔하며 ‘둔암원림(遯巖園林)’으로 후학들을 가르치며 살았기에 ‘돈암서원’은 송시열이 스승 김장생의 은둔생활을 기려 이름 붙인 것이라 여긴 것이다.     


 돈암서원의 배치는 약한 구릉지를 이용하여 전면에 강당을 두고, 후면에 사당을 둔 전형적인 전학후묘식 배치이며, 전면에서부터 산앙루, 외삼문, 강당, 내삼문, 사우가 중심축선상에 순서대로 배치되어 있고, 그 좌우로 응도당, 동서재, 장판각, 경회당, 전사청 등의 건물이 비대칭으로 자리 잡고 있다. 강학 구역에는 강당인 양성당(養性堂)과 그 앞 좌우에 동·서재를 배치해 두었다. 원래 돈암서원의 옛터에는 응도당이 강당이었으나, 이건(移建) 과정에서 양성당이 먼저 강당 자리를 차지하였다. 중앙의 양성당(養性堂)을 중심으로 좌, 우 대칭으로 배열된 동재인 거경재(居敬齋)와 서재인 정의재(精義齋)로 이루어져 있고, 양성당의 서편으로는 판각을 보관한 장판각(藏板閣), 사계 선생의 부친인 황강 김계휘 선생께서 강학하시던 공간인 정회당(靜會堂)이 위치하고 있다. 돈암서원은 호서는 물론 기호 전체에서 존숭 받는 서원으로서 사계 선생을 제향 한 서원 중 가장 비중 있고 영향력 있는 서원으로 인정받았으며, 기호 사림 전체의 구심체가 되었다.   

  

 돈암서원의 특징으로는 두 번에 걸쳐 사액을 받았는데, 먼저 효종 10년(1659)에 받았고 현종 원년(1660) 두 번째 사액을 받았다. 


 돈암서원은 사계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 제자 송시열, 송준길이 배향되어 있는 곳으로 이들 네 분 모두 문묘에도 종사하였기 때문에 돈암서원을 선정서원(先正書院)이라고도 한다.          


2. 사계(沙溪김장생(金長生선생     


 조선의 대표적인 유학자이며 정치가이며 문묘에 배향된 동방 18현 중 한 사람이다.       


 본관은 광산 김 씨이며, 호는 호는 사계(沙溪)이다. 5대조 광산부원군 김국광(金國光)은 계유정난에 참여하여 원종공신이 되고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여 적개공신이 되었으며 좌의정에 까지 오른 세조의 총신이다. 고조부인 김극유(金克忸)는 사간원 대사간, 증조부 김종윤(金宗胤)은 진산 군수, 조부 김호(金鎬)는 지례 현감을 지냈다. 부친 김계휘(金繼輝)는 명종~선조시기 사헌부 대사헌을 지냈는데 이이, 박순(朴淳), 기대승(奇大升) 등 서인계 인사들에게 높은 추앙을 받았으며, 선조 8년(1575) 동서 분당 때 심의겸(沈義謙)과 함께 서인(西人)으로 지목되었다. 그러나 청렴하고 관후한 덕이 있어 크게 동인(東人)의 공격을 받지 않았다.      


 1578년 처음으로 관직에 나섰으며 1581년 아버지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와서 돈녕부 참봉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호조 정랑이 되었으며 1597년에 군자감 첨정이 되었다가 안성 군수가 되었다. 조정에 잠시 나갔다가 북인의 득세로 귀향하였고 이후 1613년 계축옥사 당시 이복동생 김경손이 강변칠우의 하나로 체포되어서 광해군이 강변칠우 중 하나인 박응서에게 김장생이 옥사에 연루되어 있는지 물었으나 박응서는 "신들의 음모를 이명준과 김장생이 듣지 못했을 뿐만이 아니라 역적의 패거리들이 혹시라도 그들의 음모를 두 사람이 알까 걱정하였다."라고 말해서 사계 선생은 화를 피할 수 있었다.     


 박응서의 진술로 김장생이 무혐의로 풀려나자 김장생은 관직을 버리고 연산에 은둔했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조정에 출사 했으나 병으로 다시 귀향했고 이괄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로 파천 오자 어가를 맞이하였으며 이괄의 난이 평정된 뒤 다시 조정에 출사 했다. 이후 원자의 강학을 담당했고 왕의 시강과 경연을 맡았으나 또다시 귀향하여 이이와 성혼을 제향 하는 황산 서원을 세웠다. 정묘호란 때에는 노구를 이끌고 의병을 모아 공주로 온 소현세자를 호위했다.     


 김장생은 과거시험에 연연하지 않고 학문연구에만 정진하여 이귀와 함께 이이, 성혼의 학문을 계승하는 서인의 영수 격으로 활약했다. 특히 향리에서 머무르는 동안 아들 김집부터 시작하여 송시열, 송준길 등이 모두 사계 선생의 밑에서 수학하였고 이들은 서인의 학문적인 계통을 담당하는 주요 인사들이 되었다. 사계 선생이 저술한 『가례집람』 도 1685년에 송시열 등 그의 제자들의 노력에 의해 간행될 수 있었다. 1688년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아들 김집도 그를 이어 종사됨에 따라 부자(父子)가 문묘에 종사된 유일한 사례이다.   

  

 사계 선생은 84세 때 연산에서 생을 마치고 후손에게 “영정(影幀)은 머리칼 하나가 틀려도 제 모습이 아니니 쓰지 말 것과 자손이 수십 대에 이르더라도 우애를 두터이 지낼 것”을 유훈(遺訓)으로 남겼다.     


 선생이 별세한 이듬해인 1632년 그의 아들 김집을 비롯한 김장생의 문인들은 충청도 20개 군현 유림과 함께 창건을 발의했다. 당시 현직 관료 중에는 천안 군수, 니산 현감이 포함되었으며, 전직 관료로는 윤전, 송준길, 송시열, 이유태 등이 참가하였다. 다음 글은 당시 송준길이 작성해 돌린 통문(遯巖書院創建通文)의 일부다.     

'우리가 선생과 같은 세상에 태어난 것만도 얼마나 다행인가. 또 같은 고장에 함께 살면서 명성을 듣고 기뻐하고, 덕을 보고는 심취한 지가 모두 몇 년이었던가. 그러고 보면 비록 우리나라 전역에서 모두 선생을 스승으로 존경한다 하더라도 한없는 은혜는 우리에게 더욱 깊다 하겠다. 이제 기린의 덕과 봉황의 자태를 지닌 선생께서 서거하셨으나 선생을 잊을 수 없으니, 신주를 모시고 마음을 붙일 사당이 없다면 장차 후학들의 마음을 어떻게 위로하며, 거의 끊어져 가는 사도(斯道:유학의 도)를 어떻게 보위하겠는가.'     


3. 예학의 대가사계(沙溪김장생(金長生선생     


 예학(禮學)은 성리학 내용 중 예법에 관한 학문으로 특히 상장제례(喪葬祭禮)를 중시하였다. 중국에서는 공자가 사상적 토대를 구축하였고 순자에 의해 계승되고 정리되었다. 조선 초기 권근이 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을 지어 예법을 다루었고, 중기에는 정구(鄭逑) 선생이 오선생예설분류(五先生禮說分類)를 지어 예법을 설명하였다. 이어서 사계 김장생이 사계전서(沙溪全書) 51권을 저술하며 예에 관한 깊은 연구를 하였다. 사계 선생인 아들인 김집이 아버지의 학문을 이어받아 예학을 밝혔다. 예법은 단순한 이론적 주장이 아니라 현실 생활에서의 실천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이념이 첨예하게 대립되던 시기에는 격렬한 다툼이 일어나기 쉬운데 효종 때 일어난 예송논쟁(禮訟論爭)이 이를 잘 대변해주고 있다.     


 스승인 이이와 성혼을 위해 서원을 세우고 1만 8000여 자에 달하는 이이의 행장을 짓기도 하였다. 스승 이이가 시작한 『소학집주(小學集註)』를 1601년에 완성시켜 발문을 붙였는데, 『소학(小學)』에 대한 관심은 예학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사계 선생은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였는데,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이유태(李惟泰), 강석기(姜碩期), 최명길(崔鳴吉), 이상형(李尙馨), 송시영(宋時榮), 송국택(宋國澤), 이덕수(李德洙), 이경직(李景稷), 임의백(任義伯) 등 당대의 비중 높은 명사를 즐비하게 배출하였다. 아들 김집도 문하이지만, 문인들 사이에는 김장생을 ‘노선생’, 아들을 ‘선생’으로 불렀다.     


인조실록에는 김장생의 졸기가 실려 있는데 이를 통해 김장생의 인생과 학자로서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     

 “전 형조 참판 김장생(金長生)이 죽었다. 장생은 자(字)가 희원(希元)으로 자질이 돈후하고 효도와 우애가 순수하고 지극하였다. 일찍이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따라 성리학(性理學)을 수학하여 마음을 오로지 쏟아 독실하게 좋아했다. 독서할 적마다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고 무릎을 꿇고 앉아서 매일 경전(經傳)과 염락(濂洛, 주렴계, 정호, 정이)의 여러 책들을 가지고 담겨 있는 뜻을 탐색하였는데, 마음이 흡족하지 못한 점이 있으면 밤낮으로 사색하여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으며 반드시 그 의미를 파악한 후에야 그쳤다. 또 고금의 예설(禮說)을 취하여 뜻을 찾아내고 참작하여 분명하게 해석하였으므로 변례(變禮)를 당한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질문하였다. 일찍이 신의경(申義慶)이 편집한 상제서(喪制書)를 정리하고 절충하여 상례비요(喪禮備要)라고 이름하였는데 세상에 유행하였다. 사람을 정성으로 대할 적에 화기가 애애하였으나 일의 시비를 논하고 사람의 선악을 분변할 때는 엄정한 말과 낯빛으로 굽히거나 흔들림이 없었다.”     

                                                                                                               -인조실록 중-

4. 돈암서원(遯巖書院)의 주요 공간     


산앙루(山仰樓)

 서원 초입에 홍살문과 하마비를 지나면 산앙루(山仰樓)라는 거대한 누각이 자리 잡고 있다.

‘산앙’은 『시경(詩經)』의 “높은 산은 우러러보고, 큰길은 따라가네”라는 말에서 왔는데, 덕망 높은 사람을 우러러보고 따른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산앙루는 1880년 이건 당시 건립할 계획을 했으나 실천하지 못하고, 2006년에야 건립하게 되었다. 산앙루는 돈암서원의 정무 격이나 출입문의 역할은 못 하고 야외 강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산앙루 뒤로는 서원의 출입문인 입덕문이 있고, 입덕문 옆으로는 비석들이 줄지어 서 있는데 이 비석들은 이건비로 불리며 비의 내용은 사계천이 범람하여 서원이 위태롭자 서원을 현 위치로 이전 한 배경과 과정이 적혀 있다.     


산앙루 내부에는 다음 두 현판이 걸려있다.


호연지기(浩然之氣) - 하늘과 땅 사이에 왕성하게 뻗친 기운

음풍농월(吟風弄月) - 바람을 읊고 달을 보고 시를 짓는다


                     

돈암서원 산앙루 현판, 첫 글자인 맨 오른쪽 산(山) 글자의 모양이 특이하다.

입덕문(入德門)

 입덕문은 돈암서원으로 들어가는 주 출입문으로 ‘입덕’은 ‘덕으로 들어간다는 뜻’으로, 덕을 닦는 것이 곧 학문이었기에 붙은 이름이다. 입덕문의 현판은 우암 송시열이 썼다고 한다. 입덕문은 다른 서원과는 달리 좌우의 2칸은 벽으로 막아 창고로 사용하고, 출입은 가운데 1칸을 이용한다. 평대문이 아닌 솟을대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단의 기단 위에 자리하고 있다. 입덕문을 중심으로 서원 전체를 휘감는 담이 좌우로 연결되어 있다.

돈암서원 입덕문(入德門)

응도당(凝道堂)

 ‘도(道)가 머문다’는 뜻의 ‘응도당(凝道堂)’과 ‘돈암서원(遯巖書院)’ 편액은 우암 송시열이 쓴 글씨이다. 규모가 대단히 크고 아름다우며 화려하여 정말 서원에 있던 건물이 맞나 싶을 정도인 <응도당은 사람을 압도하고 숙연해지게 만들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건축물이며 내부는 모두 마루를 깔았다. 맞배지붕의 측면에는 비바람을 막기 위해 풍판을 달았으며 풍판 아래 눈썹지붕을 두었다. 처마의 암막새에 '숭정육년 계유이월이서원'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어 1633년(인조11)에 세워진 것을 알 수 있다. 보통 서원들의 배치와는 다르게 응도당은 유생들의 숙소 뒤편 장경각 앞에 조성되어 있는데, 고종 때 이곳으로 옮기면서 <응도당>을 뺀 채 옮겼다가 이후 1971년에 이곳으로 옮겨 와서 그렇게 배치되었다. 

돈암서원의 응도당, 맞배지붕의 측면에는 비바람을 막기 위해 풍판을 달았으며 풍판 아래 눈썹지붕을 두었다.

정의재(精義齋)

 정의재는 돈암서원의 서재로 동재인 거경재와 같이 건립되었으며, 응도당 우측 협실의 이름이었다. ‘정의(精義)’는 『주역』에 “의를 정밀하게 해서 신묘함에 들어감은 쓰임을 지극히 함이요”에서 나온 말이며, 현재 상황이 어렵다고 해도 미래를 위해 하늘의 이치를 잘 이해하고 긍정적인 생각으로 정진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거경재(居敬齋) - ()에 머물다

 거경재는 돈암서원의 동재로서 1998년에 건립했는데, 처음 응도당을 세울 당시에는 좌측 협실의 이름이었다. ‘거경(居敬)’은 성리학의 개념 중 하나인 거경궁리(居敬窮理)에서 따온 것으로 보이는데, 마음을 삼가서 바르게 가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원정비

 양성당 앞에 특이하게 돈암서원 원정비(院庭碑)인 연산현돈암서원비기(蓮山縣遯巖書院碑記)가 세워져 있다. 돈암서원의 건립 내력과 김장생, 김집의 업적, 서원의 건립 배경 및 구조를 기록한 비석으로 현종 10년(1669년)에 건립되었다. 송시열이 비문을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썼다. 앞면에 새겨져 있는 전서체 제목 글씨는 김장생의 증손자인 김만기(金萬基)가 쓴 것이다. 이처럼 서원의 중심 공간에 큰 비석을 배치한 것은 돈암서원의 특징이다.

양성당(養性堂)

 양성당은 사계 선생이 1601년 영의정 이항복의 천거로 다시 관직에 나갔다가 이듬해 정인홍을 중심으로 한 북인이 집권하자 낙향한 후 지은 서당이다. '양성당'이라는 편액을 걸고 이곳에서 30여 년 동안 학문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 옛 돈암서원은 이 양성당과 사계 선생의 아버지 김계휘가 강학하던 정회당(靜會堂)을 기반으로 건립되었다. 양성당은 돈암서원을 건립하면서 서원의 외부 건물이 되었고, 1880년 홍수로 잠시 피신한 후 옮겨왔을 때 강당이 되어 응도당 현판을 달았다. 그리고 응도당을 현재 위치로 옮기면서 양성당에 본래의 양성당 현판이 걸렸다.     


 본래 ‘양성’은 『맹자』 「진심 편」에 “마음을 보존하여 본성을 기르는 것은 하늘을 섬기는 것이다(存其心 養其性 所以事天也)”에서 나온 말이다. 존심양성(存心養性)이란 사람의 본심을 인으로 보존하고 사람의 본성을 길러 대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자아실현의 수양법을 의미한다. 양성당은 천명을 받들어 어기지 않고 본심을 지키며 본성을 기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겠다는 김장생의 학문하는 마음이 깃든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양성당과 정회당 사이에 있는 장판각에는 김장생의 예학 관련 저술인 '상례비요(喪禮備要)',  '가례집람(家禮輯覽)' 등의 서적들이 목판본과 함께 소장돼 있다.

돈암서원의 양성재(중앙)와 좌우의 거경재와 경의재, 강학당인 양성재의 앞마당에 원정비가 위치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정회당(靜會堂)

 응도당 옆에 ‘고요한 마음을 지니고 행동하는 방법’을 뜻하는 정회당(靜會堂)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는 사헌부 대사헌을 지낸 김장생의 아버지 황강 김계휘가 건립한 것으로 당시의 명망 있는 유림들이 모이는 곳이었고 김장생도 이곳에서 공부하였다.


 ‘정회(靜會)’는 고요히 모인다는 의미이며, 정회당의 현판에는 보통 글씨나 그림 따위에 작가가 자신의 이름이나 호를 쓰고 도장을 찍는 낙관 대신 의성김예산팔세경서(義城金禮山八歲敬書)라고 새겨져 있는데, 이는 의성의 ‘김예산’이라는 인물이 여덟 살 나이에 썼다는 뜻이다.     


내삼문 담장

 이 사당의 특이한 점은 보통 궁궐에서나 볼 법한 아름다운 꽃담이 조성되어 있는데, 사당으로 들어가는 담장에 12자의 글귀를 아름답게 표현해 놓았다. 12자의 글자는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사계 선생이 제시한 돈암서원의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땅이 온갖 것을 등에 지고, 바다가 모든 물을 받아들이듯 포용하라.

학문을 넓고 깊이 익혀서 예(禮)를 실천하라.

아침 햇살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운 품성을 길러라.     


지부해함(地負海含) : 대지가 만물을 짊어지고 바다는 만천을 포용한다. 

박문약례(博文約禮) 지식은 넓히고 행동은 예의에 맞게 하라.

서일화풍(瑞日和風) 상서로운 햇살과 온화한 바람     


숭례사(崇禮祠)

 돈암서원의 사당엔 초창기에 별도의 이름이 없었다가 20세기에 유경사(惟敬祠)라고 불리다가 숭례사로 이름을 고쳤다. 김장생, 김집, 송시열, 송준길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예학을 중시하던 대학자들을 모시고 따른다는 의미에서 사당의 이름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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