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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 담담하게 Nov 26. 2024

여행과 문학, 기타 등등 -3. 세월이 가면

영원한 가을의 시, 박인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늦가을이 오면 꼭 찾아 읽게 되는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 이 아름다운 시에 멜로디를 붙인 것이 우리 가요의 명곡으로 기억되는 세월이 가면이다.     

          

강계순이 쓴 박인환 평전 '아! 박인환’에 따르면, 시인 박인환은 1956년 봄 명동의 한 대폿집에서 가수 나애심, 작곡가 이진섭, 언론인 송지영 등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다 갑자기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것을 넘겨다보던 이진섭이 즉석에서 곡을 붙였고, 나애심은 흥얼흥얼 콧노래로 가락을 따라 했다. 나중에 합석한 테너 임만섭이 우렁찬 목소리로 이 곡을 노래하자, 지나던 행인들이 걸음을 멈추고 박수를 보냈다고 한다. 이날 이후 ‘세월이 가면’은 순식간에 명동에 퍼졌다. 마치 거짓말처럼.      

         

대단한 재주들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 시절에 대해서 지금은 돌아가신 소설가 강홍규선생이 생전에 경향신문에 쓴 관철동시대(1986-87)라는 칼럼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이듬해 1956년 이른 봄 어느 날 경상도집에 극작가이며 언론인 이진섭과 테너 임만섭이 앉아 있었다.     

스페인 사람을 연상케 하는 짙은 검은 머리 눈썹의 임만섭이 목청껏 음울한 가락을 읊었다. 노래의 가사는 물론 박인환의 시이지만 작곡은 이진섭의 것이었다. 이진섭이 즉흥으로 붙인 곡이었는데 가락이 박인환이 좋아하는 샹송풍이어서 그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노래를 경청하고 있었다.               

........................... 중략............. 경상도집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한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그 후 명동문화인들의 술자리에서 빠질 수 없는 술안주가 되어 갔다. 명동의 은성에서는 갓 숙녀가 된 소녀들이 혀 꼬부라진 소리로 세월이 가면을 부르며 눈물을 글썽였다.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은 이른바 명동주제가였다.." 

              

그러니까 처음 이 노래가 작곡되어 맨 먼저 부른 이는 나애심이었고.. 뒤이어 나타난 임만섭이 좀 더 가다듬어 이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나애심은 1930년생으로 56년에는 이제 마약 스물여섯의 나이였다. 그녀는 가수 김혜림의 어머니로 과거를 묻지 마세요, 미사의 종 같은 노래를 불렀다.)


1963년, 영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에 출연 당시 나애심, 맨 오른쪽

박인환 시인

그렇게 한국 전쟁의 직후의 폐허에서 세월이 가면이라는 시를 지었던 박인환은 그 며칠 후인 1956년 3월 20일 밤 9시에 인사불성으로 집에 들어와서 아내에게 드링크제를 달라고 하다가 갑자기 숨을 거두고 말았다.               


사인은 심장마비. 너무도 허망한 죽음이었다. 세월이 가면이라는 시를 짓던 그 전날. 박인환은 십 년이 넘도록 방치되어 있던 그의 첫사랑이 잠들어 있는 망우리 묘지에 다녀왔었다. 자기의 죽음을 예감한 듯이... 젊은 날의  아름다웠던 사랑을.. 쓸쓸하게 정리한 것이 바로 이 세월이 가면이었다.


1955년의 사진 오른쪽 끝이 박인환 그리고 그 옆이 바로 이진섭이었다.


2013년 7월 14일 자 중앙일보에는 이 노래를 작곡했던 이진섭과 박인환 그리고 조병화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다.


“명동은, 실로 / 정치와 돈이 침투할 수 없었던 / 인간의 영토가 아니었던가 // (중략) // 네 돈 내 돈 따짐 없이 / 밤깊이 서로 마시며 / 가난하면서도 왕자들처럼 떠들어대던 / 아, 그 황홀한 포기의 연대.”


 시인 조병화가 1983년 친구 이진섭을 애도하며 쓴 조시(弔詩)의 일부다. 제목도 친구의 이름 석 자로 갈음했다. 언론인이자 음악·연극 등 다방면에 재능을 보인 이진섭은 그해 3월 62세로 세상을 떴다. 이들은 6·25 전후 서울 명동을 아지트로 삼았던 문화예술인 그룹의 핵심이었다. 조병화는 자신과 이진섭이 “삼국지의 영웅들처럼 해방된 서울 명동을 웅거 했다”며 “벗들은 하나하나 사라져 간다”라고 아쉬워했다. 그도 2003년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엔 중국·일본 관광객들이 점령하다시피 한 명동이지만 해방 공간과 6·25 세대에게 명동은 해방구와도 같았다. 동방살롱·휘가로·돌체 같은 다방에서부터 은성·경상도집 같은 대폿집까지 예인들의 사랑방이 가득했다. 조병화·이진섭은 물론 시인 박인환·김수영·조지훈, 작가 전혜린 등이 진을 치고 맥주와 막걸리를 거나하게 걸쳤다. 주머니 사정이 괜찮은 날엔 조니워커 위스키로 호기를 부렸다.


 문화예술인들의 술자리에 시와 노래가 빠질 순 없는 노릇. 56년 3월 초의 밤도 그랬다. 이진섭과 박인환이 막걸리를 마시며 함께 자리한 가수 나애심에게 노래를 한 곡 청했다. 나애심이 “마땅한 노래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자 박인환이 즉석에서 쓱쓱 시를 써내려 갔고 여기에 이진섭이 즉흥으로 곡을 붙였다. ‘명동 샹송’으로 불린 ‘세월이 가면’은 이렇게 탄생했다. 명동의 터줏대감이자 ‘명동 백작’으로 불린 이봉구와 성악가 임만섭이 합류했다. 나애심에 이어 임만섭도 노래를 불렀다. 대폿집은 곧 공연장으로 바뀌었다. 약 일주일 후인 3월 20일 박인환이 심장마비로 사망했으니 ‘세월이 가면’은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남는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 바람이 불고 / 비가 올 때도 / 나는 저 유리창 밖 /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네 // 사랑은 가고 / 옛날은 남는 것.”


언론인·소설가인 이봉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첫 발표회나 다름없는 모임이 동방살롱 앞 빈대떡집에서 열리게 되었다. 박인환은 벌써부터 흥분이 되어 대폿잔을 서너 잔 들이켜고, 이진섭도 술잔을 든 채 악보를 펼쳐놓고 손가락을 튕기는가 하면, 그 몸집과 우렁찬 성량을 자랑하는 임만섭이 목청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거리의 사람들이 문 앞으로 모여들거나 말거나 곁에 앉은 손님들이 보든 말든 이들 세 사람 입에선 샹송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그 노래 눈물 난다. 인환이 어쩔라고 그런 노래를 지었노.’ 야무진 사투리로 빈대떡집 젊은 마담이 박인환의 어깨를 치기도 했다.”(이봉구, 명동, 그리운 사람들?) 극작가 한운사는 이날 밤을 두고 “젊음과 낭만과 꿈과 산다는 것의 슬픔을 그(이진섭)가 타고난 재간으로 융합시킨 이 순간은 명동이 기억해 둘 영원한 시간”이라고 묘사했다.


 그들이 풍미한 명동 시대는 저물었지만 ‘명동 샹송’은 시대의 유산으로 남았다. 후배 가수 여럿이 리메이크를 했고 여전히 방송에서 종종 흘러나온다. 이진섭의 유족들에겐 매달 꼬박꼬박 저작권료도 지급된다. 적을 때는 4만 8000원, 많을 때는 15만 원을 넘기기도 한다. 지난달 말엔 17만 8900원가량이 은행 통장에 찍혔다. 노래방·방송국 등이 한국음악저작권협회를 통해 지급하는 금액이다. 저작권협회에 따르면 노래방에서 한 번 불릴 때마다 490원씩 지급된다. 큰 금액은 아닐지라도 가족에겐 남편이며 아버지의 존재를 증명해 주는 끈과 같다. 대기업에 근무하는 아들 이기광(52)씨는 “통장을 볼 때마다 마치 아버지가 여전히 살아계신 것 같은 느낌”이라고 전했다.


 부인 박기원(84) 여사는 “우연히 라디오에서 ‘세월이 가면’ 노래가 나올 때면 보고 싶은 생각이 더 간절해진다”라고 했다. 남편이 ‘세월이 가면’을 작곡한 날의 기억도 생생하다. “명동에서 그 노래를 작곡한 날 남편은 집에 들어와 내가 시집올 때 가져왔던 장난감 피아노를 꺼내왔어요. 음정을 잡기도 하고 멜로디를 다듬기도 하면서 오선지에 채보를 하더군요. 노래를 흥얼거리는 그의 모습에 칭얼거리는 기진이(맏딸)를 보며 왠지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세월이 가면’은 박 여사에게 남편을 그리는 사부곡(思夫曲)과 같다.


 이진섭은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후 서울신문·코리아헤럴드 등에서 기자생활을 했고 KBS 아나운서로도 일했다. 틈틈이 희곡이며 소설을 썼다. 그런 그가 어떻게 작곡을 했을까. 박 여사는 “남편은 원래 음악을 공부하고 싶어 했다. 아버지가 반대해 꿈을 접었으나 음악에 대한 관심은 평생 이어갔다”라고 했다. 4남매 중 두 딸 모두 음악을 전공한 것도 그의 음악적 재능을 물려받은 결과였다. 서울신문 부국장과 극단 산울림 대표를 지낸 김진찬은 저서 그 사람 그 얘기 에서 이진섭을 ‘팔방미인의 재사(才士)’라고 추억했다. 금슬 좋았던 부인 박 여사의 필력 역시 대단했다. 서울신문·경향신문 기자 출신으로 소설을 썼던 박 여사는 83년 남편을 떠나보낸 석 달 후 추모 글을 모아 하늘이 우리를 갈라놓을지라도를 내놓았다.


 50년대 명동의 역사를 추억하는 이들은 이외에도 많다. 역시 명동을 주 무대로 활약했던 작곡가 나운영(1922~93)의 아들 나건(57)도 그중 하나다. 나운영기념사업회를 이끌고 있는 그는 다음과 같이 전했다. “아버지는 거의 매일 명동으로 출근하다시피 하셨어요. ‘돌체’ ‘하모니’ 같은 클래식 다방에서 작곡도 하고 제자들에게 레슨도 하셨죠. 친구분들 만나는 약속장소도 죄다 명동으로 잡았으니 아버지가 외출하시면 으레 ‘아, 명동 가시는구나’라고 생각했죠.” 작곡가 나운영에게 명동은 일터이자 쉼터였던 셈이다.


 50~60년대 명동의 낭만을 주제로 지난해 ‘명동 이야기’라는 전시를 열었던 서울역사박물관의 정수인 학예사는 “6·25의 상처가 여전했던 당시 명동은 문화예술인이 모여 창작욕을 불태우던 주옥같은 공간”이라며 “‘세월이 가면’의 탄생 스토리는 당시 명동의 의미를 압축한 대표적 일화”라고 말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fqKmOllfNw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박인희의 세월이 가면


이 노래에 대해서 대학 시절 궤변론자였던 선배가 내게 말했다.               

"왜 그 눈동자와 입술이 가슴에 남아 있는 줄 아니?"   

  

나는 딱히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키스를 하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해? 처음에는 눈을 보게 되지... 그리고.. 나서... 눈을 감게 되는 거야... 눈뜨고 키스하는 사람은 없잖아.. 특히 여자들은... 그러니까... 키스하려 다가섰을 때... 눈을 보게 되니까.. 그 눈동자가 기억되는 거고. 키스를 하면... 그녀의 입술에 닿은 느낌이 강렬하게 남게 되잖아.... 그래서... 시간이 흘러서..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눈동자와 입술은 가슴에 남아 있게 되는 거야.. 알겠니? "               

그 말에 내가 물었다.     

"그렇다면... 저 유리창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리라는 구절의 의미는 뭐예요?"    

           

그러자 그가 다시 대답했다..     

"뭐 어렵게 생각해? 그건 말이야... 바로 키스를 한 곳이지... 가로등 그늘,,, 그래서 잊지 못하는 거야? 첫 키스의 장소 잊어버리는 거 봤니?"       

        

정말 궤변론자다운 그의 대답이었다.      

         

나는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이라는 부분이 좋았다. 그리고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남아 있네 라는 끝부분도. 사랑이란 것도 결국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퇴색되고 마침내는 잊혀 가는 것인데 그렇게 기억 속에서는 희미해진다 해도 가슴 어딘가 한 부분에는 서늘한 느낌으로 남아 있게 된다는 것을 나이가 들어가면서 알게 되었다.      

         

평소에는 그냥 그렇게 잊은 듯이 살아가다가도 어느 순간, 어느 장소에서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 바로 희미한 옛사랑의 기억이므로. 따뜻한 느낌이 아니라 서늘한 느낌 가슴 한 구석으로 차가운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듯한 느낌, 아려오는 듯한... 그리고 잠시나마 슬픈 느낌이 들기 때문에.... 서늘한 가슴이라는 표현은 ...정말 가슴에 와 닿는 표현이었다..그런데 내가 기억하는 그 눈동자와 그 입술은 어떤 것일까? 몇 명이나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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