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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이야기 -6. 미쓰비씨 1호관 미술관

미쓰비씨 1호관 미술관을 가다

by 늘 담담하게

거대한 빌딩들이 늘어서 있는 마루노우치 주변을 여행하게 될 때, 잠시 휴식을 취하며 쉬어 갈 수 있는 곳이 마루노우치 브릭스퀘어와 바로 옆에 있는 미쓰비시 1호관 미술관(三菱一号館美術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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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편에서 설명했듯이 도쿄의 마루노우치 부지를 매입해서 개발한 회사가 바로 미쓰비시였다. 이 미술관은 미쓰비시 그룹의 부동산 회사인 미쓰비시 지소三菱地所株式会社 가 운영하는 기업 미술관으로 2009년 재개발로 탄생한 마루노우치 브릭스퀘어를 구성하는 시설로 2010년에 개관했다.

컬렉션은 건물과 같은 시대인 19세기말 서양 미술관을 중심으로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오딜롱 르동, 펠릭스 발로통 작품 등을 소장하고 있으며 관내에는 뮤지엄 카페 바 '카페 1984', 뮤지엄 숍 '스토어 1984', 마루노우치의 역사 체험 공간 '역사 자료실'이 갖추어져 있다. 전시실은 관내의 1 ~ 3 층에 나뉘어 배치되어 있으며, 건축물의 구조적인 제약으로 인해 평균 40m 2의 비교적 작은 전시실이 20 개의 이어진 특이한 구성으로 되어 있다.


이 건물의 시작은 18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미쓰비시가 건설한 최초의 서양식 사무실로서 메이지 신정부의 건축 보좌였던 조시아 콘도르(1852-1920 Josiah Conder)에 의해 영국 퀸 앤 스타일의 벽돌조 건축물로 설계되었다.




%EC%A1%B0%EC%89%AC%EC%95%84_%EC%BD%98%EB%8F%84%EB%A5%B4.jpg?type=w2 조시아 콘도르


공부 대학교 (현 도쿄 대학 공학부 )의 건축학 교수로 일본에 와서 메이지 정부 관련 건물의 설계를 맡았다. 다쓰노 긴고 등 일본 개화기 일본인 건축가들을 육성하고 메이지 이후의 일본 건축계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후 민간 건축 설계 사무소를 개설하여 일본 재계 관계자들의 저택을 다수 설계했다. 일본 여성과 결혼하여 일본화를 배우고, 일본 무용, 꽃꽂이, 만담 등 일본 문화에 대한 지식도 깊었다. 1920년 도쿄에서 뇌경색으로 사망했고 11일 전 사망한 부인과 함께 고코주지에 묻혔다. 그가 설계한 건물들의 대부분은 대부분 관동대지진과 미군의 도쿄 공습에 의해 파괴되거나 소실되었다.


1894 년 당시 서양식 사무실 건축은 요코하마, 고베의 외국인 거류지와 나가사키의 데지마 등도 볼 수 있었지만 대부분이 2층 정도였지만 이 건물은 당시에도 이례적으로 대형 건축물이었다. 그 후, 철근 콘크리트가 실용화되고, 사무실 건축은 수익성 향상을 위해 급속히 대형화했다. 건축 당시의 미쓰비시 1호관 건물(조시아 콘도르가 설계하고 그의 제자인 소네다 다쓰조가 함께 참여했다.)


이 건물의 평면도를 보면 현관·계단·화장실 등을 공용으로 하지 않고 임대인 별로 두는 연립주택의 공간을 갖는 것이 특징으로 했다. 쉽게 말해 지금처럼 층별로 된 가로 구획이 아닌 세로로 나뉜 구조이다. 이러한 방 구조가 채택된 이유로는 사무실이라 해도 건물을 자기 혼자 점유로 하고 싶다는 당시 입주자의 가치관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설계는 관청가와 도쿄역을 앞에 두고 이곳에 선행투자하여 결과적으로 거대한 비즈니스 거리를 구축하려는 것이 이와사키의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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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경의 미쓰비시 1호관, 오른쪽 첫 번째 건물이다.


건물의 이름은 당시 미쓰비시가 건물이 지어진 순서대로 제1호관, 제2호관 식으로 불렀다. 이렇게 일본에서 숫자로 건물 이름을 호칭한 것은 이 건물이 첫 번째였다. 하지만 건물이 늘어남에 따라, 숫자로 이름을 부르는 것이 불편해서 1918년에 이 건물의 이름을 동쪽 9호관으로 바꿔 불렀다. 하지만 당시 이 건물군 주변은 여전히 풀이 무성한 공터여서 살인 사건이 나기도 하고 노상강도가 있어서 밤에는 혼자 돌아다니기 어려운 지역이었다.


미쓰.jpg 1984년 건축 당시 입주했던 은행의 내부 사진


미쓰비시 1호관은 은행, 무역회사, 우체국등이 입주했는데 제1호관의 준공을 계기로, 마루노우치에는 벽돌조의 건물이 잇달아 들어서, 1900년대 말에는 바바사키몬에서 도쿄 시청사 앞 거리를 잇쵸 런던一丁倫敦, 이라고 불리는 거리풍경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잇쵸 런던 - 영국 경제의 중심지인 런던 롬바다가를 모델로 삼은 100미터 정도의 오피스 거리


그러나 내진성에 약점이 있는 벽돌 건축은 관동 대지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내진성이나 토지 이용 효율이 뛰어난 메이지 생명관 등의 합리적인 미국식 오피스 빌딩으로의 재건축도 진행되어 전쟁 이후 고도성장기에 마루노우치 재개발 사업이 진행되면서 이런 벽돌 건축물들은 급속하게 사라지게 되었다.


1960년대 후반이 되면서 1호관 건물은 (당시 히가시 9호관) 메이지 시대의 모습이 남겨진 몇 안 되는 건물로 남아 있었다. 특히 이 건물은 도쿄의 근대적 도시계획의 출발점이며, 초기의 근대적 사무소 건축으로서 역사적 가치가 있었고, 건축 당시의 형태를 잘 보존한 메이지 시대의 서양식 건축으로서 문화적 가치도 높고,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일본 은행 본점, 구 아카사카 리큐(영빈관)와 대등한 「메이지 시대의 3대 건축물」로 꼽히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 문부성에 의해 문화재로 지정되려는 움직임이 일자, 미쓰비시는 이를 무시하고 1968년에 해체해 버렸고 철거 부지에는 지하 4층 지상 15층의 미쓰비시 상사 빌딩이 건축되었다.


이렇게 멋대로 해체해 버린 1호관 건물은 해체 후 30년 이상이 지난 2004년, 미쓰비시 토지가 마루노우치 재개발 사업을 계획하면서 「마루노우치 야에스 빌딩」(1928년 준공)·「후루카와 빌딩」(1965년 준공)·「미츠비시 상사 빌딩」(1971년 준공) 이렇게 3개의 건물을 허물고 그 자리에 그 자리에 마루노우치 파크 빌딩과 함께 미쓰비시 1호관을 복원 계획을 발표하게 된다.


그 후 2006년, 3개의 건물 해체공사가 시작되었고 , 2009년 4월 30일, '마루노우치 야에스 빌딩'의 외벽 보존 부분을 가진 마루노우치 파크 빌딩과 함께 준공되었다.. 이후 미쓰비시 토지가 운영하는 미쓰비시 1호관 미술관은 준공기념전 등이 열린 뒤 2010년 4월 6일 정식 개관했다.



현재의 미쓰비시 1호관은 1894년 지어진 1호관을 복원한 벽돌 건물이다. 설계는 미쓰비시 토지설계, 시공은 다케나카 건설에 의해 각각 이루어졌으며, 이 회사들의 자료에 따르면 당초 설계도 중 남아 있던 22장과 해체 시 실측도, 내 외장사진, ·보관부재, 메이지기의 건축잡지 등의 자료를 바탕으로 재설계했다. 자료에서 빠진 부분은 콘도르 설계의 다른 사례나 같은 시기의 건축으로부터 추정해서 보완했다. 그리고 구할 수 없는 재질은 외관을 닮은 대체재를 사용하는 등 당초의 외장·구조·재질을 가능한 한 재현했다.


건물 내장은 자료가 잔존하고 있던 현관·복도 등의 공용 부분 및 구 은행 영업실을 재현했다. 그리고 1968년에 해체 당시의 보관 부재에 대해서도 일부를 재활용·전시했다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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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당시 은행 업무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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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초기 건물내부의 계단


그러나 같은 자료에 따르면 공사기간 문제나 재료의 입수성, 자료의 결손 등으로 재현되지 않은 점도 다수 있었다. 그 하나의 예로 시공에 사용된 붉은 벽돌 230만 개는 당시에 가까운 제조법으로 제조했다고 하면서도 중국산을 사용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이 밖에도 개편 부분은 다수 있는데 일례로 미술관으로 이용하기 위해 엘리베이터·위생기구·공조·전기설비·개구부가 추가되는 등 현재의 건축기준법에 적합하도록 당초의 기초 및 말뚝 부분은 복원되지 않았고 면진 구조의 기초로 대피계단· 복도를 추가한 칸막이로 되어 있다.


게다가 치요다구의 지구 계획에 의해 처음 건축 위치와는 약 1.6미터 어긋난 위치에 있다. 이렇게 최대한 건축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했다고 하지만 이 복원 또한 뒷말이 많았다. 무엇보다 미쓰비시는 이 건물을 복원하면서 당초부터 마루노우치에 미술관과 극장을 만들 계획이 있었고, 조시아 콘도르에 의한 미술관 계획 도면이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 미술관으로 사용하기로 한 것은 복원공사 직전이었다. 진짜 이 건물의 복원 목적은 미쓰비시가 역사적 건축물의 보존으로 용적률을 더 받기 위함이었다. 이것 때문에 결국 마루노우치 파크 빌딩 건축에 있어서 이익을 얻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미쓰비시 1호관 건물의 복원은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루노우치 야에스.jpg 해체되기 전의 마루노우치 야에스 빌딩

또한 이 재개발을 위해 해체하게 된 기존의 마루노우치 야에스 빌딩은 1928년에 완공된 쇼와 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로서 역사적 가치가 높았는데 멋대로 해체해 버린 미쓰비시 1호관을 복원하기 위해 다시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건물을 없애 버리는 모순된 진행방식이 문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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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노우치 파크 빌딩과 미쓰비시 1호관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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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노우치 브릭스퀘어와 맞닿아 있는 정원의 모습, 마루노우치 일대를 이리저리 걷느라 피곤했기에 이곳에서 잠시 쉬어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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