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멈춰야 할 때

장송의 프리렌

by 늘 담담하게

오늘은 남자분의 사연입니다.


그날 그녀가 말했습니다

“이제 연락하지 않았으면 해...”

예상은 했지만 그녀의 말은 무척 차가웠습니다.

“내가......... 이제..... 부담스러운.... 거니?”

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멀리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 그녀... 그런 그녀를 마음속에 담아 온 지 벌써 몇 해던가. 처음 교정에서 그녀를 보았을 때가 눈앞으로 스쳐 지나습니다. 하얀 벚꽃이 바람에 날리던 그 해 봄... 그녀는 강의실 이층 창가에 서서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열린 창으로 밀려들어오는 따사로운 봄바람에 그녀의 머리가 흔들렸을 때 나는 그녀의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그 모습이 그렇게 인상적이었을까, 그것이 그녀를 향한 긴 여정의 시작이었습니다.


“널 볼 때마다 내 마음이 힘들어..”

“내가 널 그렇게 힘들게 했니?”

“내가 편할 것 같니? 네 마음을 알고 있는데... 그걸 애써 외면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난..”

“이제 그만하자 우리... 더 이상 날 나쁜 애로 만들지 마.. 네가 이럴수록 나만 더 나빠져.. 너도 알고 있잖아.. 우리 동기들.. 네 마음을 외면하는 나를 뒤돌아서서 얼마나 비난하고 있는지... 내가 왜 이래야 하니? 내가 왜 이렇게 사람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해....”


그녀는 울먹이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언젠가는 멈춰야 할 일이었다. 열리지 않은 문 앞에 언제까지 서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인데... 난 손을 들어 뒤돌아서서 울고 있는 그녀의 어깨를 잡으려 했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내 손은 멈춰 서고 말았습니다. 그녀를 위로할 수도, 그녀를 붙잡을 수도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 알.. 았어...”


그 말이 전부였습니다. 오랫동안 간직했던 한 사람을 향한 마음이 그렇게 덧없이 꺾이고 스러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지난 시간들이 모두 다 허망함으로 남아 있는데... 대학 생활 내내 그리고 졸업 후까지 7년에 걸쳐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해 왔는데.. 이렇게 쓰라린 결말이 되어 버렸습니다.




네 사연 잘 읽었습니다. 오랫동안 한 사람만 바라본 님의 감정, 그런 것을 순애보라고 하던가요? 개인적으로 저는 순애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2022년부터 일본 주간 소년 선데이에 연재되고 있는 장송의 프리렌이라는 만화가 있습니다. 마법과 엘프가 나오는 판타지물인데 장송의 프리렌은 주인공이 마법을 연마하고 악의 세력을 처단하는 식의 줄거리가 아니라, 인간 용사 힘멜, 엘프 마법사 프리렌, 성직자 하이터, 드워프 용사 아이젠이 마왕을 토벌하고 난 뒤의 이야기입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뒤 힘멜이 죽고 난 뒤에야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엘프 마법사 프리렌이 뒤늦게 힘멜의 마음을 깨닫게 되며 사람들을 이해하고자 다시 긴 여정을 떠나는 일종의 후일담 이야기입니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힘멜의 시선은 항상 프리렌에게 가 있었고 그녀에 대한 연정은 늘 변함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삶의 기한이 정해져 있는 인간 힘멜과는 달리 거의 영원의 시간을 살아가는 프리렌은 힘멜의 감정을 무시했거나 혹은 외면했습니다.


그 서른 번째 에피소드이던가, 힘멜이 프리렌에게 경련화 반지를 선물하면서 한쪽 무릎을 꿇고 반지를 왼손 약지에 직접 끼워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경련화의 꽃말은 영원한 사랑이었습니다. 사실상 프러포즈나 다름없지만, 프리렌이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뒤의 이야기에서 힘멜이 어릴 적 숲에서 길을 잃었을 때 프리렌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프리렌은 처음에 말없이 숲을 나가는 길만 알려줬는데, 힘멜이 불안해함을 느꼈는지 꽃밭을 만드는 마법을 보여줬습니다. 이 때문에 힘멜은 프리렌의 마법 중 '꽃밭을 만드는 마법'을 가장 좋아하고 아름답다고 자주 칭찬해 주었습니다. 프리렌이 새로운 마법 배우기를 좋아하는 이유를 두고 프리렌 본인이 마법을 좋아하는 것 이상으로 그렇게 소소하게 익혀온 마법을 칭찬해 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라 회상합니다. 굳이 프리렌을 파티의 동료로 넣으려고 찾아간 것도 결국 어린 시절부터 첫눈에 반해 키워 온 순정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결국 힘멜과 프리렌은 인연을 맺지 못합니다. 제가 이렇게 만화 이야기를 길게 하는 이유는 결국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라는 것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면 혹은 받아들일 수 없다면 안타깝게도 행복한 결말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연을 보내주신 분의 감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해서 그녀를 비난할 필요는 없습니다. 괴롭고 힘들겠지만 이제 그 마음을 정리하고 다른 길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다른 길로 가는 님의 선택이 좀 더 시간이 지난 뒤에는 그나마 최선의 선택이었던 것임을 알게 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긴 시간 동안 그 분만을 바라보고 나름 노력을 했던 것도 실패라고 규정짓거나 혹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그 감정, 그 노력은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었습니다.


다시 장송의 프리렌 이야기로 돌아가서 힘멜은 사실 1화부터 평생토록 프리렌 한 명만을 기다려왔음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바로 50년 동안 같은 거리에서 살아온 것입니다. 프리렌은 모험이 끝난 후 50년 동안 다른 일행과 제대로 연락도 나누지 않았고], 왕도에 도착해선 단순히 자신의 기억으로 힘멜의 집이 있는 거리를 찾아냈습니다. 즉, 힘멜은 언제든 프리렌이 찾아오면 맞이할 수 있도록 50년이나 그 거리를 떠나지 않고 쭉 지켜왔단 것입니다. 거기에 프리렌이 대충 힘멜에게 남기고 간, 죽음의 기운 같은 것이 새어 나오는 암흑룡의 뿔을 몇십 년 동안 서랍장 안에 고이 모셔두고 있었습니다. 힘멜이 어떤 마음으로 프리렌을 기다려 왔을지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이해되지 않았으며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누군가를 향한 사랑이라는 것은 오랫동안 기억 속에 남아 있게 됩니다. 부디 마음을 잘 정리하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나레이션 하나를 듣겠습니다. 여행스케치의 소원 하나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4년전인 1992년에 발매된 음반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cQPnBkq-r8

"사람이 어떤 나이가 되면 식구들 이외의 누군가를 필요로 하게 된다. 순진하지 못한 사람이 순진한 사람과의 교제로 인해 얻는 상처는 그 반대의 경우보다 더 클 것이라는게 내 지론이다. 그 사람을 잊으려고 애쓰지는 않을 것이다. 잊혀지지도 않을테니..다만 나는 앞으로 그 사람이 출현하는 꿈 때문에 놀라 깨는 일이 없기를 바라고 지하철 안에서 괜히 우는 일이 없기를 바라며, 마침내 그 사람도 나도 좋은 이를 만나 행복하게 오래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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