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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니엘 Dec 19. 2022

 그녀 앞에서 가수가 되었다

친구의 결혼식, '아로하'를 부르다.

나는 오늘 그때처럼 가수가 되었다.

 순간만큼은 아이유, 박정현이 부럽지 않았다.



 고교시절 내 친구는 수업이 끝나고, 야간 자율학습 시작 전 쉬는 시간에 나에게 노래를 불러달라고 요청을 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노을을 바라보며 마음이 센티해진 탓이었을까. 아니면 새벽부터 일어나 학교에 와서 수업을 들으며 밤이 될 때까지 공부해야 하는 일상의 피곤함과 나른함 때문이었을까. 지금까지도 물어보진 않았지만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노래가 주는 위로와 격려를 누리던 우리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운동장으로 향했다.




나는 가수가 꿈이다. 부르는 것도 좋아하고 듣는 것도 좋아하고 만약 노래하는 게 직업이라면 급여를 안 받아도 좋을 만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할 것이다.(가수가 아니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거겠지만) 노래할 수만 있다면.

노래를 부를 때면 내성적이고 부끄러움 많이 타는 성격은 온 데 간데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즐겁고 행복하게 노래에 집중한다. 노래가 성격을 지배하는 것처럼.

미국의 시인 알프레드 디 수자의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이란 시를 애정 하는데 특히 한 구절이 가슴에 들어와 박혔다.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그런 나를 너무나도 잘 아는 친구의 큰 그림이었을까.

넓은 운동장 조회대 옆의 구석 의자에 앉아서 하늘을 바라보며 그렇게 한 명은 노래를 부르고 다른 한 명은 듣곤 했다. 그러면 우리는 엔도르핀이 샘솟아 빽빽하게 늘어 선 책상으로 가득한 강당에서 힘들고 지겨운 야간 자율학습을 그냥저냥 버틸 수 있었다.




그런 친구가 늦깎이 신부가 됐다.
어느 날 청첩장을 살포시 내밀며 정중히 축가를 부탁했다.


그래, 좋아

 나이를 먹으면 생각 따로 말 따로 나온다더니 선뜻 대답해놓고 깜짝 놀랐다. 주책바가지가 따로 없다.

어떻게 그렇게 한 마디로 단박에 수락을 했는지 정신을 차리고 아차 싶었을 때는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친구는 벌써 안도의 숨을 내쉬며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지며 그 짧은 순간에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옛날 그 시절에 교복을 입고 노랑, 주황, 분홍, 파란색이 어우러져 따라 칠할 수 없을 만큼 예쁘게 물들어가는 그림 같던 운동장에서 마치 가수인 것처럼 노래 부르던 장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한편으론, 아무리 노래하는 걸 좋아해도 내 개인적인 무대도 아니고, 여러 사람이 돌아가며 노래하는 것도 아니고, 차라리 오디션 현장이라면 나 혼자만 결과를 감내하며 떨어지면 그만인데, 이건 놀랍게도 신랑, 신부의 첫 내딛음을 축하하는 큰 성스러운 예식의 자리가 아닌가. 자칫 민폐가 되면 어쩌나 망치면 어쩌나 덜컥 겁이 났다.


그래도 다시 발뺌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고 싶었다. 노래로 친구의 앞길을 축복해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단 마음이 컸으니까. 이런 복잡하게 요동치는 내 감정들과는 너무 상반되게 웃으며 흔쾌히 축가를 하게 되었다.


괜히 한다고 했나 싶을 만큼 후회 반, 걱정 반으로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며 전전긍긍하던 한 달이 흘렀다.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지나고 나서 뒤돌아보니 과정 또한 즐겁고 행복한 추억임에 틀림없었다.




초여름 웨딩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아름답고 눈부셨다.

친구들 중 마지막 남은  순박한 아가씨가 치열하게 직장 다니며 성실하게 살다가 코로나의 여파로 결혼하기도 힘든 시기를 지나서 드디어 반쪽을 만나 결혼을 하는 너무나 대견하고 기쁜 순간인데, 괜스레 애틋하고 애잔하게 코 끝이 시큰거렸다.


신부 입장을 하는데 울컥했다. 곧 축가를 불러야 하는 상황인데, 마음을 부여잡고 그녀를 바라보며 노래를 불렀다.

그때처럼.



시원하게 에어컨을 틀어 놓은 멋스럽고 화려한 웨딩홀에서 땀이 범벅 녹초가 되었지만, 가슴이 뛰고 마음이 벅찼다. 머리에서 발 끝까지 찌릿찌릿 전율이 흘렀다.

노래는 축하가 되고 위로가 되고 즐거움이 되고 달달한 분위기를 만들기에 충분했다.
예식의 순서가 다 끝나고 그녀는 소정의 선물과 함께 연신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사실은 어린 시절 하지 못했던 말이 있는데, 그녀에게 고맙다는 다. 그때도 지금도 내가 더 많이 고맙고 감사하다.

진심으로.

그녀 덕분에 노래를 하며 잊을 수 없는 행복한 추억을 선물 받았다.

오늘, 그녀 앞에서 나는 가수다.



사진출처 : 글그램, pinterest




어두운 불빛아래 촛불 하나 와인잔에 담긴 약속 하나
항상 너의 곁에서 널 지켜줄 거야 날 믿어준 너였잖아~~~~~~
약속해(I believe) 힘들 땐(I believe) 너의 그늘이 되어줄게~ 내품에(I believe) 안긴 너의 미소가  영원히 빛을 잃어 가지 않게

- 아로하 <슬기로운 의사생활 OST Part3 ver.> -  

by 불렀던 축가.

미도와 파라솔

미도와 파라솔 '아로하' 듣기.

https://youtu.be/lFbCO_NR6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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