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마담 Apr 17. 2022

권태의 적정량은 어디까지인가요

영화 [어나더라운드]

 


 40대가 되며 그들을 맞이한 건 '권태'였다. 주위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싫증을 낸다. 직장에서는 학생들이 무시하고 힘들게 퇴근했더니 가족들도 본 채 만 채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주인공 무리가 벌인 실험은 다음과 같다. 

 '인간에게 결핍된 혈중 알코올 농도 0.05%를 유지하면 적당히 창의적이고 활발해진다.'

 남자들은 이런 거에 결단이 빠를까? 이들은 아예 알코올 측정기까지 구비하면서 본격적으로 이 프로젝트를 실행한다. 사실 여기에서 결말까지 대략적인 스토리가 예상이 갔다. 아마 처음에는 조금의 성공을 거둔 후 거기에 심취해서 점차 절제하지 못하겠고... 결국에는 그게 큰 화를 불러일으키겠지. 자잘한 설정까지 맞출 수는 없지만 역시나 예상대로 흘러갔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이 분야에 관해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영화 전문가냐고? 아니다. 술이다.

 애주가는 아니다. 물론 술자리를 가면 술도 적당히 마실 줄 알고 집에서는 혼자 치맥을 즐기기도 하지만 약속이 없다면 1달에 1번 마실까 말까 한다. 그런 내가 술 전문가라고 자칭하면 역시 어불성설이겠지. 실은 우리 못난 아버지가 알코올 1타 강사셨다.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알코올 중독'이라고 칭해지는 건 단순히 자주 마시는 레벨이 아니다. 술이 없으면 눈앞에 자식도 몰라보는 상태가 된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나. 그때가 첫 중독 증세를 뽐냈던 시기다. 하루 3-4병은 기본이요. 몸을 가누지 못하면 초등학생인 자식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돈이 없다고 하면 외상을 받아오라고 했다. 몇 개월을 주구장창 마시니 당연히 몸이 버티지 못했고 결국 병원에 실려갔다. 덩그러니 남겨진 나는 신라면을 한강물처럼 끓여주시던 친할머니와 1년 동안 지내야 했다. 그 일은 작은 트라우마로 남았지만 그래도 아버지는 돌아온 후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이제는 너무 어릴 때라 기억마저 희미해졌다. 

 직전에 여지를 남겼지만 아버지의 알코올 중독은 내가 성인이 되고 나서 다시 도졌다. 대학생이 된 나는 어마어마한 통학 시간에 질려버렸고 1년을 버티다 끝내 기숙사에 들어갔다. 다만 완전한 자유는 아니었다. 강성 기독교인인 아버지는 일요일에는 꼭 교회를 가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기에 주말마다 집에 가야 했다. 그래도 뭐... 매일 통학하지 않는 사실이 마냥 기뻤다.

 내가 볼 때 술안주로 최고는 '외로움'만 한 게 없다. 일주일에 1번 정도 자식을 보는 걸로는 혼자 사는 외로움이 충족이 안된 아버지는 이상한 쪽으로 결단을 내렸다. 그 결단의 풍경은 어느 날 열어 본 냉장고 속에 있었다. 소주병이 놓여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집에서 재회한 소주병은 내 사고 회로를 정지시켰다. 

 '냉장고에 이 소주병 뭐예요?'

 '응? 그거 만두 빚을 때 쓰려고 가져다 놓은 거야. 신경 쓰지 마'

 만두피를 빚는 것이라면 당연히 빈병이고 냉장고 밖에 있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나는 바보같이 그걸 믿어버렸다. 아니. 믿기로 했다. 이런 사실을 하나하나 다 받아들이면 나는 진작에 무너졌을 것이다.

 거짓말은 존재를 감춰도 알코올은 냄새를 숨기지 못한다. 그로부터 2주 뒤 집에 돌아온 나를 반겨야 할 아버지는 침대에 누워있었고 굳이 가까이 가보지 않아도 술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나이는 성인이 되었는데 작다고 생각했던 트라우마가 나를 어린아이로 만들어버렸다. 이제는 다 잊혀 간다고 생각했다. 맞아. 그렇게 생각했지. 그래도 나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일단 집에 있는 술을 모두 버리고 술을 구매할 수 있는 수단이라면 현금, 카드를 막론하고 모두 감췄다. 어릴 땐 술을 못 먹자 화내는 아버지가 무서웠는데 크고 나니 그저 애처롭게 느껴질 뿐이었다.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술에 대한 의지를 쉽게 꺾지 않았다. 초기에는 이런 모습을 보여줘서 미안하다고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역정을 내면서 분노를 표출했고 그걸로는 부족했는지 나에게 애걸복걸했다. 그럼에도 단호한 내 모습에 다른 방법을 찾았다. 내가 없을 때 밖으로 나가 이웃집에 돈을 빌리기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안면도 없던 이웃들을 죄다 찾아가 아버지에게 돈을 빌려주지 말라고 당부해야만 했다. 

 술에 대한 끝없는 구애가 계속되자 나는 점차 지쳐갔다. 또 이웃집에 돈을 빌리러 가는 광경을 목격하고 막막함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를 말리기 위해 아스팔트 길 한복판에서 무릎을 꿇고 그만하라고 빌었다. 그가 나를 일으켜 세우면서 한 말은 아마 평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딱 1병만 먹고 그만 마실게. 아들.'

 그의 세상에는 내가 없었다.

 그 후로 그는 10년 만에 중환자실에 입원을 하게 되었고 다시 멀쩡해져서 집으로 돌아왔다. 한 가지 이상한 건 가끔 술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마치 딴 사람 얘기하듯 말한다. 변명도 서슴없이 한다. 그건 내 의지가 아니었다고. 그건 병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거라고. 본인은 그 일로 몸이 상했지만 난 마음이 상했다는 사실조차 외면했다. 당연히 어떠한 사과도 받지 못했다. 

 이 정도면 전문가 아닌가. 인생에서 겪은 2번의 강렬한 경험은 [어나더 라운드]의 스토리를 예상하는데 지대한 도움을 주었다. [어나더 라운드]는 그 자체가 술에 대한 경고이자 술에 대한 헌사다. 내게 이 영화는 어떻게 다가왔을까. 술이라면 치가 떨려서 대학교 1학년 때 한잔도 못 마시는 척했던 내게 이 영화는 어떤 의미일까. 2학년이 되어서야 술은 무조건 적당히 마시자는 다짐을 하고 마시기 시작했다. 그 다짐은 아직도 유효해서 마셔도 주사를 안 부릴 정도로만 절제한다. 심지어 아예 주사가 정신 차리고 있기다. 

 술 때문에 가정도 친구도 잃은 주인공은 결말에서 마치 해방된 듯한 표정과 춤사위를 보여준다. 그건 술에 대한 찬가였을까 인생에 대한 찬가였을까. 권태의 적정량은 어디까지인가. 적어도 그 공백을 방편으로 술은 임시방편일 뿐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