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셉션 재개봉 기념 겸 나에 대한 탐구
눈을 감아 볼래? 그리고 잠시 동안 머릿속에 양을 떠올려봐.
다시 눈을 떠봐. 어떤 양이 떠올랐어?
털이 복슬복슬하게 난 양? 태어난 지 얼마 안돼서 몸집이 작은 양?
냇가에서 물을 마시는 양? 신나게 들판을 뛰노는 양?
그것도 아니라면 시끌시끌한 양 떼가 떠올랐어?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이게 당연할 거야.
난 안되거든. 뭐가 안되냐고?
'머릿속에 무언가를 이미지화하여 상상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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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당연한 것이 어떻게 안될 수 있냐고?
이런 걸 바로 '아판타시아 증후군'이라고 불러.
쉽게 말하면 그냥 상상이 안 되는 거고, 사전적 정의로는 '시각실인의 한 형태로 눈으로 보았던 이미지를 정신적으로 시각화하지 못하는 증상'을 일컬어.
이 증후군은 여러 가지로 아이러니한 상황을 만들어.
일단 방금 앞에 두고 봤던 사람도 눈을 감으면 머릿속에 안 떠올라.
그래서 사진으로 그 순간을 남겨두는 것을 좋아하지.
책을 읽어도 무슨 장면인지 안 떠올라.
예전에 [노인과 바다]를 읽는데 바다의 아름다움에 대해 3~4페이지에 걸쳐서 묘사하더라.
근데 난 그 바다가 안 그려져서 그 묘사가 무의미하게 느껴졌어.
참 슬퍼.
[더 글로리]의 재준이는 고작 빨간색과 녹색과 구분을 못해서 분노하잖아.
머릿속에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는 사람도 있는데!
(근데 난 실제로 적록색약도 있음)
여러 가지로 불편하지만 제일 특이한 건 이거야.
'꿈을 한 번도 꿔 본 적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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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꿈을 꿔본 적이 없냐고? 그러게 말이야.
그냥 잠을 자면 이상한 생각을 했다? 정도.
이 증후군을 알기 전에는 사람들이 꿈을 꾼다고 말하는 게 으레 하는 말인 줄 알았어.
장자의 호접몽도, 조상님의 일생일대 로또 번호 알려주기 찬스도 나한테는 없다는 말이지.
아, 억울해.
영화 [인셉션]은 나한테 '꿈'같은 얘기지.
처음 집에서 인셉션을 보는데 집중이 너무 안되더라고.
놀란 감독이 설정한 세계관이 공감이 안되는 거야.
2~3번은 30분 정도 보다가 껐던 것 같아.
꿈을 꾸는 것 자체가 공감이 안되는데 거기다 다른 사람이 꾼 꿈에 들어간다니.
2020년에 [테넷]이 개봉하면서 놀란 감독의 영화들이 재개봉했어.
당시에 놀란 감독에게 엄청 빠져있을 때라 아주 좋은 기회였고 [인셉션]도 제대로 볼 기회였지.
결과는 의외로 성공적.
[인터스텔라]도 그렇지만 놀란 감독은 참... 복잡한 소재 속에 섬세한 메시지를 잘 담아.
그렇잖아. 꿈속에 꿈을 꾸고 자각몽에, 림보 같은 한 번 보고는 이해하기 어려운 얘기를 하는데
끝내 우리는 감성적으로 납득하게 되지.
'너를 위해' 했던 행동들이 사실 '나를 위해' 하는 것일 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널 위할 수 있음을.'
그래서 '무엇이든 할 수 있음을.'
꿈속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코브를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어.
요즘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지만 아무것도 못할 것 같기도 하거든.
무능력한 사람들을 보며 한심해하지만 누구보다 무능력한 나를,
이타적인 척 해도 실은 너무나도 이기적인 나를,
그런 나를 마주하면 꿈으로라도 도피하고 싶어.
근데 난 그럴 수가 없잖아?
희망찬 미래를 그려보고 싶은데 나는 꿈을 꿀 수 없잖아?
꿀 수 없는 꿈을 핑계 삼을 수 없기에 그 꿈을 현실에 구축해야 해.
나... 더 열심히 살아야겠네?
그래도 다행인 건 악몽도 꾸지 않는다는 점.
걱정 하나를 이렇게 덜어보네.
언젠가 나도 꿈을 꿀 수 있을까?
내가 꿈을 꾸게 된다면 처음 꾸게 되는 꿈을 무엇일까?
어떤 꿈을 꾸게 될 것 같아?
나 대신 대신 상상해 줘.